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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조약돌의 춤
첫 기증, 참을 수 없는 무거움 첫 수집, 내 인생을 바꾼 화가 비움의 철학, 한쪽 손을 펴세요 뿌리 찾기의 시작, 하정웅컬렉션 ‘기도의 미술관’의 운명 이우환 화백과의 만남 운명의 갈림길에서 ‘징꼬로 센꼬로’ 사건 제가 고등학교에 가도 될까요? 강물에 떠내려간 꿈 철교 위에서 붙잡은 희망 북송선을 타겠습니다 갈라진 조국, 어디에 설 것인가 히메관음상의 비밀 〈맹인의 무리〉와 마주하는 시간 고려신사의 노래 기요사토의 기적 부모님의 마지막 한마디 고향 땅에서 첫 삽을 뜨다 산은 불타도 고사리는 죽지 않는다 디아스포라의 삶, 나는 누구인가! 에필로그: 날마다 한 걸음 작가의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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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도 일본에서도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한 채 떠도는 디아스포라의 운명에 눈물지으면서, 한국과 일본을 잇는 다리가 되고 싶었다. …… 나의 오랜 염원이던 기도의 미술관은 바다 건너 한국의 광주시립미술관에서, 하정웅컬렉션이라는 이름으로 꽃을 피웠다. 5·18 민주화운동의 아픔과 희생이 서린 땅, 상처를 딛고 빛나는 내일을 향해 꿈틀거리는 땅, 빛고을 광주는 내가 그토록 열망한 기도의 예술이 머물기에 가장 적합한 장소였는지도 모른다.
---‘첫 기증, 참을 수 없는 무거움’ 오랫동안 나의 컬렉션은 사람들에게 이해받지 못했다. 가장 가까이 있는 식구들조차도 내가 왜 그림을 모으는지, 어떤 기준으로 그림을 고르는지, 그리고 얼마나 그림을 사랑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나마 식구들은 욕을 퍼붓지는 않았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내 뒤에서 손가락질하는 것을 알고 있다. 쉽게 돈 벌어 돈 아까운 줄 모르는, 그림 사는 데 혈안이 된, 그림이라면 흥청망청 돈을 퍼붓는…… 광인이라는 소리가 들려왔다. ---‘뿌리 찾기의 시작, 하정웅컬렉션’ 조센징에다 찢어지게 가난한 학생이었지만, 나는 한 가지 점에서 최고의 행운아였다. 소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내 곁에는 훌륭한 선생님들이 있었다. 학생을 국적이나 신분, 돈으로 평가하는 게 아니라 ‘사람’ 자체를 바라봐주는 선생님들이 아니었다면, 나는 학생으로서 그리고 한 인간으로서 자긍심을 갖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은사들을 만나면서 가슴속에 꿈을 품었다. 열심히 공부해서 교단에 서고 싶었다. 그분들처럼 훌륭한 교사가 되고 싶었다. --- ‘징꼬로 센꼬로 사건’ “죽도록 고생해 공부시켰더니 환쟁이라니! 대체 너는 어미를 뭘로 알고!” 서슬 퍼런 어머니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어머니는 내 앞에서 그림들을 갈기갈기 찢어버렸다. 그 길로 곧장 강으로 내달려 그림 도구들을 집어던졌다. 평소 분신처럼 여긴 붓과 물감이 시퍼런 강물로 떠내려갔다. 교사의 꿈이 좌절된 뒤 그림에 살고 그림에 죽으려던 나의 열망도 너울너울 떠내려가고 있었다. --- ‘강물에 떠내려간 꿈’ 배를 타고 가면 지상낙원이 기다린다고 했다. 대학에도 갈 수 있고 그림 공부도 할 수 있다고 했다. 집도 공짜로 준다고 했다. 가난도 벗고 차별도 벗고 서러움도 벗을 수 있다고 했다. 모든 소원이 이루어지는 마법의 땅. 유토피아로 가는 배, 북송선이 나를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 ‘북송선을 타겠습니다’ 다자와 호수에서 일어난 역사를 바로잡는 데만 수십 년이 걸렸다. 하지만 나는 믿는다. 아무리 시간이 걸린다고 해도 진실은 반드시 세상에 드러나리라는 것을. …… 그렇게 드러난 진실은 자신을 감추려고 한 사람들을 준엄하게 꾸짖고, 은폐를 방관한 사람들에게 서슬 퍼런 질문을 던진다. “이제 당신은 무엇을 할 것인가?” ---‘히메관음상의 비밀’ 무주고혼(無主孤魂)이란, 사후 후손이나 모시는 사람이 없어 의지할 곳 없이 세상을 떠돌아다니는 외로운 영혼을 말한다. 낯선 땅에서 살다 스러져간 외로운 이들은 얼마나 고향이 그리웠을까. 그리고 마지막 순간, 얼마나 고향 땅에 잠들고 싶었을까. 일본 땅을 떠도는 조선인 무주고혼을 찾아 거두는 일은 나에게는 외면할 수 없는, 뿌리 찾기의 일환이기도 했다. --- ‘고려신사의 노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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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정웅의 삶을 관통하는 키워드, 자이니치(在日)
