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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사_ 김학철 선생과 그의 격정시대
머리말_ 인간 김학철과 그의 전우들 1부 태항산 기슭에 석류꽃 붉게 물들다 2부 중국 석가장 일본헌병사령부에서 일본 나가사키 감옥으로 3부 자유와 독립의 길을 찾아 떠난 청년 김학철 4부 상해에서의 반일 테러 활동 5부 황포군관학교와 조선의용대 6부 태항산 팔로군사령부와 팽덕회 7부 일본 나가사키형무소 8부 일본 감옥에서 서울, 평양 그리고 또다시 북경으로 9부 북경에서 정령과 함께 10부 연변에서 주덕해와의 인연 11부 작가 김학철의 작품 세계 12부 두만강에서의 마지막 길 ㆍ부록 1 김해양의 일기 11편 〈마지막 스무 하루의 낮과 밤〉에서 발췌 ㆍ부록 2 김호웅 교수가 바라본 김학철 ㆍ부록 3 김학철 선생이 생전에 정리한 자료 1 황포군관학교 13기(특별6반) 조선인 학생 명단 ㆍ부록 4 김학철 선생이 생전에 정리한 자료 2 조선의용대 명단 ㆍ부록 5 김학철 연보 ㆍ김학철 항일 투쟁 경로 ㆍ조선의용군 투쟁 경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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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님은 돌아가시기 일주일 전, 돋보기로 조선의용대 창립 기념사진 속 전우들을 하나하나 확인하며 그들의 본명과 원적을 저에게 일일이 기록하게 하셨습니다. 단식으로 기력이 쇠약해진 몸을 간신히 지탱하고 앉아 그 누구도 다시 할 수 없는 작업을 이어가셨습니다. 이로써 청년 영웅들의 이름과 얼굴이 정확하게 역사에 남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 p.20 김학철은 다리에 관통상을 입고 휘뚝 나가떨어지면서 바위에 머리를 부딪혀 순간 의식을 잃었습니다. 후에 들은 이야기지만 김학철은 당시 다리를 야구방망이로 된통 맞은 느낌이었다고 합니다. 그가 깨어나보니 자신이 일본군의 들것에 실려 가고 있었습니다. 들것에서 굴러떨어지듯 도망치자 일본군이 다시 잡아서는 이번엔 들것을 밧줄로 꽁꽁 묶어 옴짝달싹 못 하게 했습니다. 그렇게 김학철이 끌려간 곳은 일본군사령부였습니다. --- p.31 김학철은 다시 북경에서 상해로 임시정부를 찾아 무작정 떠났습니다. 그런데 상해에서 ‘의열단’이 그를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어찌 알았겠습니 까. 김원봉이 이끄는 의열단은 중국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무정부주 의 반일 테러 단체였습니다. 조선인들이 중국에서 반일 운동을 하는, 매 우 중요한 세력이었지요. --- p.65 당시 김학철이 몸담고 있던 민족혁명당의 본거지는 남경 화로강이었습니다. 김학철네 일행은 간난신고 끝에 남경 화로강에 도착했습니다. 화로강이란 남경 중화문 안에 있는 언덕배기의 지명입니다. 여기에는 묘오률원(妙悟律院)이라는 큰 사찰이 있었습니다. 그 후원에 누관 한 동이 서 있고 이 누관 아래위층의 득실득실하는 젊은이들이 곧 열혈적인 조선민족혁명당의 청년 당원들이었습니다. 민족혁명당의 지도층 김두봉(金枓奉), 한빈(韓斌) 두 사람은 독신이었으므로 석정(윤세주)네 집에 얹혀살았습니다. --- p.85 조선의용대 발대식에 참가한 인원은 모두 합하면 약 200명가량 되었으나 실제로 군복을 입고 조선의용대 깃발을 들고 나란히 선 사람들은 150명밖에 안 되었습니다. 조선의용대는 3개 지대로 구성되었습니다. 의용대의 총대장은 약산 김원봉, 제1지대 지대장은 박효삼(朴孝三), 제2지대장은 이익성(李益星), 그리고 왕통(王通)과 김학무(金學武)가 각각 1, 2지대 정치위원으로 임명되었습니다. 1939년 조선민족전선연맹 총부는 사람을 모아 중경(重慶, 충칭)에서 조선의용대 제3지대를 구성했는데 지대장은 리유민(李有民)이었습니다. 의식 순서의 하나로 전체 대원들의 가슴에 배지(휘장) 하나씩을 달아주었는데 거기에는 ‘조선의용대’라는 한글 다섯 자와 ‘Korean Volunteer’라는 영문자 한 줄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무한은 장강을 끼고 3진으로 나뉘어 있습니다. 항일 전쟁사에서 유명한 무한보위전은 조선의용대 창립과 동시에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니 조선의용대는 창립 첫날부터 중국 항일 전쟁의 최전선에서 용맹하게 싸웠던 것입니다. --- p.97 중국의 웨스트포인트라는 황포군관학교에서 조선 학생들을 계속 군사 인재로 육성해냈는데 이에 위협을 느낀 일본 정부가 항의를 했다. 