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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제1부 가족 · 12 그늘이 자라는 시간 · 14 곡성사 · 16 팔자타령 · 18 달팽이의 운명 · 20 그 사내 · 22 진범을 아시나요 · 24 삭발 · 26 나를 깁다 · 28 시앗니 · 30 동상 걸린 사과 · 32 아오자이 · 34 꽃들이 만발하는 · 36 생을 엿듣다 · 38 칡뿌리로 쓴 캘리 · 40 제2부 민들레의 꿈 · 44 다 내게로 오라 · 46 빙하지대를 가다 · 48 호흡기를 떼다 · 50 함께라서 좋아요 · 52 기울기 · 54 하얀 조각 달 · 56 빈 둥지 중후근 · 58 개미 떼를 본다 · 60 꽃동네 붓다 · 62 거미가 사는 방 · 64 말하는 누렁소 · 66 담치기 · 68 북녘 하늘 · 70 6번 국도 · 72 제3부 무늬만 · 76 두더지게임 · 78 산동네 풍물패 · 80 진달래꽃 · 82 불면 · 84 어디로 갔을까 · 86 붉은 화살 · 88 달그림자 · 90 날아봐 · 92 하루야 · 94 정치판 · 96 집게 손 · 98 철거하다 · 100 모세의 기적 · 102 달력의 묵시록 · 104 제4부 번지점프 · 108 가족사진 · 110 효자가 될 테다 · 112 어떤 가장 · 114 저 외도 · 116 비행접시 · 118 보너스 · 120 사람을 찾습니다 · 122 옻 단풍들라 · 124 꽃샘추위 · 126 도토리의 사랑법 · 128 너를 보내놓고 · 130 구두미마을 오행시 · 132 그는 그곳에 있었다 · 134 반전 · 136 해설 / 타자 중심적 존재들의 호명_최광임 · 13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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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연대의 시간
이혜민에게 있어 가족이라는 이름의 존재가 차지하는 정서적 비중은 무조건적이고 압도적이다. 이혜민의 모든 슬픔과 고통의 정서는 가족이라는 존재들과의 관계에서 생긴 것은 아닐까, 라고 예측할 정도이다. 그녀는 부모라는 윤리적 역할과 생애 말기의 시간들을 보여주고 은유되어 침묵 속으로 사라진 기억의 재생을 통해 존재들의 여백을 응시한다. 그 존재는 시간 속에서 타자와 관계 맺고 윤리적 책임을 다하는 것까지 보여준다. 입안 가득 물고기를 물어다 새끼 입에 넣어 주며 자맥질하는 고된 현장을 너희들은 보면 안 된다고 돌아서서 날숨을 소리죽여 토해낸다 - 「가족」 전문 인용된 시에서 오리 가족의 한 장면을 차용하여 인간 삶의 근원적 구조를 통찰한다. 오리=인간이라는 등가를 통해 가족 간의 헌신과 절제를 윤리화하고 인간의 무언의 사랑이라는 본질적 구조를 은유적으로 조명한다. 부모 오리가 “입안 가득 물고기를 물어다/ 새끼 입에 넣어 주”는 행위는 자연스러운 자연의 한 장면처럼 보일 수 있으나, 사람이든 동물이든 실제 이 장면은 자연스러운 것도, 아름다운 것도 아니다. 극한 노동으로 상징되는 오리 부부의 행위에는 생존을 위한 투쟁이 담기고 일상적으로 반복되는 희생과 보답 없는 인내를 내포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욕망이 모방을 통해 발생하며, 이 모방이 갈등과 폭력을 낳고 그것이 제의적 희생을 통해 해소된다는 르네 지라르의 ‘희생양 메커니즘’은 희생이 단순한 윤리적 선택이 아니라 사회의 구조적 기제라는 차원에서 본다면 희생은 결코 아름다운 것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오리 부부도 가족이라는 공동체 안에서 부모라는 이름을 가진 존재가 온전히 감당해야 할 매커니즘일 뿐이다. 