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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도서 산다는 것은
존재의 안부를 묻는 일곱 가지 방법
박범신
한겨레출판 2010.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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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작가의 말

1부 기쁨(喜)
봄꽃들 때문에, 미치겠다! | 봄이 가르치는 도덕 | ‘이층 박씨’의 소망 | 내 인생의 정상을 찾아서 | 산나귀와 집나귀 | 활연화가 부는 존재의 나팔 소리 | ‘주여, 어느덧 가을입니다’ | 안부를 묻는 세 가지 법

2부 노여움(怒)
우리가 잊은 가난 | 버릴 것과 가질 것 | 위경련 | 이런 결혼식을 보았다 | 연애에서의 세대 차이 | 숟가락 꽂아도 자빠지지 않는 고깃국 | 형님 말씀, 이게 어찌 된 셈판인가 | 생명 값에는 서열이 없다 | 갈망의 불꽃

3부 슬픔(哀)
이룰 수 없는 것들에 대한 꿈 | 가을에 겪은 사건 | 아, 아버지 | 늙은 아버지의 비애 | 멸망하는 것의 아름다움 | 바람 속에 나부끼는 것 | 순례자의 꿈 | 한국 작가라는 운명

4부 즐거움(樂)
숨바꼭질하기 좋은 집 | 문단 데뷔에 얽힌 추억 | 고백이 주는 선물 | 당신의 별이 되는 일 | 만약 다시 태어난다면 | 일상의 권태로부터의 해방 | 산악인들이 고봉에 오르는 힘 | ‘보리밥’에서 생각나는 것들

5부 사랑(愛)
사랑의 끝에 무엇이 있을까 | 비 오는 날 밤의 정인(情人) | 여전히, 사랑하는 당신 | 연애가 깃든 생생한 일상 | 취꽃 한 송이가 주는 위로 | 오늘 밤에 만난 가을 | 사랑으로 우리는 무엇을 이룰 것인가 | 삶이 이대로 계속돼도 괜찮은가 | 산다는 것 | 박경리 선생께 | 그리운 당신

6부 미움(惡)
노 전 대통령을 보내며 | 저기 사람이 가네! | 물불을 가리지 않는 사나이 | 대동여지도에 담긴 뜻 | 간도협약 100년, 그 그늘 | ‘남의 떡’ | 배꼽티의 유래와 ‘흥부네 수박’ | 우화, 일류로 사는 일

7부 욕망(慾)
중독 8 | 중독 7 | 중독 6 | 중독 5 | 중독 4 | 중독 3 | 중독 2 | 중독 1 | 생각의 틀을 바꿔야 행복해진다 | ‘쑤욱’과 ‘쓰윽’의 인생 | ‘제3의 눈’ | 결핍과 상처로부터의 해방

저자 소개 1

박범신

 

朴範信

1946년 충남 논산 출생으로 원광대 국문과 및 고려대 교육대학원을 졸업했다. 197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여름의 잔해』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1978년까지 문예지 중심으로 소외된 계층을 다룬 중ㆍ단편을 발표, 문제작가로 주목을 받았으며, 1979년 장편 『죽음보다 깊은 잠』『풀잎처럼 눕다』등을 발표, 베스트셀러가 되어 70~80년대 가장 인기 있는 작가 중 한 사람으로 활약했다. 1981년 『겨울강 하늬바람』으로 '대한민국문학상'을 수상했다. 이후 빛나는 상상력과 역동적 서사가 어우러진 화려한 문체로 근대화 과정에서 드러난 한국 사회의 본질적인 문제를 밀도
1946년 충남 논산 출생으로 원광대 국문과 및 고려대 교육대학원을 졸업했다. 197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여름의 잔해』가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고, 1978년까지 문예지 중심으로 소외된 계층을 다룬 중ㆍ단편을 발표, 문제작가로 주목을 받았으며, 1979년 장편 『죽음보다 깊은 잠』『풀잎처럼 눕다』등을 발표, 베스트셀러가 되어 70~80년대 가장 인기 있는 작가 중 한 사람으로 활약했다. 1981년 『겨울강 하늬바람』으로 '대한민국문학상'을 수상했다. 이후 빛나는 상상력과 역동적 서사가 어우러진 화려한 문체로 근대화 과정에서 드러난 한국 사회의 본질적인 문제를 밀도 있게 그려낸 다수의 작품을 발표하며 수많은 독자들을 사로잡았다.

