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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6
I. 다이애나 13 II. 생화학 73 III. 프랑스 115 IV. 대학 147 V. MRL 203 VI. 드라마 267 VII. 스타틴 293 VIII. 이력서 339 IX. 어깨 위의 거인 381 X. 맥티잔 439 XI. 클린턴과 클린턴 499 XII. 오픈 엔디드 531 옮긴이의 글 564 |
P. Roy Vagelos
Louis Galamb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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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환자들이 완전히 마비되어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는데, 의사가 되어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처음에 나는 환자들이 처한 상황을 보면서 깊은 우울감에 빠졌다. 병을 치료할 수가 없었다. 바이러스가 퍼지면 전신마비를 누그러뜨릴 수 있는 방법도 거의 없었다. 끔찍한 무력감에 시달렸다. 비통한 마음이 극단을 향하고 있을 때, 조너스 소크(Jonas Salk)와 같은 연구자들이 조만간 효과적인 백신을 개발해 미국 전역에 뿌릴 예정이라는 소식을 접했다. 1954년, 공중 보건 당국은 65만 명 이상의 어린이들에게 소크 소아마비 백신을 투여했다. 이는 주 정부, 연방 공중 보건 당국, 자선 단체, 대학교에서 연구하는 과학자들, 제약기업이 함께 공동의 목표를 달성하려 힘을 모으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보여준 인상적인 사건이었다. 1955년 봄, 내가 인턴을 끝마쳤을 무렵 소아마비 백신 임상시험 성공은, 보스턴을 비롯한 미국 전역에서 뉴스 1면을 장식했다. 하지만 1955년 가을 소아마비가 퍼지는 것을 막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 p.62~63 돌이켜보면, NIH에서 했던 거의 모든 경험이 너무나도 긍정적이었다. NIH는 유연하고, 혁신적이며, 생산성이 높은 정부 조직이었다. 그리고 분명하게 공익을 우선순위로 두는 곳이었다. 이렇게 성공적일 수 있었던 비결은 얼 스태트먼과 그 외에 다른 동료들처럼 뛰어난 인재를 모을 수 있었던 능력 덕분이다. 우리 가운데 그 누구도 NIH에서 돈을 많이 벌지는 못했지만, 모두가 말도 안 되게 힘든 일정을 소화해냈다. 헌신적으로 프로젝트에 임했는데, 과학적 발견을 가치롭게 여기는 여러 과학자들과 함께 했기 때문이다. NIH의 추진력은 과학 교육을 연계하는 생산적인 방식에서 비롯되었다. 또한 NIH는 구성원들에게 필요한 모든 자원을 제공하고, 이를 연구자들이 창의적으로 쓸 수 있게끔 조직을 운용할 때 유연함이 있었다. 이런 조건들이 없었다면, 얼 스태트먼과 같은 과학자가 자신의 연구를 위해 이곳을 평생직장으로 여기면서 머물지 않았을 것이다. 뛰어난 젊은 연구원들이 처음에는 군복무를 대신하러 NIH에 들어간 것이 사실이다. 처음에는 나도 그랬다. 하지만 이곳의 환경이 생산적으로 연구할 수 있게 해준다는 것을 알고 나면, 의무 복무 기간인 2년이 지나서도 NIH에 남고는 했다. --- p.113 우리는 모두 함께 점심을 먹으면서 연구 이외의 학과 업무를 봤다. 내가 처음 워싱턴 대학교에 왔을 때, 학과 동료들이 커다란 옷장처럼 생긴 좁은 방으로 걸어 들어가더니 그 좁은 공간에 다 같이 모여 매일 점심을 먹는 것을 보았다. 사실상 텅 빈 창고였는데 창문도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여러 의미에서 가깝게 지낼 수 있었다. 골방에 함께 모여 갈색 종이봉투에 담긴 점심 도시락을 먹는 시간은 과학계와 대학에서 일어나는 여러 일들, 학과에서 개선해야 할 일들에 대해 이야기 나누기에 더할 나위 없는 최고의 시간이었다. 앞으로 어떤 인재를 뽑을 것인지, 의학계의 다른 분야에서 주목할 만한 발전은 무엇인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또한 (유색인종 학생을 선발하기 위한 노력처럼) 대학이 직면했거나 풀기 위해 씨름하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 논의했다. 