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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1. 영화로 남겨달라 2. 환상의 하얀 성 3. 인물과 주인공 4. 혼돈의 첫 촬영 5. 다른 플롯의 조각들 6. 말과 흙이라는 재료 7. 픽션과 논픽션 사이에서 8. 이야기의 목적지 9. 아카이브의 열정 10. 그의 말이 멈출 때 11. 같이 그린 초상화 12. 전시, 유서, 영화 13. 관객이라는 사람들 14. 영화를 산포하라 15. 사이에서 서성이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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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용을 만나자마자 알 수 있었다. 그가 주인공의 삶을 선택한 사람이라는 것을. 주인공이란 스스로 주인공으로서의 삶을 사는 사람이다. 주인공으로 태어났고 스스로를 주인공으로 여긴다. 언제나 주인공답게 먼저 생각하고 앞서서 행동한다. 그들에게는 간절하게 이루고 싶은 자신만의 사명이 있다. 주인공은 그들에게 닥친 사건의 본질을 누구보다 깊게 알아챈다. 주인공은 자신을 사랑하듯 타인을 사랑한다. 주인공은 사랑받는 것을 기쁘게 받아들이며 그 사랑을 주변에 베푼다. 나는 어떤가. 어디 가면 숨을 구석부터 찾는다.
--- p.12 상업영화의 촬영 현장이 언론에 공개되는 날이 있다. 비교적 큰 규모의 현장이 그 배경이 된다. 주인공들이 모두 출연하고 로케이션은 크고 화려하며 촬영 장비도 많이 사용하는 날이다. 서울 촬영이면 더욱 좋다. 기자들과 영화 관련자들이 잔뜩 와 있는 현장은 지금 생각해도 부담스럽다. 방문객들이 나를 지켜보고 있다. 유난히 흥분한 배우들과 스태프들을 통제하기 힘들다. 여러 가지 합을 맞춰야 하는 정교한 촬영인데 쉽지가 않다. 죽을 쑤는 느낌이다. 지루한 촬영을 뒤로 하고 떠나가면서 방문객들은 말한다. 여성에 신인 감독이라 역시 현장 지휘를 못하네. 저래서 영화가 제대로 나오겠나. 아직 만들어지지도 않은 영화에 대한 평가가 무성해지는 날. 나는 촬영의 규모를 보여준다는 개념을 배운 듯하다. --- p.50 "한번은 군수가 점심 먹고 공설운동장 가자 이랬습니다. 왜 데리고 왔는데요. 볼 게 있습니다. 뭡니까. 공설운동장에서 행사를 하면 주민들이 하나도 안 온다. 당신 마을의 행사인데 왜들 안 오는 것이냐. 군수 당신 돌았구만. 당신만 본부석에서 햇볕 피하고 비 피하고 하지. 우리만 땡볕에서 미쳤냐, 거길 왜 가냐. 우리나라 공설운동장이 다 그렇거든요. 본부석만 있습니다. 군수가 깜짝 놀란 겁니다. 그게 감응입니다. 맞어. 나만 저기서 거들먹거리고 앉아있으면 누가 오겠느냐 감응한 것입니다. 이분이 보통 군수가 아니죠. 가만히 있지를 않았습니다. 뭘 했느냐. 공설운동장 뒤에다가 등나무 240그루를 심었습니다. 그래서 스탠드에 그늘을 만들자. 기가 막힌 생각이죠. 저한테 이거 보여주려고 왔습니다. 선생님, 얘네들이 자라나야 되는데 어떡합니까? 등나무의 집을 좀 설계해 주십시오. 내 평생 설계하다가 등나무의 집까지 설계하게 된 것이죠." --- p.102 다큐멘터리 촬영을 하면서 종종 만나게 되는 잘 연출된 장면 같은 현실을 접할 때마다 극영화 감독 출신인 나는 당황한다. 과연 현실은 무엇일까. 다큐멘터리에서 나만의 이야기를 한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애초에 현실은 이미 많은 상징을 가진 채 멋대로 존재하고 있지 않은가. 그 현실들을 취사선택한다고 해서 감독의 독자적인 영화가 가능할 수 있을까. 