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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1부1. 스톡브리지의 킹 가족2. 마르틴 루터3. 스위트오번4. “흑인의 미국은 여전히 쇠사슬 아래”5. 열린 커튼6. “책임감”7. 신학생8. “미친 듯이, 미친 듯이 사랑에 빠졌어요”9. 행진10. 역동적인 힘11. 표절과 시12. 기드온의 용사들13. “촉발 요인”14. “내 영혼은 자유롭도다”15. “우리는 더 이상 토끼가 아니에요”16. 경고2부17. 앨라배마의 모세18. “재채기하지 않아 다행이에요”19. 순례20. 몽고메리를 떠나다21. “케네디, 구출에 나서다”22. 새로운 노예해방선언23. 유혹과 감시24. “그냥 이 안에 들어 있을 뿐”25. 버밍햄교도소3부26. 꿈, 1부27. 꿈, 2부28. “가장 위험한 니그로”29. 올해의 인물30. 준법상의 문제31. 상32. 국장33. “존재감”의 새로운 감각34. 쇠지레35. 셀마36. “내 일의 진정한 의미”37. “빛나는 순간”38. 타오르다39. 주의하라, 그날을40. 시카고41. 블랙파워42. “킹은 알아듣기 바란다”43. “쉽지 않은 시기”44. 가치의 혁명45. 부디 멤피스에 와 주시기를에필로그주감사의 말-사랑의 공동체인터뷰 대상자 명단찾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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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nathan Ei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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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틴 루서 킹이 평생 품었던 질문- 공격적인 동시에 온건한 ‘사회운동’은 가능한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두 체제의 장점만을 결합한 ‘비전’은 가능한가?우리가 익히 아는 평화주의자라는 아이콘 이면에는, 위와 같이 모순되어 보이는 가치들을 결합하기 위해 치열하게 고뇌한 ‘급진적 사상가’이자 ‘냉철한 전략가’로서의 마틴 루서 킹이 존재했다. 이 질문들은 인종차별과 빈곤, 전쟁이라는 거대한 악에 맞서 투쟁하는 원동력이 되었다.킹은 미국의 침례교 목사이자 흑인 민권운동가로, 역사상 가장 영향력 있고 존경받는 흑인 지도자로 기억되고 있다. “저는 꿈을 꿉니다(I have a dream)” 연설을 비롯해, 백인을 향한 증오가 아니라 연대와 사랑을 주장하며 펼친 비폭력저항, 시민불복종이 잘 알려져 있다.미국 내 흑인의 지위를 향상시키는 데 전 생애를 바쳐 1957년 민권법과 1964년 민권법, 1965년 선거권법 제정에 큰 힘을 보탰다. 스물여섯인 젊은 나이에 이미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을 이끌었고, SCLC(남부기독교지도자회의)를 이끌며 워싱턴, 버밍햄, 셀마 등에서의 행진을 주도했다. 이 책은 마틴 루서 킹이 맺은 수많은 관계망을 폭넓게 다루며 1950~1960년대 민권운동의 배경과 고름 가득한 미국 정치를 보여 주는 한편, 생애 곳곳에서 마주하게 된 그의 질문들과 내면세계를 함께 들여다보게 한다.1. 킹의 유년 시절짐크로법이라는 야만의 세계이 전기는 20세기 초 미국 흑인이 일상적으로 겪어야 했던 차별과 억압의 역사, 즉 아버지 킹의 어린 시절에서 출발한다. 당시 노예제는 폐지되었지만, 1876년 제정된 짐크로법(인종차별법)에 따라 학교, 기차, 식당, 심지어 화장실과 묘지에서까지 흑백 분리가 강제되었다. 사적인 공간인 자기 집에서조차 흑인은 백인과 체커나 도미노 게임을 함께 할 수 없었고, 백인 경찰과 정부, KKK단은 린치라는 폭력적 수단으로 두려움을 조장했다.이러한 일상적 차별과 폭력은 흑인들에게 물질적, 심리적 취약성을 강요했다. 킹의 아버지 역시 어린 시절 당한 폭력의 트라우마로 가정에서 강압적으로 돌변하며 자녀들에게 정서적 문제를 안겼다. 그럼에도 킹이 올곧게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고통받는 흑인 역사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은 양쪽 할머니와 어머니, 흑인 기독교 사회의 헌신적인 보살핌 덕분이었다.2. 