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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 신현준
1971~73 1 포크, 자작?자연의 자의식과 사회 비판의 메시지 3선 개헌, 10월 유신, 긴급조치 김진성 사단, 그리고 자작?자연의 자의식 정성조, 그리고 포크와 록의 우연한 만남 포크, 언더그라운드로? 재즈 ‘메신저’, 포크 록의 산파 | 정성조 모던 포크 송라이팅의 시원(始原) | 김광희 2 소울?사이키, 포크와 합성해 한국적 팝으로 소울 싱어·포크 싱어 배후의 신중현과 그 사나이들(The Men) 소울과 포크, 혼성 혹은 혼란 김 트리오, 그리고 조용필과 최이철의 가요계 데뷔 그룹 사운드 히트곡 가왕(歌王) 등극 이전의 비사를 말하다 | 조용필 걸출한 R&B★소울 보컬리스트의 40년 외길 | 박광수 3 고고 클럽, 한밤의 혁명 혹은 하룻밤의 꿈 1971년, 긴 머리 자르고 마지막 잔치를 벌이다! 모든 것은 Nirvana로부터 시작되었다! 고고 클럽의 하위문화? 그룹 사운드, 지하에서 자기증식하다 ‘가요정화운동’과 ‘퇴폐풍조단속’ 푸른 용과의 긴 채팅 | 박명길 기타 신동의 후일담 | 김석규 1973~75 4 포크송과 그룹 사운드, 만나고 헤어지다 1973, 74년 포크의 빅뱅! 메이저 음반사에서 제작된 ‘포크 가요’ 애플과 이종환, 김희갑과의 만남 애플과 이종환, 안건마와의 만남 이종환 사단과 쉘부르, 그후로도 오랫동안… 포크 명반 전설의 편곡자 | 안건마 5 포크 록의 절정, 오리엔트 사운드 ‘동방 박사’ 나현구 사장 동방의 빛, 오리엔트 스튜디오의 ‘하우스 밴드’ 오리엔트의 경제학과 미학, 최소 비용으로 최대 효과를 포크 록의 잉태, 그러나… 포크 록의 東方之光을 찾아서 | 강근식 70년대 포크, 그 순수의 결정(結晶) | 현경과 영애의 박영애 6 아! 대마초, ‘토착화한 팝’의 유산(流産)과 유산(遺産) 1975년 10월, 엽전들과 검은 나비의 매머드 리사이틀 유신정권, 불온을 처단하고 퇴폐를 단죄하다 포크와 로크, ‘외래풍조’라는 공격을 능가하다! 로크와 포크, ‘퇴폐풍조’라는 공격에 좌초하다! 1975년 12월, 대마초 파동! 프런트맨보다 중요한 사이드맨 | 이남이 그룹 사운드계 보스의 회고 | 조갑출 1976~78 7 대마초 파동 이후 ‘트로트 고고’ 불황의 긴 터널 킹, 서라벌과 손잡고 살아남다 안타 프로덕션, 비즈니스맨이 된 그룹 사운드 연주인 70년대 말, 그룹 사운드의 쓸쓸한 뒤안길 ‘영 사운드’에서 ‘코리안 사운드’로 | 안치행 ‘안타’ 제조기, 그룹 사운드 올스타 시절을 회상하다 | 김기표 8 제1회 대학가요제와 산울림 1977년 제1회 MBC 대학가요제 명문대생들의 ‘딴따라’ 진출기: 스푸키스, 엑스타스, 그리고 들개들 샌드 페블스의 기원을 찾아 공동(空洞)에 불어닥친 파란 산울림에서 산맥으로 개구쟁이 로커와 나눈 한낮의 몽중대화 | 김창완 초창기 캠퍼스 그룹 사운드의 숨은 증인 | 스푸키스의 백광우 9 소울에서 훵크, 훵크에서 디스코, 그리고 사랑과 평화 여가수 배후의 그룹 사운드 소울, 노만기획에서 마지막 불꽃을 태우다 사계절, 까치소리, 비둘기 그룹 여성 그룹 사운드의 유행 사랑과 평화, 그리고 이장희 사단 70년대의 결산 혹은 80년대의 예시 훵키 록의 혁신자 | 최이철 한국 대중음악의 ‘이론가’, 