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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사람의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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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주
창연출판사 2026.0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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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목차

시인의 말 - 05

제1부_여기서 한 달쯤은 지나가는 바람으로


송광사 불일암佛日庵 - 13
금강경金剛經을 배우며 - 14
법정 스님의 사계四季 - 봄 - 15
- 여름 - 16
- 가을 - 18
- 겨울 - 19
마음 - 20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 - 21
달항아리 - 22
대답의 품위 - 23
성파 선예禪藝 - 24
서운암 사계四季 - 26
장경각의 봄 - 27
운주사 - 28
구례 사성암 - 29
합천 영암사지 - 30
부처님오신날 - 31
산문에 들어 - 32

제2부_겨울의 냉동고에서 환한 봄을 꺼낸다


사람의 겨울 - 35
지하련 - 36
최민식 - 37
윤수 형님 - 38
손 선생님 - 39
상기 관장 - 40
서용욱 - 41
미장원 그 여자 - 42
배꼽 찾는 여자 - 43
미더덕 까는 여자 - 44
다림질하는 여자 - 45
밭에서 만난 여자 - 46
산으로 가는 여자 - 47
김씨 - 48
노숙露宿 - 49
내가 사는 곳 - 50
중리역中里驛 - 51
성호초등학교 - 52
가포 봄길 - 53
지금, 창동에 가면 - 54
자화상 - 55
의령장 - 56
소 - 57
사려니숲길 - 58

제3부_강물을 울리지 않고 건너가는 배 없다


부추 - 61
수선화 - 62
파꽃 - 63
토마토 - 64
음식, 사랑이다 - 65
여름 풍경 - 66
폭우 - 67
입춘 - 68
곡우 - 69
하지 - 70
입추 - 71
논문 작성법 - 72
그래도 늦지 않다 - 73
채식주의자 - 74
책맹인류 - 75
퍼펙트 데이즈Perfect Days - 76
이처럼 사소한 것들 - 77
절규 - 78
파문 - 79
고래 - 80
신우해이어보新牛海異魚譜 - 81
먼바다가 전하는 소식 - 82
사할린 비보悲報 - 83
다마스쿠스 - 84
시간의 강을 건너는 배 - 84
반달 - 86

제4부_그 풍경 가위질하여 어쩌자고 가져와


파도 - 89
안개 - 90
고욤나무 - 91
바다를 붙잡다 - 92
저녁의 연인 - 93
그 여자 바람 - 94
어느 멋진 날 - 95
사랑을 꿈꾸며 - 96
연착延着 - 97
이별은 이유를 만들고 - 98
잃어버린 동전에 대한 분노 - 99
란蘭 - 100
오후 네 시 - 101
안나 카레니나에게 - 102
첫사랑 - 104
짝사랑 - 105
행복해서 슬픈 이 - 106
어린 왕자 - 107
빼빼로 - 108
유자 - 109
모두가 니탓이다 - 110
일요일 - 111

해설_사랑의 힘으로 번져가는 선연한 사유와 기억 - 112
유성호(문학평론가, 한양대학교 국문과 교수)

저자 소개 1

마산(창원군) 내서에서 출생했다. 마산 석전초, 중앙중, 경상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경상국립대학교 수의학과 졸업(수의사)하고, 경상국립대학교 문화융복합학과를 졸업(문학석사·박사)했다. 1988년 《시조문학》 초회 추천, 1990년 낙강전국시조백일장 장원, 1991년 《시조와비평》 시조로 추천 완료했다. 마산문인협회 부회장 선임(2024~2025), 터울시조문학동인, 시향문학회 회원, 경남시조시인협회, 오늘의시조, 마산문인협회, 경남문인협회, 경남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마산한마라이온스클럽 회장 역임(FY2008-2009). 창원수의사회 회장을 역임하고 경남수의사회 상임이사
마산(창원군) 내서에서 출생했다. 마산 석전초, 중앙중, 경상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경상국립대학교 수의학과 졸업(수의사)하고, 경상국립대학교 문화융복합학과를 졸업(문학석사·박사)했다. 1988년 《시조문학》 초회 추천, 1990년 낙강전국시조백일장 장원, 1991년 《시조와비평》 시조로 추천 완료했다. 마산문인협회 부회장 선임(2024~2025), 터울시조문학동인, 시향문학회 회원, 경남시조시인협회, 오늘의시조, 마산문인협회, 경남문인협회, 경남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마산한마라이온스클럽 회장 역임(FY2008-2009). 창원수의사회 회장을 역임하고 경남수의사회 상임이사로 있다. 한국사진작가협회 마산지부 회원이며 사진작가로도 활동 중이다. 창원시검도회 회장, 경일동물병원 원장, 경상국립대학교 문화융복합학과 겸임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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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6년 07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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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수/ 페이지 수
약 131쪽 ?
ISBN13
9791194987529