따라서 지상의 모든 부모가 희생적이지는 않을 것이지만, 이혜민은 타자를 위한 무한 책임으로서의 희생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것을 미덕으로 승화한다. 이 타자에 대한 책임 윤리는 “너희들은 보면 안 된다고//돌아서서 날숨을 소리죽여 토해”내는 상황으로 승화시킨다. 가족이기 때문에 드러낼 수 없는 고통, 사랑이기 때문에 말하지 못하는 침묵을 보여준다. 그 침묵이 곧 사랑이며, 그 고통이 바로 헌신이다. ‘윤리란 타자의 얼굴 앞에 선 나의 책임에서 출발한다’라고 하는 엠마뉘엘 레비나스의 말처럼 화자는 오로지 새끼를 위해 자신의 고통을 숨기고 침묵한다. 이런 행위는 본능이 아니라, 타자인 “너희들”을 위한 자발적 책임과 자기희생의 윤리이다. 타자 (너희들)의 평온을 지키기 위해 고통을 감추는 자기 포기 행동은 윤리적 책임의 정수이다. 한 숟가락이 한 숟가락을 밀며 제발 한 번만 더 넘겨 달라고 흰죽 한 숟가락으로 죽음을 밀어낸다 - 「그늘이 자라는 시간」 전문 만약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는 불안이라는 정서가 없다면 죽음 같은 자신의 한계와 가능성, 존재의 깊이를 성찰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이데거의 말처럼 인간은 언젠가는 죽을 수밖에 없다는 자각을 통해 비로소 진정한 자유와 자아에 이르게 되고 자기 존재에 눈을 뜨게 된다. 죽음은 늘 추상적으로 다가오지만, 때때로 너무도 구체적인 형태로 다가온다. 이를테면 병원 침대 위에서, 들숨과 날숨 사이로 흔들리는 생의 리듬 속에서, 더는 씹기 어려운 무른 흰죽 한 그릇 속에서, 한 숟가락을 넘기기 위해 또 한 숟가락의 시간이 필요해지는 순간, 실존보다 죽음이 더 가까이 있다. 죽음 가까이에 있는 화자는 말이 아니라 몸으로 말한다. ‘흰죽’은 죽음이 덮쳐오지 않도록 간신히 밀어내는 불안한 시간의 대체물이다. 생을 연장하는 백색의 방패이며, 죽음을 막아내는 기도다. 한 인간이 죽음과 마주한 가장 고요한 저항이다. 인간은 유일하게 자신의 죽음을 미리 아는 존재이나 여기서 죽음은 미래의 것이 아니라 바로 코앞에 닥쳤을지 모를 현실이다. 그런 점에서 이 불안은 단순한 심리적 감정이 아니라 몸으로 드러난 존재의 진실이다. 사진의 노인은 혀를 내밀어 죽을 받아들이고 죽음은 밀어낸다. 그 작고 느린 혀의 움직임은 생을 향한 가장 처절한 응답이다. 말보다 진한 존재의 진술이 혀끝에서 울린다. 그럼에도 인간은 유한하여 시간이 고요히 죽음을 키우는 만큼 그늘이 자라기 마련이다. 존재의 그림자와 자기 치유 누대에 거쳐 삶은 언제나 거기 있었다. 우리는 그것을 너무 늦게야 깨닫는다. 뒤늦게 우리 일상의 작고도 평범한 순간들에서 삶의 본질과 존재의 무게를 직시한다. 이혜민은 삶의 특별한 순간을 흥겨이 노래하지 않는다. 고작해야 “하늘길이 처음인 해외여행”에서 남긴 「가족사진」과 휴양지에서 쉬는 발을 찰칵 남긴 「보너스」 정도이다. 태어나서 처음 해 본 것으로 화자의 삶에서 아주아주 특별한 날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대체로 이혜민은 노래가 될 만큼 특별한 날을 기억하기보다 ‘나의 삶’을 구성하는 존재의 그림자를 호명하는 일에 익숙한 듯하다. 