현실이 담고 있는 기호와 의미를 뛰어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다큐멘터리는 무엇을 보여주어야 하는가. --- p.111 무주 추모의 집은 반백의 관리인 두 명이 지키고 있었다. 우리는 커다란 뽕나무 옆 평상에 카메라를 두고 그저 뭔가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이야기를 품은 추모객들이 시간차를 두고 한 사람씩, 한 팀씩 우리에게 다가왔다. 무엇을 하지 않고 그저 공간에서 기다리고 있을 뿐인데 이야기들이 스스로 다가온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경험이었다. 저 아래쪽 어딘가에서 다른 연출가가 나 모르게 미리 섭외해 둔 추모객들을 하나씩 보내주고 있는 게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였다. (...) 그때 키가 아주 작은 할아버지가 다리를 절뚝이며 올라왔다. 우리에게 묻지도 않고 그는 자연스럽게 평상에 앉았다. 돌아가신 형님을 뵙기 위해 왔다고 했다. 차가 없어 자주 못 와 형님에게 미안하다고 했다. 우리가 촬영하고 있다는 것을 할아버지는 모른 척했다. 왜 촬영하냐 그런 질문 자체가 아예 없었다. 그냥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촬영이 이루어졌다. 배낭에서 소주병을 꺼내 들고 납골당 내부로 들어가는 할아버지를 따라 들어갔다. 형님에게 무슨 말을 하시려나. 그런데 건물 안에 들어가자 할아버지는 형님의 납골함을 찾지 못하셨다. 그냥 납골함을 찾으면 그저 그런 이야기가 되고 만다. 그런데 못 찾고 납골당 안을 헤매며 형님 형님 어디 있소, 그러면 흥미로운 이야기가 된다. 관리인의 도움으로 형님을 찾고 소주를 한잔 올린 후 할아버지는 다시 배낭을 메고 언덕을 내려가셨다. 방금 우리가 경험했던 일이 통 현실 같지가 않았다. 혼자였다면 잠깐 꿈을 꾼 것이 아닐까, 귀신을 만난 것은 아니었을까, 착각했을 법한 시간이었다. --- p.114 다큐멘터리 감독으로서 나는 주인공에게 모든 관심과 애정을 집중하고 있다. 하지만 때로는 제삼자의 위치에서 주인공을 냉정하게 바라본다. 이 과정은 마치 시나리오를 쓸 때 느끼는 것과 비슷하다. 시나리오를 쓸 때 내가 등장인물에 대해 느끼는 다양한 감정이 있다. 때로는 주인공에게 다른 사람에게보다 더 냉정하게 굴기도 한다. 하지만 결코 주인공을 포기하거나 버리지는 않는다. 주인공을 엔딩까지 책임지는 것. 그게 내가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 p.120 그런데 9월 2일, 미술관 측과 전시준비팀의 전체 회의가 있던 날. 전시 프로젝트가 강력한 서사 열차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기적 소리가 빠아앙- 힘차게 울렸다. 강성원 큐레이터가 서사 열차를 타고 도착했다. 주인공답게 15분 늦게 도착했다. 영화 [말하는 건축가]에서 강성원이 등장하는 장면이 내가 그녀를 만난 첫 순간이기도 하다. 강성원 역시 타고난 주인공 재질. 그녀가 등장하는 순간부터 나는 긴장했다. 촬영감독도 전시기획팀도, 그리고 관객들도 그녀가 등장하자 의자를 당겨 앉고 자세를 바로잡았다. 다들 이야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 p.126 극영화 시나리오를 쓸 때는 전형적인 아크 플롯에 대하여 원초적인 거부감이 있었다. 주인공과 반대편의 갈등을 구조화하고 주인공의 변화를 추구하는 고전적인 서사에 반항심을 느꼈다. 내 삶에는 큰 사건이 없었다. 삶에 대한 열정과 에너지도 약했다. 