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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틀림없이 행복해진다
2부 누가 먼저 때렸나 3부 이거 못 버려요 4부 사다리 타기 5부 타조의 시간 6부 구타와 두부 7부 얼마나 아팠는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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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라, 신은 박복대에게 일평생 구타당할 운명과 놀라운 회복 능력을 함께 던져주었다. 능력이 운명의 보상일 수 있고, 운명이 능력의 대가일 수도 있다. 어느 쪽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 p.13 고지에 다녀온 군인 중 절반 이상이 크게 다쳐 다음 돌격에서 제외되었지만 박복대는 매번 그 누구보다 처참한 치명상을 입었음에도 고지에서 내려오면 또 몸이 멀쩡해진 탓에 도무지 월차를 낼 방도가 없었다. 한국전쟁 동안 한반도에서 두들겨 맞은 인원이 총 3,999,999명인데 고지전에서만 무려 2,999,999명이 두들겨 맞았다. 이쪽저쪽 합쳐 최고로 많이 두들겨 맞은 박복대는 사지가 멀쩡하다는 이유로 이 숫자에 포함되지 않았다. 포함되었다면 설명하기 훨씬 편했을 것이다. --- p.98 우등생이야 물론 훌륭하지만 어떤 개념에서 주로 애를 먹는지 지표가 되어줄 열등생도 세상에는 꼭 필요하다. 사자가 멋지긴 하나 위협을 느꼈을 때 땅에 바짝 엎드려 덤불 흉내를 내는 겁쟁이 타조 역시 사바나의 떼어낼 수 없는 일부다. 힌두의 창조신 브라흐마와 유지신 비슈누와 파괴신 시바는 한 몸이므로 브라흐마가 멋지고 시바가 화끈해도 비슈누 없이는 불완전하다. 전체란 시작과 중간과 끝으로 이루어져 있으니 프롤로그가 흥미진진하고 에필로그가 인상 깊어 봤자 그럴싸한 중간이 없다면 이야기가 아니다. 사장의 말은 그런 의미였다. 사장에 의하면 박복대는 세상의 열등생이며 유지의 화신 비슈누이자 이야기의 중간이었다. 그리고 타조였다. --- p.225~226 나는 두부 제일 많은 걸로 줘요. 박복대는 그 말이 좋았다. 그 말이 뜻하는 내용보다 그 말에 담겨 있는 마음이 좋았다. 당신을 믿는다, 당신은 내가 원하는 대로 해줄 것을 안다, 그러니 이 사소한 욕심을 당신에게 전한다…… 나는 두부 제일 많은 걸로 줘요. 들을 때마다 얼마나 가슴이 뛰었는지 모른다. 사랑은 때로 죄책감과 비슷하다. 박복대는 조연화 곁에서 늘 쩔쩔맸다. 그녀와 함께 있다는 것 자체가 매우 큰 죄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 p.274 “중심 같은 건 없어도 돼. 사람 사는 게 다 비슷하거든. 이리 쫓기면 이리 쓸려 오는 거야. 저리 밀려나면 저리 쓸려 가는 거고. 버티지 않고 쓸려 다니는 게 속 편해. 어머니한테 약속 못 지킨 거 마음에 담고 있었다간 난 예전에 속이 새카맣게 타서 죽었을걸? 아무렴, 내가, 아무렴, 내가 못살지, 내가 콱 죽고 말지.” --- p.366 형제복지원에서 제일 흔한 단어가 두 개 있었다. 그 하나는 ‘깨꾸닥’이었다. 워낙 사람을 들들 볶고 때리고 굴리는 탓에 툭하면 깨꾸닥하는 이가 나왔다. 그러면 원생 머릿수대로 받을 수 있는 정부 지원금이 줄어들지 않도록 은밀히 태우거나 묻었다. 다시 말해 깨꾸닥한 몸이라고 해서 맘대로 형제복지원 밖으로 나갈 수 있는 건 아니었다. 다른 하나는 ‘헤까닥’이었다. 원래부터 헤까닥한 사람을 잡아 오기도 했지만, 환경과 처우가 맨정신으로 버티기 워낙 어려우므로 멀쩡한 사람마저 쉽게 헤까닥했다. 박복대의 깍두기 소대가 그해 7월부터 이듬해 6월까지 내내 한 일이 바로 새 정신병동 터 닦기 작업이었다. --- p.386 엄청난 팔뚝으로 해머를 휘두르던 오라가 떠올랐다. 어쩐지 상희가 자라서 오라가 될 것 같았다. 