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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내면서
Ⅰ. 머리말 Ⅱ. 검토 자료의 선정과 정리 방식 1. 인물 선정 원칙 2. 검토 대상 인원 3. 본인 자료와 타인 자료 4. 자료의 시기별 분포 Ⅲ. 양반의 초혼 1. 양반 남성의 초혼령 2. 양반 여성의 초혼령 3. 양반 남녀 초혼령의 변화 4. 양반 초혼부부의 나이 차이 Ⅳ. 양반의 사망 나이와 혼인 기간 1. 기혼 양반의 사망 나이 2. 양반 초혼부부의 혼인 기간 Ⅴ. 양반 부부의 선사망과 재혼 1. 초혼부부의 선사망 여부 2. 동년 사망 부부의 선후 여부 3. 재혼 Ⅵ. 양반의 축첩 1. 축첩 비율과 시기 2. 축첩과 부부의 사망 3. 질투와 처·첩의 관계 4. 첩의 가사 참여와 경영 Ⅶ. 양반 가문의 입양·출양 1. 수양·시양과 입후 2. 무입양과 외손봉사·서자승적 3. 입양·출양 자료의 검토와 입양률·출양률 4. 입양·출양 친족의 범위와 변화 Ⅷ. 왕실의 혼인양상 1. 자료의 정리 2. 왕실의 초혼령 3. 왕실의 사망 나이 4. 왕실 남성의 재혼과 축첩 Ⅸ. 맺는말 부록 조선전기 양반의 혼인양상 자료 일람 |
金龍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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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혼인에 관한 연구 경향을 다시 요약하자면, 제도적인 측면에서는 조선 전기와 중기의 상황이 자세하게 밝혀지는 한편으로 운영 실태 면에서 거시적인 입장에서의 검토가 이루어지고 있지만, 조선시대 전체나 지역 전반을 아우르는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고 정리할 수 있다. 이런 현상은 지금 남아 있는 호적을 비롯한 고문서류의 자료적 한계 때문에 ‘어쩔 수 없다’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자료에 주목한다면, 조선시대 혼인에 관한 실상도 새로운 각도에서 검토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바로 묘지명·묘갈명·묘비명·묘표와 같은 금석문 자료를 비롯하여 연보·행장·전傳·정려기旌閭記 등 한 개인에 관한 정보가 자세하고도 정확하게 실린 기록들이다.
--- p.15 「Ⅰ. 머리말」 중에서 「표 3」에서 보듯이 본인 자료는 4,901명(70.2%), 타인 자료는 2,081명(29.8%)으로 7:3의 비율을 보인다. 이 중에서 양반 남성의 본인 자료와 타인 자료는 4,385:1,128로 대략 4:1의 비율을 보이나, 양반 여성은 350:907로 타인 자료가 2.6배가량 더 많다. 이 수치는 여성의 경우 주로 남편이나 아들의 자료 속에 정보가 적혀 있음을 말해 준다. 왕실의 경우는 남녀 합계 166:46으로 본인 자료가 훨씬 많다. 남녀별로 보면 남성 97:20, 여성 69:26인데, 여성도 본인 자료의 비율이 높다. 왕실 인물의 자료는 매우 적기는 하지만, 양반과 비교해 볼 때 국왕·왕비·왕자·공주 등의 본인 자료가 상대적으로 더 많이 남아 있다. 이런 현상은 그들의 사회적 지위를 말해 주는 것이 아닌가 한다. --- p.22-23 「Ⅱ. 검토 자료의 선정과 정리 방식」 중에서 고려시대 귀족 남성의 평균 초혼령은 20.7세인데 1300년대에는 18.0세였고, 귀족 여성의 평균 초혼령은 16.3세이나 1300년대에는 13.9세였다는 연구결과가 있다. 이와 비교해 보면, 조선전기 양반 남성의 평균 초혼령은 고려시대 평균보다 낮아지기는 했지만, 1300년대보다는 조금 높아졌다고 할 수 있다. 조선전기 양반 여성의 17.4세라는 평균 초혼령은 고려시대 여성의 초혼령보다 조금 높은데, 1300년대의 13.9세보다는 훨씬 더 높아졌다. 조선전기에는 양반 남성은 물론이고 양반 여성들의 혼인 나이도 고려시대보다는 높아진 것이다. 