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 검색을 사용해 보세요
검색창 이전화면 이전화면
최근 검색어
인기 검색어

중고도서 8대 교육주장
가격
25,000
28 18,000
YES포인트?
0원
결제혜택
최대 2,500원 적립
판매자
kn3927
판매자 평가 4 32명 평가
중고샵 판매자가 직접 등록/판매하는 상품으로 판매자가 해당 상품과 내용에 모든 책임을 집니다.

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한정판매의 특성상 재고 상황에 따라 품절 가능

중고도서 소개

책소개

목차

일러두기/ⅰ
해 제/ⅲ
서 문/ⅹⅶ

제1장 자학교육론(自學敎育論)/히구치 초이치(口長市) 1
제2장 자동교육론(自動敎育論)/고노 기요마루(河野丸) 23
제3장 자유교육론(自由敎育論)/데즈카 기시에(手塚岸衛) 61
제4장 일체충동개만족론(一切衝動皆滿足論)/지바 메이키치(千葉命吉) 103
제5장 창조교육론(創造敎育論)/이나게 긴시치(毛金七) 163
제6장 동적교육론(動的敎育論)/오이카와 헤이지(及川平治) 207
제7장 전인교육론(全人敎育論)/오바라 구니요시(小原國芳) 255
제8장 문예교육론(文藝敎育論)/가타가미 노부루(片上伸) 311

찾아보기/329

저자 소개4

오바라 구니요시

 
일본 가고시마현 출신. 히로시마(廣島) 고등사범학교, 교토(京都) 제국대학 철학과 졸업, 가가와(香川) 사범학교 교사,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 부속소학교 행정실장, 세이조(成城) 고등학교 교장, 다마카와학원(玉川學園) 설립자. <저서> 『전인교육론(全人敎育論)』, 『사도(師道)』, 『교육일로(敎育一路)』 등

한용진

 
고려대학교 교육학 박사, 나고야대학 및 도호쿠대학 방문교수. 전) 한국교육사학회 회장, 한국일본교육학회 회장. 현) 고려대학교 교육학과 교수. <저서 및 역서> 『근대 이후 일본의 교육』, 『근대 한국 고등교육 연구』, 『기초주의의 세계』(공편),『한국 근대대학의 성립과 전개』(역), 『일본의 교육인간학』(공역) 외 다수

신현정

 
한국외국어대학교 일본어학과를 졸업하고, 고려대학교 교육학과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진로교육전문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한국일본교육학회 총무이사와 한국생활상담협회 대외협력위원장을 맡고 있다. 일본 가나가와치과대학 교수를 거쳐 현재는 중부대학교 교양학부 교수로 재직중이다. 저서로는 『일본어 능력시험의 달인이 되는 법』, 『간바레 일본어 능력시험』, 『파트별 파워풀 일본어 단어장』등이 있으며, 역서로는 『기적의 대화-국제교양대학은 어떻게 인재를 키워내는가』, 『선생이 부서져간다』, 『친구지옥』, 『샐러드 기념일』, 『F4 선언일기(성공하는 사람들의 영업습관)』등이 있다.

조문숙

 
고려대학교 대학원 교육학과 박사과정 수료 니혼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하고, 일본 및 근대의 교육사를 연구하고 있다. 주요 논저로 『근대한국 교육 개념의 변용』(공저, 학지사, 2020) 등이 있다.

품목정보

발행일
2023년 01월 31일
판형
양장 ?
쪽수, 무게, 크기
372쪽 | 582g | 153*224*23mm
ISBN13
9791130310107

책 속으로

출전: 오바라 구니요시(小原國芳) 외(1976). 『8대 교육주장(八大敎育主張)』, 다마가와대학출판부(玉川大學出版部).

1. 이 책은 아마코 도도무(尼子止: ~1937)가 편찬하고 대일본학술협회 발행의 『八大敎育主張』(1922.01.08.)을 교정·복각한 것이다.
2. 다만 각 편의 배열은 1921년 8월 『8대교육주장(八大敎育主張)』대회에서 원래 강연하였던 순서로 바꾸었다.
3. 한자는 당용(當用) 한자를 사용하였다. 원문에서 확실하게 오류라고 생각되는 것은 정정(訂正)하였다. 또한 구두점이 명백하게 결락(缺落)되어 있는 내용에 한해 이를 보완하였다.
4. 서문과 각 장의 가장 마지막에는 각기 ‘해설’을 추가하였으므로 참고하기 바란다.

