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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목차 서문 1장. 카르티에와 세인트로렌스 강 2장. 샹플랭 3장. 졸리에, 마르케트 그리고 10만 줄기 강물의 강 4장. 라 살과 더 거대한 뉴프랑스 5장. 라디송과 거대한 북서부 6장. 몽칼름과 뉴프랑스의 몰락 7장. 폰티악과 인디언 패권의 마지막 희망 8장. 회색 가운과 검은 가운 9장. 이로쿼이족과 휴런족 10장. 쿠뢰르 드 부아와 보야저 11장. 세뇨르와 아비탕 copyrights (참고) 분량: 약 6.1 만자 (종이책 기준 약 103 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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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도한 물줄기가 짠 바닷물을 밀어내며 백 리그나 신선함을 더해주던 그 강에 대해 그는 말했네. 호첼라가 고지 위에 십자가와 왕관을 세웠을 때 두 눈에 가득 찼던 그 영광스러운 풍경에 대해 말했네. 그리고 캐나다의 열쇠를 품은 저 요새 절벽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바다 건너 사선을 넘고 돌아온 자크 카르티에를 환영했네." ?T. 다시 맥기 의원 거의 400년 전, 호탕한 헨리 왕이 '흥겨운 영국'을 다스리고 프랑수아 1세가 '햇살 가득한 프랑스'를 통치하던 시절, 서쪽 멀리 있는 땅에 관한 기이한 이야기들이 영국 서부와 프랑스 북부 항구들에 전해졌다. 콜럼버스의 항해는 유럽 전체의 화제였다. 스페인 사람들이 콜럼버스가 도달한 거대한 신세계가 보화 가득한 경이로운 동방으로 가는 지름길이 될 것이라며 기뻐하고 있을 때, 영국 모험가들의 선구자인 브리스틀 항의 존 캐벗은 서쪽으로 돛을 올렸고 아마도 콜럼버스만큼이나 빨리 대륙을 목격했을 것이다. 두 사람 모두 처음에는 섬을 발견했는데, 콜럼버스는 서쪽으로 향하던 길에, 캐벗은 해안선을 따라 항해한 끝에 발견했다. 이처럼 북쪽의 영국에서 남쪽의 스페인에 이르기까지, 항구 도시 사람들은 바다 너머 거대한 땅에 관한 이야기로 꽃을 피웠다. 북부 프랑스 항구의 강인한 선원들이 이 탐색의 대열에 합류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으며, 거의 반세기 동안 모험심 넘치는 이들의 배들은 뉴펀들랜드의 대구 어장을 방문해 생선을 가득 싣고 돌아왔다. 영국의 브리스틀이나 프랑스의 생말로 혹은 디에프와 같은 항구에서, 수개월의 긴 부재 끝에 배가 돌아와 선원들이 열성적인 청중에게 무용담을 들려줄 때의 그 열기를 상상해 보라. 자크 카르티에는 이런 분위기 속에서 꿈을 키우며, 자신도 하루빨리 어른이 되어 그 신비로운 땅을 직접 보고 싶어 했다. 영리하고 야망 있는 소년이었던 그는 선장이 되었을 무렵 이미 큰 명성을 얻었다. 국왕은 그를 직접 불러, 당시 아시아 동부 해안의 돌출부 정도로 여겨졌던 뉴펀들랜드 인근 아메리카 해안에서 통로를 찾을 가능성을 논의했다. 카르티에가 브르타뉴의 동료 어부들과 함께 대구 어장을 수차례 왕래했다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그들의 진취성은 '케이프브레턴(Cape Breton)'이라는 지명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프랑수아 1세는 영국과 스페인이 거둔 위대한 발견에 프랑스도 한몫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실제로 스페인 국왕이 신세계 전체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자, 이에 불쾌감을 느낀 프랑수아 1세는 이렇게 외쳤다고 전해진다. "우리 인류의 조상 아담의 유언장 중에 이 멋진 유산을 그에게만 물려준다는 조항이 있는지 내 꼭 확인해보고 싶구려." 1534년 어느 4월의 날, 카르티에는 선원들에게 알려진 해안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탐색하고 더 짧은 항로로 인도와 동방의 보물에 도달하겠다는 희망을 안고 60톤급 선박 두 척에 몸을 실었다. 