상희야, 하고 박복대는 저 쓰라린 기억을 향해 탄식했다. ‘좋은 세상’이 저 혼자선 움직이지 못하는 종이배 같은 놈이어서 맨땅이 아닌 새빨간 선혈을 타고 온다는 것쯤은 나도 안단다. 하지만 그게 출혈을 찬양하는 얘기는 아니야. 우리의 피든 저들의 피든, 거리에 흘려도 좋은 피라는 게 대체 어디 있겠니. --- p.478 “도둑질도 해보고요, 구걸도 해보고요, 자해 공갈도 해봤어요. 죽기 싫어서요. 어떻게든 살고 싶어서요. 그러다가 엄청나게 맞았는데요, 아주 죽도록 맞았는데요, 맞으면 맞을수록 그게, 이상하게도 그게 자꾸 더 살고만 싶더라니까요.” --- p.5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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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복대를 때리는 건 사람이 아니라 시대였다”
경이로운 신체 회복력을 지닌 한 남자의 괴이한 수난극 사회봉사 명령으로 노인복지관에서 근무하게 된 ‘나’, 김철국은 건물에 들어서자마자 기이한 광경을 목격한다. 한 노인이 다른 노인들에게 둘러싸여 무자비하게 구타당하고 있던 것. 김철국은 그를 빼내어 방으로 데려오고, 노인의 상처가 빠른 속도로 아무는 것을 발견한다. 당혹스러워하는 그에게 노인 박복대는 “나는 죽도록 맞으며 살아왔다네”(p. 13)라는 말을 시작으로 참혹했던 자신의 일생기를 들려준다. 1930년대 강원도 춘천 유포리에서 농가의 외아들로 태어난 박복대는 어릴 적 신병을 앓은 뒤 기이한 능력을 얻게 된다. 아무리 맞고 찔리고 베이고 뼈가 부러져도 금세 낫고야 마는 불가해한 회복력. 한편 “박복대의 또렷한 이목구비에는 묘하게 구타를 불러오는 힘이”(p. 13) 있어 만나는 모든 이가 그에게 주먹을 뻗지 않고는 배길 수 없게 만든다. 1950년, 전쟁은 산골 마을에까지 손길을 뻗어왔고 16살 박복대는 주민들과 함께 고향을 떠나 도망친다. 그때부터 박복대의 진정한 수난기가 시작된다. 그는 북한군과 중공군에게 무수히 맞으며 한국전쟁 3년을 지나 대구에 닿는다. 매일 스스로를 상처 입혀 돈을 버는 자해 공갈범으로서의 남루한 생활을 지나, 미군 기지와 신문사에서 짧게 벌어먹은 뒤 광주 중앙인쇄소에 다다른다. 민주화 항쟁으로 사람이 숱하게 맞고 죽어 나가던 광주에서 박복대는 맞기도 많이 맞지만 동료 그리고 사랑, ‘조연화’를 만나게 된다. 연인 조연화의 폭력과 자기반성으로 끝나버린 짧은 인연은 박복대에게 돌아볼 때마다 사무치게 아픈 가시로, 그러나 동시에 남은 인생을 지탱하는 기둥으로 자리하게 된다. 어째서 연화 씨도 나를 때린 것일까? 사람이 사람을 때리지 않고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인가? 박복대의 의문에 코웃음 치듯, 그의 삶에 찾아온 건 또 다른 사랑이 아닌 삼청교육대다. 그곳에서 박복대는 다른 교육생들과 함께 몇 개월간 “영락없는 개돼지”(p. 313) 취급을 받으며 무차별적으로 폭행당한다. 간신히 도망쳐 부산에서 새 시작을 도모하던 그에게 찾아온 것은, 이번에는, 형제복지원이다. 부랑자 단속이라는 명목으로 시민을 잡아다가 시도 때도 없이 구타해 “깨꾸닥 또는 헤까닥”(p. 386)이라는 운명에 봉착시키는 형제복지원에서의 무자비한 3년이 지나고 그는 1987년의 서울에 닿는다. 사방에서 구호가 울려 퍼지며 골목엔 최루탄 연기가 자욱한 도시. 지독하다 싶을 만큼 여전히도 박복대는 폭력의 굴레 속에 있던 것이다. 시위대 틈에서 헤매던 박복대는 ‘국제해양연구소’라는 조직에 붙잡혀 그 전과는 다르게 수술을 집도하듯 “기계 같은 무심함”(p. 468)으로 이루어지는 폭력, 즉 고문을 당한다. 인간 사회의 연쇄적 폭력에 질려 소백산에서의 은둔을 택하지만 결국 “끝없는 괴롭힘과 모욕에 고통받을지언정, 곁에 사람이 있어줘야 자기 역시 사람이”(p. 534)라는 믿음으로 다시 사회에 돌아온 박복대. 전기공에서 국밥집 사장이 되기까지 여러 인연을 스쳐 보내며 이윽고 여든을 넘어선 그는 요양원에 입소한다. 