그 40년의 실천 | 신병하 10 캠퍼스 그룹 사운드의 집단적 목소리 1978년 제1회 TBC 해변가요제 활주로를 바라보며 세상모르고 살던 사람들 블랙 테트라 혹은 훵키한 외인구단 코리안 스톤스 혹은 언더그라운드를 위한 서주 캠퍼스 그룹 사운드, 직업 그룹 사운드로 변신하다 DJ 철수, ‘젊음의 우상’ 시절 세상만사 | 배철수 80년대 언더그라운드 씬의 대표 기타리스트 | 이영재 1978~80 11 마지막 명동파 그리고 신촌파 ‘포크’는 어떻게 된 것일까 이정선과 ‘이정선 차일드’ Interlude: 정태춘 신촌파, 70년대의 ‘얼터너티브’ 씬 예외의 포크 싱어, 어쿠스틱 블루스맨 | 이정선 음악의 원류를 찾는 여행 | 오세은 12 언더그라운드, 따로 또 같이 암중모색 혹은 이합집산하다 돌아온 김민기 조동진, 우뚝 서다 따로또같이, 참새를 태운 잠수함, 그리고 명륜동파 포크에서 언더그라운드로 베테랑 키보디스트, 스튜디오의 마술사 | 이호준 기나긴 기다림, 짧은 만남, 그리고 긴 여운 | 조동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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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급조치 9호 발령 30주년
1975년 5월 13일, 유신 정권의 초절정 강박을 표현하는 ‘긴급조치 9호’가 발령되었고, 그로부터 30년이 흘렀다. 이 정치적 권력 행사가 낳은 엄청난 파장 가운데 대중가요 금지곡(외국 곡 포함)이 무더기로 쏟아진 점은 아마도 당시를 산 대중이 가장 일상적으로 가장 폭넓게 경험한 압제의 독취가 아니었을까. 최근 7080의 대중가요가 중년 소비대중의 향수를 자극하면서 붐을 타고 있지만, 6070, 즉 1960년대와 70년대에 청년기를 보낸 세대야말로 이전 이후 그 어느 세대보다 ‘음악’과 밀착되어 있었다는 것이 중론이다. 이 책은 바로 이 시기, 약 20년 동안 대중문화 특히 대중음악 분야에서 ‘팝’과 관련해 발생하고 발전한 문화적 쇄신에 대한 연구다. 이전까지 이질적인 개념이었던 ‘한국’과 ‘팝’은 이 시기 들어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기성과 청년 등을 상징하며 날카롭게 충돌했고, 국가와 시장의 강제에 반응하며 끊임없이 새로운 존재를 형성해갔다. 이 책은 바로 그 충돌음과 파문의 기록이며, 독자는 이 거대한 벽화의 어느 곳에 돋보기를 들이대도 당시를 살아간 사람들의 다양하고 생생한 삶의 세부를 목격하게 될 것이다. 쟈스와 재즈, 팝의 첫 흔적을 찾아서 대중음악에서 속칭 ‘빠다끼’로 불리는 ‘팝’의 첫 흔적은 이 책이 주목하기로 기약한 1960년대를 훌쩍 뛰어넘어 일제 강점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거기에 ‘쟈스’가 있었다. 영미 음악뿐 아니라 샹송·탱고·룸바, 게다가 클래식과 세미클래식까지를 의미했던 쟈스는 주로 악극단들에 의해 일반에 소개되었지만 1940년대 초 전시체제에 접어들면서 ‘적성국의 음악’이라는 이유로 금지되었다. 1945년 해방 이후 미군의 진주는 한국의 정치·경제뿐 아니라 한국인의 가치체계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일대 사건이었다. 