복각(復刻)에 즈음하여
오바라 구니요시(小原國芳)
다마가와대학 총장

제1차 세계대전은 세계의 교육에 큰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전쟁에서 패한 독일은 곧바로 바이마르에 국민대학을 설립하였다. 각지에서 모여든 800명의 국민 대표는 “무엇으로 국가를 부흥시킬 것인가”를 토의하였다. “그것은 교육”이라고 만장일치 되었고, “어떠한 교육인가”에 대하여는 “그것은 실험학교(Versuchsshule)”라고 정해졌다. 일본에서는 이를 ‘시행교육(試行敎育)’으로 번역하였다. 이해도 못하면서 기계적으로 외우는 주입식 방식이 아니라 시도하고, 행해보고, 직접 해보고, 부지런히 움직여보는 것이다. 우리들이 몇 년 동안 주장하여 온 노작교육이며, 창조교육이다.

일본에서도 커다란 반향이 일어났다. 1922년(大正11) 사와야나기 마사타로(澤柳政太郞: 1865~1927) 박사는 몇몇 학자들을 이끌고 1년간 구미의 신교육 시찰에 나섰다. (이 같은) 『세계교육행각(世界敎育行脚)』은 일본교육에 큰 자극을 주었다. 이보다 앞서 세이조(成城) 소학교의 신교육은 이미 시작되었었다. 이어서 다마가와학원(玉川學園)을 비롯하여, 아카시(明石) 부속소학교, 지유학원(自由學園), 나가노(長野) 부속소학교, 지바(千葉) 부속소학교, 나라(奈良)여자고등사범 부속소학교, 오차노미즈(お茶の水) 부속소학교… 지방에서도 걷잡을 수 없는 불길처럼 일제히 확산되었다. 내가 확인한 것만도 160여 교. 독일의 ‘질풍노도(疾風怒濤) 시대’ 그대로였다. 특히 도야마현(富山縣)의 학교, 이키(壹岐) 섬의 모든 학교가, 오무다시(大牟田市)의 모든 학교가! 엄청난 상황이었다.

멀게는 루소와 페스탈로치, 프뢰벨, 몬테소리로부터 배운 것도 있었다. 하지만 실제로 이 같이 된 직접적 원인은 ‘8대 교육주장대회’였으며, ‘대일본학술협회’의 주간(主幹)을 맡았던 아마코 도도무(尼子止)의 계획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21년(大正10) 8월 1일부터 8일간. 대회는 도쿄고등사범학교 강당에서 개최되었다. 모여든 사람들은 대략 4,000여 명을 넘었을 것이다. 대강당을 꽉 채우고 복도 끝까지, 그리고 창문에도 다닥다닥. 열광 그 자체였다. 참으로 장관이었다.

생각해 보면 8명의 강사가 훌륭하기도 했지만, 다이쇼 시대의 교사들은 참으로 진지했다. 특히 초등학교 교사들은! 모두 자기 돈을 내고 전국에서 모여든 것이다. 일본 교육의 대들보였으리라. 윗사람이나 밖으로부터의 압박이 심했음에도, 안으로부터 아래로부터 불타올랐던 것이다. 오늘날 교육은 위로부터 외부로부터 강요된 것으로, 안에서는 잠자고 있다. 완전히 정반대이다.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숭고한 일이었다. 이것을 전후, 이른바 ‘진보학자’들과 일부 교육학자들은 곡해(曲解)하고 잘못 해석하여 부정하려 하고 있다. 진리를 더럽히고 그르칠까 염려되는 바이다. 참으로 슬픈 일이다.

게다가 ‘8대 교육’의 용사(勇士)들 대부분은 이미 세상을 떠났고, 살아있는 사람은 이제 나 혼자뿐이다. 이들을 위해서도, 조문을 하는 의미에서도 반드시 ‘복각판(復刻板)’을 간행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우수한 교육학자들로부터 훌륭한 해설을 받을 수 있게 된 것은 대단한 행운이다.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부디 왕년(往年)의 그 8대 용사들의, 아니 전국의 초등학교 교사들의 그러한 넘치는 의기(意氣) 와 신중함, 진실함을 반 세기가 지난 오늘날, 지금의 젊은이들에게 연찬(硏鑽)하도록 하여, 참된 교육, 본래의 교육이 이 나라에, 아니 전 세계에서 재생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8대 교육주장』에 관하여 약간의 비판과 반성을 적어본다.

1. 먼저 ‘8’이라고 하는 숫자. 이는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명예교수인 하라다 미노루(原田實) 박사가 말한 바와 같이, 학문적으로는 전혀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7·5·3’이라고 하여 어린아이의 생후 7년·5년·3년을 기념하고 있지만, 이 밖에도 ‘8’이라든가 ‘10’, ‘12’ 등도 모두 기분 좋은 숫자라고 생각한다. ‘사규칠칙(士規七則)’이라든가, 모세의 ‘십계(十戒)’, 쇼토쿠(聖德) 태자의 ‘17개조 헌법’ 등은 편의상 붙인 것이다. 보이 스카우트의 헌장 12개조. 다마가와(玉川)의 교육신조도 12개조이다.

