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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가 내려졌다고 해서 서로의 마음에 새겨진 증오와 상실이 쉽사리 지워지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쌍방이 합의한 그 얄팍한 선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총을 겨눈 채, 늘 방아쇠에 손을 얹고 있다는 것을.
---p.217 일본식 목초건축과 서양식 석재가 혼합된 형태. 해방 이전의 적산가옥. 돌담과 창틀 지붕의 곡선마저 위압적으로 다가왔다. 이건 과시다. ---p.28 죽어간 이들의 마지막 모습은 아직도 내 뇌리에 박혀있었다. 그들이 남긴, 너무도 짧고 허망한 한 마디 한 마디가 낙인처럼, 시간이 지날수록 더 또렷하게 떠올랐다. ---p.104 무지개가 무슨 의미인지 아십니까? ---p.1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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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7월 27일, 전쟁은 멈췄으나 사내 강운찬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국가에 충성하고 가족을 지키기 위해 사투를 벌였으나, 정작 그 누구도 구하지 못한 채 홀로 살아남았다는 사실은 그에게 구원이 아닌 지독한 형벌이 되었다. 소설 『적산』은 그 지독한 죄책감을 안고 고립된 섬 ‘미물도’로 숨어든 한 남자의 발걸음을 따라간다. 안식처라 믿었던 적산가옥과 침묵에 잠긴 수녀원, 그리고 그가 마주한 섬의 풍경은 결코 그를 놓아주지 않는다. 작가는 강운찬의 시선을 통해 전쟁이 끝난 뒤에도 여전히 개인의 영혼을 갉아먹는 생존자의 지옥을 처절하게 그려낸다.
섬의 적막을 깨는 것은 아이 민기가 도화지에 그려 넣는 기괴한 ‘괴물’의 형상이다. 장르적인 공포처럼 다가오는 이 존재는 실상 우리가 외면하려 했던 진실과 감추려 했던 기억이 응축된 상징물로 등장한다. 수녀원의 불가해한 규칙과 저택 지하실의 육중한 침묵, 그리고 섬 깊숙한 동굴에서 새어 나오는 서늘한 기운은 인물들을 옭아매며 끊임없이 묻는다. 당신이 보고 있는 것은 현실인가, 아니면 당신의 망각이 빚어낸 환영인가. 작가는 치밀한 심리 묘사를 통해 독자로 하여금 보이지 않는 실체에 대한 압도적인 서스펜스를 경험하게 한다. 『적산』은 단순히 한 개인의 추적극에 머물지 않고 우리 사회를 향한 근원적인 질문으로 확장된다. 국가는 누구를 위해 존재했는가, 그리고 우리는 무덤 위에 세워진 오늘을 살아갈 자격이 있는가라는 뼈아픈 함의를 작품 전반에 품고 있다. 주인공이 섬의 안개 속에서 한 걸음씩 나아갈 때마다 독자는 함께 숨을 죽이며 질문의 답을 찾아가게 된다. 잊힌 자들의 침묵을 깨우고 외면했던 과거를 정면으로 응시하게 만드는 이 소설은 우리 시대의 망각이 낳은 ‘괴물’과 대면하는 가장 강렬하고도 슬픈 기록이 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