그 바람에 장개석(장제스) 교장은 눈가림으로 조선 학생 전원을 일단 출학(黜學) 처분을 해놓고 이튿날 다시 뒷문으로 불러들여 등록시켰는데 이름을 모두 중국 이름으로, 본적도 모두 중국의 동북삼성으로 바꾸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하여 조선 학생들의 성은 많이 왕(王), 호(胡), 장(蔣), 여(余), 풍(馮) 등으로 변하고 본적지는 모두 료녕(遼寧), 길림(吉林), 흑룡강(黑龍江) 등지로 변해버렸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학생들의 현주소가 모두 한구(漢口) 화상가(華商街) 15호-조선민족혁명당 한구 판사처(辦事處)로 되어 있는 것이다. 조선민족혁명당은 의열단의 후신(後身)으로 그 당수(黨首)는 약산 김원봉이었다. --- p. 25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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ㆍ“스무 살에 상해에서 반일 테러활동에 뛰어들어 맥아더사령부의 정치범 석방 명령으로 일본 감옥에서 풀려나온 서른 살까지 나는 지겨운 줄도 모르고 또 한눈도 팔지 않고 오로지 한길을 걸어 나왔다. 제멋에 겨워서 자신만만하게 걸어 나왔다. 하긴 자신만만한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 말씀은 김학철 선생님께서 1994년에 하셨으니 세상을 떠나기 7년 전에 남긴 말입니다. 선생님은 조선의용대 최후의 분대장으로 호가장전투에 참가했다가 왼쪽 다리에 총상을 입게 됩니다. 그리고 일본군 포로가 되어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일본 나가사키형무소에 수감됩니다. 그렇게 선생님은 자신의 생명을 시시각각 좀먹어 들어오는 원수 같은 다리를 끌고 “일본이 먼저 망하느냐 내가 먼저 죽느냐” 하는 경주를 3년 넘게 하다가 끝내 열악한 환경에서 다리를 절단하게 됩니다. 하지만 자신만만한 걸음으로 살아오셨던 것처럼, 다리를 절단한 후 여동생에게 쓴 편지에서 “사람의 정의는 인력거를 끄는 동물이 아니다. 다리 한 짝쯤 없어도 문제없다. 걱정 마라!”라고 태연하게 위로합니다. ㆍ김해양 선생님에게 아버지 김학철은 어떤 분이셨을까요? “나의 아버지는 극한의 상황을 수없이 극복하며 끝내 인간 승리를 증명해냈습니다. 그는 일본 감옥에서 왼쪽 다리를 절단했지만 실의에 잠기는 대신 총칼을 붓으로 바꾸었습니다. 거대한 우상들에 차례로 도전했으며 어두운 철창 속에서도 희망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22년 동안의 비인간적인 수감생활을 마치고 자유의 몸이 되었을 때, 아버지의 나이는 어느덧 65세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최후의 질주를 멈추지 않았고, 여든다섯 해로써 생을 마감하는 날까지 장장 20년간 위대한 문학 유산을 우리에게 남겨주었습니다. 진리와 자유를 위해서는 개인의 안위와 부모 형제마저 뒤로하고 나설 용기가 필요함을 아버지를 보며 깨닫곤 합니다. 아버지의 파란만장한 여정은 한국, 중국, 북한, 일본을 아우르는 동아시아 역사의 실사판입니다.” ㆍ김학철 선생님은 세상의 온갖 불의에 맞서 싸우며 죽음의 고비를 수없이 넘나들었습니다. 세상을 지배하는 힘과 권력이라도 정의롭지 못하다면 그에 도전해야 마땅했습니다. 말년에는 “나는 여생을 모든 입 가진 자들이 다 말할 수 있는 자유를 위해 싸울 거야!”라고 하시면서 출입문에 ‘한가한 사람은 문을 두드리지 말라’는 팻말을 걸고 일분일초를 아끼시며 창작에 몰두하셨습니다. 병이 깊어 글을 쓸 기력마저 쇠해지자 “작품을 더는 쓸 수 없다면 나의 인생은 끝난 것이다. 한명(限命)을 아는 것이 영웅이다.”라고 하시면서 식사를 중단하고 담담히 존엄한 죽음을 맞이합니다. 선생님의 친필 유언은 대쪽 같은 그의 신념이자 좌우명이었습니다. “편안하게 살려거든 불의에 외면을 하라. 그러나 사람답게 살려거든 그에 도전을 하라.” ㆍ김학철 문학의 원천은 평생 꾸준히 해온 ‘독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의 일생은 열광적인 독서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어린 시절에는 일본어로 된 세계문학 전집을 통독하였고, 팔만 뻗으면 닿을 수 있는 책장에 『노신전집』 10권과 홍명희의 『임꺽정』 6권을 두고 책이 닳도록 읽었습니다. 또 『홍루몽』도 외울 정도로 자주 읽으셨는데 선생님은 이 소설이 중국 사회의 백과사전이라 하셨지요. 중국의 『사기(史記)』를 좋아하셨고 숄로호프와 톨스토이의 작품도 생명같이 사랑했습니다. 문학에 대한 사랑, 박애 정신, 역사에 대한 책임감 등이 김학철 문학의 정체성이 되어주었습니다. ㆍ한반도와 일본(감옥), 그리고 중국에서 격동의 20세기를 온몸으로 치열하게 살아온 김학철 선생님은 세상을 떠나기 전 돋보기로 조선의용대 창립 사진을 하나하나 살펴보시며 대원들에 대한 자료를 정리하셨습니다. 당신만이 그 작업을 할 수 있다며 정리한 소중한 자료를 이 책의 부록으로 공유합니다. 망국 시기 ‘최초의 조선인 무장 대오인 조선의용대는 전무후무한 항일 결사체’였습니다. 독립운동과 광복을 위해 창립된 조선의용대는 어떤 이유에서든 우리의 독립운동사에서 지워져서도 폄하되어서도 안 되는 한 부분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