2. ‘여덟 명’의 문제. 인선에는 커다란 문제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가장 마지막을 성황리에 마치기 위해서였는지, 나에게는 “부디 여덟 번째”를 맡아달라고 하였다. 과분하지만 (이를) ‘수락한’ 것은 무엇보다도 영광이었다. 나라여자고등사범학교의 부속초등학교 주사(主事)인 기노시타 다케지(木下竹次: 1872~1946) 선생은 서일본(西日本)에서 일본 신교육의 중심인물이었다. 오차노미즈 여자고등사범학교 부속소학교의 기타자와 다네카즈(北澤種一: 1880~1931)도 ‘작업교육’으로 뛰어난 실적을 갖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이 참여하지 않았던 것은 매우 큰 손실이었다. 반드시 ‘대일본학술협회’의 아마코 주간이 부탁을 드렸을 것으로 믿는다. 다만 관립학교의 경우, 높은 지위와 많은 나이 등등, 부득이한 이유로 거절하게 된 것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기노시타 선생은 나의 가고시마 시절 은사셨다. 설마 그럴 리는 없겠지만 혹시 마음속에 ‘제자나 민간의 아마추어들과 함께’라고 생각하여, 거절하셨던 것은 아니었을까. 기타자와도 어엿한 관립학교 교수로, 천하의 핵심 주사 4명에 속하는 분이셨기에…

그런데 또 다른 한 명은 나가노현 사범학교 부속초등학교 주사인 스기사키 요(杉崎瑢) 선생을 꼭 포함시켰어야 했다. 캘리포니아대학에서, 스트래턴(George M. Stratton: 1865~1957) 교수 밑에서 실험심리학을 공부하고, 버크(Thomas Buck: 1881~1969) 교수에게 돌턴 플랜(Dalton Plan)의 파커스트(Helen Parkhurst: 1887~1973) 여사 및 위넷카 플랜(Winnetka Plan)의 워쉬번(Carleton W. Washburne: 1889~1968) 박사와 함께 신교육의 지도를 받았다. 귀국 후에는 나가노현에서 훌륭한 실적을 올렸던 인물이다. 앞에서 언급한 세 사람(기노시타 다케지, 기타자와 다네카즈, 스기사키 요)은 중요한 인물들이었기에, 아카시의 오이카와 헤이지(及川平治), 지바의 데즈카 기시에(手塚岸衛), 그리고 나를 포함한 3명을 추가하여 ‘6대 교육’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와세다대학 교수 이나게 긴시치(稻毛金七)는 1,000쪽의 대저서 『창조교육론』이 있다. 그렇지만 실험학교는 갖고 있지 않았다. 지바 메이키치(千葉明吉)의 ‘일체충동개만족교육(一切衝動皆滿足敎育)’은 명칭 때문에 매우 오해를 받은 것 같다. 쾌남아로 여기저기에서 박해도 받았던 듯하다. 점잖게 ‘자아실현의 교육’이라 하거나, 윤리학의 결론으로 최고 정점의 교육이라고 하였다면 무리없이 진전은 되었겠지만, 그래도 어감의 재미있는 맛은 반감되었을 것이다.

나도 이름을 어떻게 붙일까 고심하였다. 강연을 의뢰받고부터 서너달 동안 무엇으로 할까 깊이 고민하였다. 8월 초에는 동인(同人) 몇 명과 신교육과 관계가 좋은 이키(壹岐) 섬에 갔었다. 드디어 도쿄의 강연회에 참가하기 위해 출발해야 할 마지막 날 아침이 밝았다. 실은 전날 밤, 꿈에서까지 나타났던 탓인지 눈을 뜨자마자 순간적으로 떠오른 제목이 ‘전인교육론(全人敎育論)’이었다.
원고지 한 장을 뜯어 그 뒷면에 상하 2단으로 선을 긋고, 순간적으로 떠오른 몇 가지 제목을 연필로 꼼꼼하게 적었다. “이것으로 됐다. 안심이다”라고 안도하고, 목욕탕에 들어가 냉수욕을 하고 수염을 깎았다. 상쾌한 기분으로 방에 돌아와 보니, 뭔가 중요한 메모 용지가 보이지 않는다. 놀라서 일하는 사람에게 물어보니, “바람에 종이 나부랭이가 날아 다니기에, 청소하다 부엌 아궁이에 넣어버렸습니다.”라고 한다. 큰일이다. 부엌에 뛰어들어가 부뚜막 화덕 뚜껑을 열고 손을 집어넣어보니, 한 장의 종이가 잡힌다. 끄집어내서 보니, 다행히도 가장자리만 불에 탔을 뿐 내용은 건재하였다. 요행으로 남은 이 종이가 이제는 다마가와 교육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 후 18톤의 작은 배를 빌려 현해탄을 건너, 하카타(博多)에서 기차로 이동하여 산요선(山陽線), 도카이도선(東海道線)으로 갈아타고, 도쿄에 있는 요요기(代代木)의 집에 도착하고 보니, 집사람의 출산일이 임박해 있었다. 밤이 되자 드디어 산통이 시작되었다. 하룻밤 간병을 하고, 다음날 아침 일찌감치 우시코메(牛)의 요시오카병원(吉岡病院)에 갔다. 그리고 나는 오쓰카(大塚)에 있는 도쿄고등사범학교로 갔다. 그리하여 사자후(獅子吼). 우레와 같은 박수. 66년간의 강연 중에서 최고였다! 땀에 흠뻑 젖고. 방으로 돌아와 보니, 가장 먼저 악수해 준 사람은 히로시마 선배인 고시카와 야사카(越川彌榮: 1882~1965) 사범학교장! 참으로 행복했다.

