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소장하고 있다면 판매해 보세요.
|
|
동독 비밀정보기관 슈타지의 실상을 파헤친 책!
|
|
저자 서문 _ 서독의 역사는 새로 써야 한다
역자 서문 _ 40년간 슈타지의 손아귀에서 놀아난 서독 사회 제1장 서독 총리의 비서도 간첩이었다! 서독판'햇볕정책'의 창안자 빌리 브란트를 구출하라 반공 보수 정치인들 매장 공작 동독 공산당의 힘을 빌려서라도 기민당을 타도하고 싶다 슈타지에 놀아난 사민당 지도부 (...) 제2장 나치 전력 문제를 서독 공작에 이용하라 '과거 전력' 들춰내 뤼브케 대통령 쫓아내다 서독 극우주의자들과 협력하여 네오나치운동 조장 나치 부역 혐의 들춰내 서독 지도부 뒤흔들어 서독 대통령마저 나치 부역자로 날조 (...) 제3장 '공산주의자들에게 놀아난 우리들의 학창시절' 슈타지, 학생운동에 침투하다 좌파 학생운동의 스폰서는? 대학생들의 반미 시위 배후조정 '온 힘을 다해' 베트남전 반대 시위 지원 (...) 제4장 지성·신앙·양심의 이름에 붉은 물을 입혀라 마틴 니묄러 : "가장 나쁜 악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돈" '진보적이고 민주적'인 목사들의 정체는? '서독이 핵무기 개발 중'이라고 날조 미국 미사일은 반대, 소련 미사일은 침묵 (...) 제5장 서독의 반공·인권운동가들을 납치, 살해, 흑색선전, 모략 동독의 독재 비판하는 서독 인사 수백 명 납치, 처형 "우리에게 시비 걸면 그냥 안 둬! 흔한 게 자동차 사고야" 서독 인권운동가를 변태성욕자로 모략 "앰네스티, 그린피스도 우리의 적" (...) 역자후기 _ 슈타지와 협력한 서독인들은 40년 공산 독재의 공동 책임자 |
|
슈타지란?
슈타지(Stasi)는 옛 동독의 국가안전부를 말한다. 슈타지는 반체제 인사 감시·탄압, 국경 경비, 해외정보 수집, 대외 공작 등을 담당했다. 슈터지 총책은 1957년부터 1989년까지 재직한 에리히 밀케였다. 서독을 비롯한 외국에 대한 공작을 담당한 기관은 슈타지 산하의 중앙정부본부(HVA·Hauptverwaltung Abteilung)였다. HVA는 냉전시절 CIA나 KGB를 능가하는 비밀정보기관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HVA 가 이런 평가를 받았던 것은 1958년부터 1987년까지 슈타지의 해외공작 책임자로 일하면서 서방 세계 정보기관들로부터 '얼굴 없는 스파이','스파이의 장인'라는 극찬을 받았던 마르쿠스 볼프 덕분이었다. 영국의 유명한 첩보소설 작가 존 르 카레의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는 볼프를 모델로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
|
서독 대통령과 총리를 물러나게 하다
이 책에 서술된 동독 정보기관 슈타지의 서독 침투 및 파괴 공작은 충격적이다. 1980년대 말 동유럽 공산주의가 붕괴되기까지 40여 년 동안 슈타지는 서독 연방의회, 기민당, 사민당을 비롯한 각 정당 및 정부조직에 자신들의 비밀 정보원과 연락책을 심어놓았다.