동료들 사이에 만들어진 이런 종류의 협력 관계는 과학에서 중요한 요소다. NIH뿐만 아니라 대학이나 기업 연구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몸담았던, 생산적인 연구를 했던 모든 연구소에서는 점심 식사와 저녁 식사, 농구 시합이나 소풍처럼 비공식적인 사회생활(?)을 구성원들과 함께 했다. --- p.166 효소학의 시대가 펼쳐지고 있었는데도, 머크를 비롯한 제약 산업계에서는 여전히 눈을 가린 채 스크리닝하는 방식으로 신약을 개발하고 있었다. 제약기업에 있던 연구원들은 전 세계 곳곳에서 가져온 흙 속에 살고 있던 미생물에서 분리한 액체나, 몇 년에 걸쳐 만든 화학 물질들을 배양한 세포에 처리했다. (머크 과학자들은 이런 화학 물질들로 ‘라이브러리’를 만들었다.) --- p.209 과학자들은 내게 솔직하게 터놓고 말했다. 나도 과학자고 연구자다. 과학자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알고 있었다. 연구자들도 이 점을 알고 있었다. 내가 연구소 총책임자로서 이들에게 악의가 없고, 연구자들과 함께 각각의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으며, 문제를 풀어 이들을 도울 수 있는 해결책을 제시할 것이라는 점 말이다. 어떤 연구 책임자들은 이미 많은 시간과 공이 들어간 프로젝트를 바꾸는 것을 꺼렸다. 또 어떤 연구 책임자들은 연구에 써보지 않았던 접근법을 받아들이는 것을 꺼렸다. 그래서 몇 달이고 몇 년이고 질질 끌면서 미루기만 했다. 나는 시간을 정해놓고, 얼마나 노력할 것인지도 정해놓기를 원했다. 목표를 이룰 수 없다면, 성공 가능성이 더 높은 다른 방법을 시도하고 싶었다.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나는 골머리를 앓다가 한밤중에 과학자들에게 전화를 걸기도 했다. 아니면 다음에 과학자들을 만나 그 ‘터무니없는 방식’보다 더 나은 방법을 제안하려고 노력했다. 의욕과 열정이 넘치는 연구 조직을 원한다면 이렇게 연구 속으로 들어가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은 없다. 그리고 연구자가 나쁜 프로젝트를 그만두게 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훨씬 흥미진진한 프로젝트에 참여하고 기여할 수 있는 기회를 제안하면서 설득하는 것이다. --- p.243 우리 사회가 치료에는 많은 돈을 쓰면서 정작 예방에는 그만큼 돈을 쓰지 않는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많은 사람을 대상으로 질병에 대한 예방접종을 하는 것은 매우 효과적인 방식이고, 비용 측면에서도 효율적인데 말이다. 국민 전체가 감염에 대한 면역을 형성할 수 있으니 정부가 백신을 개발하고 생산하는 기업에 적극적으로 지원해야 할 것 같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1970년대에 미국 연방정부는 소아마비 퇴치와 같은 대규모 캠페인을 펼치고, 병원에서 사용할 치료용 백신을 대량으로 구매했다. 하지만 미국의 주요 백신 제조 기업들이 사업을 접고 있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는 듯했다. 부분적으로는 책임 소재 문제도 있었다. 예방 백신은 아직 질병에 걸리지 않은 건강한 사람이 맞는다. 그런데 모든 백신은, 비록 소수의 사람에게 나타나기는 하지만 예측 가능한 부작용이 있다. 그리고 이런 부작용이 어린이에게 나타나면 치명적일 수 있다. 백신을 개발하고 생산하던 기업들의 경영진은 이런 문제를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한편 경제적인 문제도 있다. 정부가 대량으로 백신을 구입했지만, 기업들에게 돌아오는 영업 이익이 매우 낮았다. 이런 상황을 고려했을 때, 제약기업 입장에서는 새로운 백신을 개발하고 생산하는 것보다는 일반 신약개발에 투자하는 것이 수익성이 더 좋았다. --- p.321~322 제약기업 CEO 일을 해보겠다는 목표를 처음으로 마음속에서 그렸을 때, 내 이력서에는 문제가 있었다. 