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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바우 가는 길
홍상화
문이당 2000.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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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1. 능바우 가는 길
2. 독수리 발톱이 남긴 자국
3. 독재자가 남긴 마지막 말
4. 세월 속에 갇힌 사람들
5. 어머니 마음
6. 유언
7. 능암리 그 여인
8. 겨울,봄 그리고 여름

저자 소개 1

서울대학교 상과대학 경제학과를 거쳐, 1989년 장편 『피와 불』(『정보원』으로 개제)을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으며, 이 작품을 영화로 각색하여 ‘아시아·태평양 영화제’ 최우수각본상을 수상했다.소설 『거품시대』는 조선일보에, 『불감시대』는 한국경제신문에 연재되었으며, 장편소설 『거품시대』(전 5권) 『사람의 멍에』 『범섬 앞바다』 『디스토피아』 『신·한국의 아버지』, 소설집 『전쟁을 이긴 두 여인』 『우리들의 두 여인』 등이 있다. 2005년 소설 「동백꽃」으로 제12회 이수문학상을 수상했으며, 문예지 『한국문학』 주간과 인천대학교 국어국문학과 겸임교수를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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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00년 11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270쪽 | 416g | 크기확인중
ISBN13
9788974561475

책 속으로

그는 깊은 잠에서 깨어난 듯 희미하게 정신이 들었다. 소파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아내에게 시선을 주지 않은 채 방으로 들어가 펴놓은 이부자리에 드러누웠던 기억이 떠올랐다. 아내가 소리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이불 귀퉁이 밑으로 들어오는 것을 느꼈다.「미선이 기분은 어때?」그가 옆에 누운 아내에게 말했다.「보통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아요. 여전히 쾌활해요.」「미선이 팔은 고칠 수 있을 거야.」「......」그들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창문을 비집고 들어온 여명이 방의 윤곽을 드러내주었다. 한쪽 벽에 놓인 싸구려 장롱, 구석에 놓인 텔레비전, 그 옆의 조금마한 탁자...... 이대로 누워 평생을 지내라 해도 마다하지 않을 평온함을 느꼈다. 실로 오랜만에, 정말로 오랜만에 느낀 평온함이었다. 탁자 위에 놓인 가족사진의 윤곽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보이지는 않으나 행복한 미소를 짓는 두 여자의 모습을 뚜렷이 그릴 수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저 행복한 두 여자의 미소는 지우지 말아야지. 무슨 짓을 하더라도 두 여자의 행복을 빼앗지는 말아야지'라고 다짐했다. 미선의 다친 팔이 떠오르자 가슴을 짓누르는 통증이 느껴졌다. 그의 다짐이 한발 늦은 느낌이 들어서였다.「어제저녁 일 미안해. 내가 잘못 말했어. 미선이는 좋은 남자를 만날 거야.」「아니에요. 제가 미안해요.」아내의 나직한 울음소리가 들리다가 금세 그쳤다. 세상에 태어나서 단 한 번만 경험하게 되는 것이 무엇이지? 첫번째 여자의 손을 잡았을 때 느끼는 친밀감, 첫번째 입맞춤이 가져다준 희열, 첫번째로 한 몸이 되었을 때 새로운 세계를 갖게 해준 한없는 고마움, 그리고 두 사람의 사랑으로 새로운 생명이 태어났을 때의 자신감. 그것들은 세상에 태어나서 한 번만, 오로지 한 번만 경험할 수 있는 일들이지 않은가.

그리고...... 그것들이 아내와의 사이에 이루어지지 않았었나. 얼마나 아름다운 경험이었나? 다시 경험할 수는 없는가? 그렇다. 얼마든지 다시 경험할 수 있다. 수백 번, 수천 번 다시 경험할 수 있다. 머릿속에서 얼마든지 다시 경험할 수 있다. 자신감을 잃었을 때, 삶이 허무할 때, 자신이 왜소하게 느껴질 때, 옆에 앉은 늙은 마누라의 얼굴을 보고, '그렇지, 우리 두 사람은 세상의 어느 누구보다 아름다운 경험을 함께했지'라고 왜 말 못하는가...... 아내의 들릴락말락하던 흐느낌이 다시 들려왔다. 그는 자는 체하며 아내의 흐느낌을 듣고 있었다. 그는 어제저녁 자신의 말이 아내의 가슴에 치유할 수 없는 상처가 되었음을 알아차렸다. 아내의 흐느낌을 듣자 가슴이 고통으로 저릿해졌다. 한때 그는 자신도 치유할 수 없는 병을 앓았다는 사실을 상기했다.

