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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글: “형무소는 자유와 정의를 얻은 자들의 수문이다”
1부 공주고등보통학교의 설립 민족의 열망으로 세운 배움터 민족의 힘으로 세운 ‘공주고보’ / 공주고보 설립을 가능케 한 문화통치 / 일제 통치의 시기별 특징 / 첫 입학시험과 개교 / 동맹휴학 등으로 절반이 이탈 / 공주고보와 사범학교의 동시 설립 / 고보의 학제 변천 / 차별의 또 다른 현장, 수업료라는 장벽 / 1925년 공주시가지의 모습 / 1926년의 ‘공주시가도’ / 민족동화정책과 황국신민화 / 산성공원과 앵산공원의 조성 / 공주의 ‘벚꽃 터널’ 2부 식민지 차별 교육과 학생들의 저항 거듭된 맹휴, 역사의 물결로 흐르다 1926년 4월 순종 추모 동맹휴학 / 6·10 순종 인산일 동맹휴학 / 공주고보 초창기 민족차별 실상 / 1926~1927년의 공주의 민족운동상황 / 1927년 이철하 사건과 동맹휴학 / 경찰 조사받던 한흥손의 사망 사건 / 당당히 항의의 목소리를 냈던 이철하 / 6·10만세운동의 설계자, 조선학생과학연구회 /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과 동맹휴학 / 1929년 공주고보의 학생독립운동 / ‘백지 동맹’을 불러온 ‘국사’ 시험 / ‘배후조종자’라는 영광의 타이틀, 윤귀영 / 비밀결사에 참여한 정용산 / 공주고보 일어 교사 가루베 지온 / 식민지시기 공주의 교육기관들 / 도청 이전의 시발점이 된 경부선 철도 / 충남도청의 대전 이전 / 도청 이전과 금강철교 건설 3부 반제 격문 사건과 비밀결사 교실 담장을 넘어 대중 속으로 1932년 3월 격문 살포 사건 / 1932년 공주고보 적색 비밀결사 ‘공친회’ 사건 / 1930년대의 독서 리스트 / 더 깊이 민중 속으로, 박명렬 / 1931년 우성 방흥리 소작쟁의 / 1930년대 공주 농민의 참상 / ‘단기 4268년’ 졸업앨범 사건 / 땀과 피와 눈물로 가르친 자주독립 정신, 유제경 / ‘명랑크라브’ 7인의 결사대 / 전가의 보도 치안유지법 / 삽을 든 소년들, ‘학교근로보국대’ 4부 전시 동원체제와 수난의 역사 어둠이 깊을수록 빛나는 의지 사이토 마코토 총독과 공주고보 / ‘조선의 히틀러’ 미나미 지로의 공주고보 방문 / 황태자 초상사진 모독 사건 / 공주고보 군사훈련과 단지 사건 / ‘공주고보·공주중 퇴학전출부’ / 민족정신 서린 공주형무소 / 수형기록카드 6,264장의 증언 / 공주에서 만주로, 공주고보인 강범진의 파란만장 / 일본 공출제도와 금영측우기 나오는 글: 학생독립운동 국가유공자 서훈을 위하여 부록 공주고보 학생독립운동 관련 주요 일지(1922~1946) 공주고보 출신 독립운동 국가유공자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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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늘구멍 같은 기회를 얻은 조선의 엘리트들은 그 보장된 미래에 마냥 순응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식민지 교육기관의 위세가 등등했지만, 참혹한 현실에 눈뜨고 그에 저항하려는 민족정신의 자각이 계속 이어졌습니다. 교육 현장에서 자행되는 민족 차별에 항의하고, 식민통치의 부당함을 고발하는 목소리를 낸 학생들은 구타와 퇴학, 심지어 체포되고 고문 받고 감옥행이 예정된 것을 알면서도 용감하게 떨치고 일어났습니다. 독립과 해방, 광복은 누군가 우리에게 그냥 공짜로 선물한 것이 아닙니다. 통감부 5년, 식민지 35년의 40년 동안 우리 민족이 일본에 동화되지 않고 마침내 해방을 이뤄낸 것은 이렇게 식민지 현실에 분연히 맞선 이들의 분투가 있었던 덕분입니다.
