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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
1. 광복전야 (1945년 8월 1일 ~ 8월 14일) 2. 조선건국준비위원회와 조선인민공화국 (1945년 8월 15일 ~ 9월 8일) 3. 미군의 진주와 한국민주당 (1945년 9월 9일 ~ 9월 30일) 4. 김일성의 등장과 북한 (1945년 10월 1일 ~ 10월 16일) 5. 이승만의 활동 (1945년 10월 17일 ~ 11월 22일) 6. 내가 돌아왔으므로 정부도 돌아온 것이다 (1945년 11월 23일 ~ 12월 14일) 7. 신탁통치의 격랑 (1945년 12월 15일 ~ 12월 31일) 참고문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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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년 한여름에서 겨울에 이르는 다섯 달은 한국 현대사의 진로가 압축적으로 결정된 시간이었다. 태평양전쟁의 마지막 순간, 한반도를 둘러싼 미·소의 전략적 계산은 격렬하게 교차했다. 8월 15일, 길고 어두웠던 식민 지배의 터널 끝에서 마침내 광복의 빛이 쏟아졌다. 하지만 환희가 채 가시기도 전에 한반도는 강대국들의 이해관계로 분단되었고, 남한 사회는 좌우 분열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머리말 중에서」중에서 이 책은 1945년 8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 153일 동안의 주요 장면을 하루 단위로 따라가며, 광복 직전의 국제 정세와 국내 상황, 그리고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커다란 영향을 미친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쟁점들을 빠짐없이 복원하고자 했다. ---「머리말 중에서」중에서 8월 10일 오후 7시 15분, 충칭에 설치된 동맹군 총본부에 일본이 스웨덴에서 보낸 국제방송이 전달되었다. “일본은 중국, 미국, 영국, 소련 4개국에 투항한다”는 내용이었다. 두취로 귀환하는 김구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천신만고의 노력 끝에 어렵게 참전 준비를 마쳤는데 이제 그 기회를 잃은 것이다. 마땅히 손에 넣어야 할 전공이 사라져 버렸다. 일본의 패배는 축하할 일이었지만 패망의 시간은 너무 빨리 왔다. 자동차가 인파를 피해 간신히 나아가는 동안 환호하는 함성은 더 커졌다. 그러나 김구는 “우리가 이번 전쟁에 한 일이 없으니 장차 국제사회에서 발언권이 박약하리라”는 우려로 마음이 한없이 무거울 뿐이었다. --- p.41 거리에는 트럭, 승용차, 전차 할 것 없이 빽빽하게 시민들이 매달려 급조한 태극기를 뒤흔들며 “해방 만세!”, “독립 만세!”를 외치며 지나갔고 인파는 홍수와 같이 거리를 메웠다. 악대가 선두에서 행진곡을 연주하는 가운데 죄수복 차림 그대로인 정치범을 앞세운 대행렬이 경성역을 거쳐 종로까지 행진했다. 만세 함성으로 들끓는 군중과 깃발이 종로에서 남대문까지 가득 찼다. --- p.76 한반도 점령과 함께 남한 주둔군사령관으로서 하지가 부여받은 가장 중요한 임무는 남한 내에 법과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군정부를 설치하는 것이었다. 군정 설치는 매우 포괄적인 명령이었지만, 하지가 이끄는 부대는 자신들에게 부여된 임무에 대한 배경 지식이나 경험이 없었고, 한국에 대해서도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게다가 그들에게 내려진 명령서에는 임무를 달성하기 위한 세부 내용이 없었다. --- p.92~93 우키시마호는 부산으로 향하지 않았다. 배에 탄 조선인들은 당연히 우키시마호가 부산으로 가는 항로를 운행하고 있는 줄 알았지만, 어쩐 일인지 우키시마호는 예정 항로에서 이탈해 일본 본토의 연안을 따라 항해하고 있었다. 23일 하루 종일 망망대해를 항해한 우키시마호는 24일 갑자기 항로를 교토 부근의 마이즈루만으로 꺾었다. 