그곳에서 보호관찰 중인 봉사 요원 김철국과 마주하고, 자신의 ‘죽도록 맞아온’ 생애를 들려주기 시작한다. 폭력의 시대를 살아낸 모든 인간에게 바치는 찬가 비극마저 해학으로 끌어안는 압도적 서사 무참할 정도로 이어지는 소설 속 구타는 국가라는 이름 아래 자행된 폭력을 멈추자는 탄원과도 같다. 박복대는 픽션 속 인물로서 그 모든 폭행을 겪고서도 살아남지만 그가 지나온 전쟁에, 형제복지원에, 삼청교육대에, 민주화 항쟁에, 빈민을 방치했던 국가에 기실 수백만의 죽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전후 시대를 바라보며 아도르노는 “삶이 살아 있지 않다”라는 말을 남겼다. 국가라는 전체가 폭력 체계로서 개인에 우위를 점하고 이들을 절멸하려 든 경험으로 ‘상처 입은 삶’들이 ‘예외 없이 불구가 되었기’ 때문이다. 박복대라는 인물은 국가에게 그리고 서로에게 죽도록 맞으며 ‘불구가 되어버린’ 근현대 한국인의 초상이다. 책 너머에서 박복대의 생로병사를 바라보는 독자는 생생한 수난극에 함께 아파하고 신음하게 된다. 압도적인 두께의 소설 내내 끝나지 않는 구타와 그 잔혹성에 혀를 내두르고 진저리 치게 된다. 그러나 결코 책장을 덮지 못하고 끝까지 읽어 내려가게 되는 동인은 진실과 허구를 유려하게 넘나들며 독자를 이야기의 수렁에 빠뜨리는 탁월한 이야기꾼 박형서의 흡인력에 있다. 그간 ‘농담의 악마’라 불려왔던 작가 특유의 천연덕스러운 어투와 시니컬한 유머는 영겁의 고통을 읽어 내리면서도 거듭 실소를 자아내게 한다. 박복대가 맞는 장면을 신들린 듯 묘사할 때는 기이한 신명까지 느껴진다. 눈물 속에서도 웃음을 금치 못하며 소설을 읽다 보면 혀끝에 기어코 인간을 향한 애증과 연민이라는 달콤쌉싸름한 맛이 스며든다. “사람은 사람 곁에 있을 때만 사람이다” 국경 너머, 이념 너머, 끝내 사람을 향한 이야기 작가는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이 소설을 시작했다. 국가란 무엇인가? 국경이란, 국민이란 무엇인가? 국가주의와 무정부주의는 무엇이며, 진정한 아나키즘이란 무엇인가?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는 모두 누군가의 적군이었다. 그러나 오늘날의 우리가 여즉 그 상대를 증오하는가? 오로지 이름으로만 존재하는 개념들에 반기를 들며 이 소설은 우리 본성이 반려인을, 곁의 이웃을, 같이 일해온 동료를 사랑하는 데 더 탁월함을 선포한다. “사람 사는 게 참 짧거든. 그러니 시간 날 때마다 옆에 있는 사람을 쓰다듬고 좋아하고 아껴주는 게 훨씬 이익이란다”(p. 514). 결국 박복대가 죽도록 맞으며 살아왔더라도 인간 사회로 돌아온 이유는 ‘어머니’ ‘홍천 국밥집 주인마님’ ‘감자 할머니’ ‘조연화’ ‘원 씨’ 등 그의 삶에 아주 작게라도 온기를 나누어주었던 사람들 때문이다. 고통과 상처도 오래가지만, 사랑을 주고받았던 기억은 그보다 오래 남는다. 폭력이 삶을 뒤흔들어놓을 때 그 삶을 지탱하는 것 또한 사랑했던 기억이다. 박복대의 삶이 결코 불행하지만은 않은 까닭은 그래서인지 모른다. 우리가 폭력의 굴레를 만신으로 겪어내면서도 끝내 희망을 놓지 못하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신도, 조국도, 주인도 없다. 이 땅에는 서로를 필요로 하는 외로운 사람들만 있을 뿐이다”(p. 224). 소설이 그리듯 우리 삶에 폭력의 그림자가 깨끗이 거둬지는 날이 오지 않을지라도 오직 인간의 인간을 향한, 그 존재의 애수마저 품는 사랑이 있다. 누군가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듣고자 하는 마음이 있고, 타인의 고통에 공명하는 영혼이 있다. 그로 인해 이 세계가 더 나은 곳으로 향하는 중이다. 이러한 믿음만으로도 우리는 ‘죽도록 맞으며 살지 않는’ 어떤 천연한 미래를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