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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아직 성공하지 않았다
쑨원 유언의 작성 과정과 그 함의
이승휘 저
일조각 2026.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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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책머리에

문제 제기

1장 관련 사료에 대한 재검토
북상에서 유언 작성까지
이해할 수 없는 사료집의 사료「문건」
「문건」과 『국부연보』의 「조문」
『국부연보』의 「조문」과 「보고」
『연보장편』과 『쑨중산사사편년』
「보고」와 유언의 작성 과정에 대한 추론

2장 새로운 사료, 그리고 ‘위조’
‘신발견’ 문건: 「집외집 문건」
마카오의 쑨완과 베이징의 다이언싸이
유언의 ‘위조’: 허샹닝의 주장

3장 국민회의에 대한 선전과 조직
북벌선언부터 베이징정변까지
북벌의 목적
쑨원의 북상선언과 국민회의
국민회의에 대한 ‘침묵’
국민회의에 대한 중공의 대응

4장 국민회의와 건국대강
새로운 권력에 의한 새로운 체제
새로운 혁명방법
국민회의와 훈정

5장 반직의 북벌과 혁명의 북벌
우한武漢에서 장시江西로
쑨원과 돤치루이의 왕래
입경

6장 쑨원과 장쭤린의 만남
언론 보도
사료집의 사료문건
회고록
만남의 실체에 대한 추론

7장 소비에트 러시아와의 연합
국공합작에 대한 선전
쑨원의 ‘연아’
‘연아’에 대한 일본 측의 반응
‘연아’에 대한 여론의 반응
‘연아’에 대한 동맹자들의 반응

8장 내분
병세 악화
덩쩌루의 ‘상서’
중앙감찰위원회의 ‘공산당 탄핵’
왕징웨이에 대한 탄핵

9장 왕징웨이의 대응과 유언
쑨원에 대한 왕징웨이의 ‘불만’
두 개의 「선언」
유언의 활용
세 번의 찬성

10장 관리가 되려고 하지 마라
쑨원 유언 속의 ‘대련’
중국국민당간친대회
간친대회 연설
이당치국, 이당건국
혁명정부의 건립

결론

참고문헌

저자 소개 1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동양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세종대학교 인문대학 역사학과 교수를 거쳐, 현재 명지대학교 기록정보과학전문대학원 교수로 재직 중이다. 한국기록학회 회장, 중국근현대사학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 대표, 한국국가기록원구원 이사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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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6년 05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414쪽 | 160*230*30mm
ISBN13
9788933708613

책 속으로

왕징웨이와 가속(쑹쯔원, 쿵샹시, 쑨커) 네 명이 병실에 들어가 쑨원과의 대화를 통해 유언을 완성했다. 완성된 후 유언에 쑨원의 서명을 받으려 했으나 병실 밖에 있던 부인(쑹칭링宋慶齡)의 울음소리에 서명이 뒤로 미루어졌고,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날인 3월 11일 서명을 받았다. 따라서 2월 24일 쑨원과 왕징웨이의 대화는 유언이 어떻게 완성되었는가를 밝힐 수 있는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과정을 살피기 위해서는 관련자들의 회고가 일차적으로 중요하다. 다만 회고 시기, 그리고 유언 작성과 관련한 회고자의 위치 등을 감안해야 할 것이다. (중략) 2월 24일 병실에 들어간 나머지 세 사람 중 쑹쯔원과 쿵샹시의 회고는 없는 듯하고, 필자도 보지 못했다. 그러면 남은 사람은 왕징웨이뿐이다. 베이징에 온 이후 쑨원이 누구를 접견하거나, 일상적으로 사무를 처리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국민당의 모든 사무 처리는 베이징의 국민당 중앙정치위원회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회의의 중심은 왕징웨이였다. 왜냐하면 그가 회의와 쑨원을 잇는 유일한 연락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유언과 관련해서도 왕징웨이는 정치위원회에서 유언 작성의 임무를 부여받았고, 2월 24일 병실에 들어가 유언을 만든 중심 인물로 유언을 필기한 사람[筆記者]이다.
--- 「1장 관련 사료에 대한 재검토」 중에서