그의 작품 중 70년대와 80년대에 발표된 작품들은 폭력의 구조적인 근원을 밝히는데 중점을 두고 있으며, 또한 도시와 고향이라는 이분법적인 대립구조를 통해 가치의 세계를 해부하려는 시도로 인해 대중작가라는 곱지 않은 평을 듣기도 했다. '영원한 청년작가'로 불리며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던 중 1993년 돌연 절필을 선언하고 문학과 삶과 존재의 문제에 대한 겸허한 자기 성찰과 사유의 시간을 가졌다. 사유의 공간으로 선택한 곳은 세상에서 가장 높고 멀게 느껴지던 히말라야였다. 에베레스트, 안나푸르나 등 히말라야를 여섯 차례 다녀왔으며 최근에는 킬리만자로 트레킹에서 해발 5895미터의 우후루 피크 정상에 오르기도 했다.

1996년 유형과도 같은 오랜 고행의 시간 끝에 [문학동네] 가을호에 중편소설 「흰소가 끄는 수레」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재개한 후 자연과 생명에 관한 묘사, 영혼의 리얼리티를 추구하는 작품 세계로 문학적 열정을 새로이 펼쳐보이고 있다. 명지대 교수, 상명대 석좌교수를 역임했다.

『외등』은 그가 글쓰기를 떠나기 전의 문학세계와 그 후의 문학성이 어우러져 있는 작품으로, 해방 후의 현대사의 흐름을 같이 걸어온 주인공 서영우와 민혜주, 노상규 이 세 인물들을 통해 잃어버린 사랑의 원형을 찾아 결국엔 죽음에 이르는 피빛 사랑을 그려내면서 해방 후 현대사의 이야기를 전해준다. 『더러운 책상』은 특이하게 '단장'으로 이뤄져 있다. 박범신의 자전적 소설로도 볼 수 있다는 점을 떠올린다면 그가 겪었을 젊은 날의 고뇌들이 그렇게 표현된 것처럼 평가받는다. "새벽이다. 무엇이 그리운지 알지 못하면서, 그러나 무엇인가 지독하게 그리워서 나날이 흐릿하게 흘러가던, 그런 날의 어느 새벽이었을 것이다."라는 그의 말은 예술가로서 인간으로서 살고자 했던 그의 고민을 엿보게 해준다. 작가 박범신은 이 작품으로 창작과비평사가 제정한 2003년 제18회 만해문학상을 수상했다.

『남자들, 쓸쓸하다』에서 박범신은 그의 문학인생 못지않게 녹록치 않았던 남자인생 60년을 이야기한다. 오로지 아들 하나를 욕망하던 어머니의 늦둥이 외아들로, 수많은 복병에도 불구하고 30년 이상 한 울타리를 지켜온 남편으로, 수십 년간 밥벌이를 감당해야 했던 고단한 아버지로 살아온 시간을 돌아보며 이 땅에서 남자로 살아간다는 것의 참된 의미를 짚어본다. 또한 하루가 다르게 변화되어가는 사회 구조 안에서 이제는 점점 설 자리를 잃어가는 남자들, 즉 구시대의 ‘화려한 권력자’에서 이 시대의 ‘쓸쓸한 인간’으로 자리바꿈한 중년 남자들의 현주소를 살펴봄과 동시에, 이제는 사회의 구석자리에서 불안한 헛기침만을 날릴 수밖에 없는 그 ‘쓸쓸한’ 남자들의 진솔한 속내 이야기를 펼쳐 보인다.

『비우니 향기롭다』는 더욱 더 소유하고자 하는 물질 만능주의 현실에서 우리가 잊고 살아가는 '나'를 다시금 돌아보게 하는 안내서이다. 내면의 깊이가 더욱 확장된 저자가 히말라야에서 깨달은 바는 진정한 삶의 행복은 가지려는 마음보다 비우려는 마음에 있다는 것. 이는 바로 불교 철학의 '무소유'와 직결된다. 소비는 많아졌지만 더 가난해지고, 더 많은 물건을 소유하지만 살아가는 기쁨이 더 줄어든 시대. 이 책은 우리에게 삶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정말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한다.

