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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영원한 스포츠 영웅1장 영원히 기억될 영웅생존의 조건생애 최후의 승부2장 현해탄을 건너다멀고도 먼 섬 청년의 꿈거부할 수 없는 운명의 힘새로운 삶을 꿈꾸며 낯선 땅으로아버지와 집안 내력폭압과 질곡의 시대설움을 달랠 틈도 없이신이 배달한 편지꿈에 그리던 만남3장 고난과 입신의 첫 라운드참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말로만 듣던 지옥 훈련데뷔전 패배를 거울삼아박치기,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훈련믿을 수 없는 변화무적의 박치기왕아, 아버지4장 영광의 나날역도산 왕국의 후계자들새로운 영웅, 박치기왕 김일소중한 인연들세계 챔피언의 길아, 스승의 죽음5장 현해탄을 오간 풍운의 레슬러새로운 여정프로레슬링은 쇼가 아니다꿈의 타이틀과 월드 스타6장 마지막 불꽃아직은 은퇴할 때가 아니다후예 양성과 숨겨온 고통영웅의 강렬했던 황혼링을 떠난 영웅의 인생무상다시 고국으로화해와 이별 그리고 영면맺음말 시대의 영웅을 기억하며김일 연보 및 상훈, 안장김일선수가 걸어온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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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을 안고 밀항선을 탄 그 청년은어떻게 세계적인 레슬링 선수가 되었나?'김일'은 본명보다 '박치기왕'이라는 별명이 더욱 유명한 프로레슬링 선수다. 우리나라 프로레슬링계에서 단연 독보적인 스타였고 1960~1970년대 우리 국민에게 짜릿한 기쁨을 안겨준 스포츠 영웅이다. 그의 일생과 발자취를 담은 책 〈현해탄을 건너서〉는 박치기왕 김일이 우리에게 남긴 의미를 되새기게 해준다.전남 고흥군의 작은 섬 거금도 출신인 27세 청년은 바다 건너 일본에서 들려온 소식에 마음을 온통 빼앗겼고 이후 인생이 완전히 뒤바뀐다. 한국 출신으로 일본에서 프로레슬링 선수로 활약하는 선수의 소식을 들은 것이다. 함경남도 출신 ‘역도산’은 일본 프로레슬링계를 주름잡으며 명성이 사방에 퍼지고 있었다. 기골이 장대하고 힘깨나 쓰던 시골 청년 김일은 역도산의 제자가 되어 프로레슬링 선수가 되겠다는 꿈을 가지고 밀항선을 타고 일본으로 향했다. 요즘 말로 ‘불법체류자’였던 김일은 일본 경찰에 잡혀 수감 되었으나 역도산에게 간절한 내용을 담은 편지를 보내 결국 역도산의 보증으로 풀려났다. 김일은 역도산의 제자가 되어 프로레슬링을 배웠으며, 나중에 세계 프로레슬링계에 뚜렷이 이름을 새긴 안토니오 이노키, 자이언트 바바와 함께 역도산의 3대 제자로 불렸다.1958년, ‘오오키 긴타로’라는 링네임으로 일본 프로레슬링계에 데뷔한 김일은 당시 엄청난 붐을 일으키며 일본 레슬링 무대에서 대단한 활약을 하며 이름을 높였다. 박치기 기술을 내세워 링 위를 누빈 그는 1963년 WWA 태그 챔피언, 1965년 북미 태그 챔피언과 로키마운틴 챔피언 타이틀을 따내며 세계 무대에서 전성기를 누렸다.현해탄을 오간 풍운의 레슬러역도산은 김일에게 혹독한 수련을 시켰고 “남들 다 하는 기술로는 일본에서 출세하지 못한다”는 전략 아래 필살기로 박치기를 익히도록 했다. 독특한 레슬링 기술을 통해 팬들의 인기를 얻기 위한 쇼맨십을 꾀한 의도였다. 그런데 박치기라는 기술은 한 방에 상대방을 쓰러뜨리는 통쾌한 맛과 멋이 있었다. ‘일본 선수’와 ‘외국 선수’를 링 위에서 단번에 쓰러뜨리는 이 기술은 김일이 ‘박치기왕’이라 불리게 된 이유였지만, 외세의 억압과 핍박에 시달린 우리 국민에게 후련함과 통쾌함을 안겨주는 상징적인 의미도 있었다. 