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책을 펴내며5
제1부 그 얼굴의 자서전 내 마음의 꽃밭19 고향의 겨울22 그 얼굴의 자서전26 남자의 인생30 세상사, 그리고 행복의 비밀34 실버들38 다시 보는 전원일기41 덕수궁 돌담길45 먹고 산다는 것49 따뜻한 천원의 행복52 별을 우러르는 마음56 제2부 인생은 노래방 무대 설날, 새로운 시작의 약속63 어머니 문갑67 가시고기71 아리랑 고개75 5대五代가 이어온 애주가 집안79 능수버들 앞에서82 인생은 노래방 무대85 청려장靑藜杖88 철부지, 때를 아는 지혜91 가요무대, 삶의 멜로디95 식구라는 말의 온기98 제3부 조국 찬가 애국가 천천히 걷는 길105 노년, 새로운 시작의 문턱에서108 달빛에 묻은 그리움112 봄이 오는 길목에서115 봄이 오는 소리119 계단 위의 봄122 조국 찬가 애국가126 첫사랑의 추억130 왕과 사는 남자134 인정人情138 청춘극장142 제4부 가을, 그렇게 스며들다 도심 속 하루 여행149 대한민국153 새 시대 삼종지도三從之道157 밥메리카노161 돈방석 시대165 한식 제사169 프로야구와 정치173 친구의 아들177 쥐불놀이181 시간과 역사 속으로185 가을, 그렇게 스며들다189 제5부 여생, 바람이 머무는 자리 삼기호수와 명상의 다리195 사도세자199 석촌 호수와 삼전도비203 서오릉 숲길207 야생 고라니의 죽음210 여생, 바람이 머무는 자리214 김장철218 개 팔자 상팔자222 의릉懿陵 답사기226 하얼빈230 황혼길에 본, 내 삶234 |
이황연의 다른 상품
|
덕수궁은 본래 조선 9대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月山大君)의 사저였다. 임진왜란으로 한양의 모든 궁궐이 불타 버리자, 1593년 선조는 이곳을 임시 거처인 정릉동 행궁으로 사용하였다. 이후 광해군이 이곳에서 즉위하고 경운궁(慶運宮)이라 정식 궁 호를 붙였다. 그 후 창덕궁으로 왕궁을 옮기면서 경운궁은 별궁으로 남게 된 것이다.
경운궁이 다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 것은 1898년 고종 황제가 ‘아관파천’ 후 이곳으로 환궁하면서부터다. 고종은 이곳에서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로 즉위하며 환구단을 세워 황제국의 위엄을 드러냈다. 하지만 1907년 고종이 일제에 의해 강제 퇴위당하고 순종이 창덕궁으로 이어 하면서, 경운궁은 고종의 장수를 기원하는 뜻에서 덕수궁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현재 덕수궁 경내에는 다양한 건축물들이 조화를 이루며 자리하고 있다. 덕수궁의 정문인 대한문을 들어서면, 위엄 있는 정전인 ‘중화전(中和殿)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대한제국 선포 후 지어진 중화전 답도 에는 황제를 상징하는 두 마리의 용이 새겨져 있어 그 의미를 더한다. 덕수궁에서 특히 주목할 만한 건물은 석조전(石造殿)과 정관헌(靜觀軒)이다. 석조전은 1910년에 준공된 대한제국 최초의 서양식 석조물로 그 웅장함을 자랑하고 있다. 이어지는 건물 팔각정은 정관헌 서양식 건축물과 한국의 전통 건축양식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독특한 건축물이다. 고종 임금이 커피를 마시며 외교 사절들을 맞이한 곳이었다. 또한 고종 황제가 승하한 침전인 함녕전(咸寧殿)과 임진왜란 이후 선조의 임시 거처로 사용되었던 석어당(昔御堂)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1904년 덕수궁 화재 이후 고종이 잠시 거처를 옮겼으며 ’을사늑약‘이 체결된 비운의 장소 중명전(重明殿) 등은 격동의 근대사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다. ---〈덕수궁 돌담길에서〉 중에서 아리랑은 한국을 대표하는 민요다. 