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
25세 청년 프란치스코가,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복음대로 사는 새 삶을 살기 시작하는 데서부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받으셨던 오상(五傷)을 자기 몸에 받고 세상을 떠나기까지의 생애를 드라마와 인터뷰와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대성당 등을 중심으로 역사적 발자취를 더듬으며 깊이 있고 흥미 있게 간추린 다큐멘터리.
|
|
아씨시의 프란치스코, 자기의 삶으로 그리스도를 재현한 성인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 ( 1182- 1226)는 여느 부유한 집안 배경의 젊은이처럼 인생을 부담 없이 즐기며 살다가 , 25세 때 성서에 나타난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서 새로운 삶의 지평을 열었다. 그는 자기 삶을 물질이 줄 수 있는 풍요와 안락이 아닌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라 살기로 노력함으로서, 그리스도 탄생 천년 훨씬 이후 사람들에게 멋진 설교나 가르침으로서가 아니라 자기 삶으로 그리스도를 재현했다.
생애 -새 출발 프란치스코는 이탈리아 아씨시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는 25세 때, 주님의 부르심을 듣고서, 지난날의 호화롭고 공허했던 삶을 청산하고 복음서의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는 새 삶을 시작한다. 그는 자신의 새 출발을 이해하지 못하는 아버지와 결별하면서 아버지의 유산은 물론 입었던 옷까지 다 벗어서 아버지에게 돌려준다. 그 후, 그는 복음적 가난을 철저하게 실천하면서 "가난뱅이" 순회 설교자로 살아간다. -수도회 설립 그리스도를 완전히 본받으며 살고자 하는 프란치스코를 따르는 "작은 형제들"과 함께, 그는 "프란치스코 수도회"를 설립한다. 하지만, 그의 복음적 가난의 이상이 너무 엄격하다며 완화를 요구하는 형제들 때문에 크나큰 고통을 겪게 된다. 한편, 프란치스코를 영적 스승으로 모셨던 글라라는 프란치스코의 복음적 가난의 이상을 완전히 실천하는 "글라라 수녀회"를 설립했으며, 프란치스코와는 영적 오누이로서의 각별한 우정을 나누었다. -나환우와 자연에 대한 각별한 사랑 프란치스코는 늘 쾌활하고 온유하고 너그러웠으며, 나환우들과 가난한 사람들 안에서 예수님을 만났다. 또한그는 하느님의 모든 창조물을 형제자매로 여기며 사랑을 나누었다. 그가 새들에게 설교하고, 늑대를 회심하게 한 일화는 널리 알려져 있다. -십자가 상의 예수님의 오상을 받다 그가 쓴 '태양의 노래'와 '평화의 기도'는 하느님과 인간과 자연에 대한 그의 영성을 잘 드러내고 있다. 세상을 떠나기 2년 전에, 그는 신비스런 은총으로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오상을 몸에 지니게 된다. 깊은 영성적 체험 안에서 가능한 사랑의 일치의 징표인 것이다. -세상 떠난 지 2년 후 성인으로 선포되다 1226년 10월 3일, 프란치스코는 42세의 나이로 죽음을 맞이했고, 2년 후에 이미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세계 110여 개국에 널리 퍼져 있으며, 한국에는 1937년에 처음 '작은 형제회(프란치스코회)'가 들어 왔고 현재 전국에 30여 개의 프란치스코 남녀 수도회가 있다. 성 프란치스코의 영성에 따라 사는 남녀 수도자(프란치스칸 가족)의 수가 한국에만도 1,200여 명에 이른다.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누구인가? -모든 인간적 제약에서 해방된 새처럼 자유로운 인간 -예수님을 가장 완전히 본받은 성인 성 프란치스코는 인류 역사상 종교, 문화, 사상을 초월해서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인물입니다. 그는 가톨릭교회가 인정한 성인이지만 이미 가톨릭교회의 울타리를 넘어섰습니다. 어떤 종교인도 사상가도, 비록 가톨릭교회에 대해선 부정적인 시각을 가진 사람이라도 프란치스코 성인에게는 사랑과 존경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성인은 성서에서 만난 예수님께 매혹되어 그의 제자가 됨으로 모든 인간적인 제약에서 해방된 자유로운 삶을 시작했습니다. 그는 주님의 가르침을 자기 삶의 근본원리로 선택함으로서 견고한 체제에 묶인 경직된 인간이 된 것이 아니라 공중에 나는 새처럼 자유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그의 자유에 대큰 갈망은 인간 삶에서 가장 필수적인 것으로 여기는 재물로 부터 그를 해방시켰기에,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모든 애착이나 집착에서도 해방될 수 있었습니다. 그의 가난은 세상이 말하는 결핍에서 오는 부족과 비참함이 아니라 하느님을 자기 삶의 모든 것으로 선택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더없는 풍요 체험이었습니다. 성서에 바탕을 둔 그의 파격적인 삶은 당시 너무 부유해서 복음적 생기를 잃고 있는 교회에 복음적 가난의 기억을 일깨우는 충격적 계기를 마련했습니다. 그는 하느님의 뜻 외에는 다른 모든 것에서 해방된 새로운 삶을 통해 세상의 정치권력과 부요함을 수용함으로서 생기를 잃은 당시 교회에 새로운 쇄신의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그는 결코 부패한 교회나 성직자를 비판하지 않고 침묵 속에서 묵묵한 자기 실천을 통해 교회에 신선한 활력을 불어넣었습니다. 