고전적 서사가 당연히 현대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나의 현실과 동떨어진 과장된 서사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다큐멘터리를 만들면서 나는 어느새 고전적 서사에 집착하게 되었다. 왜 이런 현상이 나타났을까. --- p.130 우리 삶은 차라리 아무것도 아닌 듯 보이는 목적 없는 말들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영화에는 목적 없는 감상들이 있을 시간과 공간이 필요하다. --- p.13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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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남겨달라”
기억이 머물 집으로서의 에세이 “정기용을 취재하면서 그의 말을 정리해 놓은 표지에 ‘DAYS’라고 적혀 있는 주황색 노트가 있었다. 이 노트에는 완성된 영화에는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었던 정기용의 다른 ‘말’들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영화의 메인 플롯에 포함되지 못했던 다른 플롯의 조각들이 외장하드에 남아 있었다. 다시 살펴보니 어쩌면 영화에 넣지 못했던 그것들이 훨씬 중요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기용은 왜 그렇게 하고 싶은 말이 많았을까. 나는 왜 그 말들을 이리 빼곡히 필사해 두었을까. 그런 생각들이 단초가 되어 이 책을 엮게 되었다. 다큐멘터리 영화 만들기에 처음으로 도전하면서 느꼈던 마음의 갈등들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는 것에 감사함을 느끼며 썼다. 언젠가 이 기억들도 사라질 수 있으니 어서어서 책이라는 형태의 머물 집을 마련해주고 싶었다.” - 서문 (9쪽) 처음으로 다큐멘터리 영화라는 논픽션의 세계에 진입할 결심을 한 정재은 감독. 제목 미정 다큐의 주인공은 정기용 건축가로 정해진다. 마침 생겨난 건축에 대한 관심과 전문가들의 조언를 통해서였다. "필름으로 영화를 배운 마지막 세대"였던 그는 아직 카메라도 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주황색 노트 한 권 달랑 든 채 정기용 선생의 "말"을 기록하는 것으로 '다큐멘터리 영화 만들기'를 시작한다. “나는 나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결코 만들 수 없을 것이다. 심지어 누군가 나를 따라다니며 다큐멘터리를 만든다고 하면 결코 응하지 못할 것 같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응한다. 그 차이가 뭘까. 정기용을 만나자마자 알 수 있었다. 그가 주인공의 삶을 선택한 사람이라는 것을. 주인공이란 스스로 주인공으로서의 삶을 사는 사람이다. 주인공으로 태어났고 스스로를 주인공으로 여긴다. 언제나 주인공답게 먼저 생각하고 앞서서 행동한다. 그들에게는 간절하게 이루고 싶은 자신만의 사명이 있다. 주인공은 그들에게 닥친 사건의 본질을 누구보다 깊게 알아챈다. 주인공은 자신을 사랑하듯 타인을 사랑한다. 주인공은 사랑받는 것을 기쁘게 받아들이며 그 사랑을 주변에 베푼다. 나는 어떤가. 어디 가면 숨을 구석부터 찾는다.” - 영화로 남겨달라 (12쪽) 영화감독의 눈에 정기용 건축가는 "타고난 주인공"이다. 정기용 선생은 흙건축의 대가이자 무주등나무운동장과 추모의 집 등 무주 공공건축 프로젝트, MBC [책! 