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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스스로 그러한 것이 스승
제2장 산천을 주유하다 제3장 인연(因緣) 제4장 반촌 사람들 제5장 가르침의 길에 들어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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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께서 주창하시는 태허(太虛)에 대한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과연 태허란 무엇이고 어떤 작용을 하는 것입니까?”
“이 사람이 공부한 대로 설하겠소이다. 태허란 한마디로 표현하면 기(氣)라고 할 수 있소이다. 우주 공간에 충만해 있는 원기(原氣)를 형이상학적인 대상으로 삼는다면 그 기의 본질이 태허인 것이지요. 그러므로 태허란 깨끗하고 형체가 없는 것으로 선천(先天)이라 이름 붙일 수 있소이다. 비어 있되 그저 비어 있는 것이 아니고, 그 크기는 한정이 없을 뿐더러 그에 앞서서 아무런 시초도 없으며, 그 유래는 추궁할 수도 없소이다. 다만 맑게 비어 있고 고요하여 움직임이 없는 것이 기의 근원인 것이외다.” “그렇다면 무(無)가 아닙니까?” “언뜻 생각하면 그리 말할 수 있겠으나 결코 무가 아니지요. 우주에 가득 차 있고 어떠한 빈틈도 허용치 않는 상태로 있으면서 잡으려 하면 잡히지도 않으니 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잡히지 않을 따름이지 아무것도 없는 상태는 아니기에 무가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태허가 곧 기라 하셨는데, 그렇다면 만물은 무엇입니까?” “그 또한 기의 작용이지요. 이 우주에서 생성되고 소멸하는 모든 것은 무한히 변화하는 기의 율동이지요. 바람이나 파도처럼 또는 소나기처럼 밀리고 맥박 치는 생(生)과, 구름이나 물방울처럼 사라지는 멸(滅)의 본체가 무엇이냐 하면, 부침하고 율동하는 태허기(太虛氣)의 본질인 것이외다.” “태허가 선천이라면 만물은 후천이란 말씀이십니까?” 조욱은 학자답게 예리하게 파고들었다. “잘 보셨소이다. 기가 작용해서 이루어진 만물을 바로 후천이라 부르지요. 역(易)에 나오는 선천, 후천이라는 말과는 다른 기의 선후천이지요. 그러므로 기는 모였다가 흩어지는 운동은 하지만 그 기 자체가 소멸하지 않는다는 말이지요.” “기 자체가 소멸하지 않는다는 부분이 잘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좀 더 알기 쉽게…….” “이해가 쉽지 않을 겝니다. 그만큼 난해한 부분이지요. 다시 말씀드리지요. 기가 한곳으로 모이면 하나의 물건이 이루어지고, 흩어지면 물건이 소멸하지 않습니까. 이를테면 물과 얼음 같은 것이며, 쇠를 녹여 칼을 만들지만 칼을 녹이면 다시 쇠로 환원되는 것과 같은 이치지요.” 어떤 기라도 그것이 눈앞에 흩어지는 것을 볼 수 있지만 그 남은 기운은 끝내 흩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이름 하여 일기장존설(一氣長存說)이 그가 밝혀낸 기철학인 것이다. --- p.255~2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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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담 서경덕』- 서경덕의 삶과 철학을 집대성한 최초의 소설
