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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의 전복
1968년 이후의 자율적 사회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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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1. 1968년에서 자율성으로
2. 이탈리아의 아우토노미아
3. 독일 자율정치의 원천
4. 유럽의 자율운동들
5. 독일 통일에서의 아우토노멘
6. 자율성의 (반)정치
7. 자율성 이론

저자 소개 1

조지 카치아피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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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eorgy Katsiaficas

1949년 4월 1일 텍사스 주의 댈러스에서 태어난 카치아피카스는 매사추세츠공과대학에서 경영학을 공부하던 중 격변의 1968년을 맞이하였다. 이후 사회변혁운동에 동참하여 민주사회를위한학생연합의 매사추세츠공과대학 지부(‘로자 룩셈부르크 지부’)에서 활동하던 중, 베트남에서의 미군 철수와 대학에서의 군사연구 중단을 주장한 11월행동연합의 결성에 적극 가담하였다. 당시 미 국방부의 의뢰로 베트남전쟁에 쓰일 관성항법장치, 투시레이더 등을 개발 중이던 대학 당국과 연구소에 항의하는 대규모 집회를 주도적으로 조직하면서 FBI의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1970년 매사추세츠공과대학를 졸업한
1949년 4월 1일 텍사스 주의 댈러스에서 태어난 카치아피카스는 매사추세츠공과대학에서 경영학을 공부하던 중 격변의 1968년을 맞이하였다. 이후 사회변혁운동에 동참하여 민주사회를위한학생연합의 매사추세츠공과대학 지부(‘로자 룩셈부르크 지부’)에서 활동하던 중, 베트남에서의 미군 철수와 대학에서의 군사연구 중단을 주장한 11월행동연합의 결성에 적극 가담하였다. 당시 미 국방부의 의뢰로 베트남전쟁에 쓰일 관성항법장치, 투시레이더 등을 개발 중이던 대학 당국과 연구소에 항의하는 대규모 집회를 주도적으로 조직하면서 FBI의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1970년 매사추세츠공과대학를 졸업한 뒤 캘리포니아 주의 오션비치로 이동한 카치아피카스는 그 뒤로 11년간 ‘레드하우스’로 불리던 오션비치의 코뮌을 기반 삼아 대안적인 정치와 삶의 방식을 실험한다. 그러던 중 캘리포니아대학 샌디에이고캠퍼스에서 헤르베르트 마르쿠제를 만나게 된 카치아피카스는 마르쿠제의 격려로 1974년 같은 대학의 대학원 사회학과에 입학한 뒤, 전세계의 더 많은 운동을 접해야 한다는 마르쿠제의 조언에 따라 1979년 독일 베를린의 자유대학에 교환학생으로 건너가 현대 유럽의 사회운동을 접하였다.

1986년부터 보스턴의 웬트워스공과대학 인문사회과학부 교수로 재직 중인 카치아피카스는 2006년부터 하버드대학 한국학연구소 연구원을 겸하며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한국과 동남아시아 사회운동이 주고받은 상호영향을 연구 중이다. 한국의 광주민주화항쟁을 전세계에 널리 알리고자 힘쓰는 사람으로, 전남대학교의 방문교수로 있었다.그 일환으로 『한국의 민주주의: 광주항쟁의 유산』(2006), 『시민군들과의 대화』(전2권/2003)를 엮어낸 바 있다.

주요 저서로 『자본주의에 맞서기: 전지구적 운동이 보내는 급보』(공저/2004), 『해방, 상상력, 블랙팬더당』(공저/2001), 『정치의 전복: 유럽의 자율주의 사회운동과 일상생활의 탈식민화』(1997/개정판 2006), 『신좌파의 상상력』 등이 있다.

조지 카치아피카스의 다른 상품

역자 : 윤수종
전남대학교 사회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한국 농업생산에서 노동조직의 변화과정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옮긴 책으로는 <사회학과 사적 유물론> <이탈리아 맑스주의와 국가이론>등이 있다.

품목정보

발행일
2000년 10월 31일
쪽수, 무게, 크기
459쪽 | 702g | 크기확인중
ISBN13
9788988105221

책 속으로

정치적 점거자들 사이에서는 자신들의 중요성에 대한 건강하고 폭넓은 회의론이 너무 강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 사이에 기회주의자들이 존재함을 지적하고 일부 가구들이 맺은 새로운 임대 계약을 한탄하면서, 자신들을 운동으로 규정하려는 것조차 거부했다. 그들 가운데 한사람은 내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것은 운동이 아니다. 왜냐하면 기회주의적 측면이 너무 강하기 때문이다. 만약 주택들이 국가로부터 심한 압력을 받는다면, 대개의 사람들은 간단히 떠날 것이다." 그는 1990년 점거지의 새로운 물결이 억제된 운동의 폭발적 잠재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고르바초프에 의해서 도래된 공산주의 체제의 붕괴와 전지구적 권력재편에 의해 생긴 것이라고 설명했다. 장벽의 개방은 주택을 점거하기 위한, 그리고 동베를린으로 운동을 퍼뜨리기 위한 전례 없는 기회였다. 그러나 그들이 받은 냉담한 반응은 동독인의 급진적 잠재력에 대해 갖고 있던 모든 환상을 깨버렸다.

1980년에 그랬듯이, 보다 급진적인 점거자들에게 점거지는 "혁명적 이중 권력의 기관"으로 가능하는 "해방된 영역"이었고, "국가와 체계를 파괴하기 위한 출발점"이었다. 그러나 1990년에 활동가들은 더 겸손하며, 자신들의 행동이 지닌 중요성도 덜 주장한다. 최소한, 점거는 다르게 살려는, 혼자 살거나 가부장적 가족에서 살기보다는 집합체 속에서 사는 것, 시도를 실현했다. 그들은 자생적으로 생겨나서 풍자 만화가, 벽화가, 정치적 밴드, 건축가, 그 밖의 모든 미디어 예술가들을 포함하는 찬란한 '무대'의 일부였다.

--- p.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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