킹의 지적 열정소로에서 마르크스, 다윈에서 브라이트먼까지1944년 모어하우스칼리지에 조기입학한 킹은 사회학을 전공하며 인종 정의를 향한 길을 모색했다. 그는 교수진을 통해 비판적 사고를 훈련받으며,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시민불복종』(1849)을 접했고, 해로운 체제를 거부하는 비폭력저항 이론을 흡수했다. 1948년 진학한 크로저신학교에서, 다윈의 진화론을 다루며 ‘근대적 사고’ ‘시대정신’을 읽는 눈(94쪽)을 키웠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루소, 홉스, 벤담, 밀, 니체 등(104쪽)의 사상을 섭렵한 그는, 자본주의로 인해 발생하는 빈부격차와 불공정에 대한 의구심을 날카롭게 다듬어 갔다.나아가 1951년 보스턴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하여, 인간성은 곧 ‘자유와 책임’을 의미한다는 에드거 브라이트먼의 ‘인격주의’ 철학(116쪽)에도 깊은 영향을 받는다. 청년 시절 서재와 강의실에서 흡수한 소로를 비롯한 간디, 틸리히, 니부어, 마르크스 등의 사상은 훗날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을 시작으로 미국 전역을 뒤흔든 ‘거리의 혁명’과 ‘비폭력저항’을 완성하는 강력한 지적 무기가 되었다.3. 킹의 분노사형을 각오한 ‘거리의 혁명’1954년 코레타와 결혼한 킹은 백인우월주의의 요새인 앨라배마주 몽고메리(노예 거래 중심지)의 덱스터애비뉴침례교회에 부임한다. “스물여섯 살인 이 남성은 자신이 맡을 역할로 사형에 처할 수 있음을 알고 있었다.”(9쪽)1955년 12월 로자 파크스[NAACP(전미유색인종지위향상협회) 간사] 체포 사건으로 촉발된 ‘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움직임 속에서, 킹은 흡인력 있는 연설로 흑인들의 분노를 결집했다.“우리가 틀렸다면, 미국헌법도 틀렸습니다. 우리가 틀렸다면, 정의는 거짓입니다. 그렇기에 여기 몽고메리에 있는 우리는 공의가 물처럼, 정의가 마르지 않는 강물처럼 흐를 때까지 노력하며 싸우기로 다짐합니다.”(186쪽) 보이콧은 무려 381일간 지속되었다. 킹은 과속이라는 억지 혐의로 난생처음 경찰에 체포되었고, 집에는 폭탄이 터졌다. 흑인이 권리를 찾는 것에 대한 “백인의 반발(white backlash)은 즉각적이고 사나웠다”.4. 킹의 승부수‘감옥을 무기로’ 케네디를 움직이다몽고메리 버스 보이콧 운동은 1957년 민권법 제정이라는 승리로 귀결되었지만, 미국의 뿌리 깊은 분리 정책과 일상의 폭력은 계속되었다. 암살 위협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백인시민위원회는 “니그로인종을 총, 활과 화살, 새총, 칼로 말살해야 한다”(208쪽)라고 민권운동에 대항했다. 1957년 킹은 “미국의 영혼을 구원하기 위해” SCLC(남부기독교지도자회의)를 창립하고 전국적인 비폭력 시위를 주도한다. 그는 “이제 더 이상 폭력이냐 비폭력이냐를 선택할 여지가 없습니다. 비폭력 아니면 비존재밖에 없습니다”(270쪽)라며 확고한 전략을 세웠다. 1960년, 내슈빌 청년들의 ‘자리잡기 운동(sit-in movement)’에 동참하던 킹은 또다시 체포된다(294쪽). 이때 자신이 수감되면 곧바로 언론의 주목을 받는다는 사실을 간파한 킹은 전략적으로 보석과 음식을 모두 거부했다. 사태가 심각해지자 정치인 존 F. 케네디가 개입하게 되고, 이는 “케네디, 구출에 나서다!”(300쪽)라는 대서특필과 함께, 킹의 투쟁이 전국적 이슈로 격상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5. 킹의 대전략‘고도의 미디어 전술’ 민권법, 선거권법 제정1961년, SNCC(학생비폭력조정위원회)가 올버니에서 벌인 유권자 등록 시위는 마틴 루서 킹에게 뼈아픈 좌절인 동시에 반면교사가 되었다. 보편적인 차원의 두루뭉술한 저항이나 시 관료, 정치인 들과의 어설픈 타협은 독이 될 뿐이라는 뼈저린 교훈을 얻은 그는, 이후의 투쟁을 훨씬 더 치밀하고 폭발적으로 기획하기 시작했다. 1963년, 킹은 가장 적대적인 도시 버밍햄에서 시위를 기획했다. 상대는 악명 높은 공공안전 위원 “황소” 티오필러스 유진 코너. 흑인 공동체를 결집해 시의 경제적 권력구조를 타격하고 매체 보도를 활용해 전국 시민이 투쟁에 참여하도록 유도했다. 경찰견과 소방 호스를 앞세운 당국의 야만적 진압이 매체에 노출되자, 대대적인 반향이 일었다. 법원의 명령에도 시위를 벌인 킹은 독방에 갇혔고, 이는 훗날 널리 회자될 ‘동료 성직자에게 보내는 편지’의 계기가 된다. 