--- p.9-10 「들어가는 글 “형무소는 자유와 정의를 얻은 자들의 수문이다」 중에서 수업시간표는 식민지 교육의 현실을 드러냈다. 일본어는 주당 7시간, 일본사는 3시간이었지만 조선어는 한문과 합쳐 겨우 2~3시간이 배정되었으며, 필수가 아닌 선택과목이었다. 일본어, 일본사, 일본지리는 필수과목이었다. 다른 과목으로는 수신(윤리), 단문, 외국어, 역사지리, 수학, 물리, 화학, 법제경제, 실업, 도수체조가 있었다. 외국어는 영어와 중국어 중 선택할 수 있었는데, 공주고보는 영어를 채택했다. --- p.26-27 「1부 공주고등보통학교의 설립」 중에서 1회(1927년 졸업)부터 13회(1939년 졸업)까지 졸업생 수는 매회 평균 53명 정도이다. 통계적으로 입학생의 약 48% 정도가 졸업을 한 것으로 나온다. 그중에서도 4회부터 8회까지 졸업생의 수가 적은 편인데, 그 이유로는 6·10 만세운동(1926), 광주학생운동(1929~1930) 등 항일운동에 참여한 학생들이 퇴학당한 영향이 컸다. 잇따른 동맹휴학과 뒤이은 학사처분으로 제적된 학생이 많았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특히 1929년~30년 광주학생독립운동 시기를 거친 제6회(38명)와 제7회(36명) 졸업생은 입학생 대비 33%만이 졸업했다. --- p.28-29 「1부 공주고등보통학교의 설립」 중에서 1927년 6월 26일, 공주고보에서 일본인 교장의 이철하(4학년) 폭행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교장인 에가시라는 조선사람을 무시하는 차별적 언사를 일삼아 악명이 높았다. 이에 이철하는 교장의 반성을 촉구하는 항의 글을 교장에게 보내 시정을 촉구했다. 교장은 이철하의 항의문을 문제 삼아 26일 밤, 그를 교내에서 폭행하고 퇴학 처분까지 내렸다. 이철하에 대한 교장의 가혹한 처분이 알려지자 학생들 사이에서는 분노가 폭발했다. 7월 2일, 4학년 학생 50여 명은 모두의 이름을 적은 진정서를 학교측에 제출하고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 p.69-70 「2부 식민지 차별 교육과 학생들의 저항」 중에서 1929년 11월 3일 전남 광주에서 있었던 학생들의 대규모 항일시위 소식이 공주에 전해진 것은 11월 중순이었다. 공주고보 교정도 술렁였다. 교장과 일본인 교사들의 차별과 폭압에 눌려 있던 학생들의 분노가 화약에 불씨가 당겨지기만을 기다리는 형국이었다. 공주고보 2·3·4학년생들이 중심이 되어 비밀리에 모이기 시작했다. 4학년(5회) 나관종·이관세·나승갑·백낙순·김기혁·윤상원·김제능, 3학년(6회) 이상돈·김송규, 2학년(7회) 유종호 등이 주동이었다. 김송규의 집이 주된 연락소였다. 이들은 야간에 금강백사장과 교동 너머 공동묘지, 곰나루 솔밭, 중동의 얼음창고 뒤편 같은 변두리에서 은밀히 회합했다. 경찰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한 명은 매복해서 감시하고 경찰 접근 신호가 있으면 모두 차가운 강물 속으로 뛰어들어 몸을 숨겼다. --- p.85 「2부 식민지 차별 교육과 학생들의 저항」 중에서 이러한 국사(일본사) 교육의 궁극적 목적은 조선인이 자신의 역사와 언어, 정체성을 잊고 일본 제국의 시각으로 세계를 바라보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즉, 정신의 식민화였다. 당시 공주고보 학생들의 반일 감정은 교실 안팎에서 터져 나왔다. 일본사 수업은 학생들이 가장 싫어하던 과목이었다. 