이 외의 작품으로 『죽음보다 깊은 잠』 『풀잎처럼 눕다』 『불의 나라』 『물의 나라』 『겨울강 하늬바람』 『킬리만자로의 눈꽃』 『침묵의 집』 『와등』 『더러운 책상』 『나마스테』등이 있고, 소설집에 『토끼와 잠수함』 『덫』 『향기로운 우물 이야기』 등이, 연작소설에 『빈 방』 『흰수레가 끄는 수레』 등이 있다. 2001년 소설집 『향기로운 우물 이야기』로 제4회 김동리문학상을 수상했으며, 2005년 『나마스테』로 한무숙문학상을 수상했다.

2007년 9월부터 2008년 1월까지 5개월동안 네이버 블로그에 「촐라체」라는 소설을 연재하였다. 이 소설은 2005년 1월 히말라야 촐라체봉(6440m)에서 조난당했다가 살아 돌아온 산악인 박정헌·최강식씨의 이야기를 모티브로 삼았다. 또한 『촐라체』와 『고산자』와 함께 ‘갈망의 삼부작(三部作)’인 은교에서는 실존의 현실로 돌아와 존재의 내밀한 욕망과 그 근원을 감히 탐험하고 있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시란 무엇인가. 소설은 또 무엇인가. 젊음이란 무엇이며, 늙음이란 또 무엇인가. 글쓰기를 통해 자신의 욕망을 풀어내는 '영원한 청년작가' 박범신은 최근에도 『비즈니스』, 『빈방』, 『외등』, 『힐링』,『소소한 풍경』등을 발표하며 꾸준히 글을 써내려가고 있다.

품목정보

발행일
2010년 03월 26일
쪽수, 무게, 크기
272쪽 | 389g | 148*210*20mm
ISBN13
9788984313781

책 속으로

‘산다는 것은’ 왜 오랜 병인가. 오욕칠정(五慾七情) 때문이다. 감각기관들이 느끼는 다섯 가지 욕망과 일곱 가지 정(情)이야말로 모든 인간 존재의 근원이자 빛깔이고 도덕률(道德律)이라 할 것이다. 인생관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사람이 오욕칠정의 감정을 어떻게 조절해가느냐는 기준에 불과하다. 여기 모은 글들은 우리가 시간을 통해 만나는 ‘오랜 병’에 관한 나의 내밀한 ‘혼잣말’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오랜 병은 오랜 꿈이다. 당신이 단지 목표에 불과한 것들을 꿈이라고 착각하면서 숨 가쁜 자본주의적 시간 속으로 내달릴 때, 우리들의 오랜 꿈은, 더 깊고 푸른 갈망은, 상복과 같은 검은 망토를 둘러쓰고 우리들의 등 뒤에 따라와 우두커니 서 있다. 그러니 뒤돌아보라. 당신이 혹시 온갖 핑계로 버리고 왔을지도 모르는 또 다른 당신이 거기 있지 않은가. 이 팍팍한 세상에서, 이 질주의 가파른 레이스에서 진실로 삶이 충만해지는 길을, 등 뒤에 우두커니 서 있는 그는 알고 있을지 모른다. --- '작가의 말' 중에서

봄은 생명이 발화하는 시기다. 꽃이 아름다운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그 꽃이 제 목숨을 바쳐 그것을 피워냈기 때문이다. 미물도 마찬가지고 새들도 마찬가지고 짐승들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소중하게 여겨야 할 것들은 꽃을 피우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과정이지 꽃이라는 결과물이 아니다. 그게 사람이라면 더 말해 무엇 하랴. 사랑하는 이를 위해 열심히 일하는 이는 그 직위나 빈부나 학벌에 관계없이 똑같이 아름답고 고귀하다. 22p
나는 취해 잠든 아내를 오래 내려다보았다. 기미가 끼고 사뭇 똥배도 자리 잡은 아내는 취해 잠들었기 때문인지 나이보다 더 늙어 보였다. 그때 아, 나는 보았다. 아이들이 떠난 텅 빈 집 안, 혹은 잠든 아내와 쓸쓸한 그림자에 덮인 내 자의식 사이로 가을이, 아니 시간이 물밀듯이 밀려 들어와 채우는 것을. 불같았던 한 시대가 가을빛 속으로 속절없이 침몰하는 것을. 그래서 나는 이튿날 늦은 아침 녘, 막 깨어난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제 우리에게 휴머니즘 시대가 도래한 거야.” 나는 하릴없이 창 너머로 시선을 돌렸다. 해맑은 가을 햇빛 아래, 뜰 한 켠에서 제멋대로 자란 키 큰 취꽃이 하얗게 꽃을 피운 채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국화꽃이 무더기로 핀 것도 내다보였다. 간밤에 남몰래 피워낸 꽃들이었다. 그 순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낭만주의 단계도, 리얼리즘 단계도 아니라는 것을 나는 아름답고 고요한 그 가을꽃들 덕에 선뜻 깨달았다. 인생의 진정한 승부는 마지막에 만나는 ‘휴머니즘 단계’에서 어떻게 살아내느냐, 또는 어떻게 죽음을 준비하느냐로 결정된다는 것을. 그래서 가장 중요한 새로운 인생이 지금 막 내게 밀려오고 있다고 나는 느꼈다. --- pp.42-43