책!책! 책을 읽읍시다] '기적의 도서관(순천, 진해, 제주, 서귀포, 정읍, 김해)' 프로젝트와 고 노무현 대통령 사저 '김해 주택' 등으로 한국 건축사에 중요한 궤적을 남긴 건축가다. 촬영 당시 그는 투병 중이었다.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죽음을 앞에 둔 정기용 선생은 평생 건축을 통해 인문학과 예술을 이야기했던 건축가로서 자신의 마지막 말을 세상에 남기고자 했다. ‘통제할 수 없는 한 인간의 삶’이라는 강렬한 ‘서사’를 카메라에 담고, 인터뷰하고, 편집하며 정재은 감독은 예술가로서 자신이 도달하고자 했던 '영화'를 찾아나간다. “영화 안에서 자신의 삶을 보여준 정기용. 그리고 정기용을 둘러싼 타인들의 말과 감정들은 한 인물의 초상을 만들었다. 나 혼자가 아니라 여러 사람이 같이 그린 초상화처럼.” “다큐멘터리 촬영을 하면서 종종 만나게 되는 잘 연출된 장면 같은 현실을 접할 때마다 극영화 감독 출신인 나는 당황한다. 과연 현실은 무엇일까. 다큐멘터리에서 나만의 이야기를 한다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일까. 애초에 현실은 이미 많은 상징을 가진 채 멋대로 존재하고 있지 않은가. 그 현실들을 취사선택한다고 해서 감독의 독자적인 영화가 가능할 수 있을까. 현실이 담고 있는 기호와 의미를 뛰어넘는 것이 불가능하다면 다큐멘터리는 무엇을 보여주어야 하는가.” - 픽션과 논픽션 사이에서 (111쪽) 『같이 그리는 초상화처럼』은 정기용 선생의 건축을 존경하고 사랑했던 이들에게는 선생의 마지막 시간과 "말"을 그리움으로 기록한 회고록이 될 것이다. 영화와 창작을 고민하는 독자에게 이 책은 영화와 예술 창작에 관한 사유가 담긴 흥미로운 교과서이자 '다큐멘터리 워크북’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책에 수록된 15편의 에세이는 [말하는 건축가]의 기획부터 개봉까지의 전 과정이 영화감독의 시선에서 펼쳐진다. 주제와 주인공 선정, 촬영과 플롯, 인터뷰와 대사, 편집, 아카이브 활용, 이야기라는 목적지를 향한 통찰과 함께 피칭, 개봉 후 관객과의 에피소드 등도 생생하게 옮겼다. 책 속에 기록된 정기용 선생을 비롯 다양한 인물들의 "말"은 정재은 감독이 노트, 녹취, 필사와 인용 등을 통해 당시 영화의 재료로서 채집하고 수집한 원재료의 형태로 담겨있다. 그 원재료들은 때때로 길고, 거칠고, 그래서 더욱 영화 속 대사처럼 생생하게 그 인물을 묘사한다. '말'로 이루어지는 것이 영화이고 '문장'으로 쓰여진 것이 책이라면, 책 속 "말"은 '글자'라는 도구를 통해 종이 위에 영화를 옮기려 한 작가의 시도라 할 수 있겠다. 이 책이 한 편의 영화라면 주연은 [말하는 건축가]다. 카메라를 사이에 두고 마주 선 두 예술가 정기용 건축가와 정재은 영화감독이다. 두 예술가가 자신의 생을 바쳐 사랑한 건축과 영화라는 두 예술이 『같이 그리는 초상화처럼』의 주인공이다. 책장을 넘기는 동안 독자는 건축에 인간과 생태를 담으려 헌신한 건축가의 마지막 시간을 함께 하게 된다. 그 시간을 단순한 기록으로 끝내지 않으려 끊임없이 자문하고 집요하게 답을 찾아가는 다큐멘터리스트의 분투를 목격하게 된다. 타인의 삶을 재료로 창작하는 일의 무게, 예술가로서의 윤리, 한편으론 감정적 거리를 유지함으로써까지 지키고자 했던 예술적 가치에 관한 고민에 함께 몰입하게 된다. 한 편의 영화가 된 건축가, 책으로 영화를 기록한 영화감독. 그들이 들려주는 영화, 그리고 영화 너머의 영화 이야기가 『같이 그리는 초상화처럼』에 담겨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