멀쩡한 이사회라면 CEO 지원자의 이력서에서 당연히 보고 싶어 할 항목들이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나는 경영학 수업 같은 것을 들어본 적이 없었다. 경영학도 모르는데 회계학이나 상법 같은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었다. 1982년이 끝나갈 무렵까지도 내 이력서는 ‘로이 바젤로스, 의학박사. 교육받은 것과 이력을 보면 전체적으로 경영자가 되는 데 전혀 관심이 없어 보임’이라고 선언하고 있었다. --- p.343 나는 가능한 한 많은 공장에 가보기로 마음을 먹었다. 얼굴을 맞대고 하는 회의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모든 사업이 마찬가지겠지만 주인이 자리를 비우면 사업은 잘 안 된다. 예를 들어 아일랜드나 스페인에서 공장을 운영하는 사람들을 보자. 이 사람들은 본사에서 날아 온 경영진이 자신들이 이룬 성과에 관심이 있는지 궁금해 한다. 이들에게 문제가 생기면 본사가 이 문제를 함께 받아들여주고 해결책을 제시해주길 바란다. 대부분의 경우, 잘못한다고 비판 받는 것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본사가 얼마나 자기들에게 관심을 갖고 함께 문제를 풀어주려고 하는가 하는 문제가 이들에게 언제나 훨씬 더 중요했다. --- p.370~371 조직 개편이라는 경영 행위를 할 때 사람들을 이해시키기 가장 어려운 것 가운데 하나는, 조직 개편이 (일반 직원들을 해고하는 기회라기보다는) 비즈니스 리더십, 즉 간부급 인력을 바꿀 수 있는 기회라는 점이다. 데이비드 앤스티스, 리처드 마컴, 퍼 볼드 올센 모두 머크에서 최고 의사결정권을 가진 구성원들에게 필요한 특별한 경험과 역량을 가지고 있는, 뛰어난 성과를 보여준 리더들이었다. 그런데 조직 개편을 하지 않았다면 이들을 이렇게 빠르게 승진시키기 힘들었을 것이다. --- p.396 최고 경영진은 몸과 마음에 깊게 박혀 있는 사회적 성 역할에 대한 인식과 태도를 바꾸라고 압박을 받고 있는 중이었지만, 이 가운데 일부 사람들에게는 여성들에 대한 편견이 있었다. 여성들이 경영진의 압박을 견디지 못할 것이 확실하다는 것이었다. 남성과 여성이라는 뚜렷하게 구분되는 경로를 따라 자라온 사람들이었기에, 기업에서 리더십은 남성의 전유물로 남아 있어야 한다고 보았다. 그래야 기업이 더 잘 굴러간다고 생각한 것이다. 노골적으로 이런 생각을 입 밖에 내지는 않았지만, 나는 이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 나머지 다수의 최고 경영진은 현재 남성들로 이루어진 골프 멤버가 편했다. 그리고 어떤 직원을 승진시킬 것인지에 대한 그들의 결정이 편파적이지는 않다고 확신했다. 좋은 자리는 죄다 남성들이 차지하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기회의 평등이 옳다고 막연하게는 믿었지만 현실에서는, 즉 이들의 삶에서는 평등한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그 어떤 일도 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다. --- p.469 나는 머크가 이 약(맥티잔)을 무료로 공급하겠다고 언론에 발표했다. 머크는 강변 실명증의 위험에 놓여 있는 모든 사람에게, 그 사람이 전 세계 어디에 있든지, 약을 필요로 하는 기간 동안 무료로 제공할 것이다. 물론 이 약을 위험에 처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줄 수 있는 역량을 가진 기관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머크 이사회가 소집되었고, 이 결정은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다만 왜 머크의 자원을 강변 실명증 퇴치에 쏟아야 하는지, 그것도 무한정으로, 심지어 머크 CEO만의 권한으로 이런 내용을 결정할 수 있는 것인지 설명하기 전, 이사회에서 긴장감이 감돌았던 순간이 한두 번 있었다. --- p.490 혁신적인 의약품 대부분은 작은 조직에서 태어날 것이고, 대형 제약기업의 연구 개발은 상당 부분 아웃소싱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이는 대형 제약기업에는 견고한 투자 행위가 되겠지만, 대형 제약기업이 스스로 성장하는 기업이 되어가는 행위는 아닐 것이다. 