‘이시카와의 연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유언 작성 경과에 대해 2월 24일의 대화를 기록한 대화(「집외집 문건」)에 보이는 쑨원의 말을 소개한 후, 왕징웨이가 「보고」에서 행한 발언을 다음과 같이 인용하고 있다. “선생은 이때 나에게 혁명의 방법을 설명했는데, 특히 두 가지 점을 강조하셨습니다. ‘첫 번째는 민중을 환기하는 것, 두 번째는 세계에서 우리를 평등하게 대하는 민족과 연합하여 공동으로 분투하는 것이다’. 이를 듣고 곧바로 받아썼습니다. 당시 시간이 촉박한 데다 쑨원의 면전이라 글씨가 거칠어졌습니다. 이를 읽어 드리니 끄덕이며 ‘좋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라고 하지만, 이는 ‘유언이 틀림없이 쑨원의 구술이며 자신은 단순히 필기자라는 것을 당대회라는 가장 공식적인 장소에서 표명하기 위해’ 없었던 대화를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거기에다 “당황한 탓에 글씨가 거칠어졌다”는, 정말로 그럴듯한 각색까지 덧붙였다고 해석하고 있다.
--- 「2장 새로운 사료, 그리고 ‘위조’‘ 중에서, 76~77쪽-

당의 전략이 국민회의 개최로 바뀌었다는 통고조차 없었으니, 당원들은 북상선언조차 접하지 못했을 것이다. 따라서 선전의 책임을 당원들에게만 돌릴 수는 없다. 국민당의 국민회의에 대한 선전은 두 차례 에 걸쳐 선전원을 파견한 것이 전부라고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니다. 선전원이 담당 지역에 가서 행할 통일적인 전략과 전술에 대한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아 알 수 없지만, 특별한 전략과 전술은 없었던 듯하다. 이런 추론은 국민회의에 대한 쑨원의 그것에서 알 수 있다. 다음은 북상 도중 일본에서 유학생과 국민당원들에게 행한 연설이다.

우리가 국민회의를 조직하는 목적은 2개의 큰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다. 하나는 국내의 민생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열강의 침략을 타파하려는 것이다. … 만약 여러분들(유학생)이 국내로 편지를 써서 국내의 가족, 친척, 친구들에게 연락해 일치하여 국민회의를 개최하자고 하라. 국외의 각 지역에 있는 친척, 친구에게 편지를 써서 일치하여 국민회의를 개최하자고 하라. 국내외의 민기民氣가 모두 일치된 주장을 하면 저들 힘을 갖고 있는 군인들도 민기에 반대할 수 없다. 국민의 주장에 찬성하면 국민회의가 열린다. 국민회의가 열리면 이후 대내적으로는 전국의 민생 문제가 해결되고, 대외적으로는 열강의 침략을 타파하게 된다. 만약 (국민회의가) 성사되면, 내가 가장 먼저 제출하려는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국민 생계의 개량이고, 또 하나는 중외 불평등조약의 개량이다. … 만약 내가 국민회의를 개최하라는 국민들의 1만 장 전보를 받으면, 나는 베이징에서 이 1만 장의 전보를 갖고 군벌과 투쟁할 수 있다. … 오늘 저녁 이 집회에 온 사람들은 모두 일본 각지의 본당 동지들이다. 회의가 끝난 후 일본 각지의 친구와 중국에 있는 가정에 편지를 쓰고 전보를 보내 국민회의의 중요성을 설명해 주어라.

