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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선교학회 시리즈에 대한 서문 4
감사의 말 6 한국어판 서문 10 간행사 13 추천의 글1 15 추천의 글2 17 번역서를 출간하며 19 약어표 28 Church Is a Verb│교회는 동사다 32│33 * 서론 41 * 1부_교회의 본질 도입 66 1장_ 예수와 성령 그리고 교회의 기초 68 __하느님의 선교 69 __나자렛 예수의 선교 78 2장_ 그리스도의 영과 교회의 탄생 118 __사도행전 119 __결론 166 3장_ 교회를 부르는 미래 169 __하느님 나라와 교회 169 __교회의 가르침 171 __프로테스탄트와 가톨릭신학 178 __하느님 나라와 교회: 여섯 개의 테제 182 __결론 200 4장_ 교회를 부르는 사명 : 단일하고 복잡한 실재 202 __“단일하고 복잡한 실재”로서의 선교 203 __선교를 구성하는 여섯 가지 요소 210 __결론 248 5장_ 교회를 불러일으키는 대화 : 예언자적 대화의 실천 250 __예언자적 대화: 신학적 기초 2 51 __대화 256 __예언자 263 __예언자적 대화: 실천과 영성 275 __결론 278 * 2부_교회의 신비 도입 282 6장_ 하느님의 백성으로서의 교회 : 모든 사람을 위한 축복이 되기 위해 선택됨 292 __다시 등장한 하느님의 백성 293 __성서의 하느님 백성: 선교를 위해 선택된 백성 296 __제2차 바티칸공의회와 이후 문헌에 나타나는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교회 319 __결론 345 7장_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 : 예수의 사명을 함께 나누며 이어 가기 342 __바오로 서간에 나타나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 352 __선교에 대한 함의: 선교적 신화와 세례, 그리고 성체 378 __결론 389 8장_ 성령의 창조물로서의 교회 : 현존, 도전, 그리고 놀라움 391 __성령은 교회를 선교하는 교회로 부른다 395 __성령은 선교하는 교회가 되도록 교회를 준비시킨다 398 __성령은 선교하는 교회가 되도록 교회에 도전한다 414 __결론 433 9장_선교하는 교회의 차원-I : 사도성과 보편성 435 __교회의 차원 436 __선교하는 교회는 사도적이다 445 __선교하는 교회는 보편적이다 458 __결론 471 10장_ 선교하는 교회의 차원-Ⅱ : 거룩함과 하나됨 472 __선교하는 교회는 거룩하다 474 __선교하는 교회는 하나다 496 __결론 521 * 3부_교회의 구조 도입 524 11장_ 세례받은 선교사 제자도 527 __세례와 제자도 527 __제2차 바티칸공의회와 제자도 530 __아빠레시다와 프란치스코 교황 533 __시노달리타스 535 __제자도와 세계교회협의회 539 __세례받은 선교사 제자도의 신학 542 __결론 563 12장_ 선교하는 제자들을 위한 리더십 566 __성서에 나타난 리더십 569 __현대에 선교하는 제자들의 리더십 573 __선교사 리더십의 훈련 577 __선교하는 제자를 이끌기 위한 리더의 습관 588 __결론 595 13장_ 사목하는 선교사 제자들 596 __사도직에서 사목으로 597 __교회에서의 활동 600 __사목하는 선교사 제자도 605 __결론 629 14장_서품받은 선교사 제자도-Ⅰ: 역사와 그 맥락에서 살펴보는 (서품받은 이의) 사목 631 __복잡한 역사 633 __신약성경의 뿌리 634 __교부 시대 642 __중세 신학에서의 서품 사목 657 __개신교 종교개혁과 트렌트공의회에서의 사제직 6 61 __트렌트 이후의 서품 사목 666 __결론 670 15장_서품받은 선교사 제자도-Ⅱ: 선교하는 교회 안에서 서품받은 선교사 제자에 관한 신학 672 __운동의 시대 673 __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나타나는 서품받은 이의 사목 675 __공의회 이후의 문헌에 나타나는 서품받은 이의 사목 687 __여성과 서품된 이의 사목 700 __서품받은 선교사 제자: 현대의 서품 직무 신학 704 __결론 716 * 결론 하지만 속지 마세요 교회는 동사입니다 720 찾아보기 72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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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의 죽음은 예수 운동에 종지부를 찍은 것처럼 보였다. 제자들은 실망하여 예루살렘을 떠나고 있었다. 우리는 이 장면을 루카복음 24장의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나 요한복음 21장의 “고기를 잡으러” 간 일곱 제자에게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런데 제자들은 점차 예수가 죽은 것이 아니라 살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에, 제자들은 다시 모이기 시작했고, 특유의 지도력을 갖추며 부활한 예수의 존재를 상기시키는 공동체가 되었다. 예수는 실로, 이후 서서히 성장하여 교회가 될, 이 공동체를 위한 기초를 놓고 씨앗을 심었다. 이렇게 탄생한 공동체는 예수의 “타오르는 비전”을 이어받아 인류와 하느님 사이, 인류와 모든 창조물 사이, 그리고 지구의 모든 민족 사이에 새로운 킨십을 구축할 것이다. 교회는 세상에서 정의를 증언하고 실현하려 하는 공동체, 지구 끝까지 하느님의 자비를 증언하고 전파하는 공동체, 하느님이 모든 인간과 모든 창조물에게 제공하는 치유와 온전함을 증언하고 전파하는 공동체가 될 것이다.
