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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자의 말
I II III IV V VI VII VIII IX 역자노트 |
Francis Scott Key Fitzgera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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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When I came back from the East last autumn I felt that I wanted the world to be in uniform and at a sort of moral attention forever; (원서 p.2) 지난해 가을 동부에서 돌아왔을 때, 나는 이 세계가 제복을 차려입고 있기를, 말하자면 영원히 ‘도덕적인 차렷’ 자세를 취하고 있기를 바랐다. (김욱동 역 p.16) 지난가을 동부에서 돌아왔을 때, 나는 이 세상이 제복을 차려입고 영원히 일종의 윤리적 차려자세를 취한 곳이었으면 하고 바라는 심정이었다. (김영하 역 p.12) 두 역자는 지금 be in, be at 구문을 의식하지 못하고, uniform을 제복으로, moral attention을 ‘차려 자세’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원어민 누구도 저기서 저런 뉘앙스를 느끼지 못한다. 바로 번역하면, 내가 지난 가을 동부에서 돌아왔을 때 나는 세상이 언제나 한결같고 도덕적 관심 속에 놓여 있기를 바란다고 느꼈다. (본문 pp.16-17) #2. 다른 부분은 어투의 문제에서 오는 것으로 이해하고 넘어갈 수도 있다. 그런데 이 문장, “Oh, let’s have fun,” she begged him. “It’s too hot to fuss.” (원서 p.119) 를, “아, 좀 놀라구.” 데이지가 졸랐다. “이렇게 더운 날 꼭 잔소리해야 되겠어?” (김영하 역 p.150) 라고 번역한 것은 도대체 어떻게 하면 저런 번역이 가능한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오, 좀 즐겁게 지내요.” 그녀는 그에게 간청했다. “짜증을 내기엔 너무 덥잖아요.” (본문 p.193) 주객이 완전히 전도된 번역인 것이다. #3. 다음 장면은 『위대한 개츠비』의 모든 수수께끼가 풀리는 문맥이다. 무엇보다 개츠비의 과거가 명확히 드러난다. 그런데 이 명백한 사실들이 왜 이렇듯 오랫동안, 그리고 수많은 역자들 사이에서 편견으로 점철되어 있었던 것일까?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내가 보기에 그것은 무엇보다 단어들이 가진 중의적인 의미 때문이었을 것이다. 다른 번역서들도 전체를 함께 보여 주면 이해가 빠르겠지만, 지면 관계상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라, 숱한 오역 가운데 몇 군데만 예를 들어 보겠다. 우선 전체를 오해하기 쉽게 만든 중요한 문맥 하나가 바로 이 대목이다. This tremendous detail was to be cleared up at last. (원서 p.129) 이 문장은 단독으로 쓰인 게 아니라 Another pause(또다시 침묵)에 이어지는 문맥 속의 마지막 문장이다. 선입관을 버리고 문장만 두고 나름 직역하면 이렇게 된다. 이 엄청난 사안이 마침내 풀리려 하고 있었다. (본문 p.208) 이것을 다른 역자들은 이렇게 번역했다. 마침내 그의 어마어마한 과거가 낱낱이 드러날 순간이었다. (김욱동 역 p.183) 중요한 진실이 마침내 밝혀지려 하고 있었다. (김영하 역 p.162) 완전히 다른 의미가 되어 버렸는데 세분해 보면, 김욱동 번역문에 등장하는, ‘그의’ 과거라는 말은 보다시피 원문에 없는 말이다. 역자가 임의로 집어넣은 것이다. 김영하 번역문, 원문 어디에도 ‘중요한 진실’이라는 의미의 단어는 없다. ---「역자 노트」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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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 미국 연애소설?” “왜 위대하단 거죠?” 묻는 독자들
