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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머리에
평범한 농부의 아들 성소 도망병 배우기 힘든 신학 보좌 신부 아르스의 본당 신부 극기와 표양 제일 아름다운 것은 하느님을 위하여 가장 가난한 이들의 집 사랑의 깊이 사탄 영혼들의 포로 도주의 시도 재치 있고 남을 돕기 좋아한 신부 마지막 영성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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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 없는 삶에 희망을 던져 준 성인!
사람들은 누구나 한 가지 이상의 꿈을 품는다. 그래서 그 꿈을 이룰 날을 가슴 설레며 손꼽다가도 어느 날 문득 ‘내 꿈은 뭐지?’라는 엉뚱한 질문을 자신에게 던진다. 왜냐하면 우리는 인생사에서 여러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목표를 포기한다든지, 주체성 없이 삶의 방향을 제멋대로 바꾸는 사이 그때마다 꿈을 쉽게 잊어버린다든지, 아니면 각박한 현실에서 물질적 안락만을 좇느라고 꿈은 단지 사치에 불과하다는 어리석은 판단으로 아예 꿈조차 꾸지 않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든 자신을 두둔하더라도 지금 당장 꿈이 없다는 사실은 무척이나 맥 빠지는 일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처음 품었던 꿈을 온전히 간직해 이룰 수 있을까? 지독한 방해와 좌절이 있더라도 어떻게 하면 이를 극복하고 그 꿈을 지킬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해 명쾌한 해답을 내놓은 이가 있으니, 그가 바로 아르스의 성자 성 비안네 신부다. 평범함 속에서 뚜렷한 목표를 좇는 성인! 프랑스 대혁명으로 온 나라가 피로 얼룩지고 여기저기서 긴장이 도사리는 가운데, 1786년 리옹 교외의 시골 마을에서 비안네가 태어났다. 당시 프랑스는 가톨릭 성직자와 수도자들을 추방하고 살해하는 정책을 펼쳤다. 그래서 비록 한적한 시골이라고 하더라도 그곳 역시 불안정한 정국의 여파가 미쳤기에, 비안네는 성당을 맘 놓고 다닐 수 없었다. 더구나 생활이 녹록지 않은 부모님을 도와 농사일에 매달리며 하루하루를 지내다 보니, 정상적인 교육도 제대로 받을 수 없었다. 이렇듯 어린 시절을 불안과 힘겨운 노동으로 보낸 비안네였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남모를 뜨거운 열망이 있었다. 바로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제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상황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비록 18살 때 겨우 부모님의 허락을 받고 에퀼리 본당의 발레 신부에게서 사제로서 필요한 교육을 받았지만, 수업을 따라가기엔 워낙 기초교육이 부족하고 그 능력이 떨어졌기에 그때마다 좌절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그 와중에 징집을 당해 사제의 길이 아닌 곳으로 내몰리기도 한다. 제대 후 신학교에 입학한 비안네는 한참 뒤떨어지는 라틴어 실력 때문에 동료들에게 비웃음을 당하기 일쑤였고, 결국 그 능력을 의심 받아 1년 만에 퇴학당하기에 이른다. 보통 조롱과 야유, 퇴학이라는 극단적 조치를 받으면 우리는 이내 좌절하고 다른 길을 찾아 나설 것이다. 그러나 비안네는 그렇게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여전히 그의 마음속에는 간절함이 애끓고 있었기 때문이다. 신학교는 이 특별한 경우를 인정해 비록 수학능력은 떨어졌지만, 항상 기도하는 생활을 하는 이 신학생에게 사제품을 주게 된다. 드디어 비안네는 1818년 230여 명의 주민이 전부인 아르스에 본당 신부로서 부임한다. 이곳이 바로 그가 남은 42년을 바쳐 하느님의 사랑을 일굴 터전이었다. 한적한 시골 마을이었음에도 유희와 쾌락이 난무한 아르스에서 비안네 신부는 처음에 엄격함을 고수했다. 