출판사 리뷰

사랑의 힘으로 번져가는 선연한 사유와 기억
- 이경주의 시조 미학

유성호(문학평론가·한양대학교 국문과 교수)

심원한 내면과 원숙한 시선이 들려주는 미학적 진정성

새로이 출간되는 이경주 시인의 시조집은 시인 자신이 겪은 남다른 경험에 대한 예술적 잔상殘像에 의해 형성되고 전개된 미학적 결실이다. 그의 시조는 시인의 몸속에 새겨진 수많은 기억을 통해 심층적 감동을 건네면서 선명한 언어적 상像을 각인해 간다. 우리는 시인이 충실하고도 고유한 음역音域을 통해 삶의 보편적 가치를 전달하는 미학적 진정성을 만나게 되고, 나아가 지난날에 대한 강렬한 기억에 바탕을 둔 시인의 경험적 구체성을 응시하게 된다. 이경주 시인은 이러한 기억의 과정과 결과를 밝고 아름다운 문장으로 실현함으로써 어둑한 세상을 밝히는 등불 역할을 적극 수행하고 있다. 그 안에는 뭇 사물이 서로 연결되어 생명을 품어 기르는 과정에 대한 기억이 흐르고 있고, 사랑하는 이들을 향한 한없는 믿음과 그리움이 가득 담겨 있다. 또한 시인은 긍정의 시선으로 우리 삶을 관찰하고 자신이 치러왔던 실존적 시간을 저류底流에 흐르게 하고 있다. 비상한 열정으로 정신적 깨달음의 차원을 개척해가는 자기 긍정 과정을 낱낱의 실물감으로 보여준다. 시인 스스로 오랜 시간 뒤척이고 가다듬으며 갈무리해온 시적 지향의 궁극적 결실이 이러한 과정을 통해 풍요롭게 귀납된 것이 이번 시조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실존의 상처에서 새로운 인생론적 해석으로 그 방향타를 선명하게 바꾸어가는 이경주 시인의 방법론을 만나면서 우리는 뭇 사물을 포용해 들이는 그의 심원한 내면과 함께 세계를 받아들이는 원숙한 시선을 발견하게 된다. 그만큼 그의 시조는 마이너리티의 권역에 머물러 있는 정형시의 특성을 완미한 형식과 내용으로 결속해낸다. 그가 서정시의 소통 가능성을 부드럽고 친화력 있는 소재와 어법으로 구현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의 시편에 원용된 소재들은 한결같이 삶의 밑바닥과 근원을 동시에 환기하는 상관물로 기능하고 있다. 자연 사물 자체를 물신적으로 절대화하거나 복고적 기억 속에 머무르려는 경향과 그의 시편이 갈라지는 지점이 여기일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진리를 탐색하는 기억술을 섬세하고도 다양하게 보여준 그의 시편들을 오래도록 이야기할 것이다. 그 안에 구현된 궁극의 원리는 말할 것도 없이 대상을 따듯하게 응시하고 안아들이는 사랑의 힘일 것인데, 이제 그러한 웅숭깊은 정형 미학의 세계 안쪽으로 한 걸음씩 들어가 보도록 하자.

성속일여聖俗一如와 비승비속非僧非俗의 경지

우리는 사물을 이해하는 과정에서 언어의 역할이 불가피하다는 사실에 동의하게 된다. 대상을 관찰하고 거기에 형상을 입히는 작업을 통해 사물의 본체는 언어의 굴절을 받아들이면서 자신만의 구체성을 가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때 불가적佛家的 상상력이 큰 역할을 해온 것은 한국 서정시의 숨길 수 없는 모습이다. 물론 그것은 때로는 명료한 기표로 때로는 숨겨진 침묵으로 나타난 바 있다. 이경주 시조는 비非언어적 마음을 유지하는 데서 언어를 비껴간 침묵을 통해 명상하는 것이 그러한 사유의 중요한 형태임을 입증하는 사례로서 돌올하다. 그만큼 시인은 이러한 언어적 비밀을 품어 안으면서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不立文字] 것과 언어를 떠나서는 표현할 수 없는[不離文字] 것을 동시에 표상하고 있다. 이렇게 표면적 기능의 경계가 지워져버린 마음을 ‘무위심無爲心’이라고 할 만한데, 이경주 시인은 우리의 가시적可視的 분별이 사라진 ‘무위심’을 바탕으로 하여 자신의 시조를 넉넉하게 써간다. 그렇게 시인은 자신의 실존적 기율이기도 할 이러한 불가적 상상력을 충실하게 따라가면서 독자적 시선과 언어를 배열해간다. 내면의 침묵을 일깨워 더욱 보편적인 언어로 나아가는 고투의 순간을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다음 시편을 먼저 읽어보자.