7회 윤 아무개 학생은 국사 시험 때 시험지에 이름만 쓰고 “취미 취미 무취미 일본 역사”라 적은 채 백지 답안을 냈다. 이 학생은 정학 처분을 받았다. --- p.94 「2부 식민지 차별 교육과 학생들의 저항」 중에서 1932년 3월 2일, 공주 영명여학교 기숙사 앞에 여러 장의 격문이 뿌려졌다. “생명을 희생하더라도 2천3백만 대중을 구하고 부패한 조선을 구할 노동자를 위한 대중운동을 하자!”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정책을 정면으로 비판한 이 격문에는 ‘죽음의 승리’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다. 이틀 뒤인 3월 4일, 공주고등보통학교 기숙사 식당 칠판에 격문이 게시되었다. “이번 봄 졸업생 제군은 이때를 이용하여 조선 독립에 진력하라. 형무소는 자유와 승리를 얻은 자들의 수문으로, 1천만 인이 모두 형무소에 가면 세계는 훌륭하다 할 것이다.” 식민지 현실에 대한 절규이자 청년들에게 던지는 직접적인 행동의 호소였다. 이 사건은 당시 여러 언론에 보도되었으며 재판 추이까지 여러 차례 기사화되었다. --- p.119 「3부 반제 격문 사건과 비밀결사」 중에서 1935년 3월 초, 공주고보 교정에는 졸업을 앞둔 청년들의 설렘이 가득했다. 그해 제9회 졸업생들은 반죽동의 ‘아루스 사진관’에서 만든 졸업앨범을 받아들었다. 앨범준비위원은 9회 최성희, 오연봉 등 몇 명이었다. 평범한 추억의 기록이 될 앨범은 그러나 뜻밖의 이유로 ‘사건’이 되었다. 앨범 첫 장의 졸업 연도가 문제였다. ‘서기’ 대신 ‘단기 4268년’이라 적혀 있었던 것이다. ‘단기’(단군 기원) 표기는 곧 민족의식을 드러내는 상징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내지에는 무궁화 사진을 넣고 그 밑에 한글로 ‘우리꽃’이라는 설명을 달았다. 무궁화 사진 양옆에는 권투선수 복장을 한 두 학생이 이를 지키는 모양새로 도안을 했다. 경찰은 이를 ‘불온행위’로 간주했고, 졸업식 직후 학생들은 모두 학교에 남아 조사를 기다려야 했다. --- p.139 「3부 반제 격문 사건과 비밀결사」 중에서 1944년 초여름, 공주고보에서 일본 황태자 초상(사진) 모독 사건이 일어났다. 남쪽 운동장 쪽에 있던 목조 단층 건물 교사의 복도 게시판에 일본 황태자의 근엄한 사진이 게시되어 있었다. 어떤 학생이 사진의 눈부분을 손톱으로 긁어 장님을 만들어놨다. 그러자 학생들이 너도나도 자국을 내서 나중에는 얼굴이 아예 뭉개져 버렸다. 보기 흉해서 그랬는지 얼마 후 사진이 치워졌는데, 나중에 학교측의 게시물 장부 조사에서 황태자 사진이 없어진 사실이 확인되어 큰 소동이 일었다. 마침 징병검사를 위해 고보에 파견 나와 있던 헌병 경찰이 이를 알게 되어 일이 커졌다. --- p.161 「4부 전시 동원체제와 수난의 역사」 중에서 총 4,630명의 수형기록카드에는 적용된 죄명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 종류만 해도 38종에 이른다. 이 가운데 치안유지법 위반이 2,745명으로 가장 많았고, 보안법 위반이 2,171명, 국가총동원법 위반이 479명으로 뒤를 이었다. 치안유지법, 보안법, 소요죄, 출판법 위반, 폭력행위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 폭발물취체법 위반, 불경죄 등이 전체의 약 80%를 차지했다. 현재 남아 있는 수형기록카드 가운데 가장 마지막 번호는 65,194번이다. 이는 최소한 65,193명 이상이 일제의 식민지 질서에 저항하거나 그에 맞섰다는 사실을 시사한다. 수형기록카드 6,264장은 2018년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공주고보 출신으로서 수형기록카드가 남아있는 이는 이철하, 정용산, 이도원, 박명렬, 유제경 등이다. 