대형 제약기업은 큰 규모의 임상시험을 실시하는 개발 조직, FDA와 전 세계 규제 기관과 신약 승인을 협상하는 규제 담당 조직을 유지할 것이다. 그리고 생산, 마케팅, 세일즈까지도 대형 제약기업이 맡을 것이다. 반면 신약개발의 기쁨과 흥분은 작은 바이오텍의 과학자들의 마음과 영혼으로 옮겨갈 것이다. 이것이 내가 바라보고 있는 미래 제약 업계의 R&D 모습이다. 물론 아주 적은 수의 성공적인 바이오텍은 대형 제약기업들이 겪었던 초기 시절을 꿈꾸면서 신약개발 역량과 함께 생산, 마케팅, 세일즈 역량을 갖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기업들 가운데 다시 일부가 신약개발 성공을 가능하게 했던 독창성과 혁신을 마케팅과 세일즈에도 적용시켜, 제약 산업에서 전체적으로 시작부터 끝까지 혁명을 일으킬 것이다. --- p.561~56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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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크를 아시나요?
머크, 정확하게 메르크는 독일에서 시작했다. 메르크 가문의 프리드리히 야코프 메르크(Friedrich Jacob Merck)는 1668년에 약국 한 곳을 인수했다. 메르크 가문은 이 약국을 제약 및 화학 기업으로 발전시켰고 1891년에는 미국에도 진출했다. 미국 머크인 ‘머크 앤드 컴퍼니(Merck & Co./MSD)’의 시작이었다. 그런데 1914년에 1차 대전이 터졌고, 1917년 미국이 1차 대전에 참전하면서 미국과 독일은 적국이 되었다. 미국 정부는 독일계 기업인 머크 앤드 컴퍼니를 몰수했다가 1차 대전이 끝나자 다시 시장에 내놓았다. 메르크 가문의 조지 W. 머크(George W. Merck, 1894~1957)가 이를 인수했고, 미국 머크는 신약을 쏟아내는 전 세계적 규모의 제약기업으로 성장해갔다. 1930년부터 발간된 경제 잡지 『포춘(FORTUNE)』 은 1955년부터 ‘포춘 500’을 발표하기 시작했다. 미국 기업들 가운데 매출 기준으로 상위 500개 기업을 뽑는 것이다. 1955년부터 2024년까지 ‘포춘 500’에서 한 번도 빠지지 않았던 기업은 49개였는데, 머크는 이 49개 기업 안에 들어갔다. 『포춘』 만큼이나 저명한 경제 잡지인 『포브스(FORBES)』 도 비슷한 일을 한다. 2003년부터 전 세계 기업을 상대로 상위 2,000개 기업을 뽑는 ‘포브스 글로벌 2000’이다. 2023년 『포브스』 는 20년 동안 이 명단에서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었던 기업들로 명예의 전당(Global 2000 Hall of Fame)을 만들었다. 모두 648개 기업이 명예의 전당에 이름을 올렸는데, 머크는 여기에도 들어갔다. ‘포브스 글로벌 2000’이 시작된 이래 머크가 10위 안으로 들어간 적이 없지만, 100위 밖으로 나간 적도 고작 몇 년에 불과하다. 명예의 전당에 애플과 아마존도 헌액되었는데, 첫 ‘포브스 글로벌 2000’에서 애플은 963위, 아마존은 1,178위였다. 로이 바젤로스라는 이름을 들어보셨나요? 2024년에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매출을 올린 의약품은 머크의 면역 항암 신약 키트루다(성분명: 펨브롤리주맙)였다. 같은 해 머크의 매출은 650억 달러(약 89조 원) 정도였는데, 키트루다라는 신약 1개의 매출이 약 290억 달러(약 40조 원)를 차지했다. 머크가 신약개발에 진심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기업이 정말로 진심인지는, 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머크가 2024년 1년 동안 R&D에 쓴 돈은 180억 달러(약 24조 원) 정도였다. (참고로 2024년 대한민국 정부의 전체 R&D 지원 예산은 전년 대비 15% 정도 줄어든 약 26조 원이었다.) 