왜 절에 왔냐고 물어보지 않는다
매듭이 얽히고설킨 실타래 한 짐 지고
저무는 햇빛을 캐며
묵묵하게 나선 길

오르막길 같기만 한 무거운 인연들
쉽게 끝내버린 내리막길 인연들
다 잊고 새로워지려
나를 찾아왔는데

여기서 한 달쯤은 지나가는 바람으로
그 바람 일 년쯤은 냇물로 흘려보내면
풍경의 청아한 소리로
맑아질 수 있을까

후박나무 잎이 가린 이끼로 덮은 납골
시간과 공간까지 소거된 이곳에서
아직도 나를 못 버린
내 그림자 흔들거린다
― 「송광사 불일암佛日庵」 전문

시인은 우리 나라 3대 사찰 가운데 하나인 ‘송광사 불일암’에서 만난 풍경과 순간을 서정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시인은 매듭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실타래 한 짐”을 지고 저물어가는 사찰에 들어선다. 그렇게 묵묵하게 나선 길은 어쩌면 “오르막길 같기만 한 무거운 인연들”이나 “쉽게 끝내버린 내리막길 인연들”을 다 잊어버리고 새로워지려는 길일 것이다. ‘나’를 찾아 당도한 곳에서 시인은 “풍경의 청아한 소리로/맑아질” 순간을 기대해본다. 하지만 일순一瞬 시공간이 소거된 곳에서 아직도 ‘나’를 버리지 못한 시인의 그림자만이 흔들거릴 뿐이다. “이제 시간과 공간을 버려야겠다.”라는 전언은 송광사의 상징인 법정法頂 스님이 입적 전날 남긴 법어法語인데, 시인은 그 말씀을 인용하면서 ‘나’를 찾아가는 길의 어려움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이경주 시인은 “한칼에 베지 못한 인연을 숙명처럼”(「상기 관장」) 느끼면서 “외로운 한 사람쯤은/안아줄 수 있는 곳”(「가포 봄길」)을 찾아가고 있다. 다음은 어떠한가.

비 개인 산 중턱의 툇마루 기대앉으면
지나는 시냇물 소리 발 담근 댓잎 소리
누구도 제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 「법정 스님의 사계四季 - 봄」 중에서

먹물 든 절마당 입구 보살님 눈물 모은 곳
씻어서 더 간절한 뼈마디 굵어지며
늦여름 계향충만戒香充滿한
그런 사람 될까나
- 「법정 스님의 사계四季 - 여름」 중에서

별자리 뚜렷하고 벌레 소리 아련해져
건듯건듯 소슬바람 버석버석 지나가는,
더위의 뒤끝 더듬어
헤아리는 깊은 밤

하프를 연주하듯 보름달 흘러가고
그늘이 길게 늘어진 후박나무 뜰 아래
적막과 은은한 달빛
내 그림자 씻는다
- 「법정 스님의 사계四季 - 가을」 중에서

산죽밭 사각거림 뜸해진 개울물 소리
요구하는 법 없이 담담히 지나가듯
덜 여문 내 목소리를
다시 안으로 벼린다
- 「법정 스님의 사계四季 - 겨울」 중에서

