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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A형 나는 BB형
홍서연
문학의전당 2026.0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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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동네 시인선

책소개

목차

제1부
그냥 지나갑니다·13/사과가 애플이라면 애플도 사과일까요·14/어쩌다 염색·16/새벽에 읽은 책·19/저녁은 걸어서·22/숨·24/행간을 읽어가듯·26/아마도·27/나는 리본벌레를 키운다·28/과일만 먹는 새가 있다·30/클림트는 키스만 하나?·33/휘발·34/문상 버스·36/검침원·38/가발과 중력·39/산산조각·40/가두리·42

제2부
오늘도 서커스·45/YH 노동자의 가발공장·46/흑백 포인세티아·48/봉급 다음 날·51/하얀 밤·52/인형은 자라서·56/아침은 소녀처럼 밝아 왔다·59/내일 또 내일·60/불쾌한 골짜기·62/끝나지 않는 그만·64/유리 감옥·65/쇼룸·66/사랑·68/경계인·70/절규·72/쿨럭쿨럭 CU·74/발모벽·76/지구는 서둘러 가발을 쓰고·78

제3부
off·81/수상한 알리바이·82/동의·84/수미산·86/정전기·87/얼룩·88/불타는 카르텔·90/카메라 옵스큐라·92/사라진 풀·94/프리다 칼로·96/불구의 두께에도·98/쉿! 쉿! 쉿!·100/수국·101/패러독스·104/글로리홀·106/물감·108/새로 고침·110

해설 임지훈(문학평론가)·111

저자 소개1

충남 대덕에서 태어나 2022년 《한국불교신문》 신춘문예에 「수미산」 외 1편이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관련 분류

품목정보

발행일
2026년 01월 29일
쪽수, 무게, 크기
128쪽 | 190g | 125*204*10mm
ISBN13
9791158967468

책 속으로

망부석이 되지 말라고 당신은 떠나갔습니다

한참을 궁리하다 그만,
가장 환한 꽃나무 아래 돌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냥 지나갑니다」중에서

누군가는 애플을 열고
누군가는 애플을 열기 위해 돌을 깬다

본사는 주문을 넣고 콩고민주공화국의 아이들은 서둘러 광산으로 간다

한 조각을 더 깨기 위해서

망치를 들면
사과의 귀에 울리는 타닥타닥
갱도 속에는 삭은 빛 하나

어린 광부가 내리친 곳에서
와르르 쏟아지는 사과

코발트를 오래 들여다보면 눈이 먼다

사과는 애플인데
애플은 왜 사과가 될 수 없을까

벌레 먹은
나라,
그곳엔 너덜거리는 꽃들이 수두룩하다
---「사과가 애플이라면 애플도 사과일까요」중에서

전동자전거는
사람이 다니는 인도
자전거가 다니는 전용도로
자동차가 다니는 차도
- -- - ---- -- -〉 어느 길이든 다닐 수 있습니다
다만 속도에 따라
사람이었다가
오토바이였다가
자동차가 되기도 합니다

리미트 풀었냐고 묻는 선한 선배
대한민국에서 안 되는 게 없다고 하는 말에서
번뜩이는 입술을 보았습니다

불행은 꽃잎과만 상의할 수 있는 거 아닌가요
---「오늘도 서커스」중에서

기억해요 엄마언니?
햇볕 가득한 날 그늘을 가리고 대문을 닫았지요

당신은 A형 나는 BB형

고치에서 나온 나방을 다시 고치 안으로 집어넣는 장면을 봤어요

당신의 유언을 유행가 후렴처럼 반복하는 동안
텔레비전 속 장례식장
울 수도 없는 너는
서슬 퍼런 칼날 위에 서 있어요
쓰윽 살 속을 긋고 가요

가식과 기만, 호응과 부추김, 유산에 닦긴 혀, 몸 안에서 녹아내릴 납덩어리, 자석의 없는 극, 당신의 목에 걸린 돌멩이

포인세티아
당신은 A형 나는 BB형

수요일은 심리 상담 받으러 가는 날
책상 위에 인형을 올려놓고 하고 싶은 말을 하래요

-왜 그랬어
니체와 부처와 지인에게 비수를 날리는 혀
저열한 우주에서 추락한 벨레로폰의 오만

아프지 않을 거예요
자승자박인걸요
사악한 생각부터 태워요

부피 줄이며 겹겹이 달라붙은 곡소리

포인세티아
당신은 A형 나는 BB형

겁내지 말고 주위를 살펴요 눈이 멀고 절름발이가 되어도 영혼의 고통은 지워지지 않아요 당신의 속을 뻔히 알고 있지만 말을 안 할 뿐이래요 이제야 철학자의 농담을 이해하다니
눈을 감는 편이 낫겠어요

나는 고독이 의심되는 내담자
미더운 이름이 떠오르지 않아요

저승이 이처럼 단순할 수 있다니

플래시가 터져요
상담 결과

당신은 A형 나는 BB형
---「흑백 포인세티아」중에서

백무산의 시집을 읽어도
정과리의 평론을 읽어도
나는 왜 무감각한가

무엇이든 내 문제로 받아들이는 것
감각의 불구는 무엇으로부터 비롯되는가

알람 5분 전, 출입문 잠그는 시간이다 조금이라도 늦으면 맹렬했던 하루가 건물 안에 갇힌다 지상과 맞닿은 하늘에는 새벽 별이 이미 떠 있다 밤과 낮 구분 모르는 별들이 쌓인다