이혜민의 슬픈 시의식은 삶을 염려하고 숙고해 대비한다는 차원에서라기보다 실제 염려해야 하는 일과 인내하고 감내해야 했던 삶의 시간의 축적에서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른 아침 이슬방울을 달고 있는 거미줄이나, 고양이 한 마리, 꽁꽁 언 땅 위의 작은 돌비석, 마을 어귀의 오래된 나무 장승, 뒷마당의 감자 따위처럼 아주 일상적이고 작디작은 사물들과 풍경을 통해서 소외된 생을 읽고 고단한 삶으로 은폐되었던 존재들을 호명하는데, 그 사소함 안에는 삶을 지탱해온 시간의 누적과 누군가의 침묵과 고통, 돌봄과 사랑의 기록이 스며있다. 가난 속에 박혀 있는 시간을 만나는 일 어둠에 갇혀있는 나를 찾아 헤매는 일 속창알이 맺힌 속울음을 캐는 일 - 「생을 엿듣다」 전문 감자라는 일상적 사물에서 출발하여 인간 존재의 본질과 그 속에 깃든 고통, 그리고 자기 탐색의 여정을 그리고 있다. 삶의 공간은 어둡고 형식은 가난하지만, 잊고 살았던 본질적 존재를 찾기 위해 “가난”을 만나고 “어둠” 속을 헤매고 “속울음”을 캐냄으로써 현존재의 자기 발견의 여정을 보여준다. 오랜 기다림과 노동의 산물인 감자는 거칠고 투박한 모습이지만, 그것이야말로 진솔한 삶의 형상이다. 존재는 본래 은폐되어 있으므로 가난과 고통은 그 은폐된 층위를 드러내는 통로가 된다. 감자이기도 한 “나”는 내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어둠 속에서 나를 찾는다. 나를 찾기 위해서는 레비나스의 말처럼 타자의 얼굴이 우리 안의 윤리를 각성시켜야겠지만, 여기서 타자의 얼굴은 아직 보이지 않는다. 다만, 그 얼굴을 보기위해 나는 내 안의 어둠을 통과해야 한다. 이 어둠은 내면의 무의식일 수 있으며, 고통이나 자기 상실일 수 있다. 그러니까 “어둠에 갇혀 있는 나”는 아직 말하지 못하는 ‘타자-로서의 나’이기도 하다. ‘나’를 헤매는 일을 통해 내면화된 타자를 향해 회귀한다. 거기에는 말로 옮겨지지 않은 슬픔, 울지 못한 울음처럼 “속창알이”와 “속울음”의 이중의 침묵이 있다. 이는 현존재가 비본래성에서 본래성으로 이행하려는 존재 투쟁 의식이 내포된 것으로 볼 수 있다. 생을 엿듣는다는 것은 그 생을 잊지 않겠다는 의지이며 침묵을 청취하겠다는 「그 사내」는 고공 농성 중인 노동자를 통해 사회 속에 던져진 존재를 보여준다. 「시앗니」는 첩이었던 시앗니로 하여 화자 내면의 깊은 상처와 아울러 상처와 고통의 삶이었을 시앗니의 삶을 뒤늦게서야 호명한다. 「말하는 누렁소」에서는 시골 마을 어귀에 서있는 나무 장승과 함께 한국 농촌 공동체의 오래된 정서와 돌봄의 타자성을 드러낸다. 장승은 단순한 수호신이 아니라 타자의 얼굴을 품은 윤리적 주체로 의미한다. 제자리를 맴돌다 주저앉아 한 점 마침표로 찍히게 될지도 모를 그 동굴 속에 갇혀 천년만년 살아 있을지도 모를 A4용지 - 「빙하지대를 가다」 전문 빙하지대는 존재가 자신의 자리를 중심으로 끝없이 맴돌다 그 자리에 멈추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 그리하여 자기의 고유한 ‘있음’이 결빙된 상태로 있게 될 수도 있다는 불안 앓음이다. 그 빙하라는 동굴에 갇혀 “천년만년 살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나 “한 점/ 마침표로 찍히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의 다른 표현이다. 시인인 이혜민에게는 예민한 문제가 아닐 수 없으며 시인 일생의 과제 같은 것이다. 시인이 수십 년 시를 쓴다는 것은 자기 삶의 연대기를 기록하는 것과 맞먹는다. 그 연대기적 삶이 빙하지대의 동굴에만 있게 될지 모른다는 것, 한갓 한 점에 불가한 마침표와 같은 의미일지 모른다는 불안, 그 마침표는 새 기록을 추동하는 장치가 될 수도 있으나 빙하지대에서는 “제자리를 맴”도는 것이 운명이라는 암시성을 시인이라면 누구나 아는 일일 터다. 