정리하고 도쿄역으로 갔다. 밤차로 교토를 거쳐 마이즈루(舞鶴)로. 다음 날 아침, 한참 강연 중인데 전보가 왔다. “남아(男兒) 태어남. 모자 건강”이라고. 그 아이가 데쓰로(哲郞)이다. ‘전인교육’이라 이름 붙인 날과 생일이 같다는 것은 참으로 기적이다.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에 의한, 깊고 깊은 은혜로, 특별히 감사의 마음을 금할 수 없다. 부모 자식 수 세대! 동인들 수 천 명, 제자들 수 만 명이 모두 뜻을 같이 하여 ‘전인교육’을 더욱 더 높이고, 넓히고, 바르게 하고 힘써 키워낼 것을 기원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정도만이 아니다! 영원히 일본 교육 전체가! 나아가 세계 교육 전체가! (주기도문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처럼 간절히 기도하는 바이다.

---「서문」중에서

출판사 리뷰

1. 『8대 교육주장』의 서지학적 · 연구사적 접근

‘8대 교육주장’이라는 용어는 1921년(大正10) 대일본학술협회(大日本學術協會) 주최로 도쿄고등사범학교(東京高等師範學校: 현 쓰쿠바대학) 강당에서 개최된「교육학술연구대회」(일명 8대 교육주장 강연회)에서 비롯된 것이다. 1921년 8월 1일부터 8일까지 8일간 당시의 교육계를 대표하는 8명의 강연자가 하루에 한명씩 자신의 교육론을 발표하였다. 행사가 진행된 도쿄고등사범학교 강당은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연일 2,000명이 넘는 청중이 모여들어 보기 드문 대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하시모토 미호(橋本美保) 등은 “이 강습회가 성공한 것은 도쿄고등사범학교 교수인 오세 진타로(大甚太: 1865~1944), 도쿄제국대학 교수인 요시다 구마지(吉田熊次: 1874~1964) 등이 참석한 면도 있으며 강습회의 형식도 강연 후 질문을 받는 등 자유롭고 열정적인 분위기 덕분”이었다고 하였다. 강연 내용은 행사 3개월 뒤인 1921년 11월에 대일본학술협회의 주간(主幹)을 맡았던 아마코 도도무(尼子止)가 정리 · 편집하여 『8대 교육주장』으로 간행하였고, 이를 1976년에 오바라 구니요시(小原芳)가 다시 복각본으로 간행한 것이다. 다만 아마코가 편집한 1922년의 책자와 오바라가 복각본으로 발간한 1976년판의 목차는 다음 〈표 1〉과 같이 그 순서가 달라졌다.