아리랑의 정확한 기원과 유래는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오랜 세월 동안 한국인의 삶과 애환을 담아 전승되어왔다. 강원도 정선, 경상남도 밀양, 전라남도 진도 등 지역별로 다양한 ‘아리랑’이 존재하며, 각 지역의 역사와 문화적 특색을 반영하고 있다. 특히, 일제 강점기에는 아리랑이 민족의 아픔과 독립에 대한 염원을 담아 불리며, 민족의 노래로 자리매김했다. 기쁨, 슬픔, 그리움 등 다양한 감정을 표현하며, 한국인의 삶과 애환을 담은 소중한 문화유산이다. 2012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민족의 화합과 통일을 염원하는 상징적 의미도 지니고 있다. 일제는 조선의 경제적 기반을 붕괴시키기 위해 토지조사 사업을 시행하여 많은 농민의 땅을 빼앗았다. 그로 인해서 많은 농민이 소작농으로 전락하거나 만주 등지로 떠나야 했다. 또한, 산업 현장에서는 조선인을 험난한 노동 환경으로 내몰았고, 특히 일본으로 강제 징용된 노동자들은 극한의 노동과 학대를 견뎌야 했다. 심지어 여성들은 ‘위안부’로 끌려가 인간 이하의 삶을 강요받았다. 문화적으로도 일제의 탄압은 가혹했다. 조선어 사용이 금지되었고, 학교에서는 일본어 교육이 강제되었으며,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부정하는 ‘식민사관’이 주입되었다. 전통적인 민속놀이와 문화 행사도 금지되었고, 심지어 사람들의 이름까지도 일본식으로 바꾸도록 강요하는 ‘창씨개명’ 정책도 시행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서 제작된 영화 아리랑은 일제의 압제에 신음하는 조선인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그려 내며, 독립을 향한 염원을 담아냈다. ---〈아리랑 고개〉 중에서 1988년 9월 17일, 서울올림픽이 개막되던 날. 전 세계의 눈과 귀가 한반도 남쪽, 서울 잠실 올림픽주경기장으로 향해 있었다. 성화가 활활 타오르고, 평화의 상징인 비둘기가 하늘로 날아올랐다. 그리고 이어서 장엄한 선율이 경기장에 가득 울려 퍼졌다. “동해 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한국의 국가 애국가였다, 조국의 이름을 부르는 그 노래가 울려 퍼지는 순간, 관중석 한편에서 서양 할머니 한 분이 조용히 눈물을 훔치고 계셨다. 그는 올해 일흔이 된 스페인 국적의 ‘롤리타 탈라베라 안’ 여사였다. 세월은 흘렀지만, 그녀의 가슴속엔 여전히 생생히 살아있는 기억이 있었다. 1936년, 나치 독일의 수도 베를린에서 열렸던 그 올림픽의 장면들 말이다. 그날 한 젊은 조선인이 구깃구깃한 악보 한 장을 손에 쥔 채, 분주히 뛰어다녔다. 그는 커다란 몸짓과 억센 평안도 사투리로 자신의 곡을 설명하고 있었다. “이건 조선 응원가요! 조선의 피가 흐르는 우리 응원가요!” 그렇게 그는 재독 동포들 앞에서 자작곡을 부르며 조선 응원단을 응원했다. 그의 두 눈은 반짝였고 손끝은 떨렸다. 그 노래는 바로 오늘, 88서울올림픽의 하늘을 가른 그 노래, 애국가였다. 그 젊은이가 바로 우리의 애국가를 만든 안익태였다. 조국은 아직 독립을 이루지 못한 채, 일본의 이름으로 올림픽에 출전했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았다. “조선에도 노래가 있다. 이름도 없이 빼앗긴 나라에도 가슴을 울리는 노래가 있다”라고 외치듯, 그는 그 곡을 만들고,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보름 뒤, 손기정 선수가 일장기를 단 채 마라톤 1위로 결승선을 통과하던 순간, 관중석 한편에서 그 노래가 다시 울려 퍼졌다. ---〈조국 찬가 애국가〉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