일시에 봇물 터진 듯이 다시 유입되기 시작한 ‘재즈’에도 이러한 변화는 확연히 드러난다. 일반에는 이제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음악’이 재즈로 통했고, “베사메 무초”같은 몇몇 ‘재즈곡’은 한국어로 번안되어 대중 속에 파고들었다. 악극단에서 활동하던 음악인들은 점차 미군 쇼 무대로 흡수되었고, 1954년 미8군 사령부가 일본에서 서울 용산으로 이전한 후에는 쇼 단체가 난립하는 상황까지 전개된다. 이어 미8군 쇼 무대는 한국 연예인들을 체계적으로 공급하고 관리하는 ‘연예용역회사’의 탄생을 불러일으켰다. 여촌야도 뽕촌팝도의 1960년대 하지만 미8군 무대와 일반 무대는 별개였다. 재즈는 여전히 미8군 무대의 전유물이었고 일반 무대에는 이른바 ‘뽕끼’(왜색) 흐르는 가요곡이 전부였다. 저자들은 이러한 상황을 돌파한 최초의 인물로 손석우를 꼽는다. 해방 이후 최고 히트곡으로 기록된 “노오란 샤쓰 입은 사나이”의 작사·작곡가이며 국내 무대에 최초로 전기 기타를 도입한 손석우는 번안곡이 아닌 창작곡으로 일반 무대에서 승부한 한국 팝 계열 최초의 작가라는 것이다. 1961년 그의 이 화려한 성공 이후 김광수·김인배·박춘석·길옥윤 등 많은 미8군 무대 출신 연주인들이 작·편곡가로 전업해 ‘가요곡’에 도전하는 집단적인 흐름을 형성하면서 한국 대중음악에 장르 구분이 불가피해진 점도 주목된다. 바로 미8군 무대 출신 가수가 부르는 ‘외래가요’와 일반 무대 출신 가수가 부르는 ‘재래가요’로. 당시 언론에서는 이를 ‘재즈조’와 ‘뽕짝조’로 구분짓기도 했는데 이들의 지지기반도 전자는 도시, 후자는 농촌으로 갈렸다. 당시 정치문화의 구도가 여촌야도(與村野都)였다면 음악문화의 구도는 뽕촌팝도였다는 결론도 흥미롭다. 한국 팝의 절정, 그리고 이렇듯 미8군 쇼 무대와 각종 쇼 단체들, 그리고 민방 개국과 함께 활기를 띠기 시작한 방송무대에서 점차 그 뇌관을 완성한 팝은 1968년과 69년 소울·사이키를 폭발시킴으로써 절정을 맞이한다. 그 사이 미8군 무대 초창기의 악단 편성인 풀 멤버 밴드(10명 이상)는 캄보 밴드(6, 7인조 내외)로 정착했고, 여기서 다시 전기 기타가 밴드의 중심이 되면서 록 밴드의 형태에 가까워졌다. 이인성, 김희갑 등 선구적인 기타리스트들이 이끈 캄보 밴드는 사운드도 재즈보다 록에 한결 접근해 있었지만 ‘기타 치며 직접 노래 부르는’보컬 캄보로 혁신됨으로써 온전한 록 밴드의 형식을 갖추게 된다. 그 전위에 신중현이 결성한 애드 포와 키 보이스, 코끼리 브라더스 등이 있고, 1964년부터 비틀스의 선풍적인 인기에 힘입어 4, 5인조의 보컬 캄보가 가요계의 주류로 부상하면서, 비틀스는 그룹 이름을 넘어 비틀스 밴드라는 하나의 장르를 형성한다. 1968년과 69년 펄 시스터스와 김추자 등 이른바 신중현 사단이 주축이 돼 대중음악계에 폭넓게 확산된 팝 혁명은 1970년대 초 순수와 격조에서 비판과 풍자로 진화하는 포크와 합성하며 새로운 도약을 완성해가던 즈음 풍비박산 나고 만다. 긴급조치 9호 발령에 이어 1975년 12월, 대마초 파동이 터진 것이다. 유신 정권, 불온을 단죄하고 퇴폐를 처단하다 저자들은 1974년부터 75년에 이르는 시기를 한국 대중음악의 역사, 나아가 한국 대중문화의 역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시기로 본다. 