‘갑’도 ‘을’도 아닌 스스로 치열한 경계인이
조세희론을 읽으면서 무감각할 수 있다니

나는 무엇에 길들어 분노할 줄 모르는가
내 감각은 무엇에 최적화되어 있는가

노동시를 읽으면서도
감성이 무뎌졌다면

그 죄 위에 더 포함할 나의 죄는 또 무엇인가

---「경계인」중에서

출판사 리뷰

[시인의 말]

비, 바람, 햇빛, 먼지
겹겹

차라리 철학자의 농담에
귀 기울였다면

덜 돌아
여기 당도했을까.

2026년 1월
홍서연

[해설 엿보기]

오늘날 많은 시들이 상처와 고통을 다루면서도, 결국에는 화해·치유·연대·회복이라는 이름의 조화로운 결말을 요청받는다. 이러한 요청은 종종 선의의 형태를 띠지만, 동시에 세계가 지닌 구조적 불화와 존재론적 차이를 서둘러 무화시키는 폭력으로 작동하기도 한다. 홍서연의 시는 바로 이 지점에서 한 발 물러선다. 이 시집의 화자는 “섞이고 싶었다/속하고 싶었다”(「동의」)라고 말하면서도, 끝내 섞이지 못하고 속하지 못한 채 남는다. 그러나 이 남겨짐은 실패나 결핍의 징표가 아니라, 성급한 동일화에 저항하는 주체의 위치로 재배치된다. 가발과 머리가죽, 중력과 절벽, 공장과 상담실, 신앙과 기술의 이미지들이 끝내 하나의 의미망으로 통합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시집에서 사물들은 서로를 보완하지 않고, 의미들은 매끄럽게 이어지지 않는다. 그 대신 개별적인 것들은 자신의 차이를 끝까지 유지한 채 충돌하고, 그 충돌 속에서 시는 발생한다. 다시 말해, 이 시집의 미학은 ‘조화로운 세계를 그리는 기술’이 아니라, ‘조화되지 않는 세계를 견디는 형식’인 셈이다.

누군가는 멧돼지라 하고
누군가는 뱀이라 하고

자라고 날고 뛰고 속이고 짓밟고 뭉개고
이미지는 읽고 먹고 쓰고 덮는다

이것은 이것이 아니고 그것은 그것이 아니어서

이미지의 꼬리가 요들처럼 떨고 있다

마지막으로 보이는 비명
물방울처럼 부딪히는 요란한 언어들,

장면은 계속 바뀌고
소리는 여전히 off

들리지 않는다고 드러나지 않는가
- 「off」 전문

이러한 불화의 미학은 동시대적 맥락에서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효율과 투명성, 가시성과 설명 가능성이 미덕으로 승인되는 사회에서, 이해되지 않는 것·분류되지 않는 것·회복되지 않는 것은 빠르게 제거되거나 주변화된다. 『당신은 A형 나는 BB형』은 이 흐름에 맞서, 분류 불가능한 BB형의 자리를 끝까지 고수한다. 이 시집에서 시는 이해를 강요하지 않으며, 독자에게 공감의 즉각성을 요구하지도 않는다. 대신 시는 불편한 상태, 미결의 상태, 이름 붙일 수 없는 상태를 지속시키며 묻는다. 과연 모든 것은 이해되어야 하는가, 모든 상처는 회복되어야 하는가, 모든 불화는 조화로 귀결되어야 하는가에 대해서 말이다.
- 임지훈(문학평론가)

추천평

홍서연 시인의 시는 머리를 뚫고 나온다. 시집에 자주 등장하는 ‘가발’처럼 문장을 한 올 한 올 엮여 놓았다. 거기 고통이 흐른 자국이 보이고, 때로 슬픔을 다독이는 하얀 손이 있다. 그 수척한 손으로 세상이 숨긴 것들을 하나씩 끄집어낸다. 그것 중에는 하루 밥벌이를 위해 “서둘러 광산으로 가”는 “아이들”(「사과가 애플이라면 애플도 사과일까요」)이 있고, 사그라지지 않아 “끈질기게 달려드는 소문”(「불쾌한 골짜기」)들이 있다. “한 줌의 약을 삼키는 여자가”(「불타는 카르텔」)는 머리 틀에 머리카락을 심듯 이 상황들을 적어간다. 그것도 “바늘 촉”(「아침은 소녀처럼 밝아 왔다」)처럼 예리한 감각으로 무장해 “뿌리 뽑힌 것들”(「지구는 서둘러 가발을 쓰고」)이 앓는 소리를 생생하게 살려 놓는다. 이 겨울엔 시인이 한 올 한 올 심어 놓은 시에 귀를 기울여보자. 세상 속 나를 선명하게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상처받은 나를 다독이게 될 것이다. - 길상호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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