한국 고유의 스포츠가 아닌 레슬링이라는 생소한 격투기 스포츠에서 한국(조선) 출신 선수가 등장해 일본 선수와 미국 선수를 쓰러뜨리는 모습을 본 우리 국민은 자존감과 자신감, 짜릿함과 해방감을 절절하게 느꼈을 것이다.김일이 1965년 일본에서 한국으로 귀국해서 이후 1970년대를 거쳐 1980년대 초에 이르기까지 프로레슬링이라는 스포츠를 국민 스포츠로 거듭하게 하면서 대단한 흥행을 일으켜 성공한 바탕에는 이러한 무의식적인 응원과 지지가 깔려있었다.김일은 박치기라는 기술로 독보적인 레슬링 영웅이 되었지만 흥행 스포츠를 성공시키는 본능적인 감각이 뛰어난 기획자이자 프로모터이기도 했다. 스승 역도산은 한국 출신이었으나 공식적으로 일본인으로 활약하면서, 전후 일본에서 거구의 미국 선수들을 쓰러뜨림으로써 패전 후 일본인의 콤플렉스를 달래주었다. 김일 역시 한국전쟁 이후 어수선한 국내 상황에서 한국 출신 선수로서 프로레슬링을 국민 스포츠를 끌어올리면서 스스로 국민 영웅이 될 수 있었다. 김일이 1965년에 일본에서 한국으로 건너오자마자 한일 간 국교가 수립되었고, 때마침 한국은 TV 시대를 맞아 방송에 걸맞은 스타가 필요했다. 김일은 서양의 거구들이나 일본 선수들을 물리쳐 이기는 모습을 통해 국민에게 기쁨과 자신감을 심어줌으로써 국내 프로레슬링 저변 확대와 함께 국민에게 희망찬 볼거리를 제공하는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박치기왕에서 세계 스포츠 영웅이 되다스승 역도산의 사망 이후 한국으로 건너온 김일은 한국에서 프로레슬링 붐을 일으킨 주역이었다. 1965년 극동 헤비급 챔피언, 1967년 WWA 세계헤비급 챔피언, 1972년 인터내셔널 세계헤비급 챔피언 등 그가 활약한 30년간 20회 넘게 세계 챔피언 타이틀을 따냈다.1960년대 전쟁 이후 극심한 빈곤을 겪던 국민들은 그에게 ‘박치기왕’이라는 별명을 선물하며 열광적인 지지를 보냈다. 프로레슬링을 지원했던 박정희와 달리 전두환 정권 이후 프로레슬링의 인기는 서서히 저물었지만 김일은 1970년대까지 그 인기를 꾸준히 이어갔다.1987년부터 경기 후유증으로 각종 질병에 시달리며 투병 생활을 하면서도 후배 양성과 프로레슬링 재건에 힘썼고, 1995년에 일본에서, 2000년에 한국에서 은퇴식을 가졌다.2006년 향년 77세에 작고한 그는 1994년 국민훈장 석류장, 2000년 체육훈장 맹호장을 수훈했다. 2006년 체육훈장 청룡장에 추서됐고 2018년 대한체육회가 선정한 대한민국 스포츠 영웅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2020년에는 한국 체육 발전에 공헌한 업적을 인정받아 국립대전현충원 국가사회공헌자 묘역에 안장되었다.한국인의 가슴에 희망과 불굴의스포츠 영웅 김일, 우리 모두의 영웅입니다.김일은 그저 ‘성공한 프로레슬링 선수’라는 평가를 넘어 국민에게 통쾌함과 즐거움, 희망과 자존감을 보여준 ‘스포츠 영웅’이라는 찬사를 받는다. 오랜 일제강점기를 지나, 곧 전쟁이라는 고초를 겪은 뒤 폐허 같은 삶의 터전에서 힘겹게 살아가던 국민에게, 희망의 등불로서 국민을 열광시킨 사람이다. 가난하고 암울하던 시절, 벼락과도 같은 박치기로 모든 한국인의 가슴에 희망, 불굴의 의지, 샘솟는 환희를 선사해준 스포츠 영웅 김일은 새로운 성장의 동력을 찾는 이 시대에 재조명받아야 마땅한 위대한 스포츠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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