내가 요즘 꿈꾸는 것은 대부분 이룰 수 없는 것들뿐이다. 예컨대 ‘영원’이나 ‘불멸’ 같은 꿈. 혹은 완전한 사랑, 완전한 세상에 대한 꿈. 더 이상 쓰지 않아도 될 ‘마지막 한 편의 소설’에 대한 꿈. 이성적으로 보면 백 번 생각해도 불가능한 초월적 꿈인데, 왜 나는 시시때때로 그 초월적 꿈들 때문에 가만히 앉아 있는 어느 순간조차 스스로 화염병이 되어 타오르고 스스로 벼랑 끝에서 투신하고 싶은 욕망으로 진저리치는지 모를 일이다. --- p.87

어떤 꽃은 계속 피고 어떤 꽃은 계속 졌다. 시간이 흐르는 게 아니라 피고 지는 꽃이 시간 속을 흐르는 것 같았다. 아침에 먼저 뜰로 나가 새로 벙글어진 꽃들을 찾아보는 게 제일 행복한 일과였다. 그늘 속에만 있는 것은 햇빛이 드는 쪽으로 옮기고, 너무 바투어 자리 잡은 것은 사이를 벌려주었다. 뜰에만 나와 있으면 과장하건대, 밥도 먹고 싶지 않았고 원고도 쓰고 싶지 않았다. 젊을 때 살던 시골집 마당에도 더러 꽃나무가 있었지만, 꽃이 이렇게 예쁜 줄을 몰랐다. 다른, 젊은 욕망들이 내 주인인 것처럼 나를 사로잡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 살아 있는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꽃만 예쁘고 풀은 예쁘지 않겠는가. 풀은 예쁘고 나무는 예쁘지 않겠는가. 온갖 짐승도 다 그렇다. 예전엔 미운 것이 먼저 눈에 들어왔는데 이제 미운 것은 잘 안 뵈고 예쁜 것만 먼저 뵌다. 얼마 전까지 미웠던 사람조차 다시 보니 예쁜 게, 참 이상하고 오묘하다. 예쁘기만 한 게 아니라 눈물겹다. --- pp.102-103

돌아보면, 나는 평생 나 자신에 대해 썼다. 그건 사실이다. 스토리는 비록 꾸며냈을지언정 그간 써낸 수십 권의 소설 어느 한 페이지도 내가 깃들여 있지 않은 페이지는 없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가령 삼십대에 쓴 나의 작품들은 나의 삼십대를 어떤 의미에서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고, 사십대에 쓴 작품들 역시 내가 경험하고 사유했던 그 당시의 나에 대한 은유와 고백을 내포하고 있다. 그러나 그 시절의 작품들에 깃들여 있는 나는 하나의 부스러기나 이미지, 혹은 숨긴 꿈의 파편 같은 것이어서 일반적인 의미로서의 고백이라고 하기엔 무리가 있을 것이다. 내가 깃들지 않은 작품은 없겠지만, 사실적 의미로서의 나는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적인 의미로서의 나는커녕 삼사십대의 글쓰기는 오히려 사실적인 나에게서 떠나는 먼 유랑으로서의 소설 쓰기는 아니었던가, 생각하고 있다. --- p.134

창가를 서성거리는데 때 없이 입에선 노래가 나온다. 외출한 아내 모르는 나의 꿈은 그것이다. 별이 되고 싶다는 것이다. 누군가 당신, 한세상 다하여 돌아가는 꿈에 조용히 고개 들고 보라. 저기…… 저무는 하늘가에 별이 하나 환하고 정갈하게 떠 있다. 내가 당신의 그 별이 된다면 좋겠다. 그것이다, 내 남은 꿈은. --- p.141