오바라는 1976년 간행본을 통해 강연회의 발표 순서대로 정리하였다고 하지만, 1922년 간행본에서 아마코 간사가 어떤 이유로 이러한 순서로 정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다만 발표자의 출생연도로 본다면 자학교육론을 주창한 히구치 초이치(口長市: 1871~1945)가 가장 빠르고, 그 다음으로 자동교육론의 고노 기요마루(河野丸: 1873~1942)이지만, 자유교육론의 데즈카 기시에(手塚岸衛: 1880~1936)보다 동적교육론을 주창한 오이카와 헤이지(及川平治: 1875~1939)가 연배가 더 위이고, 그 다음으로 마지막 장의 문예교육론을 주창한 가타가미 노부루(片上伸: 1884~1928)에 이어 일체충동개만족론(一切衝動皆滿足論)의 지바 메이키치(千葉命吉: 1887~1959)와 창조교육론의 이나게 긴시치(毛金七: 1887~1946), 그리고 전인교육론의 오바라 구니요시(小原芳: 1887~1977)는 모두 1887년 동년배이다. 어쩌면 연배와 함께 독자들의 이해를 높이기 위하여 자학 · 자동 · 자유교육론과 같이 유사한 제목의 교육론을 앞으로 모아놓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8대 교육주장의 이론적 배경과 관련하여 시즈오카현(岡)의 하마마쓰니시고등학교(浜松西高等學校) 초대교장을 지냈던 영어학자 마쓰다 요소노스케(松田與之助)는 교육학술계(敎育學術界)에서 간행된 『8대 교육주장 논란호(八大敎育主張論難號)』를 읽고 각각의 교육주장들을 〈표 2〉와 같이 정리하였다. 이러한 각 이론의 논거나 철학적 배경이 중요한 것은 각 교육론의 명칭만으로는 그 개념적 이해가 어렵기 때문이다. 특히 각각의 이론이 서구의 일제식 학교제도에 근거한 근대교육과는 상당히 다른 신교육을 주장하고 있었기에, 기존 방식에 익숙해진 교사들을 비롯하여 일반인들에게는 상당히 낯선 것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개념적 오해나 불명확성으로 이러한 주장들이 당대 일본 사회에서도 상당한 논란을 불러일으킨 것으로 보인다.

국내에서 일본의 8대 교육주장과 관련된 연구물로 가장 먼저 발표된 것은 아마도 김정환에 의해 소개된 오바라 구니요시의 전인교육론이라 생각된다. 김정환은 『사학』 29호(1984)에 세계의 명문 사학(일본편)으로 “다마가와 가꾸엥(玉川學園)-전인교육의 도량(道場), 전인교육론의 산실(産室)”이라는 글을 실었고, 1987년에는 한국교육학회 교육사연구회(현 한국교육사학회) 편으로 간행된 『교육사상가평전』(2. 동양편)에 “오바라 구니요시”를 소개한 바가 있다. 이미 단행본으로 『전인교육론』(세영사, 1983)을 집필한 김정환은 오바라 구니요시뿐 아니라 페스탈로치의 교육론에서도 전인교육론을 찾아내며 자신의 교육이론으로 삼았다. 특히 산업화 과정에서 인간성 상실을 우려하던 시대적 분위기는 1980년대 이래 전인교육이라는 표현을 단지 오바라 구니요시의 교육론에 한정하지 않고, 온전한 인간을 길러내는 바람직한 교육을 상징하는 용어로 사용하게 되었다.

1990년을 전후하여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의 ‘참교육’이 사회적으로 주목을 받게 되고, 대안학교와 대안교육 프로그램들이 주목을 받으면서 우리나라에도 기존의 교육과는 다른 다양한 교육논의가 활발히 전개되었지만 당시에는 1920년대 일본의 신교육운동에 주목한 국내 연구자나 연구논문은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한국일본학회 편으로 간행된 『일본교육의 이해』(시사일본어사, 1998) 제1장 일본교육의 이해(한기언 집필)에는 “외래 교육방법에 힌트를 얻어 다년간의 경험을 살려 제창한 신교육설(8대 교육주장)도 나왔는데, 히구치 초이치(口長市)의 자학교육론, 고노 기요마루(河野丸)의 자동교육론, 데즈카 기시에(手塚岸衛)의 자유교육론, 이나게 긴시치(毛金七)의 창조교육론, 지바 메이키치(千葉命吉)의 일체충동개만족론, 오이카와 헤이지(及川平治)의 동적교육론, 오바라 구니요시(小原芳)의 전인교육론, 가타가미 노부루(片上伸)의 문예교육론이 그것이다.”라고 소개한 바가 있다.

국내에서 이러한 8대 교육주장의 주창자와 해당 이론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2014년 이후이다. 즉 이나게 긴시치의 창조교육론을 비롯하여, 데즈카 기시에의 자유교육론, 오바라 구니요시의 전인교육론, 히구치 초이치의 자학교육론, 지바 메이키치의 일체충동개만족론 등의 연구가 비교적 최근에 이루어졌으며, 자동교육론이나 동적교육론, 문예교육론 등은 아직 국내에서는 제대로 된 연구물을 찾아보기 어렵다.