이번에는 법정 스님의 사계四季를 기록하는 정성을 다하고 있다. 춘하추동을 지나면서 스님 거하시던 공간은 자연 사물과 어우러지고 궁극의 가치들을 이끌어온다. “비 개인 산 중턱의 툇마루”나 “지나는 시냇물 소리”도 제 것이라고 주장하지 않는 봄날이나 “먹물 든 절마당 입구”의 “늦여름 계향충만戒香充滿한” 전언까지 모두 우리로 하여금 내면을 비우고 낮아진 상태로 연결되어가라고 한다. 스님은 연꽃이 피면 물속 시궁창 냄새는 사라지고 향기가 연못에 가득하다는 뜻을 전하신 바 있는데, 시인은 그것을 이렇게 선명하고도 아름답게 기억하고 기록해놓은 것이다. 가을이 되어 별자리 뚜렷하고 벌레 소리 아련해질 때, 소슬바람 지나는 순간을 헤아리는 밤에, 시인은 “적막과 은은한 달빛”이 자신의 그림자를 씻는 환각을 경험한다. 겨울에는 산죽밭 개울물 소리가 담담히 지나갈 때 “덜 여문 내 목소리”를 안으로 벼리려는 자기 다짐의 순간도 잊지 않는다. 이렇게 시인은 법정 스님의 사계절을 빌려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스스로를 견인하고 성찰하며 내면적으로 굳은 의지를 다져간다. 그 과정에서 “바람의 뼈를 숨긴 깜깜한 적막”(「수선화」)을 만나기도 하고 “단단히 견뎌내고 은은히 스며들어/가득한 지혜의 말씀 밤낮없이 담는”(「달항아리」) 순간도 맞이하게 된다. “저만의 보폭으로 한 생을 마름질”(「반달」)하는 자연이 “정갈히 씻어 내리는”(「산문에 들어」) 시공간을 실존적 제의祭儀처럼 받아들인다. 무궁하고 융융하고 성스러운 순간들이 그 아래로 숱하게 지나갔을 것이다.

대체로 서정시는 사라져간 순간에 대한 그리움의 현장으로 펼쳐져 있게 마련이다. 그곳에는 신성한 세계와 함께 가장 인간적인 슬픔의 미학이 흐르고 있고, 지상의 원리에 충실하면서도 한켠에서는 초월과 비상의 꿈을 잃지 않으려는 시인의 고투가 담겨 있을 법하다. 유한자有限者로서의 한계를 벗어나 감각으로는 포착되지 않는 근원적 실재를 찾아나서는 초월과 모험의 순간이야말로 서정시가 꿈꾸는 가장 고차원의 지향일 것이다. 이경주의 시조는 이러한 서정시의 기능을 견지하면서 우리로 하여금 어떤 근원적 실재를 유추하게끔 해주는 화폭으로 다가온다. 시인은 시공간의 심층을 활달하게 가로지르면서 더욱 크나큰 세계로 나아가려는 심미적 진경進境을 제시해준다. 그야말로 성속일여聖俗一如와 비승비속非僧非俗의 경지가 시인의 밝은 눈을 따라 펼쳐져간다. 우리 또한 그리움과 사랑 안에서 성속이 일체가 되는 것을 경험하면서 근원적 실재를 유추해가는 순간을 만나게 된다. 우리 시조시단에 매우 드물고 또 이채로운 성과가 여기에서 도출되고 있다.

‘삶’과 ‘시’에 대한 가장 근원적인 사유

그런가 하면 이경주 시인은 자연 사물의 구체성을 통해 ‘삶’과 ‘시詩’에 대한 가장 근원적인 사유를 수행해간다. 자연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면서 뭇 생명들이 어울려 공존하는 지혜를 얻어가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시인은 가장 근원적인 사유와 감각을 자연으로부터 얻을 수밖에 없다는 엄연한 진실을 노래한다. 그 점에서 그는 우리 시대에 가장 필요한 사유 방식을 보여주는 서정시인이다. 그 안에는 그리움으로 불러보는 근원적 가치들이 출렁이면서 자연 속에서 자연과 함께 결핍과 불모의 기억을 넘어 숯처럼 견고하게 결정結晶된 상상력을 찾아나서는 면모가 담겨 있다. 뭇 존재자들의 실존을 노래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지상의 존재자들을 따뜻하게 감싸 안는 크나큰 품을 암시하는 것이다. 그만큼 이경주 시인은 자신의 오랜 기억을 드러내면서 미약하게 사라져가는 존재자들을 실감 있게 복원해내기도 한다. 이는 그가 한결같이 약하고 소외된 존재자들을 옹호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음을 알려준다. 한편으로는 첨예하고 구체적인 스스로의 기억으로, 다른 한편으로는 대상을 향한 지극한 사랑으로 그의 시조는 간단없이 퍼져가고 있다. 그 사랑의 힘이 우리 시조시단의 한 개성적 역동성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금낭화 앞장세워 봄햇살 두른 도자陶瓷
공작은 허리 깃 펼쳐 호위무사 자처하고
영축산 그림자 비껴
화엄 내린 장경각