친인척, 친구들에게 보내는 편지로 얼마나 선전의 효과가 있겠는가. 또 쑨원의 연설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편지나 전보로 국민회의 개최를 주장했다는 기록도 없다.
--- 「3장 국민회의에 대한 선전과 조직」 중에서

그런데 반직전쟁의 일환인 ‘반직의 북벌’은 베이징정변으로 일단락되었고, 쑨원은 승자로서 북상길에 올랐다. 또 하나는 ‘혁명의 북벌’이다. 쑨원은 중국의 남쪽 끝자락 광둥에 대원수부를 건립했다. 혁명의 첫 단계인 군정이다. 이후 북벌을 통해 일정 지역을 확보하면 혁명정부를 건립하여 훈정을 행하는 것이다. 따라서 쑨원의 북벌은 반직전쟁의 일환이자 훈정을 위한 전쟁이다. 그런데 베이징정변으로 반직의 북벌은 그만둘 수밖에 없게 되었지만, 훈정을 위한 혁명의 북벌은 어떻게 할 것인가. 북벌은 무력통일이니, 이를 포기하면 화평통일이다. 쑨원은 화평통일의 방법으로 국민회의를 주장했다.
--- 「5장 반직의 북벌과 혁명의 북벌‘ 중에서」 중에서

혁명위원회를 곧 성립시켜 여러 비상사태(상단사건)에 대처해야 한다. (胡)漢民과 (汪)精衛를 (혁명위원회에) 가입시키지 않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 생각건대, 금일의 혁명은 러시아를 배우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漢民이 이미 이런 신념을 잃었으니 가입시키지 않는 것이 물론 일에 도움이 되며, 만약 가입시키면 오히려 방해되는 바가 많고 동시에 그 기능을 잃을 수가 있기 때문에 이는 개의치 않아도 된다. 精衛도 원래 러시아파의 혁명(을 지지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정치위원회에) 넣지 않아도 된다. 금후 우리 당의 혁명은 러시아를 모범으로 하지 않으면 단연코 성공하지 못한다.

쑨원의 답도 명확했다. 보로딘이 ‘국민당의 속사정에 어둡다’는 이유로 장제스가 보로딘의 인선 문제에 반대했다면, 쑨원은 ‘국민당의 속사정’이라는 좁은 시야가 아닌 ‘쑨원의 혁명’이라는 더 넓은 차원에서 보고 있다. 이제 ‘쑨원의 혁명’에 있어 러시아의 혁명은 배워야 할 모범이기 때문에, 말하자면 ‘연아聯俄’는 필수이기 때문에 러시아에 대한 믿음이 없는 후한민과 왕징웨이를 제외하거나 제외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 「7장 소비에트 러시아와의 연합‘ 중에서」 중에서

이후 반년이 채 안 되는 시기에 제2차 봉직전쟁의 발발과 쑨원의 북벌선언, 베이징정변, 북상, 일본 방문, 톈진 도착 후 발병 등 우여곡절을 겪은 끝에 쑨원이 베이징에 입성했다. 쑨원의 병세가 갈수록 위중해지면서 당내에서는 쑨원 사후를 염두에 두기 시작했다. 1월 26일 수술 결과는 절망적이었다. 당일 저녁 긴급 소집된 베이징의 정치위원회 제1차회의에서는 쑨원에게 유언을 청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거기에 더하여 쑨원의 입원 소식은 서세로 와전되어 퍼져 나갔고, 광저우에서는 후한민이 선후 처리를 위한 비밀회의를 개최하여 대원수 계임 문제를 논했다는 보도까지 나왔다. 쑨원의 앞날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국민당 내 분파 활동이 나오고 이는 내분으로 확대되어 갔다. 이 시기 분파 활동은 주로 언론 보도를 통해 확인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분파 활동을 주도한 조직들은 그 구성이나 활동이 주밀하지 못했다.
--- 「8장 내분‘ 중에서」 중에서