모두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되었을 때 작성된 기록이다. --- p.181 「4부 전시 동원체제와 수난의 역사」 중에서 독립운동은 몇몇 영웅의 서사가 아니라 이름 없는 다수의 참여로 이루어진 집단적 투쟁이었습니다. 2025년 현재 독립유공자 서훈 누계는 1만8,664명이지만 독립운동 참여 인원은 약 300만 명에 이른다고 합니다. 독립유공자 서훈은 엄정해야 하지만 그 엄정함 때문에 일제 식민 권력이 남긴 기록이 가장 중요하게 취급돼 온 것이 사실입니다. 조사 및 수형기록, 판결문, 경찰 보고서가 없으면 공적을 입증하기 어려웠습니다. 항일 독립운동은 그 성격상 기록을 남기기가 어려웠는데 바로 그 점 때문에 일제에 의해 기록이 남은 활동 이외에는 찾기 어려웠고 인정받기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공주고보 출신의 항일 활동과 독립운동도 연구하고 조명하기가 어려웠습니다. 현재까지 공주고보 출신으로 10여 명의 국가유공자가 확인되는데, 아직 학적 여부가 불분명한 분들이 더 있습니다. 이후 계속된 조사, 연구로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한 분들 가운데 적어도 20여 명의 활동을 추가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미서훈 독립운동가 발굴과 이들에 대한 서훈은 역사를 바로 세우는 작업이라고 생각합니다. --- p.187-188 「나오는 글: 전시 동원체제와 수난의 역사」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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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무소는 자유와 정의를 얻은 자들의 수문이다”
엘리트의 길 대신 펜을 꺾고 시대를 움켜쥔 소년들 『땀을 흘려라, 피를 흘려라, 눈물을 흘려라』는 일제강점기 충남 교육의 상징이었던 공주고등보통학교(현 공주고등학교) 학생들의 치열했던 항일 독립운동사를 발굴, 정리한 책이다. 1922년 설립된 공주고보는 충남 각지를 비롯해 전국의 인재들이 모여든 엘리트 교육기관이었으나, 그곳의 청년들은 보장된 미래 대신 가시밭길 같은 항일의 길을 선택했다.전국의 인재들이 모여든 엘리트 교육기관이었으나, 그곳의 청년들은 보장된 미래 대신 가시밭길 같은 항일의 길을 선택했다. 이 책은 1926년 순종 인산일 동맹휴학부터 1929년 광주학생독립운동에 호응한 저항, 그리고 1930년대 비밀결사인 ‘공친회’와 ‘명랑크라브’ 사건까지 학교 안팎에서 전개된 생생한 투쟁의 역사를 담고 있다. 특히 일본사 시험에 한 글자도 쓰지 않은 ‘백지 답안’이나 일왕의 사망 추모기간에 조선식 상복을 입고 등교한 일, ‘단기(檀紀)’ 연도를 표기했다는 이유로 압수된 졸업앨범 사건, 일본 황태자 사진을 손톱으로 긁어 모독한 사건 등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일상의 저항 기록들을 꼼꼼하게 복원해냈다.본 황태자 사진을 손톱으로 긁어 모독한 사건 등 잘 알려지지 않았던 일상의 저항 기록들을 꼼꼼하게 복원해냈다. 또한 1922년 학교 설립 과정부터 일제의 ‘문화통치’ 속에 숨겨진 기만적인 교육 정책, 그리고 학생들에게 가해진 고초와 탄압의 실상을 면밀히 분석한다. 무엇보다도 이 책의 가치는 미발굴 독립운동가의 재조명 작업이다. 퇴학, 체포, 고문 등 고난을 겪었음에도 아직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한 분들을 찾아내어 그들의 명예를 회복하고자 하는 저자의 실천적 의지가 돋보인다. 