--- p.115 2014년부터 2022년까지 WCC 세계선교및복음화위원회의 위원으로 있으면서 나는 에큐메니칼 대화가 매우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경험했다. 이 과정에는 깊은 경청과 유연성, 개방성과 정직함, 그리고 많은 인내가 필요하다. 하지만 그 노력은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확신한다. 다른 그리스도교 전통을 가진 사람들과 진정한 우정을 쌓을수록, 우리를 갈라놓는 일부 사안의 사소함과 다른 사안의 심각성을 깨닫게 되면서 일치를 위한 도전이 시급한 과제가 된다. --- p.236 성령은 실로 인간 삶의 모든 측면과 모든 피조물에 현존하시기 때문에 교회는 특정 시대의 특정 문화에 속한 특정 민족의 교회, 즉 지역 교회로서만 교회일 수 있다. 이것이 성령이 오늘날 교회를 창조하기 위해 움직이시는 방식이다. 성령은 보편적이고 미리 정해진 메시지를 가진 추상적인 보편적 기관을 창조하시는 것이 아니라, 특정 문화와 시대에 뿌리내린 교회를 창조하신다. 교회는 삶의 복잡한 맥락 속에서 복음을 이해하라는 성령의 도전을 받아들이는 공동체여야 한다. --- p.423 오늘날 여러 측면에서 교회의 진정한 지속적인 창조를 방해하는 것은 서품받은 사역에 대한 비맥락적이고 비역사적인 이해이다. 과거에 서품 사목이 어떻게 발전해 왔는지에 대한 복잡성을 인식하는 것만이, 미래의 서품 사목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계급, 지위, 특권에 뿌리를 두는 것이 아니라, 세례받은 선교사 제자들의 평등성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 --- p.67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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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사명을 이어받아 킨십으로 선교하는 교회는 어떻게 구성되는가. 저자에 따르면 교회는 설명할 수 있는 지식이나 정의된 실체가 아니다. 즉 교회의 활동에 참여함으로써 비로소 마주하는 신비인 것이다. 따라서 교회는 하느님의 역사에 참여하는 신자들로 구성된 ‘공동체’의 형태를 가진다.
저자는 공동체의 구성원을 ‘제자도’라는 개념을 중심으로 두고 구조화한다. 이는 종래의 ‘성직자/평신도’ 이분법을 해체하고, 모든 그리스도인이 ‘세례받은 선교사 제자’라는 점을 바탕삼아 다양한 직분을 인정하고, 인식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는 두 가지 측면에서 특히 중요하다. 하나는 그리스도인의 근본적 평등을 선언하는 일이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교회의 선교적 본성을 심화함으로써 동사로서의 교회를 구현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즉 기존의 ‘성직자/평신도’ 이해가 그 역할과 책임을 한정함으로써 교회의 구조를 경직시켰다면, 세례받은 선교사 제자도에 기초한 이해는 선교라는 교회의 본성이 그리스도인 모두가 공유하는 킨덤의 성사임을 자각하도록 한다. 저자는 모든 신학은 ‘상황신학’이라고 단언한다. 이때 ‘상황’은 역사적·문화적 맥락을 의미한다. 공동체로서의 교회는 다문화적일 수밖에 없다. 다양한 맥락을 지닌 사람들이 함께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회는 근본적으로 역동적이고, 창조적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동사이며, 킨덤이 도래하는 그날까지 ‘계속하여 창조되는 신비’이다. 이 책 전반을 관통하는 태도는 열정과 성실함이다. 나를 알고 타자를 이해하고자 하는 성실함, 함께 행복하기를 기원하는 열정이다. 가톨릭 신부로서, 신학자로서 그의 신학은 가톨릭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다른 그리스도교를, 세상을 이해하고, 존중하려는 그의 노력에는 “온 마음”이 담겨 있다. 오늘날 교회가 놓인 현실은 도전적이다. 그리고 이 도전은 교회 안팎을 가리지 않는다. 이러한 상황에서 혹자는 이 글이 충분히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고 그저 미적지근하다고 비판할 수 있다. 과연 이 글은 잘 벼린 날붙이 같은 서슬을 부리지도 않고, 그렇다고 성벽을 높이 쌓고 위용을 과시하지도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이해하지 못하는 타자에 대한 관용은 이 온도에서 가능한 걸지도 모른다. 더욱이 저 온도가 온실에서 배양된 안온함이 아니라 노신학자가 만남과 만남을 거듭하며 터득한 황금률이라면 이 만남을 사양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오늘날 ‘여기’에 관한 신학이라는 면에서 보면 이 글은 당장 증명할 길 없는 ‘청사진 교회론’으로서의 한계를 지니고 있다. 하지만 오늘날 ‘만남’에 관한 신학으로서 이 책을 읽는다면 가장 가까운 곳, 곧 내 마음에서 나침반처럼 기능하는 신학으로 볼 여지가 있다. 만사가 제로섬 게임이라도 되는 양 절박하고 절박하여 그저 내달릴 뿐 타자의 사정 따윈 살필 여유가 없는 듯 보이는 지금, 우리는 때로 같은 것을 바라보면서도 그것을 가리키는 손끝에 걸려 넘어진다. “단일하지만 복잡한 현실”을 인정하고 ‘단일하지만 복잡한 실재’로서 서로를 대할 수 있다면, 우리의 세상은 모노톤에서 벗어나 보다 다채로울 터, 그 풍요로운 세상이 바로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창조의 완성, ‘킨덤’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