그는 하느님을 향해 철저히 회개해야만 그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차적으로 자신에게 엄격한 고행의 잣대를 적용했다. 각종 갈고리가 달린 채찍으로 인한 육체적 고통을 이겨내는 고행, 빵 몇 조각과 물 한 잔으로 허기를 버티는 극도의 금식, 개인적 안위를 돌보지 않고 옷이든 잠자리든 필요한 이에게 양보한 후 형편없는 상태에서 생활하는 청빈, 단 한 번도 적정 수면시간을 지키지 않는 수면 부족 상태의 지속 등 주위의 걱정을 살 만큼 비안네 신부의 고행은 엄격을 넘어 지나칠 지경이었다. 그렇다면 이 같은 엄격함이 그를 성인의 자리에까지 올라서게 한 것일까? 살아 있는 성인으로 추앙받는 신부! 비안네 신부는 스스로 엄격한 잣대를 적용해 생활했지만, 본당 주민에게는 하느님께서 주신 사랑의 잣대를 제시했다. 그래서 비안네 신부의 친절, 자애심,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타인을 도와주는 모습은 주민들의 감동을 이끌어 내기에 충분했다. 또한 그는 갖가지 미사여구를 써서 어렵게 강론하는 당시의 사제들과 달리, 간단명료하고 직설적이지만 사람의 마음에 더 강렬한 여운을 남기는 방식으로 강론하였다. 허풍쟁이라는 주위의 비아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비안네 신부는 자신이 마귀들과 치른 싸움을 계속 증언하였다. 왜냐하면 그에게 그 싸움은 하느님을 향한 기도와 단식으로 거둔 승리의 증거이기 때문이었다. 개인의 안위를 돌보는 데는 무심경한 비안네 신부였지만,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위해서는 그 누구보다 앞장섰다. 그래서 가출해서 떠돌거나 부모 없이 고생하는 어린 소녀들을 위해 그나마 있던 전 재산을 들여 프로비당스(섭리)라는 학교를 세우기도 한다. 드디어 세? 사람들은 자신의 편안함보다는 타인의 평안을 위해 몸소 실천했던 비안네의 제 가치를 알아보게 된다. 그의 명성은 아르스의 주민 230명만이 아니라 프랑스 전 지역으로 퍼져, 한적한 시골 마을이 그를 보려고 찾아오는 사람들로 북적대기에 이른다. 다른 사제들은 낯선 나라까지 가서 죄인들을 구제해야 했지만, 비안네 신부의 경우에는 죄인들이 그를 보러 아르스로 몰려들었다. 그는 프랑스 혁명 이후 실증주의가 팽배했던 19세기 중엽에 자신의 영적 빛에 이끌려 몰려든 수많은 영혼들에게 마음의 평화와 구원을 얻게 해 주었던 것이다. 순례자들은 모두 비안네 신부의 진심어린 충고를 들으려고 왔는데, 평균적으로 1년에 이만 명에 달했다. 어쩌면 아르스의 신부로서는 그저 달가운 일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쉼 없이 몰려드는 사람들 덕분에 그는 하루에도 18시간 이상씩 고해성사를 보아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안네 신부는 이를 거절하지 않고 70세가 넘어설 때까지 고된 생활을 지속했다. 고행을 고행이라 여기지 않고 순순히 받아들여 열심히 생활한 비안네 신부는 1859년 여전히 고해성사를 보려고 몰려드는 사람들을 뒤로 하고 하늘의 별이 되었다. 그리고 곧 그는 본당 주임 신부로서는 최초로 성인으로 추앙되었으며, 1929년 드디어 ‘본당 신부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내 안의 성성을 일깨워 주는 성인! 평생에 걸쳐 남루한 수단을 입고 거의 먹지도 자지도 않는 생활을 하며 하느님의 기적을 행한 비안네 신부는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가? 그처럼 절제하고 금욕하며 청빈하게 살라는 게 아니다. 다만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는 사제가 되기 위해 그토록 충실한 삶을 살아 낸 열정, 타인의 비웃음에도 굴하지 않고 자기의 뜻을 좇았던 용기, 인간적 믿음에 따라 봉사했던 우리를 향한 사랑 등 그는 우리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 준다. 또한 하느님께 선택받은 특별한 사람이 성인으로 태어나는 게 아니라, 조금 부족한 듯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마음만 먹는다면 자기 안의 성성을 충분히 발휘해 누구나 성인이 될 수 있다는 진실도 새삼 깨닫게 해 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