이와 같은 변화에 대해서는 좀 더 분석이 필요하겠지만, 왕실 간택을 위한 처녀금혼이라는 규정이 조선시대에 조혼이 촉진된 주요한 원인이었다는 종래의 견해는 재고되어야 할 것이다. --- p.30 「Ⅲ. 양반의 초혼」 중에서 「표 14」가 보여 주는 수치에 대해 두 가지 해석이 있을 수 있다. 하나는 남녀 모두 50세 이하의 사망률이 그 이상의 나이보다 훨씬 낮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50대보다 나이가 적은 사람들이 신체적으로 더 건강했으리라고 추정하면, 40세를 기준으로 해서 기혼 양반의 사망률이 크게 차이가 난다는 현상은 쉽게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다른 하나는 이 수치가 사후死後 기록에서 뽑은 것이라는 점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즉, 비교적 ‘일찍’ 사망한 양반계층들도 중년 이후의 사망자들과 비슷한 비율로 묘지명 같은 기록을 남겼을까 하는 의문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장성한 자녀들이―주로 아들이겠지만― 부모의 장례를 주관하면서 묘지명 등을 만드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라고 생각해 보면, 부모나 남편 또는 아내가 일찍 사망한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그렇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양반 중에는 20~30세의 ‘젊은’ 나이에 사망한 기혼자들이 꽤 있었을 터인데, 이들에 대한 사후 기록은 더 적을 것이다. 이런 점을 감안하면 실제 평균 사망 나이는 더 낮을 것이다. --- p.40 「Ⅳ. 양반의 사망 나이와 혼인 기간」 중에서 「표 21」을 보면 처가 죽은 1년 뒤에 재혼한 경우는 19명이다. 2년 뒤 재혼한 사람은 12명이다. 48명 중 31명은 처가 사망한 뒤 만 2년을 전후해 재혼했는데, 이들의 비율은 64.6%를 차지한다. 상복을 벗자마자 재혼한 이들 모두가 『경국대전』에서 규정한 예외 조항에 합당한 조건을 갖추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실제로는 재혼이 허락되는 법적 기간이 지난 뒤 재혼을 한 이들이 더 많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지 않을까 한다. 48명의 재혼까지 걸린 평균 기간이 2.3년이라는 수치와, 4년 이상을 넘겨 재혼한 사례는 9명으로 전체의 18.6%라는 수치가 그런 사실을 말해 준다. --- p.54 「Ⅴ. 양반 부부의 선사망과 재혼」 중에서 「표 24」에서 보듯이 초혼 처가 먼저 죽은 남성이 첩을 둔 사례는 486명으로, 전체 922명 중에서 52.7%를 차지한다. 남성보다 초혼 처가 뒤에 사망한 경우는 205명으로 축첩 비율이 22.2%, 같은 해에 사망한 경우는 13명으로 1.4%, 미상은 218명으로 23.6%이다. 뒤의 사례 3개를 모두 합하면 47.2%가 되는데, 이 수치는 처의 선사망 비율인 52.7%에 미치지 못한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즉, 축첩자 중에서 초혼 처가 먼저 사망한 남성의 축첩 비율이 과반이 넘는 것이다. 물론 이 중에는 초혼 처가 사망한 뒤에 첩을 둔 남성도 다수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표 24」에서 보듯이 최소한 22.2%의 남성은 처가 살아 있을 때 이미 첩을 둔 것으로 나타난다. --- p.66-67 「Ⅵ. 양반의 축첩」 중에서 이 책에서 제시하는 「표 27」은 조선전기의 전기류 자료를 주로 이용한 것으로, 기존의 연구자들이 거의 주목하지 않은 것이다. 