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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목차

어머니를 그리며 꽃을 그리며
작가의 말

꽃과 나무에게 말 걸기
꽃과 나무에게 말 걸기 │ 돌이켜보니 자연이 한 일은 다 옳았다
다 지나간다 │ 만추 │ 꽃 출석부 1 │ 꽃 출석부 2
시작과 종말 │ 호미 예찬 │ 흙길 예찬 │ 산이여 나무여
접시꽃 그대 │ 입시추위 │ 두 친구 │ 우리가 서로에게 구인이 된다면

그리운 침묵
내 생애에서 가장 긴 8월 │ 그리운 침묵 │ 도대체 난 어떤 인간일까
좋은 일 하기의 어려움 │야무진 꿈 │ 운수 안 좋은 날 │ 냉동 고구마
노망이려니 하고 듣소 │ 말의 힘 │ 내가 넘은 38선
한심한 피서법 │ 상투 튼 진보 │ 공중에 붕 뜬 길 │ 초여름 망필(妄筆)
딸의 아빠, 아들의 엄마 │ 멈출 수는 없네 │ 감개무량

그가 나를 돌아보았네
그는 누구인가 │ 음식 이야기 │ 내 소설 속의 식민지시대 │ 그가 나를 돌아보았네

딸에게 보내는 편지
내가 문을 열어주마 │ 우리 엄마의 초상 │ 엄마의 마지막 유머
평범한 기인 │ 중신아비 │ 복 많은 사람 │ 김상옥 선생님을 기리며
이문구 선생을 보내며 │ 딸에게 보내는 편지

저자 소개

박완서
1931년 경기도 개풍군에서 태어났다. 1950년 서울대 국문과에 입학했으나 한국전쟁으로 중퇴하였다. 1970년 마흔이 되던 해에 『여성동아』 장편소설 공모에 『나목』이 당선되어 등단하였다. 장편소설로 『휘청거리는 오후』 『도시의 흉년』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 『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아주 오래된 농담』 『그 남자네 집』 등이 있고, 소설집으로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엄마의 말뚝』 『저문 날의 삽화』 『너무도 쓸쓸한 당신』 『노란집』 『꿈을 찍는 사진사』 등이 있으며, 산문집으로는 『꼴찌에게 보내는 갈채』 『어른노릇 사람노릇』 『두부』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 『모독』 『빈방』 등이 있다. 한국문학작가상, 이상문학상, 대한민국문학상, 이산문학상, 현대문학상, 동인문학상 등을 수상하였다. 2011년 1월 22일 80세에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림 호원숙
1954년에 서울에서 태어나 경기여고와 서울대학교 국어교육과를 나왔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부터 원고를 배달하면서 어머니 박완서의 글쓰기를 다방면으로 지원했던 맏딸이자 작업의 동반자이다. 『뿌리 깊은 나무』의 편집 기자로 일했고, 박완서 일대기 『행복한 예술가의 초상』, 산문집 『큰 나무 사이로 걸어가니 내 키가 커졌다』 『엄마는 아직도 여전히』를 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그 뒤를 이어 노란집과 그 정원을 가꾸고 있다. 그리고 이제 어머니의 글밭에 꽃을 심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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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14년 11월 26일
이용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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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TS 불가능
  •  저작권 보호를 위해 인쇄 기능 제공 안함
지원기기
크레마,PC(윈도우 - 4K 모니터 미지원),아이폰,아이패드,안드로이드폰,안드로이드패드,전자책단말기(저사양 기기 사용 불가),PC(Mac)
파일/용량
EPUB(DRM) | 61.74MB ?
ISBN13
9788970639239

책 속으로

돌이켜보니 김매듯이 살아왔다. 때로는 호미자루 내던지고 싶을 때도 있었지만 후비적후비적 김매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 결과 거둔 게 아무리 보잘것없다고 해도 늘 내 안팎에는 김맬 터전이 있어왔다는 걸 큰 복으로 알고 있다. 내 나이에 ‘6’ 자가 들어 있을 때까지만 해도 촌철살인(寸鐵殺人)의 언어를 꿈꿨지만 요즈음 들어 나도 모르게 어질고 따뜻하고 위안이 되는 글을 소망하게 되었다. - ‘작가의 말’ 중에서