‘반공파’는 ‘쑨원이 없는 국민당’을 상정하며, ‘당무 전횡’, ‘우당과의 이간질’을 행하는 왕징웨이를 탄핵하자고 공격했다. ‘반공파’가 ‘쑨원이 없는 국민당’을 염두에 두고 당권투쟁에 나섰듯이, 왕징웨이도 ‘쑨원이 없는 선언’을 만들어 발표했다는 점에서 양측 모두 다가올 ‘쑨원 사후의 권력’을 위해 싸웠던 것이다. 그러나 왕징웨이로서는, ‘쑨원이 없는 선언’이 아니라 자신이 바라는 바가 담긴 ‘쑨원이 있는 선언’을 받아 내는 것이야말로 권력투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최상의 길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누구보다도 왕징웨이가 유리한 것은 쑨원에게 다가갈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병시중을 위한 가속 이외에 ‘반공파’는 물론 쑨원 측근들도 접근이 어려웠다. 왕징웨이는 이런 유리함을 십분 이용하는 마지막 시도를 했다.
--- 「9장 왕징웨이의 대응과 유언‘ 중에서」 중에서

샌프란시코의 간친대회가 쑨원을 겨냥하는 듯한 구국선언을 발표하고 있을 때, 광저우의 간친대회에서 쑨원은 당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본당(국민당)이 성립한 이래 국내에서의 진보는 아주 느렸고, 해외에서의 진보는 매우 빨랐다. 그러나 민국이 성립된 이후 해외에서의 진보도 아주 빠르지 않았다. 왜 그런가? 그것은 일반 화교 당원들이 혁명이 성공했다고 생각하고, 당원이니 관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만약 관리가 되지 못하면 의기소침해 하며 원래의 분투 정신을 잃어 버렸다. 그래서 해외 각 성의 당무黨務가 이제 활기를 잃고 심히 무기력하다. 전도가 매우 위험하다. 우리는 현재의 무기력을 없애고 활기를 회복해야 한다. 여러분은 당을 위해 분투했던 종전의 정신을 회복하고, 큰일을 하려는 마음을 지녀야지, 대관이 되려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 된다. 그런 연후에야 본당은 비로소 날로 발전할 수 있다.

--- 「10장 관리가 되려고 하지 마라」 중에서

출판사 리뷰

쑨원의 유언에 대한 뒤늦은 의문

“내가 국민혁명에 힘 쏟기를 40년, 그 목적은 중국의 자유와 평등을 구함에 있었다. 이 목적을 달성하고자 하면 반드시 민중을 환기시키고 세계에서 우리를 평등하게 대하는 민족과 연합하여 함께 분투해야 한다. 현재 혁명은 아직 성공하지 않았다. 무릇 우리 동지들은 모름지기 내가 저술한 건국방략, 건국대강, 삼민주의, 그리고 제1차전국대표대회선언에 의거하여 계속 노력해 혁명을 관철하길 바란다. 최근 주장한 국민회의 개최와 불평등조약 폐지는 더욱 최단기간 내에 실현하기를 촉구한다.”

이 쑨원의 유언이 어떤 과정을 통해서 작성되었는지, 유언의 내용이 담고 있는 의미에 대한 연구는 매우 적다. 다만 당시 주변 인물들의 회고를 근거로 유언을 누가 썼는지를 밝히는 글이 있기는 하나, 근거로 하는 회고조차도 세밀하게 분석하지 않고 있다. 이 책에서는 사료집이나 연보의 ‘조작’에 대해 꽤 장황하게 다루었다. 역사의 실제를 온전히 복원할 수는 없다고 하더라도, 실제에 조금이라도 다가가는 방법은 ‘실증’이 아닐까? 그래서 저자는 사료의 직접 인용을 많이 했다.