2. 다이쇼기(大正期)의 교육상황과 ‘8대 교육주장’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전반에 걸쳐 유럽과 미국 등 서구의 교육사를 보면 매우 다양한 교육적 실험활동들이 활발히 전개되며, 그 토대가 되는 교육이론들이 고안되었다. 근대적 학문으로서 과학적 교육학의 출발을 19세기 전반에 활약한 헤르바르트(J.H. Herbart: 1776~1841)에게서 찾고 있는데 이 밖에도, 19세기 후반에는 나토르프(P.G. Natorp: 1854~1924)의 비판적 교육학, 베르게만(P. Bergemann: 1862~1946)의 실증적 교육학, 듀이(J. Dewey: 1859~1952)의 실용주의적 교육학 등 다양한 교육학 이론이 만들어졌다. 특히 듀이는 시카고대학에 실험학교를 설립하였고, 스웨덴의 엘렌 케이(Ellen K.S. Key: 1849~1926)는 20세기를 시작하며 『어린이의 세기』(1900)를 간행하였으며, 교육분야에서 새로운 전환점을 예고하였다. 이러한 흐름속에서 20세기 초 세계 각지에서는 기존의 주입식 교육과는 다른 교육방식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미국이나 영국, 프랑스 등은 이를 ‘신교육(New Education) 운동’이라 하였고, 독일에서는 ‘개혁교육학 운동’이라 불렀다. 독일의 교육학계는 ‘어린이로부터의 교육학’, ‘청소년운동’, ‘예술교육운동’, ‘전원기숙사학교운동’, ‘노동학교운동’, ‘사회교육학운동’, ‘국민교육운동’, ‘통합학교운동’, ‘발도르프 교육학’, ‘몬테소리 교육학’ 등을 모두 개혁교육학 운동 범주에서 다루고 있다.

정치사적으로 일본은 메이지(明治) 초기인 1880년대의 자유민권운동이 1889년의 제국헌법 반포로 위축되었다가, 다이쇼기(大正期: 1912~1926)를 전후하여 민중의 정치적 요구가 다시금 높아지게 되었다. 하지만 다이쇼기는 제1차 세계대전 후 러시아혁명, 쌀 파동에 결부되며 지주층의 사회적 통제력에 저항하는 소작쟁의가 빈번했던 시기이기도 하였다. 지주들의 지배질서를 근간으로 하는 공동체적 분배기구, 곧 온정주의에 입각한 특권의식이 더 이상 지탱될 수 없었던 시기로 현(縣)의 관료와 지방 당국이 손을 잡고 ‘관민공동’의 자치개량방침을 내걸었다. 이른바 ‘관치’의 말단조직부터 ‘입헌국가의 유기적 부분’으로 바꾸는 것이 국가적 과제였다. 내무대신 고토 신페이(後藤新平: 1857~1929)를 중심으로 ‘자치’정신이 강조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대는 ‘전문(專門) 분화’와 ‘대중화’가 진전하여 ‘교육개조’를 지향하던 시대였다. 따라서 교육적으로는 과거의 ‘신민교육(臣民敎育)’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획일적이고 교사중심의 주입식 교수방식에서 벗어나 아동의 관심이나 감동을 중시하며, 보다 자유롭고 생동감 넘치는 교육체험을 강조하게 되었는데, 이를 ‘다이쇼자유교육운동(大正自由敎育運動)’, 혹은 ‘다이쇼신교육(大正新敎育)’이라 불렀다. 당시까지 일본은 메이지시대의 국가주의적 사고방식을 토대로 체제 유지의 가치를 어린이에게 주입시키기 위하여 교육내용을 획일적으로 통제하였기에 교육은 형식화되고 형해화(形骸化)되어 있었다.

이 시기 일본에서는 의무취학이 안정되면서 대다수의 어린이들이 심상소학교 4년을 마치게 되었고, 생애진로를 고려한다면 고등소학교 2년도 끝내는 것이 유익하다는 것을 사람들이 깨닫게 되면서 교육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게 되었다. 모리카와 데루미치(森川輝紀)는 “제1차 세계대전 후, 소학교는 근면 · 정직 등의 통속적인 도덕이나 충효라는 ‘국가도덕의 교화의 장(場)’에서 사회적 진로선택과 관련된 ‘자격 부여의 장’으로 그 중심을 옮기게 되었다”고 하여, 전통적인 보수적 교육보다 능력주의에 입각한 후천적 학력(學歷)이 점차 중시되는 사회로 변하였음을 밝히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흐름을 바탕으로 일본에서 신교육운동은 주로 제1차 세계대전 이후 1920년대에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1912년부터 1926년까지 일본의 연호였던 다이쇼(大正) 시기와 상당 부분 겹쳐진다. 하지만 1930년대 세계적인 경제대공황이 시작되면서 일본의 신교육운동도 미국의 진보주의 교육운동처럼 아동중심주의 교육방법은 상당히 위축되고 말았다. 그런 의미에서 일본에서의 신교육운동은 특별히 ‘다이쇼신교육’ 혹은 ‘다이쇼자유교육’이라 부르고 있다.