하정웅은 자이니치다(자이니치는 재일한국인, 재일조선인을 통틀어 부르는 일본말이다). 즉 전후 일본 사회에서 차별과 냉대를 받아온 재일교포들의 고단한 삶과 한(恨)이 뼛속 깊이 각인돼 있다. 동시에 그는 재일교포라는 역사적 위치에서 일본인의 감성으로 살 수밖에 없었다. 하정웅의 국적은 한국이지만, 그의 생활 터전은 일본이다. 뿌리는 한국에 있으나, 일본은 그의 삶의 무대다. 어렸을 때는 가난뱅이 ‘조센징’이었고, 20대 중반 이후부터 경제적으로 성공 가도를 달리자 그는 일본 사회로부터 은근히 귀화할 것을 종용받았다. 귀화하지 않은 탓에 어릴 적부터 간직한 교사의 꿈도 접어야 했고, 경제적 불이익도 감내해야 했다. 그러나 그가 귀화하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 재일한국인이기 때문이다. 그가 두 나라를 조국으로 여기며 당당히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존재를 끊임없이 되돌아보며 올곧은 세계관을 확립해나갔기에 가능했다. 이데올로기와 자본의 논리를 뛰어넘어 한국인으로서 철저하게 자기 정체성을 지켜온 하정웅. 그의 노력을 확인하는 순간, 우리는 그에게 “당신은 한국인인가, 일본인인가” 하는 질문이 얼마나 부질없는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이우환 등 천재 미술가를 알아보다 한국은 물론 세계가 주목하는 미술가 이우환. 그와 하정웅의 인연은 198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연히 본 미술 잡지에 소개된 이우환의 작품에 매료돼, 하정웅은 누가 시킨 것도 아닌데 이우환의 작품을 발 벗고 소개하기에 이른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하정웅은 이우환의 유럽 활동 경비를 지원하고, 이우환의 예술 변천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작품 컬렉션을 연다. 그때 받은 이우환의 작품 50여 점은 모두 한국 미술관에 기증했다. 특히 ‘하정웅컬렉션’에는 재일한국인 작가의 작품이 상당한데, 해방 후 재일한국인 화가로 한국에 처음 소개된 故 전화황은 하정웅컬렉션의 출발이기도 하며, 그 덕분에 한국 미술계가 재일한국인 화가에 관심을 갖는 길을 활짝 열어젖혔다. 이 책에는 이우환을 비롯해 전화황, 손아유, 곽덕준 등 저자가 재일한국인 화가의 작품을 수집하게 된 사연에서부터, 그들 작품을 통해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조국에 대한 이해와 화해의 장을 만들게 된 다양한 에피소드가 펼쳐진다. 억울하게 희생당한 이들을 위한 진혼곡 저자는 “미술 작품에서 조국의 역사를 배웠다”고 말하면서, 하정웅컬렉션을 한민족의 잃어버린 역사를 다시 불러내고 복원하는 ‘기억의 유산’으로 우뚝 세웠다. 즉 ‘기억의 유산’은 한국 뿌리 찾기의 시도이자, 핏줄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다지는 작업에 다름 아니다. 이 책에서 하정웅은 강제징용으로 억울하게 죽어간 조선인들의 영혼을 달래고, 일제강점기에 일본에서 죽은 재일한국인 6천 명의 명단을 모으고 보존하는 등 세상이 외면한 이름 없는 무주고혼(無主孤魂)을 달래는 일에 고군분투한 일화들을 생생하게 담았다. 과거와 현재 사이에서 끊임없이 대화를 시도하는 하정웅의 행보를 통해, 우리는 한국과 일본 사이에 가로놓인 역사의 긴 터널을 홀로 외롭게 여행해온 한 인간으로부터 희망을 발견하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살아 있는 ‘역사의 증언’이자, 억울하게 희생당한 이들을 위한 진혼곡이며, 평화와 행복을 향한 염원의 메시지가 아닐는지. 휴머니즘의 또 다른 이름, 메세나(Mecenat)! ‘미술품 1만 점 기부’ 말고도 하정웅을 대변하는 또 다른 별칭이 있다. 바로 ‘시각장애인들의 아버지’다. 우연히 알게 된 시각장애인 안마사와의 인연으로, 하정웅은 일본과 광주를 수차례 오가면서 우여곡절 끝에 광주에 시각장애인회관을 건립한다. 수많은 기부 활동, 폭넓은 사회공헌과 자선사업 등을 펼치며 그는 한국 사회의 구석진 곳, 혜택 받지 못하는 사람들, 죄 없이 고통 받는 사람들을 가장 먼저 보듬어왔다. 한마디로 하정웅은 휴머니즘의 다른 이름으로 메세나 정신을 실천하면서, 더 많은 사람들과 감사의 마음을 나누고자 공(公)을 위해 사(私)를 버리는 삶을 기꺼이 선택한 것이다. 그는 원대한 목표를 지향하기보다는 하루에 한 가지만이라도 좋은 일을 하겠다는 일념으로 1년 365일을 살겠다고 말한다. 이 책은 바로 이런 하정웅의 한 걸음 한 걸음이 담긴 기도의 메시지다. 그리고 그 기도는 위안, 위령, 진혼, 치유, 용서, 화해, 평화를 향해 있다. 저자는 매일 한 가지씩 좋아지는 세상을 상상하며, 자신의 인생이 훗날 ‘일보전진’이라는 말로 요약되기를 희망한다. “나는 50년 동안 1만 점에 이르는 미술 작품을 수집했고, 그 1만 점을 모두 한국에 기증했다. 한때 나의 개인 수집품이던 이 작품들은 이제 언제든 대중과 만날 수 있고 소통할 수 있는, 새로운 터전인 한국의 공공 미술관에 자리를 잡았다. 내 컬렉션은 처음부터 ‘개인재’가 아닌 ‘공공재’의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일본이 아닌 한국에서 피어날 수밖에 없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 예정된 운명에 기꺼이 따랐을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