우선 이 시기 대중음악의 작품과 작가가 뛰어났기 때문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 시기에 독재정권과 청년문화가 정면으로 충돌했기 때문이다. 1974년 새해 벽두에 발표된 긴급조치 1호로 시작되는 이 시기는 75년 12월 대마초 연예인들의 대거 구속 사태로 끝난다. 1972년 이미 불온으로 지목된 김민기의 첫 앨범은 뚜렷한 이유 없이 판매가 금지된 상태였고, 돌아온 한대수가 1974년과 75년에 한 장씩 발표한 음반들도 뚜렷한 이유 없이 방송과 판매를 금지당한다. 서유석은 DJ를 보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베트남전의 참상을 고발하는 글을 읽어내렸다가 3년간 활동을 정지당했다. 이정선은 데뷔 음반의 경우 가사가 문제가 되어 방송과 판매를 금지당했고, 그 다음 음반에서는 표지의 장발이 문제가 되어 우여곡절을 겪었다. 이밖에 김의철, 오세은, 양병집의 음반들도 황당무계한 사유로 비슷한 운명을 맞이했다. 1975년 6월, 그러니까 마지막 긴급조치(9호)가 발표된 뒤에는 금지곡이 무더기로 지정되기 시작했다. 예륜이 주체가 된 이 무더기 금지곡 사태는 1975년 말 국내 가요만 223곡에 이르렀다. 이때 예륜의 금지 기준은 불온뿐 아니라 저속과 퇴폐를 포함했고, 트로트와 포크, 록을 가리지 않았지만 트로트의 경우 금지곡 지정이 가수·작곡가· 음반사에 경제적인 타격을 입히는 데 그친 반면, 포크와 록 등 팝 계열의 경우 작품을 금지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활동을 금지하는 정치 탄압에 가까웠다. 금지곡 지정의 최대 피해자가 19곡이나 블랙리스트에 오른 신중현이었고, 포크 계열에서는 이장희였던 점은 다가올 대마초 파동의 전조를 드러낸다. 드디어 12월 초 신중현을 비롯한 소울·사이키 계열의 음악인들의 이름과 이장희를 비롯한 포크 계열 음악인들의 이름이 번갈아 일간지 사회면을 대문짝만하게 장식하고, 이윽고 7명의 가수가 구속되는 것으로 수사는 서둘러 마무리된다. 「대마 관리법」이 제정된 것이 1976년 4월이고 보면 대마초 흡연의 시시비비를 떠나 제대로 된 법률도 없는 상황에서 수사가 진행된 것이다. 장소와 정책의 계보, 비주얼과 텍스트의 완벽한 조화 이후 팝의 주무대는 대학가요제를 비롯한 캠퍼스 그룹 사운드, 언더그라운드 무대로 잦아든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미8군 쇼 무대와 기지촌 클럽·방송 무대·음반사·스튜디오·카바레·생음악 살롱·고고 클럽·명동·명륜동·신촌 등 이른바 ‘딴따라들’이 모이고 흩어진 유흥과 작업의 공간들, 음반법을 비롯해 가요정화운동·긴급조치·대마초 파동 등 음악산업을 울리고 웃긴 이른바 문화정책의 계보가 재구성된다. 가수 김추자와 함께 한때 스캔들의 중심에 있던 소윤석을 비롯해 고(故) 김대환·김인배·신중현·서병후·한대수·김광희··조용필·최이철·안건마 등 가수와 연주인, 매니저, 저널리스트, 작·편곡자 등 당시 대중음악 판을 움직인 41인의 음악인 인터뷰와, 800여 컷에 달하는 자료 사진과 디스크 재킷은 이 지난한 발굴과 복원의 보습이며 증거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