그리고 오후 5시 20분경 배는 갑자기 폭파하여 두 동강이 났다. 조선인 승선자 중 528명이 사망했다. --- p.108 일본은 세상이 바뀌었는데도 불구하고 가공된 정보들을 미군에 전달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보전하려는 공작을 진행했다. 그들은 하지가 한반도에 진주하기 전에 소련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와 조선의 현 상황에 대한 경계심을 심었다. 이처럼 미군 상륙 전, 한국의 정세와 상황에 대한 정보를 교환하는 과정에서 조선인은 철저히 배제되었고 공작에 성공한 일본군은 오히려 미군의 호감과 비호를 받게 되었다. --- p.133 오후 4시 30분 총독부 청사 왼편 앞뜰에서 국기 교대식이 열렸다. 미군 군악대의 취주가 끝나자 하사관 5명이 게양대를 둘러쌌다. 이윽고 하사관 두 사람이 지휘관의 호령에 따라 35년 동안 한반도를 지배해 온 일장기를 끌어내렸다. 총독부 정문과 광화문에 모여 있던 시민들이 이 광경을 지켜보며 감격과 환희에 겨운 함성을 지르며 박수를 쳤다. 이어 군악대가 미국 국가를 연주하는 가운데 성조기가 올라갔다. 시민들은 다 함께 만세를 부르기 시작했고 인파는 열광과 흥분의 도가니에 빠졌다. --- p.178 인민공화국이 박헌영과 여운형 등 좌익의 주도하에 수립된 것은 분명하지만 명단에서 알 수 있듯 좌익만으로 구성된 것은 아니었다. 좌익에 치우쳤지만, 선의로 해석하면 좌우합작 정부를 염두에 둔 점이 있었다. 그러나 명단에 포함된 우익 지도자 중 이승만, 김구, 김규식, 신익희 등은 아직 해외에서 입국도 하지 않은 상태였으므로 그들과 사전협의를 할 수 없었다. 조만식은 북한에 있었다. 그리고 남한에 있는 우익 지도자 역시 인민공화국을 주도하는 쪽에서 찾아가 수락을 부탁한 일이 없었다. --- p.198 한민당의 두 번째 정치노선은 미군정과의 협조였다. 한민당 중심 세력은 일제하의 지주, 자본가, 친일 관료와 언론인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전문학교 이상의 고등교육을 이수했고, 일본이나 미국 유학 경험이 있는 이도 많았다. 미군정은 행정과 통치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영어에 능통하고 서구식 교육을 받은 보수 성향의 인사들이 필요했고, 한민당은 실질적인 통치 권한을 쥐고 있는 미군정과 협력하는 것이 정치적 영향력을 확보하고 권력을 획득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판단했다. 이러한 이해관계의 일치 속에서 미군정과 한민당의 협력 관계는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 p.207 1945년 8월 15일 광복과 함께 투옥되었던 한글학자들은 석방되었지만, 그들의 모습은 처참했다. 최현배, 이극로, 이희승, 정인승은 주위 사람의 부축을 받아 겨우 걸어 나오거나 아예 들것에 실려 나왔다. 그들은 몸을 추스를 사이도 없이 조선어학회를 재건하고 국어사전 출간을 재개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사건 당시 사라진 조선어사전 원고가 여전히 행방불명 상태였으므로 사전을 만드는 작업이 가까운 시기에 가능할지도 모르는 형편이었다. --- p.300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의 등장은 북한의 정치적 전환점이었다. 그동안 수면 아래에서 활동하던 김일성은 북조선분국 승인과 함께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리고 북한의 공산당 조직도 주도하게 되었다. 김일성은 입북 3주 만에 열성자 대회를 치러 내면서 국내파 공산주의자들의 강한 반발을 누르고 실질적인 권력을 거머쥐게 된 것이다. --- p.317 정치적 영향력은 필연적으로 경제적 영향력으로 이어졌다. 미군정기 통역관들의 경제적 영향력은 특히 일본인들이 두고 간 적산의 불하와 관련되었다. 적산의 관리와 불하는 통역관들의 입에 달리게 되었고 통역관들은 각종 특혜 배분과 편취, 수뢰 등의 불법에 가담했다. 