시대를 거슬러 온 해안의 우주 허공
선한 눈매를 가진 고래와 사슴들이
한 물에 어울려 노는
평화로운 이 뜨락

일하며 공부하고, 공부하며 일하듯이
미물도 제 몸 바쳐 옻칠로 변신하여
이 땅의 불국정토가
소슬하게 세워졌나니

수행의 복력福力으로 거룩한 됨됨이로
볼수록 빛이 나는 이 따뜻한 이룸이여
해와 달 두루 비추어
곳곳마다 여래로다
- 「장경각의 봄」 전문

영축산 통도사 성파 스님 어록語錄 『일하며 공부하며, 공부하며 일하며』를 가로지르는 상상력이 이 시편을 관통하고 있다. 시인은 “금낭화 앞장세워 봄햇살 두른 도자陶瓷”를 바라본다. 그리고 그 곁으로 찾아든 “영축산 그림자 비껴/화엄 내린 장경각”의 모습은 가장 거룩한 침묵의 전언을 우리에게 건넨다. 그 안에는 모든 생명들이 평화롭게 어울려 노는 뜨락이 존재하고, “미물도 제 몸 바쳐 옻칠로 변신”하는 “이 땅의 불국정토”도 깃들어 있다. 이제 시인은 “수행의 복력福力”을 통해 한없이 빛나는 “따뜻한 이룸”을 불러본다. 그 거룩한 성취를 두고 시인은 “해와 달 두루 비추어/곳곳마다 여래”라고 감동하는 것이다. 그렇게 영축한 장경각의 봄은 “볕뉘가 다녀갔을 그늘”(「안나 카레니나에게」)을 안으로 숨긴 채 “마음속 저 혼자만 비밀을 숨겨두고”(「짝사랑」) 은은하게 복력을 펼쳐가고 있다. “캄캄한 심연 속에 숨겨둔 고요한 빛”(「성파 선예禪藝」)이 그 안으로 그득 번져오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그 빛으로 시인은 자신의 ‘삶’과 ‘시’를 스스로 비추어보고 있다.

내 글이 책상에서 절 한 채 떠받들 때
네 법구 시장에서 세상살이 가르친다
마땅히 머물지 않은
그 마음이 금강이라

활자는 아슴푸레 입에서 깔끄럽고
가슴속 닿지 못해 손에서 멈칫하여
고귀한 문구 밖으로
갸웃대는 물음표

여법한 수행으로 삼매에 빠진 밑줄
형광펜 노란빛이 홀씨로 난분분해
새벽녘 이슬 맞은 듯
하얘지는 말머리

꽃그늘 주저앉은 나 데리러 산에 간다
고랑 길 훑어가듯 찬찬히 손 내밀어
네 경經이 나에게 닿게
한 발짝씩 옮긴다
- 「금강경金剛經을 배우며」 전문

‘금강경’은 대승불교 초기 공空 사상을 담은 반야 계통 경전으로 알려져 있다. 시인은 책상에서 절 한 채 떠받드는 것보다 시장에서 세상살이 가르치는 마음이 결국 ‘금강’의 속성일 것이라고 믿는다. 활자는 입에서 깔끄러울 뿐이어서 결국 “고귀한 문구 밖으로/갸웃대는 물음표”에 불과한 것이다. 그렇게 “여법한 수행으로 삼매에 빠진 밑줄”을 넘어 시인은 “꽃그늘 주저앉은 나”를 데리러 산으로 향한다. “네 경經이 나에게 닿게” 함으로써 한 발짝씩 진리의 언어로 옮겨가는 시인의 국량局量이 크게 다가온다. 시인은 이처럼 금강경을 배우며 스스로 깨달음에 이르러간다. 그 깨달음에는 “인간의 굴곡진 명암”(「최민식」)을 넘어서는 “무와 무 그 사이에서 살아가는 하루”(「퍼펙트 데이즈Perfect Days」)의 연속이 자리잡고 있고, 나아가 “해야 할/말을 수선해/책 속에다 묻는”(「시인의 말」) 시인의 성숙한 요량이 개입해 있을 것이다. 과연 그러하지 아니한가. 이처럼 이경주 시인은 불가적 사유를 바탕으로 하여 주위에 존재하는 사물들로부터 가장 근원적인 가치를 소환하고 있다. 우리 삶의 배경이 되는 사물들에서 얻어낸 깨달음을 집중적으로 노래하면서 그 이면에 캄캄한 깊이를 거느린 진리의 도량을 찾아간다. 이때 각 사물은 제 몫의 물질성을 유지하면서도 일상에서 어떤 지혜나 경험을 회복해주는 상징적 장치로 차츰 변모해간다. 이러한 모습은 궁극적 대상을 바라보는 시인의 독자적인 태도나 관점에서 빚어지는 것인데, 그렇게 시인은 인간과 자연의 상호의존성을 바탕으로 그 생명의 경이가 전해주는 가장 구체적이고 심미적인 풍경을 채집해간다. 이때 시인이 포착한 사물의 존재 방식은 시인 자신의 원형으로 환치되기도 하고, 존재의 심층에 가라앉은 삶의 이법理法에 대한 사유를 가능케 해주는 형식으로 화하기도 한다. 다양한 사물의 존재 방식을 통해 삶의 비의秘義에 도달하려는 이러한 의지는 양도할 수 없는 이경주 시조의 표지標識가 되는 동시에, 자연 사물 속에 내재한 소멸과 신생의 원리에 대한 그의 사유를 증명해준다. ‘삶’과 ‘시’에 대한 가장 근원적인 사유를 담아내는 데 남다른 적공積功을 들이는 시인의 불가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시선이야말로 오랜 시간 쌓아온 연륜을 한결 선명하게 보여준다 할 것이다.