다른 건 바라지 않겠습니다. 늘 환하게 사십시오. 봄꽃은 소월의 시에서처럼 ‘저만치’에서 황홀하게 터져 나오고 있습니다. 그 ‘봄꽃’과 우두커니 그것을 바라보고 서 있는 ‘나’ 사이의 거리 따위는 그만 잊겠습니다. 지금 떠오르는 당신의 모습이 수십 년 전의 당신인 것도 같고, 엊그제 꿈속에서 만난 당신인 것도 같고, 또는 전생의 당신인 것도 같습니다. 부드러운 안개가 흘러가지만 ‘천 년 전부터’ 거기 있었던 벚꽃 환한 그늘에 은신한 당신이 비로소 따뜻하고 넉넉하게 미소 짓고 있는 모습을 보니, 이 봄날이 참 환합니다. --- p.171

외부로 열린 문을 닫으면 내면의 뜰이 넓어지는 게 인지상정이다. 넓어진 내면의 뜰로 돌아가 혼자 가만히 앉아 있어 보면 누구나 악을 쓰며 달려온 지난여름의 방종과 오만과 오류와 편견도 막힘없이 볼 수 있다. 내가 밟고 선 풀 한 포기의 비명 소리도 그때 비로소 들리고 내가 버리고 온 옛 꿈이 나를 부르는 소리도 마침내 환히 들린다. 잎새를 흔들고 가는 바람 소리가 가슴에 사무치고 오래전 헤어진 첫사랑의 그림자가 불현듯 나를 덮칠 때, 그리하여 숨 가쁘게 달려오느라 미처 보지 못한 내 삶의 물집들이 눈물겹게 시선 속으로 들어올 때, 바로 그런 가을이야말로, 마실 나갔던 본성이 내 영혼 속으로 되돌아와 나를 깨우는 축복의 시간이다. --- p.189

그는 ‘미워하지 말고 원망하지 말라’고 했지만 고백하건대, 우리는 남아서 미워하지 않을 수 없고 원망하지 않을 수 없을 터이다. 미워하는 것으로 양다리를 걸쳤던 나의 부끄러움을 감추고, 원망하는 것으로 나의 명목적인 도덕성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를 지키지 못한 것은 용감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감성과 이성을 각각 딴 주머니에 넣어두고 시치미를 뚝 떼고 마는 우리의 부정직한 이중성, 혹은 과실을 핑계로 한 비겁한 삶의 전략에 그 연유가 있다. 혹시 나는, 우리는 우리 짐을 대신 짊어지게 할 ‘짐꾼’을 잃어 지금 울고 있지는 않는가. --- p.210

이 가을에―나는 당신을 잡아먹고 싶다. 이를테면 세상을, 세상의 모든 언어들을, 세상의 언어의 모든 살점들을, 피를, 게걸스럽게 뜯어 먹고, 남김없이 빨아 먹고 싶다. 정말이다. 가을이 깊을수록 나의 욕망은 더욱 난폭해지고 있다. 나는 자주 쩝 하고 비명을 지르려고 입을 벌린다. 왜 나는 쓰고 싶은 말의 감옥으로부터, 혹은 수천의 ‘나비 떼’로부터, 혹은 내 안에 도사리고 있는 ‘짐승’으로부터 해방되지 않는가.

--- p.245

출판사 리뷰

오랜 병, 오랜 꿈에 관한 나의 혼잣말

5년 만에 펴내는 박범신 작가의 신작 에세이 『산다는 것은』은 우리가 시간을 통해 만나는 ‘오랜 병’에 관한 작가의 내밀한 혼잣말을 담고 있다. 산다는 것이 오랜 병이라는 소크라테스의 말처럼, 인간 존재의 근원인 다섯 가지 욕망과 일곱 가지 정(오욕칠정)의 감정을 어떻게 조절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인생처럼, 작가는 인간 본연의 오욕칠정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혼자될까 봐 두려워 평생 소설을 썼다’는 작가 박범신. 이 책에서는 삶과 사랑, 일에 대해 작가로서, 아빠로서, 남편으로서의 진실한 그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그는 봄에 꽃이 피고 꽃이 지는 모습에 슬퍼 눈물을 흘리고, 글을 쓰지 않을 때는 ‘이층 박씨’가 되어 집 구석구석을 정리하고 수리하고 화단을 가꾼다. 깊은 밤 아내의 방귀 소리를 존재의 나팔 소리라며 해맑다고 칭찬하는 그는, 계절의 변화에 따라 흔들리는 자신의 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사람을 만나면서 느끼는 점들을 솔직담백하게 그려낸다. 삶에서 느끼는 소박하고 소소한 이야기들을 통해 나이를 먹는 것에 대하여, 존재의 안부를 물으면서, 인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고민하고 성찰하며, 되짚어보게 한다. 또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작가로서, 오랫동안 진행되어왔던 결혼 관행에 대해 비판하고, 어머니의 제사상을 차리면서 ‘한우 쇠고깃국’을 고민하고, 이주노동자들의 죽음에 대해 비통해하며, 다양한 문화와 인종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제안한다.