또 「표 27」의 결과를 조사 대상 양반 남성의 숫자와 비교해 보면 1500년까지는 39명으로 해당 시기 1,004명 중에서 3.9%의 입양률을 보이고, 1501~1550년에는 해당 시기 1,342명 중 76명으로 5.7%, 1551~1590년에는 해당 시기 1,902명 중 143명으로 7.5%의 입양률을 보이고 있어 조금씩 증가하는 현상을 보인다(시기별 조사 대상 양반 남성 수는 「표 4」 참고). 이런 변화는 결국 조선 건국 이후 16세기 전반까지에도 수양·시양과 관계없이 입후, 즉 입양에 대한 관심이 꾸준히 늘어나고 있었다는 사실을 반증해 준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조선전기의 이런 입양의 변화는 시기가 지날수록 가부장적 종법宗法 의식이 더 강화됨과 동시에 적장자에 대한 필요성도 더 높아졌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 p.88 「Ⅶ. 양반 가문의 입양·출양」 중에서 「표 37」을 보면 국왕과 왕비의 평균 초혼령의 차이는 -0.4세, 왕자와 왕자빈은 -0.5세, 부마와 공주·옹주는 +0.7세이다. 즉, 국왕과 왕자의 경우 처보다 나이가 평균 0.4~0.5세 적지만, 부마의 경우는 처보다 나이가 평균 0.7세 많다. 전체 평균은 남성이 여성보다 0.3세 높다. 그러므로 왕실의 남녀들은 대부분 비슷한 나이끼리 결혼했다고 보아도 좋지 않을까 한다. 실제로 이들의 혼인 나이 차이를 조사해 보면, ±3세 이상의 차이를 보이는 사례는 4명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2세 내에서 결혼한 것으로 조사된다. 각 부부의 나이 차이를 더 찾아보면, 국왕 부부 12쌍 중에서 남성 연상은 4쌍, 동갑은 1쌍, 여성 연상은 7쌍으로, 왕비가 연상인 비율이 조금 높다. 왕자 부부의 나이 차이는 11쌍이 확인되는데, 남성 연상은 8쌍, 동갑은 2쌍, 여성 연상은 1쌍이다. 공주·옹주 부부는 22쌍이 확인되는데, 남성 연상이 6쌍, 동갑이 8쌍, 여성 연상이 8쌍으로 나타난다. --- p.98 「Ⅷ. 왕실의 혼인양상」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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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사회상 연구, 사료를 확장하다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는 가족이고, 가족은 혼인으로 맺어진 부부로부터 형성된다. 그러므로 두 사람이 언제 어떻게 부부가 되고, 이후 그 관계는 어떤 모습으로 전개되는가 하는 문제, 즉 혼인을 둘러싼 여러 가지 양상은 그 사회를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주제이다. 신분제를 기반으로 운영되던 전통사회에서 혼인은 개인과 개인의 결합이 아니라 각자가 속한 신분 내에서 가문 대 가문의 결합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 사회에는 신분에 따른 통혼권이라는 제한된 범위가 존재했고, 각 신분은 그 안에서 그들의 특권을 유지·강화하거나 다른 신분을 통제하는 수단으로써 혼인을 하고 가족관계를 유지해 나갔다. 이에 따라 국가에서는 법령이나 규정을 통해 혼인을 제도적으로 규제했고, 그 제도와 함께 만들어진 사회적 규범 속에서 가문들은 서로 혼인 상대를 골라 부부라는 관계를 맺고 가족을 형성했다. 이런 점에서 혼인에 관한 관심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혼인에 관한 제도적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그 혼인이 실제로 어떻게 운영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전자는 혼인에 대한 절차나 법규, 그에 따르는 의례, 이혼·재혼·간통·성범죄 등의 규제와 처벌에 대한 내용이 포함된다. 