쑨원의 유언이 작성되는 과정에 대해서는, 쑨원의 병세가 심해지자 1925년 2월 24일 왕징웨이汪精衛가 미리 준비한 유언을 병상의 쑨원에게 읽어 주니 쑨원이 이에 찬성했다는 내용이 기왕의 통설이다. 그런데 저자는 병실에서 이루어진 이 「쑨원과 왕징웨이 등과의 대담」의 끝맺음에 궁금증이 생겼다고 한다. 왕징웨이가 미리 준비한 유언을 읽어 드리겠다고 하자 쑨원이 “읽어 보세요” 하고는 대화가 끝나 버리는데, 저자는 쑨원이 유언에 대한 찬부 표명을 했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결국 이 의문에서 시작된 쑨원 유언에 대한 연구는 그동안 알려진 것과는 다른 과정을 통해 유언이 작성되었음을 확인했다. 더 나아가 유언은 글자 그대로의 의미를 넘어, 북상 시기의 쑨원과 국민당에 대한 실질을 보여 주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쑨원이 ‘없는’ 국민당과 쑨원의 유언

이 책은 쑨원이 북상선언(1924. 11. 10.) 후 상하이를 거쳐 일본으로 갔다가, 톈진을 경유한 뒤 베이징에 입성하여 생을 마감할 때(1925. 3. 12.)까지의 약 4개월을 다룬다. 이 시기는 쑨원이 혁명을 시작한 이래 매우 ‘복잡하고도 어려운’ 시기였다. 따라서 ‘복잡하고 어려운 상황’을 빼 버리고, ‘민의를 반영하는 국민회의’를 개최하기 위한 북상으로 단순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북상이 복잡하고 어려운 이유는 동맹자들과 함께 혁명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쑨원은 반직전쟁 승자의 한 사람이었지만, 실제 전쟁 과정에서의 역할은 그다지 없었다. 쑨원은 북상에 앞서 시국 해결책으로 국민회의 개최를 선언했다.

쑨원의 북상에 관한 연구는 별로 없다. 별로 없다기보다는 단순하다. 대부분의 연구는 거의 모두 “군벌들과 싸우기 위해 ‘국민회의 개최’라고 쓴 깃발을 들고 단기필마로 북으로 올라가는 쑨원”으로 묘사하고 있다. 말하자면 쑨원의 북상을 국민회의가 감싸고 있는 듯하다.
1924년 1월 말 소비에트 러시아와 쑨원 사이에 이른바 국공합작이 이루어졌다(연아聯俄). 이는 쑨원의 혁명에 획을 긋는 사건이었다. ‘연아’는 외부와의 충돌뿐만 아니라 국민당 내부와 쑨원 측근들 속에서도 충돌했다.

그러나 톈진 도착 후 예기치 못한 쑨원의 발병과 병세의 악화 속에서 이 내분은 점차 ‘쑨원이 없는 국민당’을 전제로 진행되었다. 내분은 점차 권력다툼이 되어 쑨원의 죽음이 다가올수록 그 양상은 확대되었다. 근본적으로는 쑨원의 뜻이 국민당의 결정이라는 조직적 결함이 내분과 권력다툼을 더욱 조장했다. 쑨원의 유언 속에는 국민당의 이런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1925년 2월 24일 병실에서 유언을 청하는 왕징웨이에게 쑨원은 “이미 나의 저술에 있지 않느냐”고 반문하고, 왕징웨이는 그 자리에서 쑨원이 1923년 10월 국민당 간친대회에 보낸 제사題詞를 인용하여 유언의 한 구절을 작성했다.

“현재 혁명은 아직 성공하지 않았다. 무릇 우리 동지들은 (중략) 계속 노력해 혁명을 관철하길 바란다.”

이 대련對聯이 당원들의 분투를 요구하는 전략적 선전으로 쓰였기에 왕징웨이가 쑨원의 유언에 사용했다고 생각된다. 왕징웨이에게도 국민당은 이제 ‘쑨원이 없는 국민당’이었다. 그러나 국민당의 미래 권력을 잡는 데 ‘쑨원이 있는 국민당’이라면 더욱 유리할 것이라고 생각한 왕징웨이는, 병실에서의 유언 작성에서 쑨원으로부터 소기의 성과를 얻어 내어 유언의 마지막 구절을 만들었다.

