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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ws from Nowhere Intro _ 겸허함으로부터의 관찰 _ 잔 보그 Experience _ 감시하고 감시당하느라 간과한 것 _ 티파니 젠킨스 Attention _ 눈먼 관찰의 시대 _ 마리나 벤저민 Comic _ 벤담, 감옥을 설계하다 _ 코리 몰러 Notice _ 관찰하는 자신을 관찰하기 _ 톰 챗필드 Shift _ ‘보는 것’과 ‘~로 보는 것’ _ 나이젤 워버튼 Artist _ 렌즈에 맺힌 존재의 연약함 _ 토마스 슈트루트 Science _ 목격되지 않으면 존재하지 않는가 _ 패트릭 스톡스 Interview _ 기억보다 기록이 우위인 이유 _ 대니얼 사이먼스 Relationship _ 제4의 벽을 무너뜨릴 용기 _ 마리아나 알레산드리 Opinion _ 기념하느라 놓친 수많은 생의 본질 _ 안토니아 케이스 Interview _ 현상을 감각하다, 감각을 관찰하다 _ 니컬러스 험프리 Reality _ 어디에도 없지만, 어디에나 있는 감시자 Philosophy _ 외줄타기 곡예사가 된 철학자들 _ 코스티카 브라다탄 Interview _ 철학의 언어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_ 박은미 사소한 것들의 철학 _ 노자와 공자도 품어주는 휴지 _ 이진민 앎과 삶 _ 야만의 시대, 어떻게 살 것인가 _ 황진규 On Thinking _ 다시 데카르트로 돌아갈 때 _ 정지우 Our Library 13 question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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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는 관찰에서 시작된다
- ‘보는 것’과 ‘~로 보는 것’ 스크롤과 스킵 기능은 스마트폰을 손에 쥔 우리에게 숨 쉬는 것만큼이나 끊임없이 이어지는 행위이다. 수많은 ‘보는’ 행위가 떠다니는 먼지처럼 인식되지 못한 채 지나쳐버리는 이 시대에, 《뉴필로소퍼》는 관찰의 의미와 가치를 되짚어본다. 1922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닐스 보어는 “어떤 현상도 관찰되지 않는 한 현상이 아니다”라고 했고, 정확히 10년 뒤 같은 상을 받은 베르너 하이젠베르크는 “우리가 관찰하는 대상은 그냥 자연이 아니라, 우리의 질문 방식에 영향을 받은 자연이다”라고 말했다. 두 위대한 물리학자가 자신이 이루어낸 결과물이 아닌, 그 결과물의 근원인 관찰의 경이로움을 공통적으로 강조하였다. 무엇보다 그들이 말한 관찰은 단순한 들여다봄이 아니라, 관찰자의 (무한한 지적 열망과 도전 의식 같은) 주관적 정신에서 비롯된 몰입의 행위였다. 관찰은 관찰의 대상을 바꿔놓는다. 무신론자는 봉우리로 이뤄진 산등성이를 보며 복잡한 생태계로 진화한 자연 현상으로 보지만, 기독교인은 똑같은 대상이라도 이를 하나님의 아름다운 작품으로 볼 것이다. 어린아이 눈에 비친 동물원 우리 안의 원숭이와 어른이 미소 지으며 바라보는 원숭이가 같을 리 없다. 과학자 뉴턴의 사과와 화가 폴 세잔의 사과가 똑같은 관찰의 결과일 리 없다. 과학자는 “이것은 무얼까?” 하고 묻겠지만, 시인은 “이것에서 무엇이 느껴지는가?”라고 스스로에게 질문한다. 한 가지 방식의 관찰만이 존재할 수 없으므로, 한 개의 진실만이 전부라고 믿는 것은 오판이자 위험한 일이다. 작가 마리나 벤저민은 미술관에서 그림을 지그시 바라보는 것보다 폰 카메라로 작품을 찍는 데 열중하는 사람들 이야기로 글을 시작한다. 그들이 스마트폰에 담은 명작은 SNS에 당당히 재전시되어 다수의 관객들에게 노출될 것이다. 바야흐로 ‘보는 것’보다 ‘보여지는 것’에 무게 중심이 옮겨진 시대가 되었다. 관찰은 그저 보는 것이 아니라 알아차리는 것이다. ‘보다’와 ‘알다’를 동시에 품은 영어의 ‘see’가 그 방증이다. 어떤 대상에 주의를 기울일 때 곧 그 대상을 앎으로써 반응하는 것이 되므로, 본다는 행위는 상호적이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세상은 이미지로 넘쳐나지만 오히려 차분히 들여다보는 능력을 잃어가는 시대에, 허약해진 집중력의 근육을 키워나가는 것이 절실한 듯하다. 우리는 지켜보는 자리에 있음으로써 상황에 참여하며, 변화를 일으키고 수행하게 된다. 