존재론적 기원起源에 대한 사랑의 마음

이경주 시인은 현실에서는 가닿을 수 없는 어떤 세계를 그려가면서 그 세계를 순리와 역리의 균형으로 걸어가고 있다. 그리고 온몸의 직접성으로 겪은 자신의 기억을 통해 그것을 수행해간다. 우리가 잘 알듯이 기억이란 자기동일성에 의해 구현되는 재현과 창조의 원리를 말한다. 시인은 사물을 해석하고 형상화해가는 과정에서 사물의 이면에 존재하는 순리와 역리의 파동을 세밀하게 포착하면서 그것을 순간적 기억으로 복원해간다. 사물들이 감각적 현존으로 나타나는 구체적 시공간을 작품 안으로 초대하는 것이다. 이때 그의 섬세하고도 아름다운 기억은 서정시가 구현하는 시간예술로서의 속성을 한껏 충족하는 기능을 떠맡는다. 그리고 인간의 오래된 근원을 유추하게끔 하는 유력한 역할을 자임하기도 한다. 그 가운데 특별히 자신의 존재론적 기원起源에 대한 사랑의 마음은 서정시가 오랫동안 축적해온 핵심적 기율이기도 하고 사라져버린 대상을 상상적으로 재현하고 복원하는 일에 심혈을 기울여온 오랜 경험적 방법론이기도 할 것이다. ‘시인 이경주’는 자신의 존재론적 기원이 되어준 이들에 대한 기억을 통해 자신을 가능케 한 시간을 적극적으로 사유하고 표현해간다.

첫눈은 해가 바뀌어도 어김없이 내리네요
남녘의 바닷바람 텃새처럼 불어와서
눈사람 남기지 못하고
사라지며 묻히고

흙먼지 빛을 가려 녹아서 마르기 전
까맣게 잊어왔던 그대를 소환하네요
당신이 처음이에요
나를 다 보였어요

햇살이 고백으로 귓불에 전해지면
수신을 알 수 없는 사랑이 맴도네요
그대를 찾아가네요
하늘에서 땅으로
- 「첫사랑」 전문

오래고도 오랜 ‘첫사랑’에 대한 기억이 ‘첫눈’의 형상을 통해 펼쳐진다. 단정한 경어체의 말건넴 구조로 짜여 있는 이 시편은 그때처럼 내리는 ‘첫눈’이 이제는 “남녘의 바닷바람”처럼 불어와 눈사람 남기지 못하고 사라지고 있다고 묘사한다. 하지만 그 순간 “까맣게 잊어왔던 그대”에게 “당신이 처음”이었고 “나를 다” 보였다는 고백이 소환된다. “새벽녘/택배로 오는/그대 마음의 온도”(「곡우」)가 전해진 것이다. 그렇게 햇살이 고백으로 귓불에 전해지는 순간, 시인은 오래 가슴에 묻어두었던 “수신을 알 수 없는 사랑”을 찾아간다. “하늘에서 땅으로” 낙하하는 ‘첫눈’을 바라보면서 말이다. 언젠가 시인의 존재를 온통 흔들었을 첫사랑의 기억이 새삼 내리는 ‘첫눈’을 통해 강렬한 감각으로 불려온 시편이다. 비록 “헛헛한 인연들은 오래갈 수 없는 법”(「자화상」)이라지만 시인은 “속마음 들킬지 몰라/조바심이 앞서는”(「바다를 붙잡다」) 사랑의 마음을 자신의 기원으로 호명하고 이렇게 새겨놓았다. ‘시인 이경주’가 살아온 여러 삶의 한 단면이 부조浮彫된 작품인 셈이다. 이는 “웃소금 덮어두듯 애써 감춘 그리움”(「음식, 사랑이다」)의 반영이기도 하여 시인은 “무수히도/남몰래 다녀갔을/너를 떠올리는 것은/나의 서툰 사랑 고백”(「안개」)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지중해 가자 지구, 흑해의 크림반도
꺼지지 않는 불이 점령한 지 오래다
탄환은 바다 밑으로
쉬지 않고 달린다