자연의 질서를 긍정하고, 거기 순응하는 행복감에는 그런 불안감이 없다. 아무리 4월에 눈보라가 쳐도 봄이 안 올 거라고 불안해할 필요는 없다. 변덕도 자연 질서의 일부일 뿐 원칙을 깨는 법은 없다. 우리가 죽는 날까지 배우는 마음을 놓지 말아야 할 것은, 사물과 인간의 일을 자연 질서대로 지킬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가 아닐까. 익은 과일이 떨어지듯이 혹은 누군가가 거두듯이 그렇게 자연스럽게 죽고 싶다. 26p

이렇듯 남들이 말하는 나의 전원생활은 조금도 평화롭지 않다. 내가 여기 정착하려 한 것은 자연 친화적인 삶을 꿈꿨기 때문도 도처에 도사린 불안을 몰라서도 아니었다. 그냥 아파트가 너무 편해서, 온종일 몸 놀릴 일이 너무 없는 게 사육당하는 것처럼 답답해서 나에게 맞는 불편을 선택하고자 했을 뿐이다. 내가 거둬야 할 마당이 나에게 노동하는 불편을 제공해준다. 33p

손가락에 물집이 잡히는 것도 모르고 오래도록 잔디에 가위질을 하는 것은 풀 냄새 때문만은 아니다. 유년의 뜰을 떠난 후 도시에서 보낸, 유년기의 열 곱은 되는 몇십 년 동안에 맛본 인생의 단맛과 쓴맛, 내 몸을 스쳐간 일이라고는 믿어지지 않게 격렬했던 애증과 애환, 허방과 나락, 행운과 기적, 이런 내 인생의 명장면(?)에 반복해서 몰입하다 보면 그렇게 시간이 가버린다. 70년은 끔찍하게 긴 세월이다. 그러나 건져 올릴 수 있는 장면이 고작 반나절 동안에 대여섯 번도 더 연속상연하고도 시간이 남아도는 분량밖에 안 되다니. 눈물이 날 것 같은 허망감을 시냇물 소리가 다독거려준다. 그 물소리는 마치 다 지나간다, 모든 건 다 지나가게 돼 있다, 라고 속삭이는 것처럼 들린다. 그 무심한 듯 명랑한 속삭임은 어떤 종교의 경전이나 성직자의 설교보다도 더 깊은 위안과 평화를 준다. 34-35p

칠십 고개를 넘고 나서는 오늘 밤 잠들었다가 내일 아침 깨어나지 않아도 여한이 없도록 그저 오늘 하루를 미련 없이 살자고 다짐해왔는데 그게 아닌가. 내년 봄의 기쁨을 꿈꾸다니……. 가슴이 울렁거릴 수 있는 기능이 남아 있는 한 그래도 인생은 살 만한 것이로구나. 39p

내가 출석을 부르지 않아도 그것들은 올 것이다. 그래도 나는 그것들이 올해도 하나도 결석하지 않고 전원출석하기를 바라기 때문에 그것들이 뿌리로, 씨로 잠든 땅을 함부로 밟지 못한다. 그것들이 왕성하게 자랄 여름에는 그것들이 목마를까 봐 마음 놓고 어디 여행도 못할 것이다. 그것들은 출석할 때마다 내 가슴을 기쁨으로 뛰놀게 했다. 1백 식구는 대식구다. [...] 그것들은 내가 기다리지 않아도 올 것이다. 그래도 나는 기다린다. 기다리는 기쁨 때문에 기다린다. 43p

고개를 살짝 비튼 것 같은 유려한 선과, 팔과 손아귀의 힘을 낭비 없이 날 끝으로 모으는 기능의 완벽한 조화는 단순 소박하면서도 여성적이고 미적이다. 호미질을 할 때마다 어떻게 이렇게 잘 만들었을까 새롭게 감탄하곤 한다. 호미질은 김을 맬 때 기능적일 뿐 아니라 손으로 만지는 것처럼 흙을 느끼게 해준다. 53p