항해 도중 그는 지금의 벨아일 해협에서 라로셸(Rochelle)에서 출항한 거대한 선박과 마주쳤는데, 이는 해당 해역이 이미 프랑스 선원들에게 낯설지 않은 곳이었음을 입증한다. 카르티에 일행은 계속해서 서쪽으로 나아갔다. 빙산이 떠다니는 차가운 해협을 지나 지금의 세인트로렌스 만으로 들어섰을 때 그들이 느꼈을 감흥을 상상해 보라. 그곳의 7월 열기는 너무나 압도적이어서 그는 그곳을 '샤뢰르(Chaleur, 열기) 만'이라 명명했으며, 그 이름은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이 해안가에는 구즈베리, 딸기, 라즈베리와 장미가 지천으로 널려 있었고 강에는 연어가 가득했다. 7월 24일, 그들은 오늘날 우리가 '가스페(Gaspe)'라 부르는 곳에 도착하여 프랑스의 백합 문장과 '프랑스 국왕 만세(Vive le Roi de France)'라는 문구가 새겨진 방패를 단 거대한 십자가를 세웠다. 카르티에는 자신이 인도로 가는 길목에 있다고 굳게 믿었기에 인디언(Indians)이라 불렀던 원주민들은 매우 우호적이었다. 그는 추장의 두 아들을 설득해 프랑스로 데려가기로 했다. 장기 체류 준비가 되지 않았던 데다 폭풍우를 우려한 그는 귀국길에 올랐고, 9월 초 생말로 항에 다시 입항했다. 대담한 상상력을 지닌 그에게 프랑스 궁정에 선보일 두 인디언 왕자의 존재는 다음 해의 탐험대를 준비하는 데 더할 나위 없는 자산이 되었다. 1535년 7월, 그는 세 척의 소형 선박과 함께 다시 생말로를 떠났다. 국왕의 임무를 띠고 자신의 가치를 증명해 보인 생말로의 아들, 그리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인디언 왕자들을 태운 배들이 닻을 올릴 때 항구에 가득했을 설렘을 떠올려 보라. 8월에 거대한 만에 진입한 그는 인디언 왕자들의 지식에 힘입어 대담하게 항해를 이어갔다. 그러다 강둑이 좁아지는 것을 보고 자신이 만을 벗어나 거대한 강으로 들어서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들은 현재 퀘벡(Quebec)이 자리 잡은 좁은 목 부분에서 멈춰 섰다. 그곳에는 휴런-이로쿼이어로 '날개'(두 강 사이의 지형을 의미)를 뜻하는 '스타다코나(Stadacona)'라는 마을이 있었고, 그곳에서 인디언 추장 돈나코나(Donnaconna)를 만났다. 그들은 이 추장을 오두막 집단의 우두머리인 '캐나다의 영주'로 예우했다. '캐나다(Canada)'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공식 접하게 된 순간이었다. 카르티에는 이 땅을 '뉴프랑스'라 명명하고 점유권을 선포했다. <추천평> "식민지 시대 뉴프랑스의 간략한 역사. 이 책의 세부 묘사는 카르티에의 세인트로렌스 강 항해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7년 전쟁 중 영국의 퀘벡 정복으로 끝난다. 역사적 사건과 그에 영감을 준 인물들, 즉 까르띠에, 샹플랭, 루이 14세 등에 대한 훌륭한 세부 묘사가 포함되어 있다. 또한 퍼스트 네이션과 원주민에 대한 매우 공감적인 시각을 담고 있어, 100년 전 출판된 작품이라는 점에서 아주 기분 좋게 느껴지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덧붙이자면, 이 책은 특이한 역사적 상황 속에서 집필되었다. 이 책이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캐나다 국민과 프랑스 국민 간의 우정의 상징이 된 책이었다." - kies, Goodreads 독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