그들은 대한민국 정치와 경제의 틀을 짤 정도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 --- p.339 귀국 직후부터 모든 정당과 당파의 대동단결을 주장하며 각계의 인사들과 접촉했던 이승만은 귀국 일주일 만에 좌우를 망라한 통일기관을 결성하는 데 성공했다. 이는 좌우를 통틀어 이승만에게 가졌던 높은 기대를 반영한 결과였다. 하지만 독립촉성중앙협의회가 순전히 이승만의 발의로 만들어진 단체는 아니었다. 독촉은 여운형의 정당통일운동의 결과로 만들어진 ‘각정당행동통일위원회’를 기반으로 탄생했다. 이승만의 등장으로 순식간에 정당통일운동의 모든 성과가 그의 깃발 아래 수렴된 것이다. --- p.358 특별한 법적 근거 없이 실시되고 있던 조선의 여자근로정신대는 1944년 8월 23일 「여자정신근로령」이 공포되면서 합법적인 근거가 마련되고 공식적으로 출범했다. 조선여자근로정신대에는 12세 이상 40세 미만의 배우자가 없는 조선 여성이 소속되었으며, 이들은 군수공장 등에 투입되었다. 동원 방법은 관청의 알선, 공개 모집, 자발적인 지원, 학교나 단체를 통한 선전 등 다양한 형태로 이루어졌다. 근로정신대로 동원된 일본과 조선의 여성은 20만 명이었으며, 그중 조선인은 5만에서 7만 명이었다. --- p.388~389 「매일신보」는 11월 23일 「서울신문」으로 제호를 바꾸고 속간되었다. 같은 날 우익 계열 언론 지원 방침에 따라 「매일신보」의 인쇄시설을 이용하여 「조선일보」가 복간되었다. 12월 1일 「동아일보」도 귀속재산인 「경성일보」 시설을 이용하여 신문을 발행하게 되었다. 미군정의 직접적인 지원 아래 신문을 발간하게 된 우익지는 복간과 동시에 김구와 이승만의 노선을 적극 지지하면서 ‘민족의 대변자’인 것처럼 나섰다. 이들은 초창기 반탁운동, 미소공동위원회 반대, 반공주의적 성향, 한국독립당 지지 논조를 보이며 좌익 계열 신문과의 대립을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물론 일제시대 민족지답게 때로는 정론과 직설을 펼치기도 했다. --- p.431 미군정은 김구의 귀국에 상당한 기대를 걸고 있었다. 김구와 이승만의 연합을 통해 국민적 지지 기반을 가진 우파가 중심이 되고 좌파 세력까지 아우르는 정계 통합기관을 마련함으로써 국무부의 신탁통치안을 철폐하고 한반도에 과도정부를 세울 것을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p.483 광복 당시 학령기 어린이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일본제국의 식민지민이었다. 학교에서 일본어와 일본사를 국어와 국사로 배웠으며 전시체제기의 혹독한 집단 동원을 일상으로 경험했다. 그러므로 광복을 맞이한 어린이에게 기존 가치관을 바꾸고 새로운 정체성을 세우는 교육, 이들을 새로운 국가의 주역으로 기르려는 교육이 절실했다. --- p.514 일제강점기의 고통이 컸기에 출판계가 느낀 광복의 감격은 더욱 컸다. 광복 후 공보처 출판국장을 지낸 시인 김영랑은 “해방의 절대적 자유가 역연하게 반영된 부문은 언론·출판계”였다고 말했다. 1945년 9월 11일 하지 사령관은 기자회견을 통해 앞으로 언론에 대해 어떠한 간섭도 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서 “문자 그대로 절대적인 언론자유의 보장”을 약속했다. --- p.567 잊혀져 가고 있었던 신탁통치 구상은 미 국무부 극동국장 빈센트가 10월 20일 미 외교정책협의회에서 한반도에 대한 신탁통치 구상을 공개함으로써 확실한 사실이 되었다. 이때를 기점으로 한국의 모든 정치 지도자는 조만간 국제회의에서 한반도의 신탁 문제가 논의될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그들은 신탁통치 계획에 격렬히 반대했을 뿐 별다른 선제적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신탁통치 구상이 여러 차례 공개적으로 거론되고 있었음에도, 상황을 냉정하게 판단하여 신탁통치의 의미나 필요성, 실시 시기에 대해 연합국에 문의하려 하지 않았다. --- p.573 국어 교원 양성, 교사 재교육 강습뿐만 아니라 일반인을 위한 한글 강습회도 전국 곳곳에서 개최되었다. 일반인을 위한 한글 강습회에는 조선어학회뿐만 아니라 교육 당국과 관공서, 학생단체, 사회단체, 신문사 등 다양한 사회적 주체가 하나가 되어 참여했다. 