나는 살았고, 오로지 썼고, 언제나 사랑했다!
내 남은 꿈은 순례자가 되는 것, 그리고 당신의 별이 되는 일!


“살았다, 썼다, 사랑했다”는 스탕달의 말처럼 작가 박범신도 “나는 살았고, 오로지 썼고, 언제나 사랑의 열망이라는 뜨겁고 황홀한 감옥 속에 갇혀 있으며, 지금도 그렇”다고 고백한다.(169p) 특히 이 책 곳곳에선 그의 글쓰기에 관한 고민과 열정과 아픔과 고통을 절절히 느낄 수 있다. 그의 초기 작품 〈우리들의 장례식〉을 쓰게 된 동기를 들려주며 다른 사람의 가난과 불행에 대해 분노하지 않는 우리 자신들의 모습에 대해 물어보고, 오래 쓴 책상을 바라보며 작가의 길을 가게 만들었고, 아이들 셋을 먹이고 가르쳤던 기억을 더듬는다. 또한 소설 한 편을 끝낼 때마다 매번 습관적으로 위경련을 겪었던 십 년, 이십 년, 삼십 년 전의 삶을 되돌아본다. 결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내에게 주는 선물로 쓴 〈여름의 잔해〉를 통해 문단에 등단하고, 다시 태어나면 절대 아버지, 작가, 남편이 되지 않겠다는 그의 이야기는 우리의 가슴을 울린다.
사랑의 끝에는 사랑이 있다고 말하는 아내와 함께 살며, 글쓰기는 일종의 연애와 같다고 말하는 작가. 어떠한 글을 쓸 때도 독자에게 작업을 거는 기분으로 쓴다는 그는 7부의 글 〈중독〉 연작을 통해 아파서 원고를 쓰지 못할까 봐 걱정하고, “세상을, 세상의 모든 언어들을, 세상의 언어의 모든 살점들을 남김없이 빨아 먹고 싶”어 하고, 쓰고 싶어 잔뜩 독이 올라 있으며, 농담처럼 소설은 육십 세가 넘으면 쓰지 못하도록 법으로 제한했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소설이 끝날 때 존재에 깃든 목숨 하나 끝내는 것이라고 느끼는 그에게서 글쓰기에 미친 작가의 솔직한 내면을 엿볼 수 있다. 더불어 스스로 ‘낙지’라 부르는 가슴속의 늙지 않는 짐승을 이야기하며, 늙지도 죽지도 않는, 죽지 않기 위해 현재에도 계속해서 소설을 쓰고 있는 그는, 한국 작가의 운명을 넘고 싶다고 소망한다.
그는 아내에게 말한다. “언젠가, 내 책임으로부터 쏙 빠져나가도 크게 표 안 난다고 생각되면, 난 순례자가 될 거야. 그것이 나의 감춰둔 오랜 꿈이었어. 바랑 하나 메고 히말라야 같은 데로 훌쩍 떠나고 나면, 나를 절대 찾지도 말고 애달피 생각하지도 마”(112p)라고. 그러면서 그는 순례 길로 나서고 싶은 건 인간 본질의 하나라며 한 해를 보내고 겨울 숲을 보면서 순례의 길로 나서고 싶은 꿈을 은밀히 내비친다. 또한 조용한 집 안에서 히말라야를 떠올리며 창가를 서성이며 노래한다. “누군가 당신, 한세상 다하여 돌아가는 꿈에 조용히 고개 들고 보라. 저기…… 저무는 하늘가에 별이 하나 환하고 정갈하게 떠 있다. 내가 당신의 그 별이 된다면 좋겠다. 그것이다. 내 남은 꿈은.”(14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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