이들의 활동 중 대표적인 것이 1972년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에 대한 의회의 불신임안 부결 사건이다. 당시 야당인 기민당은 사민당·자민당 연립정부의 수반인 브란트 총리에 대해 불신임안을 제출한 상태였고, 연립정부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자민당 의원 일부가 이탈한 상황이어서 기민당의 목적은 쉽게 달성될 듯했다. 그러나 투표 결과 과반수에 두 표가 모자라 불신임안은 부결됐다. 그 배경에는 ‘서독판 햇볕정책’이라고 할 만한 동방정책의 창시자 브란트 총리를 보호하려는 슈타지의 활약이 있었다. 슈타지는 자신들과 오랜 관계를 유지해 오던 기민당과 자민당의 의원 두 명을 매수했던 것이다. ‘총리의 그림자’로 통하던 브란트 총리의 비서 귄터 기욤이 동독의 거물 간첩이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1973년 그가 체포될 때 “나는 동독 시민이자 동독의 장교다. 그 점을 존중해주기 바란다”고 외친 것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기욤의 체포 뒤에도 슈타지는 헬무트 콜 총리의 측근 칸터, 자민당 의원 보름 등 ‘귄터보다 유용한’ 첩자들을 유효적절하게 활용했다는 것도 슈타지 문서가 공개될 때까지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1968년 10월 14일 하인리히 뤼브케 서독 연방대통령이 나치 전력 문제와 관련해 사임한 것도 슈타지의 작품이다. 슈타지는 ‘과거사 청산’이라는 명목 하에 이렇다할 증거도 없이 뤼브케를 나치주의자로 몰았고, 서독을 포함한 유럽 전역에 반(反)뤼브케 캠페인 열풍을 일으켰다. 분위기에 편승한 서독의 유력지인 ‘슈피겔’과 ‘슈테른’도 뤼브케를 나치주의자로 낙인찍었다. 그 와중에 동독 인민회의(국회) 의원 중 40% 이상이 나치당원이었다는 사실은 역사 속에 파묻혔다. |
|
사회주의를 옹호했던 서독 지식인들이 더 문제
슈타지는 서독의 학생운동, 평화운동, 반전운동 등 소위 양심세력들을 동독에 유리한 방향으로 이끄는 데도 성공했다. 서독 평화운동의 거두이자 오늘날까지 ‘마음 불편한 경고자’로 존경받고 있는 마틴 니묄러가 그 예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독일인들은 분단된 상태로 살 것이냐, 소련식 독재하의 재통일이냐는 대안 가운데 하나를 선택하라고 하면, 아마도 공산주의의 위험을 감수할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1950년대 초 니묄러는 소련과 동독을 잇따라 방문했는데 당시 동독의 민주인사들이 줄줄이 체포된 것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켰다. 슈타지는 평화운동을 자신들에게 새로운 간첩을 공급하는 인력창고로 생각했지만, 평화주의적 구호가 동독 지역으로 흘러들어오지 않도록 하는 데는 최선을 다했다. 서독판 햇볕정책인 동방정책에 대해서도 슈타지는 “환상을 가지지 말라”며 경계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학생운동도 슈타지의 마수를 벗어날 수 없었다. 역사학자이자 한때 사회주의 독일학생연맹 프랑크푸르트 지부 간부였던 볼프강 크라우스하르는 1998년에 ‘공산주의자들에게 놀아난 우리들의 학생시절’이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해 엄청난 반향을 일으켰다. 그에 따르면 슈타지는 학생운동 조직에 자신들의 간첩을 침투시켜 반미시위와 반전운동을 조장했다. 유력한 서독 학생운동 조직에서는 “익명으로만 한다면, 동독의 지원금도 반대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문서를 동독 측에 보낼 정도였다. 북한에 대한 내재적 접근법을 주장한 송두율 씨와 마찬가지로 동독에 대한 내재적 접근법을 주장한 루츠 교수의 등장과 죽음도 흥미로운 대목이다. 1960년대에 그는 동독 정권의 전체주의적 성격을 거부하고 동독을 ‘보다 객관적으로’ 분석하자는 학계의 분위기에 편승해 주목을 받았다. 슈타지 기록카드에는 루츠 교수가 ‘연락책’으로 공작을 받았다는 암시도 발견되고 있다. 1970년 루츠는 슈타지 첩자 ‘K'의 관할이 되면서부터 출세가도를 달렸고, 1979년 갑자기 사라지더니 숲 속에서 시체로 발견됐다. 통계에 따르면 동독 정권 붕괴 후 간첩 혐의로 서독 국민을 상대로 수사에 들어간 사건은 약 3,000건에 달했다. 그 가운데 253건만이 유죄로 판결됐으며 그마저도 대부분 집행유예를 받는 데 그쳤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 후베르투스 크나베는 서독에서 활약한 간첩의 숫자나 범죄행위보다 사회주의 체제를 옹호했던 당시 서독 사회의 정치적·지적 분위기가 더 문제라고 지적한다. 1960년대 이후 서독 지식인 사회에서는 동독 편을 들어주고 동독을 인정해야만 ‘진보적’이라는 논리가 팽배했으며, 많은 서독인들은 독일의 적은 좌파가 아니라 우파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저자는 동독 공산당이 40여 년의 장기 독재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상당 부분 서독의 소위 ‘진보적’ 지식인들에게 그 책임이 있다고 강조한다. 남북한이 대치하고 있으며, 좌우 이념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는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참조할 만한 대목이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