그러므로 잘 관찰한다는 것은 행위의 본질을 이해하고 안과 밖을 동시에 살피는 것,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바라보는 행위가 시선이 닿는 영역에 늘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인지한다는 의미다. (본문 9쪽) 관찰하는 나, 관찰되는 나 _ 어디에도 없지만, 어디에나 있는 감시자 관찰의 한 영역으로서 ‘감시’라는 행위를 거론하는 것에 대해 현대 철학자들에게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이유가 있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부르짖은 공리주의 대표자 제러미 벤담이 최초 설계한 원형구조의 감옥, 즉 판옵티콘의 존재와 의미가 현대인들이 치러야 할 감시의 메커니즘의 근원이 되기 때문이다. 중앙 탑의 감시자는 빙 둘러싼 각 감방의 죄수들을 볼 수 있지만, 피감시자는 자신이 감시받고 있는지 여부를 알 수 없다. 다시 말해 ‘자신이 항상 감시받는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것’이 판옵티콘 구조의 핵심 목적이다. 각종 사건 사고를 방지하고 조사할 수 있도록 절대 다수의 동의 아래 설치된 수많은 CCTV는 보호받고 있다는 안심과, 감시받고 있다는 불쾌감을 동시에 선사한다. 스마트폰 카메라의 세상에서 서로 간 찍고 찍히기를 반복하다가, 어느새 의도하지 않은 감시와 피감시가 이루어지는 것을 뒤늦게 깨닫는다. 감시의 주체는 사람을 넘어선다. 커넥팅된 세상에서 나와 너의 취향과 검색의 흔적은 알고리즘이라는 그물에 걸려 국가 기관에, 알 수 없는 서버에, 들어본 적 없는 홍보업체나 데이터 센터 등 세상 어디론가로 낱낱이 전달된다. 주체는 객체가 되고 관찰 대상은 구경거리가 된다. 그리고 디지털 시대에는 이 불균형이 시스템 전체에 만연해 있다. 당신의 몸짓과 당신을 담은 영상, 당신이 서 있는 장소는 탑에 서 있는 감시자 한 명이 아니라 잠들지 않는 알고리즘이 포착하고 분석한다. 시선은 널리 퍼져 있고, 어디에나 있으며 어디에도 없다. 눈은 한 개가 아니라 수백만 개에 이른다. (본문 123쪽) 미셸 푸코는 판옵티콘의 더 큰 목적이 감시가 아니라, 누구든 감시받고 있음을 의식하게 만드는 것에 있다고 말했다. 이 효과는 자기 규율, 즉 내면을 향하는 시선으로 나타나며, 상상으로라도 자신이 누군가의 관찰 대상이라 믿으면 스스로를 추적하게 된다는 점에 있다. 어떤 대상을 바라봄에 있어 윤리적 태도가 동반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겸손함’에서 비롯되어야 한다.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데 있어서 연결과 거리를 동시에 인정하는 것이다. 사람은 많은 것을 볼 수 있지만, 반면 볼 수 없는 것이 더 많다는 점 또한 염두에 둬야 한다. 《뉴필로소퍼》의 철학자는 말한다. 관찰을 줄이는 것보다 더 잘 관찰하는 것이 옳은 방향이라고. 산만한 시대에 두 눈을 질끈 감기보다는, 더 천천히 신중하게, 더 인간적으로 바라볼 것을 당부한 것이다. 다시 데카르트로 돌아갈 때 - 죽음을 의식할수록 삶의 의미가 선명해져 《뉴필로소퍼》의 후반부를 장식하는 국내 인터뷰와 철학 에세이는 공교롭게도 ‘진정한 나 자신을 만나는 법’에 대해 공통된 목소리와 철학적 표지판을 제시하였다. 철학 커뮤니케이터로 활동하며 아카데미가 아닌 일반 대중에게 일상의 철학을 전파하는 박은미는 이번 인터뷰에서 심리적인 나, 논리적인 나, 그리고 무의식의 나를 오롯이 만나는 방법에 대해 조언한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죽는다’는 전제를 늘 의식하는 것이야말로 더 에너제틱하고 선명하게 삶을 이어가도록 만들며, 철저히 홀로 적막 한가운데 놓여 있는 시간을 가져야 그간 잊고 지냈던 순전한 나 자신을 만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문화평론가이자 변호사인 정지우는 요즘과 같은 상시 접속의 시대에 진정한 자아관을 확립하기란 요원한 일이 되었음을 말하고, 자신이 누구이며 어떤 유형의 사람인지조차 AI에게 답을 구하는 세태를 ‘자아의 외주화’라 진단하며 이에 대한 해법을 구하고자 한다. “과거의 인간이 침묵 속에서 사유하며 자기 존재를 확인했다면, 이제 자아는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실시간으로 온라인이라는 외부 저장소에 기록하고 전시할 때 비로소 존재한다고 실감하게 되는 것이다.” (본문 168쪽) 데카르트는 모든 것을 믿을 수 없을 때조차, 유일하게 확실한 것이 하나 있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그것은 바로 ‘생각하고 있는 나’라는 존재 자체다. 댓글이나 ‘좋아요’ 숫자로 증명되는 내가 아니라, 적막과 고독과 혼자만의 생각과 글쓰기로서 만나게 되는 진정한 나 자신부터 대면하는 것이 먼저임을 반복하여 강조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