가히 들불 같은 열기로 진행된 문맹퇴치운동 덕분에 광복 당시 78%이던 문맹률은 3년 후인 1948년 8월에는 41%로 낮아졌다. 세계사에 유래가 없는 성과였다. --- p.598 국민은 외세가 다시 한국의 운명을 좌우하고 있다고 인식하고 신탁통치 반대 운동을 광복 후 실현되어야 할 완전한 독립을 위한 의무라고 받아들였다. 감정에 휩싸인 군중 사이에 ‘반탁은 애국, 찬탁은 매국’이라는 단순한 구도가 형성되었고 혹한의 날씨에도 반탁 시위는 빠른 속도로 확산되었다. 임시정부는 이러한 정세를 정치적으로 활용하려 했다. 반탁운동을 임시정부에 대한 국민적 지지와 연결하고, 이를 바탕으로 임시정부가 정통 정부로서 정권을 인수하겠다는 의도를 숨기지 않았다. 실제로 반탁 여론이 거세지면서 미군정의 조속한 종료와 임시정부로의 정권 이양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커갔다. --- p.6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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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루씩 따라가는 153일의 기록
이 책의 가장 큰 독창성은 1945년 8월 1일부터 12월 31일까지의 타임라인을 '하루 단위'로 정밀하게 추적한다는 점이다. 트루먼과 스탈린의 긴박한 움직임, 김구, 이승만, 여운형, 박헌영, 송진우 등 지도자들의 선택과 오해, 광복 전후 조선총독부의 행보, 미군정의 성립과 김일성의 등장, 임시정부 귀국에서 신탁통치 파동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방향타가 움직인 순간들을 매일의 뉴스처럼 생생하게 마주할 수 있다. ■ 정치사부터 민중의 삶까지 지도자들의 정치적 행보와 국제 정세라는 거시적 흐름뿐만 아니라, 역사의 그늘에 놓여 있던 미시적 장면들도 빠짐없이 조명한다. 사할린에 버려진 조선인들, 조선 청년 포로감시원의 비극, 일본에서 귀환한 근로정신대 여성들의 이야기는 물론, 광복 직후의 동시, 화신백화점의 자주관리운동, 어린이신문 창간과 책의 해방 등 그 시대를 살아낸 사람들의 다양한 삶과 경험을 함께 담아내어 한국 현대사의 기원을 입체적으로 이해하도록 돕는다. ■ 이념을 넘어선 균형 잡힌 시선 좌우 대립이 치열했던 광복 정국을 다루면서도, 어느 한쪽의 시각에 치우치지 않고 당시 상황을 있는 그대로 담아내고자 했다. 혼란 속에서도 새 질서를 세우고 독립 국가를 이루기 위해 기울인 선대들의 노력과 성취를 제대로 조명함과 동시에, 현대사 연구자들이 쌓아 올린 연구 성과를 철저한 사료 검증을 통해 담담히 엮어내며 역사 대중서로서의 신뢰성과 품격을 갖추었다. ■ 이 책을 읽는 세 가지 포인트 ① 역사 속 '행간'을 읽는 재미: '8·15 광복', ‘미군 진주’, '모스크바삼상회의' 등 대형 사건 사이에 생략되어 있던 153일 동안의 촘촘한 사실들을 입체적으로 연결하며, 그 안에서 펼쳐진 선택과 오해, 갈등의 순간들을 읽는 재미를 선사한다. ② 1945년 당대 언론 등 '1차 사료'가 전하는 현장감: 역사적 사건을 결과로만 바라보는 대신 현장의 시선에 집중하여 매일신보, 신조선보,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 당대 언론 보도와 기록을 통해 그 시절 사람들이 느꼈던 혼란과 열기를 있는 그대로 체감할 수 있다. ③ 오늘날 대한민국의 갈등과 체제의 '뿌리' 확인: 남북 분단, 이념 갈등, 경찰 조직, 경제 체제 등 현재 대한민국 사회가 안고 있는 주요 쟁점과 갈등이 1945년 그해 한여름부터 겨울 사이에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를 선명하게 보여 준다. ■ 저자의 한마디 1945년 8월부터 12월까지의 다섯 달은 현재 한반도가 안고 있는 여러 쟁점이 시작된 중요한 시간이었습니다. 이 153일의 여정 속에서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를 던지는 153개의 장면을 포착해, 광복 정국의 정치·경제·사회·문화적 현장과 당대인의 생각을 입체적인 타임라인으로 복원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