이혜민 시인도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의미다. 한편으로는 나의 어느 한때의 삶에 마침표를 잘 찍었으며 그 마침표가 영구히 보존되고 그 시대의 형상으로 영원히 존재할 것이라는 의미일 수도 있겠으나, 그럼에도 시인에게 불안이 증폭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빙하지대에서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더 이상의 생산적 창작은 이루어질 수 없다는 사실이다. 시인의 불안은 이 지점에서 증폭한다. 이혜민의 빙하지대는 『토마토가 치마끈을 풀었다』와 『나를 깁다』 두 권의 시집이다. 두 권의 시집에 시인의 시간이 얼마나 수장되어 있는 것인지 알 수는 없으나, 결코 짧은 세월이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 삶의 가장자리를 수없이 맴돌다 한 점 마침표로 정리한 존재를 자발적으로 동굴에 유폐시키면서 존재는 부재하게 된다. 이것은 어느 한 시기의 삶의 정지이며, 언어의 침묵이고 존재의 그림자가 얼어붙은 것이다. 하이데거가 말한 ‘존재의 망각’은 바로 이렇게 언어를 잃은 자리에서 발생한다. 존재는 그 자리에 있으되, 말해지지 않음으로써 깊은 그림자를 갖는다. 그림자는 침묵과 등가이다. 그 침묵은 아이러니하게도 말의 심연이 된다. 그러므로 빙하지대는 내면의 사유가 가장 짙게 가라앉은 장소라 할 수 있다. 시인 삶의 아카이브다. 그러므로 이혜민은 지금, 이 시간부터 기록의 매개체인 A4용지에 인간의 사유와 언어를 쓸 수 있게 된다. 존재가 언어 속에서 드러나거나 언어에 갇히는 그 사이에서 창작의 길항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존재는 침묵한다. 침묵한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 침묵 속에는 무수한 얼굴과 목소리와 눈빛이 웅크리고 있다. 우리는 삶이라는 것에 쫓겨 존재의 얼굴을 잊은 채, 제대로 보지 않고 소리도 외면하며 산다. 디카시를 쓰는 일은 그런 삶을 교정하는 것이며 수많은 존재의 침묵을 깨우는 일이다. 한 장의 사진 기호와 짧은 문장의 융합으로 완성된 디카시는 가려진 존재의 가면을 벗기고 우리에게 바로보기를 유도한다. 이혜민의 디카시가 그렇다. 이혜민은 은폐된 존재에게 균열을 내고 말을 걸어 침묵했던 존재들을 우리 삶의 사정거리 안으로 데려온다. 최광임 시인(계간 《디카시》 주간)은 “이혜민의 디카시는 존재와 타자가 서로를 부르고 응답하는 그 순간을 재연한다. 삶의 작고 섬세한 순간들이 이혜민의 호명에 불려나와 존재를 증명한다. 이혜민은 침묵하던 가족이라는 이름의 존재를 불러내고, 무너진 시간 위에 응시하는 어느 삶들을 불러내고 마침내 부유하는 존재의 그림자들 사이에서 ‘나’를 불러내 ‘나답게’라는 자리에 선다.”고 말한다. 디카시집 『그늘이 자라는 시간』은 사진이라는 기호적 현실 위에 언어를 얹음으로써, 존재의 그림자에 말을 걸고 침묵의 결을 드러내는 섬세한 시적 작업이다. 이혜민 시인은 삶의 언저리에서 밀려난 존재들, 어둠 속에 숨어 있던 목소리들을 애써 불러내고, 말보다 앞선 감각으로 세계와 관계 맺는 존재의 방식을 새롭게 제안한다. 그의 디카시는 정서가 흐르는 사진이자, 시선이 머무는 시이며, 언어 이전의 고요한 진실을 응시하는 또 하나의 미학이다. 삶의 가장자리를 떠도는 수많은 타자들과 그림자 같은 존재들이 이 디카시를 통해 응답받고 위무되기를, 그리고 독자 또한 자신 안의 침묵과 마주하는 시간을 갖게 되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