그것은 아내를 사랑하는 병이었다. 그러나 그 병은 세월이 흐르면서, 반복되는 일상행활에 빠져들면서, 경쟁사회의 부대낌 속에 살면서, 그리고 세속적인 욕망을 채우면서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희미해져 버렸음을 깨달았다. 불치의 병이 사라지면서 그는 고독해졌고 그때부터 그의 인생은 고독과의 외로운 싸움이었다. 이제 그는 자신의 인생 앞에 놓일 더 깊은 노년의 고독과 싸울 것이 아니라 명예로운 평화협정을 맺을 나이가 되었음을 알았다. 아내 없이는 그것이 어떤 협정일지라도 명예로운 협정이 될 수 없음을 그는 또한 알아차렸다.

--- pp.250-252

출판사 리뷰

이번 소설집에 수록된 홍상화의 단편들은 모두 하나같이 한국의 구체적인 역사적 상황을 이야기의 중요한 밑그림으로 놓고 있다. 그는 깊이 있는 예민한 시선으로 우리 사회 구석구석의 사정을 세심하게 들여다본다. 분단의 상황하에서 우리 민족들이 겪어야만 했던 이산의 아픔을 다양한 이야기들을 통해 능숙하게 풀어놓고 있으며, 아울러 IMF 파동이 한반도를 휩쓸고 간 이후 남겨진 상흔과 새로운 치유의 싹을 우의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그의 작품들은 한국 사회의 현주소를 총체적으로 제시하는 보기 드문 통찰력을 드러낸다. 또한 작가를 주인공으로 종종 내세움으로써 자신의 작가로서의 자의식을 그대로 지닌 채 보다 사실적으로 이야기를 이끌어가고 있다.

특히 이번 작품집에서 주목되는 것은 분단과 IMF라는 역사적 상황하에서의 한국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홍상화의 작품에서 여성들은, 작중화자의 마음의 고향으로 매번 등장하는 능암리/능바우와 동일시되곤 한다. 그러나 이 동일시는 고향과 여성을 일치시켜온 낡은 상징체계와는 분명히 구별된다. 이 작품집에서 여성들은 움직이지 않는 동상으로서 고향을 표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역사 속에 섞이어 그 움직임을 면면히 이어가는 힘있는 일개의 인간으로서 고향을 짊어지고 있다.

남성들은 가족들로부터 떠나가게 했던 '이념'이란 거창한 이름은 '병적인 낭만주의와 이기주의'라는 진실한 구절로써 낱낱이 풀이된다. 아버지의 표준말, 아버지의 이념을 꿈속에서 추종할 때는 이제 지나가고, 눅눅하나 찐득찐득한 강인함을 지닌 어머니의 마음을 기억해야 할 시간이라고 작가는 이야기한다. 역사의 뒤편에 밀쳐져 있던 그녀들의 흐느낌이, 그리고 그 흐느낌을 스스로 잦아들게 하면서 상처를 극복하고 늘 새롭게 움직임을 시작하는 그녀들의 모진 힘이 이번 작품집에서 특별한 빛을 발하고 있다. 그리고 작가가 궁극적으로 바라는 것은 그러한 여성과 남성이 서로를 용서하고 이해하여 명예로운 평화협정을 맺는 일이다. 아픔을 딛고 일어난 어머니의 계보를 이어, 화해와 협력을 기꺼이 준비하고 있는 딸들에게서 남성인물들은 자신을 반추하고 성찰하는 계기를 얻곤 한다. 작가는 확실히 눈동자를 멀리 미래에 열어놓고 있다.

능바우로서의 아프리카는 작가 홍상화의 글쓰기의 근원을 형성하고 있다. 김윤식의 해설에 따르면 그곳은 지방성(센티멘털리즘)의 시발점이자 초극이 가능한 곳이다. 그리고 인간의 고귀성이 가능한 지점이다. 그곳을 향한 비행 끝엔 '죽음'이 가로놓여 있다. 그러나 그 죽음은 퇴행적인 죽음이 아니다. 새로운 삶의 텃밭을 일구어내기 위한 제의적인 죽음인 것이다. 어리석은 과거, 후한만이 남은 지난 삶을 청산하고 싶어하는 간절한 바람이 그 죽음의 제문 안에 담겨 있다. 죽음으로 이끄는 어둠의 골짜기 안에서부터 '능바우 가는 길'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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