후자는 혼인 나이와 그 변화, 부부의 혼인 기간, 이혼과 재혼의 실상, 첩과 서자녀, 입양과 가족구조 같은 문제들이 중요한 내용이 될 것이다. 조선시대 지배층인 양반의 혼인에 관해서도 이 같은 두 가지 관점에서 많은 연구가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 전체나 지역 전반을 아우르는 연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것도 실상이다. 이런 현상은 지금 남아 있는 호적을 비롯한 고문서류의 자료적 한계 때문에 ‘어쩔 수 없다’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자료에 주목한다면, 조선시대 혼인에 관한 실상도 새로운 각도에서 검토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묘지명·묘갈명·묘비명·묘표와 같은 금석문 자료를 비롯하여 연보·행장·전傳·정려기旌閭記 등 한 개인에 관한 정보가 자세하게 실린 기록들이다. 이 자료들에는 본인과 배우자의 혼인 나이, 사별과 재혼·3혼, 축첩, 자녀 출산과 입양 등 혼인양상과 관련된 많은 정보가 담겨 있다. 또 3년 단위로 만들어지던 호적이 조선후기의 특정한 지역을 중심으로 남아 있는 것에 비해, 이 자료들은 한 인물의 생애 전반을 망라하면서도 조선 건국 이후부터 후기까지 장기간에 걸쳐 전국에 분포하는 것들이다. 동시에 남녀는 물론이고 왕실을 포함한 양반계층 전체를 아우르고 있다. 그러므로 이 자료들을 적극 활용한다면 조선시대의 혼인과 관련한 여러 모습을 시기와 지역에 관계 없이 다양하면서도 거시적으로 조망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전기 양반계층의 혼인, 숫자로 복원하다 조선시대 문집들은 한국고전번역원이 펴낸 『한국문집총간』 500책에 거의 다 수록되었고, 여기에 실려 있는 조선시대 각종 금석문과 개인 전기 자료들을 전부 합치면 그 양이 어림짐작으로 수만 단위 숫자일 것 같은데, 그야말로 ‘보물창고’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조선에는 호적이나 족보, 일기와 편지를 비롯한 고문서류도 많기 때문인지 이 시대의 연구자들에게 금석문 같은 자료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거의 관심을 끌지 못하고 있다. 저자는 이와 같은 사정을 아쉬워하다가 퇴직한 뒤, 이 자료들을 조금씩 들춰 보기 시작했다. 고려사 연구의 권위자로 특히 생활사, 사회사에 관심이 많은 저자가 조선시대 사회사의 대표적 주제인 혼인에 관심을 가진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하다. 『한국문집총간』에 수록된 묘비명, 묘지명, 행장 등 개인 전기류 기록을 일일이 들여다보고 조선시대 양반의 혼인 및 가족관계의 구체적인 수치를 도출해 냈다. 저자는 “노느니 염불한다”는 겸손한 표현을 썼으나, 그 이면에는 방대한 데이터를 스프레드시트로 정리하며 파편화된 정보를 하나의 ‘보배’로 만들어낸 노학자의 집념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단순한 사료 소개를 넘어 초혼령, 재혼율, 축첩률 등을 구체적인 ‘수치’로 제시함으로써 ‘보편적 현상’을 데이터 시각화와 통계적 접근을 통해 명확히 제시했다는 점에서 그 학술적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다. 방대한 분량으로 인해 부득이 시기를 구분하여, 조선전기 양반 6,982명을 대상으로 정리한 내용을 먼저 엮어 출간했다. 여기서 조선전기라 함은 1392년 개국 이후부터 1590년대 말까지를 말한다. 그 이후 17~18세기와 19세기 이후 상황에 대한 검토는 후속 연구에서 다룰 예정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