‘송도삼절의 하나’ ‘토정 이지함의 스승’ ‘황진이의 유혹을 물리친 군자 중의 군자’ 우리 역사상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사상가의 한 사람인 서경덕을 가장 대중적이고 친숙한 역사적 인물로 각인시킨 이름인 동시에 그를 세간에 회자되는 싸구려 일화의 주인공으로 왜곡시킨 이름들이다. 그러나 화담 서경덕의 본모습은 산속에 은둔하여 음풍농월이나 일삼은 산중거사가 아니라 퇴계 이황이 ‘살아생전 그를 만났더라면 10년 책 읽는 것보다 나았을 것’이라고 숭상했을 만큼 학문적으로 큰 업적을 이룬 대학자였다. 또 스스로는 벼슬길로 나가지 않았지만 영의정을 지낸 명재상 박순(朴淳), 토정비결로 유명한 이지함(李之函), 동인의 영수(領袖)이자 『홍길동』의 저자 허균과 허난설헌의 아버지인 허엽(許曄), 민순(閔純), 이구(李球), 박민헌(朴民獻), 장가순(張可順), 박지화(朴枝華), 서기(徐起), 한백겸(韓百謙), 정개청(鄭介淸) 등 수많은 인재들을 길러낸 뛰어난 스승이었다. 그가 제자들을 길러낸 송도의 화담 산방은 조선 중기 이후 사림들이 보급하기 시작한 사립교육기관의 효시가 되었다. 총 3권 15장으로 이루어진 소설 『화담 서경덕』은 이처럼 단편적인 일화와 사설(私說)만 넘칠 뿐 그 본모습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서경덕이란 인물을 총체적으로 복원시킨 작품이다. 나물바구니를 끼고 들로 나가 종종새를 관찰하며 스스로 자연의 이치를 터득했던 어린 소년의 호기심, 지쳐 쓰러질 때까지 한 가지 주제에 몰두하여 궁구하던 청년의 기개, 신진사림들이 칼바람에 스러지는 것을 목격하면서 미래의 동량을 길러내는 스승으로 자신을 자리매김하는 과정, 학문으로 일가를 이루었으면서도 결코 관직을 탐하지 않고 오히려 깊은 골짜기에 산방을 차려 제자 기르기에 힘쓰고, 자신이 기른 제자들이 파를 이루어 바른 학문과 정치 발전에 걸림돌이 되는 일이 없도록 홀연히 세상을 떠나는 진정한 스승의 모습이 절제된 언어로 형상화되고 있다. 서경덕은 왜 벼슬을 마다하고 산중에 은거하였는가? 서경덕이 살았던 16세기는 기득권을 차지한 훈구세력과 새로운 이상사회를 꿈꾸는 신진세력이 정치적?도덕적으로 갈등하고 대립하는 시기였다. 그리고 훈구파와 사림파의 대립은 네 차례의 피비린내 나는 사화로 끝을 맺었다. 그러한 현실에서 서경덕은 대립의 중심에 들어서기보다는 무대 밖에서 갈등의 양상을 지켜보고, 그 결과를 예측하며 자신이 역사적으로 어떤 몫을 담당해야 하는지 고민하고 실천한 인물이었다. 결국 그는 일신의 영달을 포기하고, 현실적으로 참패를 면치 못하는 새로운 세력, 진보세력을 키우는 일에 전념한다. 그런 연유로 서경덕은 현실에 발을 들여놓지 않는 방관자로 비치기도 했지만 그 역시 나름의 방식으로 누구보다 치열하게 역사에 참여했던 것이고 그 결과 새로운 시대를 이끌 관료들과 학자들을 길러냈던 것이다. 이처럼 학문이 권력의 지름길이던 시대에 학문으로 일가를 이루었으면서도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깊은 골짜기에 은둔해 제자들을 기르는 일에 힘쓴 이유는 무엇일까에 초점을 맞추어 서경덕이 스승으로서의 소명을 자임하는 과정과 이지함, 허엽, 박순, 정개청 등 16세기를 풍미한 관원과 학자들은 물론 화담이 시에서 짤막하게 언급한 황원손, 이균 등 저잣거리의 백성들, 기생 황진이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와 양천을 불문하고 배움을 청하는 자들을 거두어 가르친 큰 스승으로서의 화담의 모습을 구체적인 사건과 인물들을 통해 리얼하게 그리고 있다. 황진이를 받아들이다 - 인간과 인간의 조건에 대한 한없는 사랑과 연민 서경덕과 관련하여 가장 자주 거론되는 인물은 황진이일 것이다. 