땀과 피와 눈물로 써 내려간 이들의 발자취는,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자유가 결코 공짜로 주어진 것이 아님을 일러준다. 공주고등보통학교의 설립 공주고보의 탄생 배경과 식민지 교육의 실상을 다룬다. 1919년 3·1운동 이후 일제가 내세운 ‘문화통치’의 기만성을 폭로하며, 그 속에서 지역 주민들이 십시일반 성금을 모아 민족의 힘으로 학교를 세운 과정을 추적한다. 일본인 교사가 압도적이었던 교육 환경과 조선어 교육의 탄압 속에서도 우리말의 뿌리를 지키려 했던 조선인 교사들의 노력이 조명된다. 식민지 차별 교육과 학생들의 저항 학생들이 왜 동맹휴학(맹휴)이라는 무기를 통해 일제에 저항하게 되었는지 그 동기와 과정을 살핀다. 1926년 6·10만세운동과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에 호응하여 일어난 공주고보생들의 대규모 동맹휴학 사건을 상세히 기록했다. 특히 6·10만세운동과 광주학생항일운동 사이 1927년 공주에서만 있었던 다이쇼 일왕의 사망 추모기간에 조선식 상복을 입고 등교한 일과 그로 인한 탄압에 항의했던 이철하 학생, 또 이철하 학생의 구타와 퇴학에 반발해 일어난 동맹휴학의 전말은 식민지 교육에 정면으로 맞선 소년들의 결기를 보여준다. 반제 격문 사건과 비밀결사 더욱 조직화된 항일 투쟁의 양상을 다룬다. 먼저 공주를 들썩이게 만든 격문 사건을 자세히 소개한다. “형무소는 자유와 승리를 얻은 자들의 수문으로, 1천만 인이 모두 형무소에 가면 세계는 훌륭하다 할 것이다.” 1932년 학교 식당과 기숙사에 항일 격문을 살포한 노수남, 김순태의 활약과 지역 노동자 및 점원들과 연대하여 계급의식과 민족의식을 고취했던 비밀결사 ‘공친회’ 사건, ‘명랑’이라는 말을 앞장세운 비밀결사대 등을 발굴해냈다. 또한 일본인 상점 불매운동 등 일상 속에서 실천했던 다양한 저항의 방식들을 소개한다. 전시 동원체제와 수난의 역사 일제 말기, 민족말살정책과 전쟁 총동원령 아래 놓인 학교의 비극적 상황을 기록한다. 징병과 징용으로 끌려가야 했던 학생들의 수난과 공주형무소에 투옥되어 고초를 겪은 독립투사들의 발자취를 따라간다. 저자는 ‘퇴학자 명부’와 ‘수형 기록’ 등을 대조하며, 지금까지 국가유공자로 인정받지 못한 20여 명의 잊혀진 영웅들을 세상 밖으로 불러낸다. “완결을 위한 책이 아니라, 비어 있는 역사를 채우기 위한 ‘시작’의 기록” 이 책은 '공주'라는 공간이 품고 있는 뜨거운 저항의 DNA를 기록하고 있다. 저자는 공주고보 학생들이 남긴 격문의 한 구절, “형무소는 자유와 정의를 얻은 자들의 수문이다”라는 문장에 주목한다. 엘리트로서의 미래가 보장되었음에도 스스로 가시밭길을 택했던 그들의 선택은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지식인의 책임’이 무엇인지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단순한 연대기적 서술에 그치지 않고 당시 학생들이 탐독했던 독서 리스트와 생활상, 그리고 학교를 떠나야만 했던 퇴학자들의 명단을 꼼꼼히 갈무리한 것은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이다. 저자는 이 책이 ‘완결’이 아닌 ‘시작’임을 강조하며, 아직 명예를 회복하지 못한 독립운동가들을 찾아내는 ‘벽돌 한 장’의 역할을 자처한다. 2026년 공주 지역 동맹휴학 100주년을 앞두고 출간된 이 책은, 우리 곁에 살아 숨 쉬는 독립운동의 역사를 재발견하는 소중한 지도가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