나카노 아키라(中野光)는 “다이쇼 자유교육의 역사적 성격에 관하여 거시적으로는 제국주의적 발전단계에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이데올로기로 뒷받침되었다는 지적은 타당하지만, 이러한 지적만을 결론으로 하는 연구로는 오늘날 그 의미를 찾기에 부족하다”고 하였다. 즉 나카노는 “신교육을 메이지 절대주의 교육의 부르주아적 수정 지향이라는 입장과 함께 보다 자유주의적인 비판에 의해 민주주의화로 나아갈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는 에비하라 하루요시(海老原治善)의 지적이 있었음에도 어째서 1930년대 일본의 신교육은 민주주의적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파시즘 교육과 연계되었는가라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야모토 겐이치로(宮本健市)는 21세기에 들어와 ‘신교육’을 보는 현대인의 시각은 이전처럼 낙관적이지는 않다고 하였다. 즉 신교육에 관한 연구는 신교육운동을 몸소 담당하였던 사람들이 모두 세상을 떠났기에 이제는 완전히 역사의 대상이 되었다는 것이다. 어떤 면에서 20세기 전반의 거의 모든 교육개혁운동은 신교육의 이념과 연계되지 않는 것이 없다고 보며, 19세기 말부터 20세기에 걸쳐 진행된 교육개혁의 이념과 실천을 교육사상사, 교육사회사, 교육방법사 및 교과교육사, 그리고 내셔널리즘과 신교육이라는 4가지 관점에서 다음과 같이 신교육의 연구사를 정리하고 있다.

먼저 전체 신교육 연구물의 절반을 넘는 교육사상사 연구가 가장 일반적인데, 듀이(John Dewey: 1859~1952)와 킬패트릭(W. H. Kilpatrick: 1871~1965) 등 프래그머티즘과 진보주의 교육사상가들을 중심으로 진행된 연구이다. 둘째로 교육사회사적 연구는 독일에서의 어린이 · 청년을 주체로 보며 그들의 능동성을 육성하는 관점에서 신교육을 낙관적으로 보는 연구들이지만, 전원학사형 기숙학교에서 질서를 유지하는데 나타나는 ‘보호’와 ‘포위(包圍)’의 이중성을 언급하는 연구들이 있다고 보았다. 셋째로 교육방법사 및 교과교육사는 듀이나 몬테소리의 실험학교 사례와 같이 교재론, 교육과정론, 특수교육, 교사교육론 등 다양한 관점에서 연구되고 있다. 특히 노작교육이나 예술교육 등도 이에 포함된다. 넷째의 내셔널리즘과 관련하여 신교육을 보는 연구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일으키는데 신교육이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에 주목하고 있다. 이는 단지 독일만의 문제가 아니라 심지어 미국에서도 개인주의적 세계관을 벗어나 사회적 유대 및 협동의식을 창출하는 과정에서 국민국가 통합 이데올로기로 신교육이 작용하였다는 관점이다. 우리는 역사적 사실을 통해 이 이데올로기가 일본이 일으킨 대동아전쟁이라는 비극으로 이어졌음을 확인한바 있다.