이 작은 마당이 한겨울 빼고는 매일매일 나에게 일을 시킨다. 주로 나는 땅 위를 엎드려 기어다니면서 일을 한다. [...] 땅은 내가 심거나 씨 뿌리는 것한테만 생명력을 주는 게 아니다. 바람에 날아온 온갖 잡풀의 씨앗, 제가 품고 있던 미세한 실뿌리까지도 살려내려 든다. [...] 내가 땅 위를 기면서 하는 노동은 제가 잉태한 것은 어떡하든지 생산하고자 하는 땅의 욕망과 내가 원하는 것만 키우고 즐기고 싶어하는 나의 욕망과의 투쟁이다. 이상한 일이다. 내가 땅 위에 직립했을 때 가장 땅과 친하고 땅을 기어다닐 때 가장 땅과 적대적이라는 건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58-59p

단돈 1천 원도 벌어본 일이 없는 청소년도 몇천만 원씩 카드빚을 질 수 있는 세상에 그까짓 몇백만 원 때문에……. 우리 70대들은 그렇게 변변치 못하고 소심하다. 그래도 도덕성 하나는 역대 정권보다 좀 나을 줄 알았던 참여정부의 여전한 몇백 몇천억 대의 하늘 무서운 부정한 돈 냄새, 그 얼굴이 그 얼굴인 권력 주변의 부끄러움을 모르는 뻔뻔한 얼굴들을 볼 때마다 이러고도 이 나라가 안 망하는 게 이상할 지경이었다. 그의 아름다운 편지를 읽으면서 이러고도 안 망하는 까닭이 우리 70대들 덕이 아닐까 하는 좀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 간 큰 이들이 아무리 말아먹어도 이 나라가 아주 망하지 않을 것 하나만은 확실한 것은 바로 간 작은 이들이 초석이 되어 떠받치고 있기 때문이라고 좀 으스대면 안 될까. 66-67p

첫애가 이 세상에서 첫 번째 시험을 보는 날 아침에 그애의 밥그릇 뚜껑이 깨지다니 이게 무슨 불길한 징조란 말인가. 손끝이 떨리면서 뚜껑 깨지는 소리보다 더 큰 소리로 가슴이 내려앉았다. 그 자리엔 시어머님도 계셨다. 그분은 옛날 어른답게 미신적으로 꺼리고 피하는 게 많았다. 사위스럽다고 야단치실 게 뻔했다. 그러나 그분은 잠깐 굳었던 표정을 환하게 풀고는 큰 소리가 났으니 합격은 떼논 당상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나도 그 말씀의 뜻을 곧 알아듣고 수험생에게 네가 합격해서 친척과 이웃들에게 그 소문이 쫙 퍼질 좋은 징조라고 뚜껑 깨지는 소리를 해몽했다. 71-72p

그렇게 사랑하고 사랑받은 종로서적을 언제부터인지 책을 사기 위해서가 아니라 만남의 장소로서만 이용하게 되었다. 근처에 대형서점이 많이 생기고 매장에 들어가기도 책을 고르기도 그쪽이 더 편하게 돼 있는 것 때문에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되고 말았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종로서적을 사랑한다고 생각했고 그 사랑의 표시처럼 그 앞에서 누구를 만나거나 기다리는 것을 좋아했다. […] 나 아니라도 누가 하겠지 하는 마음이 사랑하는 것을 잃게 만들었다. 관심 소홀로 잃어버린 게 어찌 책방뿐일까. 추억어린 장소나 건물, 심지어는 사랑하는 사람까지도 늘 거기 있겠거니 믿은 무관심 때문에 놓치게 되는 게 아닐까. 78-79p

들판의 모든 것들, 시방 죽어 있지만 곧 살아날 것들, 아직 살아 있지만 곧 죽을 것들, 사소한 것들 속에 깃든 계절의 엄혹한 순환, 그런 것들이 하나하나 나에게 말을 거는 것 같았다. 침묵으로 말씀하시는 분이야말로 신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전율처럼 나를 흔들었다. 98p

먹는 거라면 절대로 버려서는 안 된다는 신념을 가진 이 늙은이를 자식들이나 손자들이 창피스러워한 나머지 죽는 날이나 기다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은 음식은 지딱지딱 버리고 새로 사 먹는 게 젊은 사람 마음에 드는 일도 되고 농사짓는 사람을 이롭게 하는 일도 된다는 걸 이제야 알았으니 내 자본주의 공부는 끝도 없어라. 110p