밤이면 섬광으로 참혹한 불꽃 피고
아침엔 아이들의 팔뚝에 피 흐르고
격랑의 세상천지에
사람들은 사라진다

장갑차 낸 자국에 가슴이 패인 날들
염병처럼 번져버린 결전의 현장에는,
아무도 승자는 없다
신들도 전범자다
- 「먼 바다가 전하는 소식」 전문

태어나 죽음까지 열심히 달려가도
시원始原의 터전에선 똑같이 대우한다
사람일 하늘에 지은
구름 같은 절이다

금강경 문리 트면 모두가 없다 한다
시작과 끝 바깥에서 소멸하여 비워져
머무른 나의 자리는
그 안쪽에 잠시뿐

베푸는 마음조차 은혜로이 사라진다
오늘을 수고해서 다음 생 아름답게
찰나의 유혹을 건너
저마다 귀의한다

바람은 자유롭게 거침없이 비행하여
사람으로 산다는 걸 탓하지 않겠지만
기대어 일어서는 난,
등 뒤가 시려온다
-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 전문

시인은 자신의 존재론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 인간애와 휴머니즘을 노래한다. “지중해 가자 지구, 흑해의 크림반도”에 꺼지지 않는 전쟁의 불을 연민하고 그 쉬지 않는 질주를 비판한다. 참혹한 불꽃과 아이들 팔뚝의 피 그리고 사람들 사라진 그곳을 응시한다. “장갑차 낸 자국에 가슴이 패인 날들”이야말로 “아무도 승자는” 없고 “신들도 전범자”로 추락하는 지옥도일 뿐이 아닌가. 먼 바다가 전하는 소식은 그야말로 우울하고 잔혹한 것일 뿐이다. 이렇게 제국의 폭력을 비판하던 시인의 마음이 귀환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라는 불가적 지혜이다. 그것은 아무런 집착 없이 남에게 베풀어주는 것을 의미하는 불교 교리이다. 두루 알려져 있듯이 ‘무주상’은, 크고 작음이 생멸하는 우주처럼, 특정하고 견고한 이미지에 긴박되지 않음을 말한다. 이때 사랑과 지혜가 그러한 항심恒心을 가져다주는 실천적 항목이 된다. 이는 『금강경』의 “응무소주應無所住 이생기심而生其心” 곧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라는 지혜를 담고 있는 가르침인 셈이다. 결국 이는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는 마음으로 행함으로써 그 어떤 것에도 사로잡히지 않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이렇게 이경주 시인은 우리가 열심히 살아도 “시원始原의 터전에선 똑같이 대우”하게 마련이며 “금강경 문리”에 따르면 “머무른 나의 자리는/그 안쪽에 잠시뿐”임을 우리로 하여금 알게 해준다. 베푸는 마음도 사라지니 찰나의 유혹을 건너 귀의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말이다. 그래서 이 시편은 우리가 “일정을 알수 없는 항해”(「사랑을 꿈꾸며」)를 한다 해도 “더 오래 참고 기다리면 별빛으로”(「란蘭」) 일어설 것이고, 마침내 “저만의 요량으로 가야 할 곳을”(「그래도 늦지 않다」) 알게 될 것을 암시해주는 명편이 아닐 수 없다.