기업의 최고 경영자(CEO)는 돈을 벌어들이는 사람이지만, 돈을 쓰는 사람이기도 하다. 머크의 CEO는 전체 매출의 1/4에 달하는 돈을 어떤 R&D에 어떻게 쓸 것인지 2024년에도 끊임없이 결정해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는 가장 중요한 결정이었을 것이다. 이런 구조를 가진 기업의 CEO는 어떤 사람이어야 할까? 로이 바젤로스(P. Roy Vagelos)는 1985년부터 1994년까지 머크의 CEO를 지냈다. 그는 원래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한 심혈관계 의사였다. 그런데 대체 군복무를 하러 갔던 미국 국립 보건원(National Institutes of Health, NIH)에서 콜레스테롤 생합성 과정을 연구하는 생화학자가 되기로 한다. NIH에서 자신의 연구팀을 이끌던 그는 다시 워싱턴 대학교 의과대학으로 자리를 옮겨, 그 어렵다는 대학 개혁에 나선다. 그리고 대학에서 자리를 잡아갈 때 즈음, 로이 바젤로스는 다시 머크 연구소로 간다. 그가 머크 연구소로 갈 당시만 해도 A급 과학자들이 기업 연구소로 가는 경우는 드물었다. 로이 바젤로스는 머크 연구소에서 연구소장을 지내다가, 나중에는 머크 CEO 자리에까지 올랐다. 로이 바젤로스가 CEO를 하는 동안 머크의 연매출은 35억 달러에서 105억 달러로 늘었다. 그는 의사라는 경험과 콜레스테롤 생합성 과정을 연구한 생화학자라는 경험을 바탕으로 고 콜레스테롤 혈증 치료제 개발 분야에서 스타틴(statin) 혁명을 이끌었다. 스타틴 계열 치료제들은 기존 치료제들과는 다른 접근법으로 개발된 신약이었는데, 이는 이후 머크의 신약개발 방식을 전면적으로 바꿀 만큼 효율적인 것이었다. 물론 스타틴 계열 신약들은 약효에서도 기존 치료제들을 압도했다. 로이 바젤로스는 머크에서 스타틴 계열 신약개발을 맨 앞에서 지휘했고, 머크는 빠른 시간에 블록버스터 의약품들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후 로이 바젤로스는 머크라는 기업을 더 강력한 R&D 중심 기업, 신약개발을 최우선과제로 삼는 제약기업으로 더 만들었다. 이 책은 이미 위대한 기업이었던 미국 머크를, 더 위대한 기업인 글로벌 머크로 도약시킨 의사이자 과학자였던 CEO 로이 바젤로스에 대한 이야기다. 따뜻한 혁신가, 과학을 하는 CEO 하지만 가장 평범했던 미국인 『메디신, 사이언스 그리고 머크 - 로이 바젤로스의 가장 미국적인 신약개발 이야기』 는 로이 바젤로스의 자서전이다. 1929년 평범한 그리스 이민자 가정에서 바젤로스라는 아이가 태어나는 것으로 시작하는 이 책은, ‘모든 것이 좋았던 시절’로 여겨지기도 하는 1960년대 미국 과학계가 매일매일 놀라운 성취를 이뤄냈던 이야기, 그리고 같은 시기에 차별받던 흑인들의 권리를 보장하려 노력했던 미국의 보통 과학자들의 이야기를 함께 보여준다. 19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의 늪에 빠지면서 경쟁력을 잃어가는 미국 기업들 가운데, 과학에 모든 것을 걸어 위기에서 벗어난 머크라는 제약기업의 이야기도 이어진다. 1980년대와 1990년대 미국 제약 산업의 비약적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과, 이를 뒷받침하지 못했던 정책적 실패가 어떤 것이었는지도 날카롭게 지적한다. 책은 바젤로스가 머크 CEO에서 물러난 뒤에도 계속된다. 전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제약기업 가운데 한 곳인 머크 CEO에서 물러나자마자, 과학자로 돌아가 이제 막 시작한 작은 바이오텍에 뛰어든 이야기가 열리기 때문이다. 미국 현대사를 따라가며 말썽꾸러기 소년 로이 바젤로스가 의사가 되었다가 과학자가 되고, 다시 기업의 세계로 뛰어들어 어려움을 뚫고 신약을 개발하며 기업을 키워가는 이야기는 한 편의 동화처럼 읽힌다. 바젤로스와 그의 주변 인물들은 가족과 공동체, 인내와 노력, 성실과 도전이라는, 이제는 귀해진 가치들을 놓치지 않았다는 점도 이 책이 동화처럼 읽히게 하는 데 한몫한다. 과학을 향해 맹렬히 달려가던 동료 연구자들이 하나둘 노벨상을 타고, 우여곡절 끝에 신약을 개발해 전 세계 최고의 제약기업을 키워가는 이야기는 잘 짜인 한 편의 영화처럼 보이기까지 한다. 