나는 엄마들이 아들에게 거는 기대는 한 집안의 이익과 노후대책을 바라는 지극히 이기적인 것인 데 비해 딸에게는 이 세상을 바꾸기를 바라는 더 원대한 꿈을 건다고 믿고 있다. 내 어머니가 척박한 환경에서도 딸에게 최고의 교육을 시키면서 귀 따갑게 하신 말씀이 ‘너는 나 같은 세상 살지 마라’였기 때문이다. 그게 바로 세상을 바꾸라는 비원이 아니고 무엇이랴. 113-114p

그 연세에 어떻게 진지를 손수 해 잡숫느냐고 상대방의 동정심은 수그러질 줄 모른다. 그럼 나는 조금 화가 나서 아니 내가 글도 쓰는데 그까짓 밥을 왜 못 해먹느냐고 짜증을 내고 만다. 밥 하고 반찬 하는 건 손에 익으면 쉬워지지만 글 쓰는 일은 생전 해도 숙련이 안 되기 때문이다. 내 입엔 내 손맛이 가장 잘 맞는다. [...] 젊었을 적의 내 몸은 나하고 가장 친하고 만만한 벗이더니 나이 들면서 차차 내 몸은 나에게 삐치기 시작했고, 늘그막의 내 몸은 내가 한평생 모시고 길들여온, 나의 가장 무서운 상전이 되었다. 199-200p

엄마는 말년에 우리 집에 와서 지내신 적이 많았는데 엄마가 오실 때마다 나는 내 책을 엄마의 손이 못 닿도록 서가 맨 위 칸에 꽂고도 안심이 안 돼 책 제목이 안 보이게 뒤집어 꽂아놓곤 했다. 엄마가 읽을까 봐 겁이 났다. [...] 따님 소설을 읽은 소감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엄마는 싸늘하게 원 그것도 소설이라고 썼는지, 라고 대답하셨다. 그 매몰찬 혹평은 나에게 오래도록 상처가 되었다. 나는 아마 생전 엄마를 극복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236p

근심이 생겨 너한테 털어놓을 말을 머릿속으로 굴리기만 해도 근심의 반은 사라지고, 미운 사람 욕을 너한테 하고 나면 미움은 거의 사라지고 만다. 도저히 인력으로는 해결 안 되는 어려움이 생겼을 때는 너한테 기도 좀 해달라는 부탁까지 하니 나는 얼마나 한심하고 뻔뻔스러운 엄마냐. 그러나 이해해다오. 내 기도발보다는 네 기도발을 더 믿는 것은 모성애보다 더 깊은, 네 진국스러운 인간성에 대한 신뢰감이라는 것을. 늘 뭔가를 시키고 부탁만 해서 미안하지만 한 가지만 더 하겠다. 만약 엄마가 더 늙어 살짝 노망이 든 후에도 알량한 명예욕을 버리지 못하고 괴발개발 되지 않은 글을 쓰고 싶어한다면 그건 사회적인 노망이 될 테니 그 지경까지 가지 않도록 미리 네가 모질게 제재해주기를 바란다. 엄마가 말년을 깔끔하게 정리할 수 있도록 도와다오.

---p.272

출판사 리뷰

박완서가 40세의 나이에 작가로 등단했을 때부터 맏딸의 조력과 지지는 작가에게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인터넷이 나오기 이전 시절, 광화문에서 고등학교를 다닐 때엔 어머니의 소중한 원고를 배달하고, 줄곧 딸이요 친구인 동시에 어머니 작품의 적절하고 따뜻한 비평가 노릇까지 도맡았으며, 어머니가 집안의 대소사나 근심거리를 늘 기탄없이 의논해온 각별한 맏딸이었다. 이제 그 맏딸은 어머니 박완서가 생의 마지막 시간을 보낸 아치울 노란집을 돌보면서 어머니가 가꾸던 마당 정원을 직접 가꾸고 있다. 노란집 마당에서 전 주인이 호미질하던 것을 보아온 사람, 그 정원에 쏟아부은 정성과 사랑을 바로 옆에서 느껴온 사람, 마당 노동의 고됨과 애환을 함께 이해해온 사람, 그곳의 식물들이 지닌 아름다움과 그들이 말없이 전하는 지혜에 진정으로 공감해온 사람, 그래서 전 주인과 같은 마음으로 그 꽃들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 그가 어머니의 글밭 『호미』에 생명을 새로이 불어넣은 것이다.