시조를 포함한 서정 양식은 근본적으로 시인 자신이 살아온 시간의 결을 회상하고 성찰하는 기억 작용을 강렬하게 활용하는 언어예술이다. 우리가 서정시의 직접적 창작 동기를 자기 회귀의 나르시시즘에서 찾으려 하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처럼 서정시의 가장 중요하고도 원초적인 욕망은 한편으로는 자신의 기억으로 잠입하려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다양한 사물을 향해 확장해가려는 외연적 힘에 있다. 이경주 시인은 사물을 향한 외적 관심의 확장보다는 자신의 삶에 대한 기억을 구성함으로써 그 안에 있는 시간을 회감回感하려는 내향성內向性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그에게 기억이란 지나온 시간에 대한 단순한 미화나 특화보다는, 자신의 삶에 남은 흔적을 추스르고 견디는 쪽에서 발원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만큼 그는 자신의 삶에 커다란 무게로 주어진 흔적들에 대한 기억을 토로하면서 시간의 심연에 한편으로는 잠기고 한편으로는 그것을 넘어서려는 의지를 단호하고도 섬세하게 드러낸다. 그 힘으로 시인은 자신의 존재론적 기원에 대한 사랑의 마음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첫사랑’으로부터 마침내 ‘무주상’으로 자연스럽게 귀환하는 궁극의 마음까지 이러한 원리는 폭넓게 그의 시조를 관류하고 있다. 애잔하고 중중重重하고 단연 아름다운 성과라 할 것이다.

더욱 견고하고 아름다운 시조 미학을 구축해가기를

우리는 예술을 통해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존재 전환을 꿈꾼다. 일상적이고 물리적인 현실을 벗어나 전혀 다른 곳으로 이동하려고 하는 꿈은 예술을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할 것이다. 특별히 서정시를 쓰는 시인은 사물로 한껏 관심의 권역을 넓혔다가 다시 스스로에게 회귀하는 과정을 밟음으로써 타자의 꿈을 언어적으로 내면화하는 존재이다. 이러한 자기 회귀와 타자 발견 과정을 노래함으로써 시인은 언어 뒤편에 존재 전환의 꿈을 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포착되는 것이 시간의 흐름일 것이고 그에 대한 각별한 기억일 것이다. 이경주 시인은 시간이 인간 욕망에 평등을 부여한다는 점에서 시간에 대한 기억을 통해 삶을 증언하고 해석하는 작업을 줄곧 수행해왔다. 살아온 시간을 응시하고 그 시간이 남긴 흔적을 반추하는 과정에서 창작된 것이 그의 시조일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그에게 시조는 “단출한 세 줄 글”(「내가 사는 곳」)로서 자신의 실존과 역사를 한꺼번에 담는 그릇이 되어주었다. 이때 시인이 수행한 회감의 깊이와 표현의 진정성이 결합하면서 그의 시조는 읽는 이들의 공감도 비례적으로 키워온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경주 시인의 회감이 시인 자신으로 하여금 어떤 근원을 향하게끔 하는 것을 천천히 목도해왔다. 말할 것도 없이 ‘회감’이란 지나온 시간을 재현하는 운동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실존적 현재형을 아름답게 견지해가는 힘으로 각인되기도 한다. 사실 이경주의 시조는 어떤 시편을 인용하더라도 상관없을 정도로 풍요롭고 또 균질적이다. 감각의 충실성과 시간 인식 그리고 사물의 기억에 대한 흔연한 자각을 통해 그는 오늘도 빼어난 시조를 써간다. 이는 모두 이경주 시인 자신의 유니크한 경험들이 대상과 수평적 관계를 형성하면서 자연스러운 공감으로 구체화되는 과정에서 완성된 것일 터이다. 그리고 그것은 대상과의 불화나 그 사이의 균열보다는 친화와 동화의 과정이 육화된 예술적 결과일 것이다. 그만큼 이경주의 시조는 섬세한 현대성과 균형 있는 시조성時調性을 동시에 구현하면서, 정격正格의 형식과 내용을 심미적으로 담아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도 그의 시조는 살아온 날에 대한 재현에 머무르지 않고 앞으로 살아갈 날들의 정신적 지남指南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주체와 대상, 현상과 실재, 죽음과 삶, 생성과 소멸의 경계를 지워가면서 그 역할을 또한 첨예화할 것이다. 세상을 따뜻하게 안아들이고 스스로의 삶을 완성해가는 사랑의 힘이 그 안에서 항구적으로 숨쉬고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한없는 사랑의 힘으로 번져가는 선연한 사유와 기억을 그가 단단히 딛고 넘으면서, 앞으로도 더 견고하고 아름다운 시조 미학을 구축해가기를 마음 깊이 희원해본다. 그럼으로써 그의 정형 미학이 우리 시조시단을 또렷하게 밝히면서 도약하는 새로운 진경進境이 되기를 소망해보는 것이다.

시인의 말

넌, 할 수 있는 게 없어

고도를
기다리지만

난, 마음 자판 위를
일하듯 뜀을 뛰며

해야 할
말을 수선해
책 속에다 묻는다

2025년 9월
이경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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