맥티잔 프로젝트 CEO 바젤로스는 노동조합과 대립하기도 하고, 늘 논란에 오르는 강력한 구조조정을 실시하는 경영자였다. 그러나 경영학 수업을 들어본 적이 없는 의사이자 과학자 출신 CEO가 보여준 경영은, 오히려 원칙적이면서 과학적이고 꽤나 따뜻한 경영이었다. 1980년대와 1990년대, 유리 천장에 금이 가게 만들려고 어떻게든 최고 경영진에 여성 임원을 포함시키려는 노력, 유색 인종 인재를 머크에 채용하려고 유색 인종 학생들이 다니는 대학교에 후원 프로그램을 세팅하는 시도, 환경 당국의 규제보다 강한 오염물질 배출 기준을 정하고 전 세계 모든 모든 머크 공장에 적용한 일, 사회주의 중국이 감염병 예방 백신 공장을 지을 수 있도록 말도 안 되는 저렴한 비용으로 기술 수출을 한 사건들 모두 로이 바젤로스의 작품이었다. 그리고 클라이맥스에는 맥티잔이 있다. 머크는 가축 기생충을 없애는 이버멕틴이라는 약물을 개발한다. 그런데 머크 연구소와 로이 바젤로스는, 숙주로 삼은 사람의 시력을 결국 잃게 만드는 미세사상충을 박멸하는 데 이버멕틴이 효과적이라는 것을 발견한다. 이 발견은 아프리카 대륙의 사하라 사막 이남 지역에 최소 1,800만 명이 감염되어 있었고, 감염될 수 있는 사람이 8,000만~9,000만 명에 이르렀던 어마어마한 공중보건 위기 상황을 해결할 수 있다는 희망과도 같은 일이었다. 머크 연구소장이었던 로이 바젤로스는 이버멕틴을 가지고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의약품을 개발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매년 한 알만 먹으면 미세사상충을 예방할 수 있고, 투약만 계획적으로 잘 진행하면 기생충을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만들 수도 있는 맥티잔을 개발한다. 그러나 늘 돈이 문제다. 어떤 정부 기관, 공공 기관도 맥티잔을 구입해서 배포하겠다고 적극적으로 나서는 곳이 없었다. 머크 연구소장으로 맥티잔 개발을 결정했던 로이 바젤로스는, 머크 CEO가 되어서 맥티잔의 무상 공급을 결정했다. 누군가 아프리카에 있는 어떤 마을에 맥티잔을 가져다주기만 한다면 무료로 맥티잔을 주겠다는 결정이었다. 맥티잔을 개발하고, 임상시험을 진행하고, 허가와 승인을 받고, 공장을 지어 멕티잔을 생산하는 모든 비용은 머크가 부담하기로 했다. 로이 바젤로스가 이 책을 출간했던 2003년 기준으로 총 2억 달러가 들어갔다는 이 프로젝트는, 1987년부터 2025년인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이 모든 이야기는 비현실적인 픽션이 아니다. 지극히 평범했던 어떤 의사의 이야기이고, 어떤 과학자의 이야기이며, 어떤 비즈니스맨의 이야기다. 우리 모두가 듣고 싶어 하는 이야기이며, 다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이야기이고, 충분히 이루어질 수 있는 이야기다. 평범해서 잊고 있었던 가장 위대했던 진리 왜 미국에서 신약이 나오는지 물으면, ‘미국에는 신약을 개발할 수 있는 거대한 자본을 가진 제약기업이 있기 때문이다’라고 답이 돌아오고는 한다. 어떻게 미국 제약기업은 거대한 자본을 갖게 되었는지 물으면, ‘미국 제약기업은 엄청난 수익을 거둘 수 있는 신약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라는 답이 돌아온다. 질문과 답과 서로의 꼬리를 물고 돌아가는 이런 분석에서 통찰을 얻기란 불가능하다. 하지만 이 책을 따라가며 로이 바젤로스의 꽤나 낭만적이었던 도전과 끊임없이 저지르는 실수, 그럼에도 다시 도전하고 결국 매번 벽을 넘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다보면 무엇인가를 찾아낼 수 있다. 그리고 그의 낭만과 열정의 밑바탕에는 가족과 사회와 공동체와 인류에 대한 사랑과 책임이라는, 너무나 뻔해서 누구도 입에 올리지 않지만 무엇보다 강력해서 기적을 일으키는, 가장 미국적이었고 여전히 인간적인 동기가 자리 잡고 있다는 것도 알게 된다. 아픈 사람들에게 직접적인 도움이 되고 싶다는, 가장 평범하지만 잊기 쉬운, 그래서 가장 위대할 수 있는 진리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