당시 교회가 체제유지와 확장을 위해 십자군 모병이라는 광기에 빠졌던 시대에 ,교회에 대한 순종이란 미명 아래 이 광기에 협조했던 다른 많은 이들과 달리, 철저히 복음에 바탕을 둔 복음적 태도를 통해 교회의 참 모습을 증거 하였습니다. 당시 교회가 원수로 여겼던 이슬람교도를 유일신 하느님을 경배하는 형제로 끌어안음으로서 오늘과 내일의 세계에 큰 화약고로 등장하고 있는 이슬람과의 대화에 필요한 상호신뢰라는 다리를 마련했습니다. 성지탈환의 미명 아래 이슬람교도와 전쟁을 벌였던 부끄러운 우리 교회이지만 성 프란치스코의 따뜻한 사랑의 손이 있었기에, 오늘 그들에게 화해의 손길을 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현대 과학 기술의 발달은 인류에게 더 풍요로운 삶에의 갈망은 충족시켜 주었으나 전쟁 지역은 갈수록 확대되면서 정신적인 화약 냄새의 공포와 불안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종교적인 편협성과 정치적 이익의 추구로 서로 불목했던 사람들을 화해시키며 평화의 메세이지를 전했습니다. 오늘 평화를 갈망하는 사람이라면 프란치스코에게서 평화의 지혜를 배울 수 있습니다. 세월의 흐름 안에서 많은 사람들이 간절히 바치는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는 사람들에게 프란치스코의 사랑의 실천이 평화의 효과적인 처방임을 알리고 있습니다. 물질적인 풍요만이 행복한 삶의 기본이란 착각 아래 시작된 극심한 자연파괴는 인간의 기본적인 생활 환경을 극심히 파괴하고 있는 현실에서, 모든 피조물을 하느님의 작품으로 여기며 형제 자매적인 친근함과 사랑을 표시했던 프란치스코의 가르침은 환경 파괴와 오염으로 어두운 그림자를 던지고 있는 세상에 새로운 무지개를 던지고 있습니다. 그는 하느님을 온전히 따르기 위해 물질의 힘과 안락을 포기하고 가난을 선택함으로서,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고 소외된 삶을 살아야 하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진정한 형제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가난이 실패나 하느님의 저주가 하니라 하느님을 온전히 차지할 수 있는 새로운 생활 양심임을 세상에 증명하였습니다. 그의 복음에 바탕을 둔 형제적 삶은 종교의 울타리를 넘으며 모든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공산혁명을 일으켜 피바다를 연출했던 레닌이 말년에 이런 여운 있는 말을 남겼습니다. "내 생애에 성 프란치스코 같은 분이 몇 명이 있었다면 피비린내 나는 혁명은 일으키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이것은 인간다운 삶을 갈망하는 모든 이들에게 공감대를 확산하는 정서이며, 오늘 이 세계가 행복하기 위해선 프란치스코의 지혜를 필요로 합니다. 이런 관점에서 이 작품은 현대인의 감성에 신선한 활력소를 선사할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수도회 이 요한 신부(011-9058-5691) 제공 ------------------------------- 성 프란치스코가 쓴 기도문 '평화의 기도' 나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을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두움에 빛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가져오는 자 되게 하소서 위로받기보다는 위로하고 이해받기보다는 이해하며 사랑받기보다는 사랑하게 하여 주소서 우리는 줌으로써 받고 용서함으로써 용서받으며 자기를 버리고 죽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다. '태양의 노래' 지극히 높으시고 전능하시고 자비하신 주여! 찬미와 영광과 칭송과 온갖 좋은 것이 호올로 당신께만 드려져야 마땅하오니 사람은 누구도 당신 이름을 부르기조차 부당하여이다. 내 주여! 당신의 모든 피조물 그 중에도, 언니 햇님에게서 찬미를 받으사이다. 그 아름다운 몸 장엄한 광채에 번쩍거리며, 당신의 보람을 지니나이다. 지존이시여! 누나 달이며 별들의 찬미를 내 주여 받으소서. 빛 맑고 절묘하고 어여쁜 저들을 하늘에 마련하셨음이니이다. 언니 바람과 공기와 구름과 개인 날씨, 그리고 사시사철의 찬미를 내 주여 받으소서. 당신이 만드신 모든 것을 저들로써 기르심이니이다. 쓰임 많고 겸손하고 값지고도 조촐한 누나 물에게서 내 주여 찬미를 받으시옵소서. 아리고 재롱되고 힘세고 용감한 언니 불의 찬미함을 내 주여 받으옵소서. 그로써 당신은 밤을 밝혀 주시나이다. 내 주여, 누나요 우리 어미인 땅의 찬미 받으소서. 그는 우리를 싣고 다스리며 울긋불긋 꽃들과 풀들과 모든 가지 과일을 낳아 줍니다. 당신 사랑 까닭에 남을 용서해 주며, 약함과 괴로움을 견디어 내는 그들에게서 내 주여 찬양 받으사이다. 평화로이 참는 자들이 복되오리니, 지존이시여! 당신께 면류관을 받으리로소이다. 내 주여! 목숨 있는 어느 사람도 벗어나지 못하는 육체의 우리 죽음, 그 누나의 찬미 받으소서. 죽을 죄 짓고 죽는 저들에게 앙화인지고, 복되다, 당신의 짝없이 거룩한 뜻 좇아 죽는 자들이여! 두 번째 죽음이 저들을 해치지 못하리로소이다. 내 주를 기려 높이 찬양하고 그에게 감사드릴지어다. 한껏 겸손을 다하여 그를 섬길지어다. (최 민순 신부 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