“최근 주장한 국민회의 개최와 불평등조약 폐지는 더욱 최단기간 내에 실현하기를 촉구한다.”

쑨원의 유언은 왕징웨이가 미리 준비한 전반부와 병실에서 추가한 후반부로 이루어져 있다. 유언을 마무리한 후 왕징웨이는 쑨원의 서명을 받고자 했으나, 병실 밖에서 들려오는 쑹칭링의 울음소리에 뒤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병실에서 나온 왕징웨이는 베이징반점에서 열린 정치위원회 회의에 참석하여, 병실에서의 대화 내용을 정치위원회 위원들에게 전했다. 이어 오후 4시 25분 왕징웨이는 병실에서의 대화를 대화체 형식의 문장으로 소략하게 만들었다(「집외집 문건」). 「집외집 문건」 말미에 함께 병실에 들어간 세 사람(쑹쯔원, 쿵샹시, 쑨커), 그리고 당시 병실 밖에서 대화를 들었던 쩌우루가 증명자로 서명했다.

따라서 2월 24일에 만들어진 문건은 왕징웨이가 미리 준비한 유언에 병실에서 보충하여 완성된 국사유언, 병실 밖에서 미리 준비한 가사유언, 그리고 병실 밖에서 만들어진 「집외집 문건」 이렇게 3개가 있는 셈이다. 아무튼 왕징웨이가 쑨원과 단독으로 대화한 것이 아니라 병실에 함께 들어간 세 사람이 있고, 이들이 유언 작성 과정을 직접 봤고, 쑹쯔원은 가사유언 작성에도 참여했다. 굳이 서명까지 받아야 할 ‘증명서’가 왜 필요했을까. 어찌 보면 왕징웨이가 유언에 대해 매우 ‘집착’하는 듯하다. 사실 유언에 대한 ‘왕징웨의의 집착’이 이 책의 출발이다.

쑨원은 혁명가였다

이 책은 쑨원의 유언이 만들지기까지의 과정을 밝히는 한편, 유언의 내용에 함축된 의미를 살피기 위해서 ‘쑨원의 북상’까지 들여다보았다. 이에 대한 연구는 진작 밝혀졌어야 할 주제인데도 너무도 단순하게, ‘민의를 담은 국민회의를 개최하기 위해 군벌에 맞서 북상한 혁명가 쑨원’으로 쑨원의 북상을 정형화해 버리는 바람에 연구의 빈 공간이 생긴 것 같다고 저자는 말한다. 더 넓게는 쑨원 연구, 근대 중국의 혁명사 연구가 ‘민중과 결합한 혁명’이라는 틀 속에서만 파악하고자 했기 때문이 아닐까 보았다. 민중에 선전하고 그들을 조직하여 이를 통해 혁명을 추진한다는 틀을 부정하지는 않으나, 이를 어느 때, 어느 장소, 누구에게나 교조적으로 적용하는 것이 문제라는 저자의 일침이 따끔하다.

쑨원 서세 직후 광저우에 건립된 국민정부는 쑨원의 우려를 실천하려는 듯이 끊임없는 권력투쟁을 이어 갔다. 권력투쟁 중 자신을 정당화하고 상대를 부정하기 위해 늘 쑨원의 유언을 서로 내세웠지만, “국민정부는 훈정기의 혁명정부이므로 혁명당인 국민당의 당원은 헌정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혁명에 종사하고 관리가 되려고 해서는 안 된다”는 대련의 뜻을 이어 가지 않았다. 대륙에서 국민당이 몰락한 첫째 원인은 중국공산당이나 제국주의보다 그 자신에 있었다. 최근 우리 사회, 나아가 전 세계가 진영으로 나뉘어 상대방을 제거하기 위해 독성의 농약을 서로 살포하고 있는 듯하다. 친환경농법이라고 할 수 있는 쑨원의 혁명정신이 여전히 요구되는 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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