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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장 헌법 제11조 제1항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15
제2장 평등과 정의의 관계 71 제3장 차별금지법안에 대한 분석 97 제4장 평등과 사회적 기본권 125 제5장 공직자 재산등록 결정에 있어서의 평등권 심사 159 제6장 국가인권위원회법상의 차별 개념 199 제7장 캐나다 법원의 간접차별 이론에 대한 분석과 비판 229 제8장 병역법 사건 재론 265 제9장 3단계 심사 체계 29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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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계가 평등의 내용으로 받아들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은 모든 사람을 완벽하게 차별하여야 한다는 이론이다. 그는 어떤 가치나 부담을 배분할 품성을 정하고, 그 품성의 비율에 따라 모든 사람들에게 각기 다른 법적 효과를 부여하여야 한다는 이론을 세웠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은 결국 차별론이다. --- 「서문」 중에서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그 비율에 따라 다르게 취급하라”는 말을 논리적으로 정리해 보자. ‘같은 것은 ‘다른 것의 특별한 양태’다. A와 B 사이의 품성의 比가 1로 되었을 때, 다름의 量이 零으로 되었을 때 양자는 같다고 판단된다. 그러므로 ‘같은 것은 같게’라는 부분은 논리적으로 완전히 무의미하다.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그 비율에 따라 다르게 취급하라”는 말은 “다른 것은 그 비율에 따라 다르게 취급하라.”는 말로 전환하여도 완벽히 같은 것을 가리킨다. --- 「서문」 중에서 “헌법 제11조 제1항 전문, 즉 모든 국민이 법 앞에서 평등하다는 선언이, 모든 국민을 평등하게 처우하여야 한다는 명령을 포함하고 있다고 보니(입법자 구속설), 해석에 있어서 어려움을 만날 수밖에 없다. 법을 만들 수 없다. 법이란 본디 차별의 체계이기 때문이다.” --- 「서문」 중에서 Martin Luther King 목사는 “나는 4명의 어린 자녀들이 그들의 피부색이 아닌 그들의 성품으로 평가받는 그 날을 꿈꾸고 있습니다.”고 말했다. 그가 평등하다고 보는 세계의 모습이다. ‘그들의 피부색’이라는 속성에 따라 평가되는 것은 온당하지 아니하다. 이것이 인종평등의 주장이다. ‘그들의 성품으로 평가’받아 다른 처우를 받는 것은 인종간 평등의 눈으로 보아 문제 되지 않는다. --- p.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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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서문 ]
제목이 괴이하게 보일 수 있겠다. ‘차별’이 ‘정의’롭다는 것인가? 그렇다. 학계가 평등의 내용으로 받아들이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은 모든 사람을 완벽하게 차별하여야 한다는 이론이다. 그는 어떤 가치나 부담을 배분할 품성을 정하고, 그 품성의 비율에 따라 모든 사람들에게 각기 다른 법적 효과를 부여하여야 한다는 이론을 세웠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의론은 결국 차별론이다.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그 비율에 따라 다르게 취급하라”는 말을 논리적으로 정리해 보자. ‘같은 것’은 ‘다른 것의 특별한 양태’다. A와 B 사이의 품성의 比가 1로 되었을 때, 다름의 量이 零으로 되었을 때 양자는 같다고 판단된다. 그러므로 ‘같은 것은 같게’라는 부분은 논리적으로 완전히 무의미하다.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그 비율에 따라 다르게 취급하라”는 말은 “다른 것은 그 비율에 따라 다르게 취급하라.”는 말로 전환하여도 완벽히 같은 것을 가리킨다. (중략) 『평등정명론』 이후에 썼던 논문들을 모으고 다듬었다. 그리고 논문으로 발표되지 아니하였던 글을 보태어 실었다. 제1장이 그것이다. 상당히 긴 글이다. 나의 생각을 쭉 내려썼다. 하지만 평등에 관해 아직 다루지 못한 주제들이 수도 없이 많다. 필자의 OneDrive 디렉토리의 〈쓰는중〉 폴더에 있는 많은 글들이 완성될 수 있을지, 언제 완성될지 모르겠다. 노력하겠으나 안 될 수도 있다. 참 단순해 보이는 ‘평등’이라는 말을 붙잡고 늘어진 지도 20년이 넘었다. 지긋지긋하다. 어처구니없는 동어반복의 늪, 토톨로지(tautology)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나 보려고 20년을 보냈다. 그래도 거기에 있는 것이 편안하다는 사람들을 보니 애처롭다는 생각이 든다. 동어반복의 늪, 토톨로지(tautology)의 구렁텅이, 해 놓고 보니 쓸 만한 말이다. 법원(헌재를 포함하여)에 있는 사람들이야 자기들의 권력에 관한 문제이니 굳이 거기서 벗어나고 싶지 않을 터이고, 오히려 머물고 싶겠지만, 공부하는 사람들이 그러는 것은 이해하지 못하겠다. 단지 자기가 아는 개념으로 세상을 재단해 보고 싶은 생각이 그 스탠스를 유지 하게 만드는 것은 아닐까? 법치주의를 아는 사람은 법치주의라는 말로써 세상의 일을 재단하고 싶어 하고, 자유를 아는 사람은 자유라는 말로써 세상을 재단하고 싶어 하며, 평등을 아는 사람은 평등이라는 말로써 세상을 재단해 보고 싶어 하는 것 아닐까? 그래서 ‘실질적’ 등등의 말을 추가하여 그 말의 그릇을 자꾸 키워 가는 것 아닐까. 나는 ‘실질’이야말로 ‘법학’에서 추방하여야 할 가장 나쁜 말이라고 생각한다. ‘실질’이 등장하면 모든 개념들이 애모하고 모호해진다. 논리는 사라지고 정치만 남는다. 출판에 도움을 준 분들께 감사하고 싶다. 충남대학교 출판문화원의 박수연 원장님, 양광준 과장님, 이재은 선생님께 감사드린다. 이재은 선생님은 필자의 전작, 『헌법재판론』을 편집해 주셨다. 너무 큰 노고를 끼쳐드려 미안했고, 그 결과물에 감탄했다. 감사 드린다. 그 책에는 이를 표현하지 못하여 여기에 적는다. 아내와 기준, 유연에게는 늘 고맙다. 영양의 일을 걱정한다. 충남대학교의 학술연구비를 지원받았음을 밝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