박완서가 가꾸던 꽃들, 그에게 삶의 마지막 지혜를 일깨워주던 그 꽃들이 여전히 노란집에서 철 따라 싱그럽게 피어나고 있고 심지어 이번 개정판 『호미』에서도 우리를 반갑게 맞이하고 있는 것은 『호미』가 수년 전 우리에게 주던 삶의 가르침이 여전히 주목해야 할 빛나는 가르침임을 환기한다. 박완서는 아치울 노란집에 육십 대 후반에 들어가, 삶을 마감하기까지 칠십 대 전반을 오롯이 그 집에서 살아냈다. 『호미』는 바로 이 시절, 이 공간에서 박완서가 마당 노동과 함께 일구어낸, 그 생의 마지막 지혜를 담아내고 있는 것이다. 한 사람의 작가로서 칠십 대라는 인생의 호기(好期)에 그가 사랑하게 된 삶의 연장(鍊匠)은 호미였고 그 호미와 함께한 나날들이 『호미』에 구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호미』에 새롭게 생명을 불어넣은 호원숙의 식물화는 물론 애초에 책에 수록하기 위해 그려진 것은 아니었다. 단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과 노란집 마당의 1백여 식물 식구들에 대한 애정으로 스케치북을 마주하고 연필을 손에 쥔 것일 따름이었고 그의 스케치북을 우연히 보게 된 출판사의 수차례 설득으로 마침내 수록을 받아들인 것이었다. 그의 식물화는 전문 화가의 기교와 스타일 대신, 기술적으로 흉내 낼 수 없는 ‘진심의 삶과 사랑’을 담고 있으며 따라서 박완서가 『호미』에 글로 표현한 일상과 지혜에 더없이 잘 어우러진다. 이로써 개정판 『호미』는 두 세대가 함께 가꿔낸 아름다운 텍스트로서 그들의 삶을 닮은 향기로움을 내뿜으며 다시 독자들을 맞이하게 되었다.

“죽기 전에 한 번은
꼭 완벽하게 정직하게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고,
그건 농사밖에 없을 것 같았다.”

『호미』는 몸을 낮춰 땅을 마주하고 호미로 꽃밭을 일구며 체득한 자연의 질서와 그 안에 깃든 깊은 성찰, 더불어 세상에 대해 더없이 너그러웠던, 앞서 세상을 살다 갔거나 여전히 우인(友人)으로 존재하는 어른들의 삶이 묵직한 울림이 되어 독자들의 마음을 적시는 산문집이다. 나이가 들면서 자신도 모르게 어질고 따뜻하고 위안이 되는 글을 쓰기를 소망하게 되었다는 작가의 온기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저자는 복잡한 서울을 피해 아치울로 이사한 후, ‘농사’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고 작은 행복을 알아가기 시작한다. 노란집의 정원에 1백 종류가 넘는 꽃과 나무, 풀들을 심고 가꾸며 항시 호미를 끼고 땅을 일구어 무언가를 심고 거두는 핏줄의 자랑스러운 내력을 숨기지 않는다. 또한 누구보다도 꼿꼿한 삶을 사셨던 그의 시어머니와 측은지심과 수오지심을 사람의 근본으로 삼고 진보적인 사고로 양력설을 쇠도록 했던 그의 할아버지가 가르친 훈계와 뜻을 잊지 않고 글로 풀어냈다.

일제시대에 태어나고 여덟 살 때까지 이조시대를 살아온 그가 스스로 겪어낸 어린 시절의 전쟁과 한국사는 한 여성으로서 개인적으로 살아낸 구체적 역사를 절절하게 느끼게 한다. 더불어 역사학자 이이화가 민족의 고통을 온몸으로 체험하는 역사의식으로 압록강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던 에피소드, 뛰어난 안목으로 자연과 혼연일체 된 갤러리를 선보인 박수근의 이야기, 이름만 봐도 가슴이 따뜻해지는 소설가 이문구 선생에 대한 저자의 존경과 그리움이 주는 깨달음은 값지다. 세대 간 문제, 정치 문제, 나이 든 이들, 특히 칠십 대가 지닌 힘과 지혜, 동시에 칠십 대로서 새로운 문화를 접하고 배워간다는 것에 대해 풀어낸 글들은 박완서가 이 시대의 진정한 열린 어른이었음을 두고두고 되새기게 한다. 그리고 우리가 그러한 이를 이 시대의 한 작가로 갖게 되었음이 더없는 축복이었음을 기억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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