60여 종의 번역 속에 ‘위대한 개츠비’는 없다! [타임] 선정 현대 100대 영문 소설·[뉴스위크] 선정 100대 명저·BBC 선정 반드시 읽어야 할 고전……. 스콧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에 따라 붙는 수식어들이다. 이미 수많은 이들의 독서와 평가가 가해진 이 오랜 고전을 다시 번역하는 일이 필요할까? 도널드 트럼프의 백악관 입성 이후 거론되는 ‘아메리칸 드림의 폐기’에 맞서 향수를 자극하려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새로운 『위대한 개츠비』의 출현은 기존 번역의 왜곡과 오류에 맞서려는, 순수하게 ‘문학적인 도전’이다. 도대체 어떤 왜곡, 오류였을까? 그보다 그 오랜 고전을 ‘전혀 새롭게’ 번역하는 일이 가능할까? 역자 이정서의 말을 들어보자. “소설 문장은 그 하나하나가 전체 속에서 견고하게 고리를 짓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것 하나 각자 노는 것은 없다는 이야기다. 작가는 그 고리를 만들기 위해 수많은 시간을 고뇌하고 다듬었던 것이다. 고전의 반열에 든 작품이라면 당연히 그러한 기본이 바탕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게 작가가 고뇌한 문장을 역자 임의로 끊고, 더하고, 설명하면서 작가의 원래 의도를 충실히 살렸다고 한다면 그건 어폐가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위대한 개츠비』의 세계적 명성과 우리들의 체감에는 큰 괴리가 있었다. 적어도 한국에서 『위대한 개츠비』는 독특한 연애 소설의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 또한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제목으로 인해, 한편에서는 “도대체 이러한 개츠비를 왜 ‘위대하다’는 것이냐”는 의구심을 품어온 게 사실이다. 새로운 『위대한 개츠비』의 역자는 그 의구심을 풀고자 했고, 그 방식은 의외로 단순했다. “작가의 문체를 임의로 해체하지 않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원문의 쉼표 하나까지 살려야만 하는 것인데, 나는 그 원칙을 지켰다. 여기서 내가 ‘원칙’이라고 한 것은 부사나 형용사, 접속사 등 원문에 없는 의미를 임의로 넣거나 빼지 않은 것은 물론 대명사는 있는 그대로 옮겼다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이 같은 원칙이 실제 번역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 그 결과 『위대한 개츠비』가 어떻게 달라질 수 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누락, 오해, 문체의 해체, 캐릭터 왜곡… 잘못된 번역이 ‘위대한 개츠비’를 초라하게 만들었다! There is no confusion like the confusion of a simple mind, and as we drove away Tom was feeling the hot whips of panic. 단순한 마음이 혼란해질 때처럼 혼란스러운 경우도 없는 법이다. 차가 달리는 동안 톰은 몹시 겁에 질려 있었다. (김욱동 역, 민음사, 178쪽) 단순한 정신은 혼란에 취약하다. 차가 달리는 동안 톰은 공황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었다. (김영하 역, 문학동네, 157쪽) 잘 알려진 역자들의 번역이다. 그러나 번역의 과정에서 무언가 ‘누락’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원문의 ‘hot whips of panic’은 어디로 사라졌나? 생동하는 문학적 표현이 사라졌다. 원래 복문이었던 문장은 임의로 쪼개졌다. 번역을 통해 ‘피츠제럴드’와 ‘위대한 개츠비’가 동시에 증발했다. 새로운 번역은 이렇게 간다. 단순한 마음을 지닌 사람의 혼란처럼 혼란스러운 것은 없어서, 우리가 떠날 즈음 톰은 뜨거운 채찍질 같은 공황상태에 빠져 있었다. (이정서 역, 새움, 202쪽) 작품 전체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닌 단어를 잘못 해석해놓은 곳도 여러 곳 눈에 띈다. 작품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바른 번역에서 오는 것인데 곳곳에서 오역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는 비바람에 바랜 월세 80달러짜리 허름한 방갈로를 하나 구했다. 그러나 정작 그 집에 들어갈 때는 그 친구가 워싱턴으로 발령을 받는 바람에 혼자서 이사할 수밖에 없었다. (김욱동 역, 민음사, 18-19쪽) 그가 비바람에 바랜 허름한 월세 팔십 달러짜리 방갈로를 구했지만, 회사에서 그 친구를 갑자기 워싱턴으로 발령 내는 바람에 결국 나 혼자 이사할 수밖에 없었다. (김영하 역, 문학동네, 14쪽) 역자들은 지금 단지 ‘한 달에 80달러’라는 저 말에 싸다는 느낌을 가지고(1922년, 당시 80달러는 지금의 1,000달러 수준이다) ‘a weather-beaten cardboard bungalow’를 ‘비바람에 바랜 허름한 방갈로’라고 번역했다. 그러나 저기에서 cardboard는 분리된 수식어가 아니라 저 자체가 미국의 단층집(cardboard bungalow)을 가리킨다. 이 집은 개츠비의 호화 저택 바로 옆집으로 이 작품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하다. 새 번역은 이렇다. 