차후 학생들과 어린아이들까지 행진에 동원한 이 시위는 미국 전역의 공분을 일으키며 케네디의 ‘포괄적 민권 법안’ 제안(386쪽)이라는 승리를 이끌어 냈다. 버밍햄 시위의 여세를 몰아 워싱턴에 결집한 25만 명 앞에서, 마틴 루서 킹은 세기의 연설을 남겼다(419쪽). “저는 꿈을 꿉니다. 흑인 어린이와 백인 어린이가 손잡는 꿈을. 저는 이 아침에도 꿈을 꿉니다. 피부색이 아니라 인격에 따라 판단받는 날이 오기를.” 2년 후, SCLC, SNCC, 지역 활동가들과 함께 1965년 앨라배마주 셀마에서 유권자 등록을 위한 행진을 주도한다. 경찰의 곤봉과 최루가스에 무참히 짓밟힌 참상이 생중계된 ‘피의 일요일’, 뜻밖에도 당국과의 합의를 통해 시위대를 물리는 고도의 전술을 발휘한 ‘돌아선 화요일’ 등 킹의 지휘 아래 결집한 시민들은 5만 명으로 불어났다. 분노를 무기 삼고 비폭력을 전략 삼아 주 의사당 앞까지 행진한 이 치밀한 혁명은, 마침내 존슨 대통령의 ‘선거권 법안’ 서명(556쪽)이라는 역사를 완성해 냈다.6. 킹의 새로운 전선, 인권전쟁, 빈곤에 맞서다노벨평화상 수상 이후, 킹의 시야는 흑인 민권운동을 넘어 ‘보편적 인권’이라는 더 거대한 전선으로 확장되었다. 그는 굳건한 신념을 바탕으로 당시 미국인의 단 19퍼센트만이 반대하던 베트남전쟁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648쪽). FBI의 집요한 공산주의자 몰이와 협박에 이어, 민권운동이 위축될 것을 우려한 동료들의 거센 만류조차 그의 행보와 발언을 막지 못했다.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폭력을 유발하는 우리 정부에 대해 먼저 발언하지 않고서는, 빈민가에서 억압받는 이들의 폭력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더 이상 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 소년들을 위해, 폭력 아래 떨고 있는 수많은 사람을 위해, 저는 침묵할 수 없습니다(650쪽).”전쟁에 대한 그의 급진적 비판은 곧 빈곤과 경제적 불평등이라는 자본주의의 구조적 모순에 대한 날카로운 저항으로 이어졌다. 킹은 실질적인 경제적 권리 쟁취를 위해 모두에게 조건 없이 소득을 지급하는 ‘소외계층권리법(Bill of Rights for the Disadvantaged)’ 제정을 정부에 촉구했다(446쪽, 569쪽). 1966년 북부 시카고로 거처를 옮긴 그는 빈민들을 결집해 일자리를 요구하는 ‘브레드바스켓 작전(Operation Breadbasket)’을 개시했다(450쪽, 619쪽). 나아가 백악관과 의사당이 보이는 공유지에 판자촌을 세우고 거대한 시민불복종을 전개하려 했던 ‘빈자들의운동(Poor People’s Campaign)’은, 불평등한 체제의 심장부를 겨눈 혁명적 운동이었다(667쪽).7. 강박, 불안, 스캔들불완전한 인간, 위대한 역사가 되다수많은 동료의 생생한 증언, 가족의 전사와 기밀 해제된 FBI 문서 등 자료 수만 건을 바탕으로 복원한 마틴 루서 킹의 초상은, 우상화된 영웅 뒤에 있던 ‘진짜 인간’을 독자들 앞에 내보인다. [동료(해리 벨라폰테, 존 루이스, C. T. 비비언, 제시 잭슨, 후아니타 애버내시, 앤드루 영, 해리스 워포드, 제임스 로슨), 가족 및 최측근(코레타, 랠프 애버내시, 도러시 코튼 등) 인터뷰] 평화의 아이콘이라는 거대한 이름표 뒤에서, 극심한 불면증과 탈진, 우울증에 시달렸고 완벽한 지도력에 대한 강박으로 목 뒤에 신경성 경련인 틱을 앓았다. 아내에게 의존하면서도 끊임없는 여성 편력으로 스스로를 자책했고, 유능한 여성 동료들에게 지도적 위치를 내어 주지 않는 한계를 지닌 모순적인 인물이었다.FBI 수장 존 에드거 후버는 그의 이러한 사생활적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들어 민권운동을 무너뜨리려 했다. 킹이 가는 곳, 그와 연결된 모든 주요 인사의 전화기에는 도청기가 심겼고, 치졸한 공작과 맹렬한 협박이 그의 숨통을 조였다. 그러나 킹의 진짜 위대함은 그가 결점이 없는 무결점의 성인이었다는 데 있지 않다. 스스로의 나약함과 도덕적 결함에 괴로워하면서도, 날아드는 폭탄과 칼, 암살과 감옥의 공포를 뚫고 묵묵히 폭력의 한복판으로 걸어 들어가 비폭력운동의 소명을 지켰다는 데 있다. 결함 많고 고통받던 한 인간이 온갖 억압을 딛고 도달한 숭고한 이 길은, 압도적이고 묵직한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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