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埈
1560년(명종15)?1635년(인조13). 경북 상주 달내[酉川] 출신으로, 본관은 흥양(興陽), 자는 숙평(叔平), 호는 창석(蒼石)이다. 어린 시절에 석천(石川) 김각(金覺)과 서산(西山) 민은(閔誾)에게 배웠고, 그 뒤에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1542?1607)에게 수학하였다. 1582년(선조15) 생원시에 합격하고, 1591년(선조24) 문과에 급제하여 권지교서관정자(權知校書館正字)에 보임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향으로 돌아와 의병을 일으켜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1563?1633)를 주장(主將)으로 하고 자신은 소모장(召募將)이 되어 백화산 고모담에
1560년(명종15)?1635년(인조13). 경북 상주 달내[酉川] 출신으로, 본관은 흥양(興陽), 자는 숙평(叔平), 호는 창석(蒼石)이다. 어린 시절에 석천(石川) 김각(金覺)과 서산(西山) 민은(閔誾)에게 배웠고, 그 뒤에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1542?1607)에게 수학하였다. 1582년(선조15) 생원시에 합격하고, 1591년(선조24) 문과에 급제하여 권지교서관정자(權知校書館正字)에 보임되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향으로 돌아와 의병을 일으켜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 1563?1633)를 주장(主將)으로 하고 자신은 소모장(召募將)이 되어 백화산 고모담에 진을 치고 왜적에게 대항했다. 1595년에는 경상도 도사가 되었고, 이후 예조 정랑, 단양 군수 등을 역임하였으며, 1604년 주청사(奏請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남긴 글과 저서로는 중국 역대 왕들의 덕행과 신하들의 정사(正邪)를 밝힌 《중흥귀감(中興龜鑑)》, 임진왜란 때 형님인 월간(月澗) 이전(李?, 1558?1648)이 자신을 업고 피신한 일을 그림으로 그리게 하고 조선 명사 26명이 여기에 서문과 시를 붙여 만든 화첩 《형제급난도(兄弟急難圖)》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