일본에서 다이쇼신교육에 대한 대표적인 연구자로는 메이지 · 다이쇼 시대를 살았던 후지와라 기요조(藤原喜代藏, 1943, 1883~1959)를 필두로 오바라 구니요시(小原國芳, 1976, 1887~1977), 쇼와(昭和) 시대에 태어난 나카노 아키라(中野光, 1998, 1929~현재), 그리고 전후 세대인 모리카와 데루미치(森川輝紀, 1997, 1945~현재)로 꾸준히 이어져 왔다. 최근에는 하시모토 미호(橋本美保: 1963~현재)와 다나카 사토시(田中智志: 1958~현재)의 『다이쇼신교육 사상: 생명의 약동(大正新敎育の思想: 生命の躍動)』(2015)이 주목할 만하다. 이 책은 기존 연구들이 듀이나 킬패트릭과 같은 진보주의 교육사상은 여러 차례 논해왔지만 정작 듀이 교육사상의 근간인 ‘자연사상’의 깊이는 등한시해 온 것이 아닌가라고 묻는다. 즉, 다이쇼신교육의 사상적 맥락을 모르더라도 거기서 강조되는 활동, 생활, 자유, 경험, 협동과 같은 말들이 사람들에게 큰 호소력을 발휘해 왔기에 굳이 사상사의 일부로 다이쇼신교육을 볼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다. 당연히 교육방법에만 치중하는 접근방식의 문제점은 인간 사회의 역동성과 다면성 그리고 그 의의를 제대로 평가하지 못할 수 있다. 특히 하시모토는 2016년에 『문헌자료집성 다이쇼신교육(文資料集成 大正新育)』(전6권)을 편찬하였다. 이 책들은 제1기 연구과제로 ‘8대 교육주장과 공립학교의 신교육’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다이쇼신교육 역시 넓은 의미에서 ‘신교육운동’에 속하지만, 굳이 ‘다이쇼신교육’ 혹은 ‘다이쇼자유교육(운동)’이라고 하는 배경에는 ‘교육운동’이라는 용어에 대한 상반된 입장이 작용하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먼저 1930년대 프롤레타리아 교육운동에 주목하여 『신흥교육운동의 연구(新興敎育運動の硏究)』를 쓴 가키누마 하지메(沼肇)는 “교육운동이란 권력이 지지하는 교육이념과는 다른 교육이념을, 민간의 사회적인 힘이 지지하여 다양한 수단으로 그 실현을 시도하는 것”이라는 입장이 있다. 둘째로는 가이고 도키오미(海後宗臣)의 ‘교육운동’ 개념인 “정부의 문교 관계정책 및 행정에 대해 작용하는 반관(半官) 내지 반관(反官) 대중운동”이라는 관점이 있다. 전자는 정부의 교육정책과 전면적으로 구분되는 교육이념으로 민간의 측면을 강조한 데 반해, 후자는 반관이라는 용어를 통해 정부의 교육정책에 대하여 상반되는 대중운동뿐만 아니라 절반 정도는 관의 작용을 수용하는 개념도 포함하여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1920년대 8대 교육주장은 후자의 입장에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실제로 다치카와 마사요(立川正世, 2018)는 『다이쇼의 교육적 상상력(大正の敎育的想像力)』이라는 책에서 ‘다이쇼신교육’을 다음과 같이 세 영역으로 구분하고 있다. 첫째 영역은 공립소학교에서의 ‘교육개혁’이다. 이를 담당하였던 교사들은 교육학자로부터 자립하여 교육현장에서 승부를 걸겠다는 기개를 지닌 ‘교육실천가’로 불리게 되었다. 둘째 영역은 ‘새로운 학교’의 창설이다. 이상적인 교육을 실현하기 위해 설립된 학교로서 세이조학원(成城學園), 지유학원(自由學園), 다마카와학원(玉川學園), 지도노무라소학교(兒童の村小學校) 등이 있다. 셋째 영역이 ‘예술교육’이다. 스즈키 미에키치(鈴木三重吉)가 창간한 잡지 『아카이토리(赤い鳥)』에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芥川龍之介), 아리시마 다케오(有島武郞), 니이미 난키치(新美南吉), 기타하라 하쿠슈(北原白秋), 사이조 야소(西條八十) 등 전도유망한 멤버들이 기고하고, 야마모토 가나에(山本鼎)는 자유화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렇게 보면 1920년대 다이쇼신교육은 교육개혁과 이러한 교육개혁을 실행할 새로운 학교의 설립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는 예술교육이라는 측면에서 문화, 생명, 자유, 사랑과 같은 보편적 가치에 기반한 아동 · 활동 · 경험 중심의 교육론을 활발히 전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오바라 구니요시(1930)의 『일본의 신학교(日本の新學校)』는 제1편 신학교론, 제2편 공립학교, 제3편 사립학교, 제4편 특수학교, 제5편 결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제1편 신학교론에서 신학교 흥망사(1장)와 신교육의 곤란(2장), 신학교의 의의(3장) 등을 다루고 있다. 여기서 언급된 학교는 공립학교(14교), 사립학교(8교), 특수학교(10교) 등으로 당시 신교육운동이 단지 사립학교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공립학교가 오히려 더 많이 참여하였음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결국 일본에서 1920년을 전후하여 어린이를 둘러싼 교육의 세계에 큰 변화가 나타나게 되는데 이를 대표하는 사건이 바로 1921년 8월 도쿄고등사범학교에서 개최된 ‘8대 교육주장’ 강습회였으며, 식민통치하의 우리나라도 1919년의 3.1독립운동 이후 1920년대에는 이른바 문화통치기를 맞게 되는데, 이 역시 일본 다이쇼기의 사회적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고 하겠다.
역자 대표 한용진

상품정보안내

  •  주문 전 중고상품의 정확한 상태 및 재고 문의는 [판매자에게 문의하기]를 통해 문의해 주세요.
  •  주문완료 후 중고상품의 취소 및 반품은 판매자와 별도 협의 후 진행 가능합니다. 마이페이지 > 주문내역 > 주문상세 > 판매자 정보보기 > 연락처로 문의해 주세요.

부적합 상품 신고하기

신고하기
  •  구매에 부적합한 상품은 신고해주세요.
  •  구매하신 상품의 상태, 배송, 취소 및 반품 문의는 판매자 묻고 답하기를 이용해주세요.
  •  상품정보 부정확(카테고리 오등록/상품오등록/상품정보 오등록/기타 허위등록) 부적합 상품(청소년 유해물품/기타 법규위반 상품)
  •  전자상거래에 어긋나는 판매사례: 직거래 유도
18,000
1 18,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