그는 월 80달러짜리 햇볕에 거칠어진 단층집을 찾아냈지만, 그러나 마지막 순간에 회사가 그를 워싱턴으로 발령을 냈고, 나는 혼자 시골로 나와야 했다. (이정서 역, 새움, 19쪽) 단어 하나, 문장 하나에 대한 사소한 부주의와 몰이해가 전체 작품을 망친다. 등장인물의 캐릭터는 왜곡되고, 작품은 길을 잃는다. 개츠비는 ‘타락의 주체’로 전락하고, 개츠비의 첫사랑 데이지는 아무 생각 없이 파티나 즐기러 다니는 ‘천박한 여자’가 된다. 베이커는 ‘치유할 수 없는 부정직한 여자’로 그려지고, 부와 명예를 다 벗어던지고 바다를 여행하고 다녔던 댄 코디는 ‘폭력의 화신’이자 ‘못된 난봉꾼’으로 둔갑한다. 『위대한 개츠비』는 간신히 흔적만 남아 있는 셈이다. 신랄하고 정밀한, 67군데의 오역 지적 『이방인』에 이은 제2차 ‘고전 번역 논쟁’ 예고! 이렇듯 원저자의 섬세한 의도와 뉘앙스를 파악하며 67군데의 오역을 지적한 「역자노트」를 따라 읽다 보면 충격적이지 않을 수 없다. 새 번역을 통해 그동안 우리가 읽어왔던 『위대한 개츠비』와는 완전히 다른 개츠비, 진정으로 ‘위대한’ 개츠비를 만나게 된다. 이번 『위대한 개츠비』의 출간은 대대적인 ‘고전 번역 논쟁’을 예고하기도 한다. 이 책의 역자인 이정서는 2014년 「역자노트」를 실은 『이방인』 출간으로 학계와 출판계에 뜨거운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이어 2015년 생텍쥐페리 『어린 왕자』의 시공간적?존칭 개념을 바로잡아 차별화된 번역을 선보인 바 있다. 역자는 말한다. “『이방인』 때는 낯선 불어로 인해 일반 독자들이 논쟁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었다. 이번에 내가 영미문학을 택한 이유이기도 하다. 의역 중심의 우리 번역은 분명 문제가 있다. 무엇이 문제라는 것인지, 원문을 대조해본다면 딱히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그것을 누구라도 알 수 있다.” 그의 말마따나 이번에 새롭게 출간된 『위대한 개츠비』는 누구라도 원문을 대조해보며(원문은 새움출판사 블로그에서 항시 확인할 수 있다), 논쟁에 참여할 수 있다. 역자의 말대로 부사나 형용사, 접속사 등 원문에 없는 의미를 넣거나 빼지 않았고, 수식어 하나, 쉼표 하나까지 무시하지 않는 치밀한 번역으로 한 문장 한 문장이 시(詩)인 피츠제럴드의 문장을 고스란히 되살려놓고 있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작가의 문체를 고스란히 살리느라, 문장 구조를 해치지 않았으므로 누구라도 대조가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역자의 말 우리는 일반적으로 번역에 있어서 ‘의역’에 너무 관대하다. 그러다 보니 실제로 처음 공들여 옮긴 번역이 긴 시간 대접받기는커녕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서 번역이라기보다는 그 번역을 참조한 ‘번안’ 혹은 ‘표절’된 번역서에게 자리를 빼앗기게 되는 경향이 있다. 현재 시장에 나와 있는 『위대한 개츠비』 번역서만도 60여 종이 넘는 모양이다. 한 책을 두고 왜 이런 현상이 가능할까? 그것이 가능하도록 만든 토대 역시 바로 ‘의역’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직접 번역을 한 사람은 누군가 자신의 작품을 보고 번안하고 표절하면 그것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그런데 그런 지적을 당한 당사자가, 혹은 그 출판사가 그냥 ‘의역’이라고 주장하면 속수무책인 게 또한 우리의 번역 현실인 것이다. 실제로 번역이라기보다는 남의 것을 두고 베끼다시피 한 번역서가 역자의 이름과 출판사의 마케팅에 힘입어 당해 최고 베스트셀러가 되고 현재 시장에서 가장 잘된 번역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는 게 부정할 수 없는 우리 현실인 것이다. 사실 이건 독자들에게 치명적인 일이다. 실제 그런 행위에 분노하고 감시해야 할 평론가조차 번역의 질에 대해서는 거의 살펴볼 생각을 않고, 그게 그거려니, 그냥 약간의 윤문 차이겠거니 여기며 그 책을 낸 사람과 출판사의 권위만 가지고 추천을 하는 마당이니, 독자들이야 당연히 번역은 그게 그거겠거니 오해하고, 오역투성이 번역서를 고개를 갸웃거리며 읽고는 감동한 척, 심오한 깨달음을 얻은 척 포즈를 취하거나 자신의 독해력을 의심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아무튼 ‘윤문’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숱한 ‘번안’과 ‘표절’은 애초에 정확한 번역이 나와 있는 상황이라면 원천적으로 불가능할 것이다. 정확한 직역이 이루어진 다음은 그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려 한다고 해도 결코 할 수 없는 이유인 까닭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