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序
십일 전 삼일 전 하루 전 첫째 날 둘째 날 셋째 날 십일 후 |
|
와카에도 소양이 깊다. 서책들도 가까이 한다. 아주 옛날의 선승 겐신(源信)이 썼던 왕생요집(往生要集)을 쉽게 편저한 화문왕생요집 같은 건 달달 외우다시피 해서 점원들의 교육에도 활용한다. 맹안장 같은 책도 빠뜨리지 않는다. 덕분에 희귀한 서책들도 많이 빌려볼 수 있었다. 귀족 시늉이 허울만은 아닌 것이다.
명준은 손바닥으로 이마를 가볍게 치며 허허, 하고 다시 웃고 말았다. 관수 아들의 동반자살이 망령의 짓으로 판명되어, 뱃사람들이 붉고 깊은 물결을 두려워한다면 달리 뾰쪽한 수가 있겠냐는 속마음을 가을의 미감을 극명히 표현한 와카의 구절로 빗댄 셈이다. 능구렁이라고 한다면 보통 능구렁이가가 아니다. 게다가 자기는 그저 이는 물결이 멈추길 기다릴 수밖에 없는데 너는 어떠냐고 묻는 모양새이니 넌지시 시험하는 꼴이다. 명준은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눈이 하나, 둘이 전부가 아니다. 다섯 여섯 그리고 셋도 넷도 있구나 주사위 눈금이여 그러자 진자에몬이 잠시 멈칫댔다. 명준은 일부러 진지한 얼굴로 지그시 시선을 주었다. 그가 미간을 조금 구기는가 싶더니 이내 요란스레 한바탕 웃어젖혔다. “와하하하! 이거 걸작이로군, 걸작이야.” “옛날 와카를 빌려왔을 뿐입니다.” “자네는 언제나 나를 놀라게 하는군. 옛날 와카라 해도 지금 상황과 탁월하게 들어맞지 않는가? 내 생각에 대한 답가로 손색이 없네 그려.” “눈치 채셨습니까?” “교토야의 주인이 누군가! 이 진자에몬이로세. 전생에 나도 교토 조정의 주나곤이었네. 어찌 그 와카의 속뜻을 짐작 못하겠나, 껄껄껄!” 실없는 소리도 수다쟁이처럼 늘어놓고, 그는 아이처럼 배를 싸안고 웃었다. 명준은 웃음이 그치기를 잠자코 기다렸다. 이윽고 진자에몬이 말했다. 하지만 남 얘기하듯 지나가는 말투다. “자네는 동반자살이 망령의 짓이 아니라고 보는 게지?” 명준은 단호히 대답했다. “이르다 뿐이겠습니까.” “그럼 누구 짓 같은가?” “주사위 눈금은 하나만 있는 게 아니니까, 눈에 보이는 쪽이 아닌 다른 쪽 눈금도 보아야지요.” “흐음, 셋도 넷도 있다 이거지, 주사위 눈금에는?” “예.” “껄껄껄, 그런 점에서 이 와카와는 상당히 어울리는구먼. 즉, 사건의 이면을 다시 보자는 게 아닌가. 역시 자네는 영리해. 내가 사람 보는 눈 하나는 있다니까.” 유들유들한 기색으로 진자에몬이 이번에는 예법을 싹 무시하고 화과자 하나를 덥석 집어 한입에 넣었다. 씹는 소리도 경쾌하다. “흐음, 망령의 짓이 아니라면 자살한 관수 아들의 동기를 다른 쪽 눈금을 보듯 찾아보자는 것이지?” 명준은 어깨를 으쓱해 보이곤 얼굴을 바투 내밀었다. 목소리에도 힘을 주었다. 이제 딴전 피우지 말라는 의미였다. “자살할 동기가 그 아드님에겐 없습니다.” “뭐?” --- 본문 중에서 |
|
1636년 까마귀떼들이 우짖는, 늪처럼 고여 있는 그곳이 삼켜버린
38년 전의 비밀! 사흘 동안의 연쇄살인사건, 그 충격과 여운의 전말 임진전쟁이 끝난 지 38년, 피로인(被擄人) 출신인 박명준은 왜관에서 일하는 와중에 거상 진자에몬으로부터 팔공산 협곡에 자리 잡은 까마귀촌으로 의문의 남자 오카다를 데려다 달라는 부탁을 받고 동행하는데…… 박명준이 도착한 그곳은 마치 늪처럼 고요하고 이종(異種)의 세상 같은, 낯설고 괴이한 부락이다. 그리고 촌락에는 엄청난 비밀이 뱀처럼 꿈틀거리고, 도착 첫날부터 연쇄살인사건은 숨 가쁘게 터져나가면서 명준은 충격의 도가니 속으로 휩쓸리게 된다. 박명준이 밝혀낸 까마귀촌의 엄청난 비밀이 파생시킨 잔혹하고도 슬픈 살인…… 현실성을 획득한 시대상황, 치밀한 추리, 예측 불허의 반전이 웰메이드 미스터리 소설로서의 입지를 확보 시킨 『조선탐정 박명준 백안소녀 살인사건』은 탐정하고 추리하는 박명준의 캐릭터가 전작 이상으로 구축되어 깊은 여운을 일으킨다. 무엇보다 작중인물 박명준에게 구축된 실재성이 실로 놀라운 작품이다. 저자가 서문에서 피력했듯이 “실제로 그 시대에 있을 법한 이력을 지녔다고 감히 자신한다. 요컨대 조선과 일본 양쪽에 한 발 씩 걸치고 있는 경계인(境界人)인 것이다…… 박명준은 어떨까? 피로인의 자식이니 만큼, 경계인적 속성이 내재되어 있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탐정(探偵)의 역할에 적격인 것이다. 왜냐하면 경계인은 그 특성상 어느 한쪽의 감성에 함몰되지 않기에, 양쪽 모두 이성으로 바라보고 ‘탐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때문에 독자는 박명준을 따라서 1636년의 여정을 함께 하다보면, 시대 미스터리 소설이 겸비해야 될 ‘당대의 고증’, ‘정교로운 추리’, ‘예측을 불허하는 반전’이 퍼즐처럼 짜 맞혀 있l다는 것을 실감하게 된다. 단언컨대 독서삼매의 즐거움을 여실히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래서 유추하건대 저자의 박명준 시리즈는 앞으로도 계속 당대를 추리하면서 지속될 것이라는 점이다. 미스터리 소설은 독자를 지적 유희의 장으로 안내하는 매개다. 어설프지 않아야 높은 완성도를 이룰 수 있다. 이 작품은 가장 중요한 그 점이 확보되어 있다. 그래서 무서운 흡인력으로 하룻밤 만에 다 읽었다 하더라도 금방 책장을 덮지 못하리라 감히 자신한다. 진한 감동의 여운이 결말에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은 당대의 실재성을 살린 저자의 필력이다. 따라서 독자는 1636년, 팔공산의 부락이 배태한 미스터리, 복수와 증오를 뛰어 넘은 사흘 동안의 연쇄살인사건 현장에서 이제껏 느껴보지 못한, 시대의 살아 숨 쉬는 명제를 탐정 박명준과 함께 추리하면서 깊고 넓은 경험을 하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과장이 아니다. 책장을 펼치는 순간, 어느덧 1636년 6월 까마귀떼들이 우짖는 그곳으로 타임슬립해 있을 테니까. 어쩌면 박명준의 와카도 들을 수 있을지 모른다. 눈이 하나, 둘이 전부가 아니다. 다섯 여섯 그리고 셋도 넷도 있구나 주사위 눈금이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