서경덕은 이사종과의 계약동거, 지족선사의 파계 등 수많은 스캔들의 주인공인 황진이를 제자로 거두어들였다. 그것이 또 세상의 입들을 분주하게 했을 것이다. 화담과 황진이의 만남은 오늘날까지도 스캔들로 전해지지만 그가 황진이를 제자로 받아들인 것은 인간과 인간의 조건에 대한 통찰과 가없는 연민 때문이 아니었을까? 황진이는 절세미인에 빼어난 문예를 겸비한 천재적인 여성이었지만 신분과 가부장적 질서를 근간으로 삼은 조선 사회에서는 마이너 중의 마이너일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 벽계수, 소세양, 이사종, 지족선사 등과 얽힌 황진이의 파격과 일탈은 그런 억압된 상황에서 출구를 찾아 헤매는 처절한 몸부림이었고, 그것이 거듭 상처를 만들어내는 악순환이 계속되었다. 서경덕은 그렇게 많은 상처를 안고 자신을 찾아온 황진이의 존재론적인 고뇌와 인간적인 아픔을 이해하고 공감하였기에 저잣거리의 입방아는 물론 제자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황진이를 내치지 않았다. 그리고 스스로를 사랑하고 긍정할 때에 비로소 자신을 찾을 수 있다는 진리를 깨닫게 하였다. 수없는 연사와 파문의 주인공인 황진이가 서경덕만큼은 깨부수어야 할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참인간이요 큰 스승으로 존경하고 숭모하였던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닐까? 그동안 황진이의 시선을 통해 서경덕을 보아왔던 독자들이라면 서경덕의 눈과 마음으로 본 황진이의 이야기에 깊이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화담 서경덕』을 통해 만나는 16세기의 인물들과 당시의 사회상 역사소설이 주는 묘미 가운데 하나는 교과서나 역사서를 통해 활자로만 알고 있던 인물들을 구체적인 상황과 사건 안에서 살아 숨 쉬는 인간으로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화담 서경덕』에서는 우선 4대 사화를 중심으로 연산과 중종, 인조, 명종 초까지의 혼란스런 정치적 상황과 함께 조광조, 김안국 등 역사적 인물들의 얼개를 한눈에 개괄할 수 있다. 또한 피장, 임꺽정 등 야사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물론 저잣거리의 일반 백성들과 반촌의 백정들에 이르기까지 16세기를 살았던 다양한 계층의 인물들을 만날 수 있다. 특히 서경덕과 함께 전국을 유람하며 도학을 수련하는 한편 송도와 화담에 칩거한 서경덕과 세상을 연결시켜 주는 메신저로서의 역할을 담당하는 전우치를 비롯하여 조선조의 기인(奇人)으로 꼽히던 정염과 남사고와 관련된 일화들이 소개된다. 이처럼 어디선가 한번은 들어봤음직한 인물들이 살과 뼈를 가진 인간으로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관계를 맺고 역사를 이루어가는 과정과 당시의 사회상을 엿보는 재미가 적지 않을 것이다. 한국 기철학의 계보를 일별한다 화담 서경덕은 당시의 학자들과는 달리 스승이나 주석한 책을 통하지 않고 스스로 궁구하고 해석하여 발전시킨 기철학의 완성자이다. 『화담 서경덕』에서는 서경덕이 저술한 것으로 알려진 「원리기설」, 「이기설」, 「태허설」, 「귀신사생론」의 핵심 내용과 함께 바둑을 통해 본 주역의 원리, 민들레, 개, 고양이, 익모초 등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물들을 통해 인간사의 원칙과 도리를 추론하는 독특한 시각을 쉽고 재미있게 예시하고 있다. 기철학과 주역의 원리에 대한 본격적인 담론까지는 아니더라도 한국 기철학의 면모를 일별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