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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해녀의 조상이 된 허정승 따님아기
- 구슬할망 이야기 29 살강질강 노 젓는 소리 따라 바다를 건넌 오합상자 - 광청아기씨 이야기 42 심방이 되지 못한 원혼, 죽어서 신이 되다 - 양씨아미 이야기 60 돌아오지 못한 넋을 향한 마지막 몸짓 - 고전적 아기씨와 악생이 이야기 77 나주 기민창의 신, 조천 포구에 닿다 - 새콪알 천구아구대맹이 이야기 91 왜구의 침략과 여성의 희생을 기억하다 - 알토산당 방울신 아기씨 이야기 102 칠성골 송대정에 자리 잡은 장설룡 따님아기 - 칠성신 이야기 114 바다에서 올라온 돌미륵, 안씨 셋째와 연을 맺다 - 화북 돌미륵 이야기 126 한 집안의 여인에서 일월조상이 되다 - 한수리 열녀 고씨 이야기 138 4대를 잇는 삼승할망, 일뤠당 조상이 되다 - 존나니모루 삼승할망 이야기 148 ‘안 판관’ 부군칠성, 고씨 심방에게 가다 - 선흘리 안 판관 이야기 157 제주의 수호신, 고대장 심방 이야기 - 각시당의 영험함을 목사에게 증명한 고대장 - 기우제로 제주 백성들을 구해낸 고대장 169 세양거리에서 멩두를 발견하고 제주섬을 구하다 - 우렝이 김씨 하르방 이야기 181 날개 달린 아기장수의 아름다운 결말 - 평대리 부대각 이야기 193 제주 백성들, 진상의 고통에서 벗어나다 - 양이목사 이야기 204 제주 민중의 마음속에 남은 영원한 영웅 - 고도채비 이야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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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슬할망은 육지 사회에서 버림받은 존재였지만, 제주에서 물질을 배우고 해녀로서의 삶을 이어가면서 새로운 정체성을 가지게 된다. 구슬할망의 신성은 초자연적 혈통이나 기이한 인연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가 신이 되는 근거는 오로지 물질이라는 육체적 노동을 통해서였다. 이는 바다에서 극한의 노동으로 생계를 꾸려온 해녀들의 현실을 신화적 권위로 승인하는 것이다. 더불어 노동이 곧 신성이라는 제주 특유의 세계관을 보여준다.
해녀의 숨비질은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나든다. 깊은 바다로 내려갔다가 다시 물 위로 돌아오는 반복의 과정은 생사를 건너는 일이다. 그 과정에서 얻는 전복과 진주는 그저 돈이 되는 물건이 아니라, 바다가 내어준 생명의 빛이자 노동으로 길어 올린 축복이다. --- p.28 제주 무속 전통에서 여성 심방의 역할과 위상은 매우 컸다. 수많은 여성 심방들이 뛰어난 노래와 춤, 그리고 신통력을 바탕으로 큰굿을 주도하며 사람들의 영혼을 위로하는 중심 역할을 맡아왔다. 하지만 뛰어난 무속적 능력에도 불구하고, 당시 여성들은 남성에 비해 사회적 권력이나 결정권을 가지지 못하고 소외되었다. 신화 속 양씨아미의 큰오빠 역시 가부장적인 권력을 앞세워 여동생의 운명을 마음대로 휘둘렀다. 결국 양씨아미는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선택할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고 만다. 그러나 양씨아미의 죽음은 단순한 비극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녀는 죽은 뒤 굿판에서 다른 사람의 몸을 빌려 신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자신의 억울함을 풀고 신성한 권위를 인정받아 주어진 운명을 마감 지으려 했다. 이제 그녀는 구천을 떠도는 원혼이 아니라, 공동체가 귀하게 모시는 조상신으로 자리 잡게 된다. --- p.59 열녀 고씨의 삶은 한 개인의 미담에 머물지 않는다. 그녀의 이야기는 한 여성의 삶이 어떻게 기억되고, 공동체의 이야기로 전승되며, 마침내 공동체를 지탱하는 정신적 유산으로 자리 잡는지를 보여준다. 제주에서는 특별한 삶을 살다 간 넋이 조상신이 되어 후손을 돌본다고 믿는데, 이를 ‘일월’이라 한다. 고씨 또한 세상을 떠난 뒤 집안을 지키는 일월조상으로 좌정하였고, 그녀의 삶은 대를 이어 전해지는 본풀이가 되었다. 당시의 열녀 행위는 단순한 희생으로만 바라볼 것이 아니라, 여성에게 일방적인 희생을 요구했던 시대 속에서 한 개인이 감당해야 했던 불가피한 선택으로 읽어낼 필요가 있다. 이러한 시선은 역사 속에서 이름 없이 살아간 수많은 여성의 삶을 새롭게 기억하고 조명하는 계기가 된다. --- p.137 대국을 치겠다고 호통치던 부대각의 모습은 중요한 상징성을 지닌다. 변방의 섬 제주에서 탄생한 그의 당당함에는 오랜 세월 지배에 눌려 살아온 사람들의 저항 의식이 투영되어 있다. 이는 현실에서는 강한 권력에 밀릴 수밖에 없었던 민중들이 상상 속에서라도 대국을 이겨 보고자 했던 바람을 보여준다. 비록 영웅은 시대의 한계에 부딪혀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지만, 사람들은 그를 잊지 않았다. 그를 조상신으로 좌정시켜 마침내 영원한 생명을 불어넣은 것이다. 결국 부대각 신화는 불합리한 권력에 맞선 이들을 잊지 않으려는 민중의 기억 투쟁이자, 역사적 상처를 신앙으로 치유해 낸 숭고한 정신의 기록으로 오늘날까지 생생히 살아 숨 쉬고 있다. --- pp.191-192 조상본풀이는 한 개인의 상상력이 아니라, 역사적 현실을 마주한 공동체가 제 스스로 고통을 이해하고 견디기 위해 빚어낸 서사다. 가뭄과 흉년, 정치적 억압과 사회적 불의, 억울한 죽음과 좌절을 겪고 살아온 제주 사람들의 집단적 기억이 세월 속에서 응축된 형상으로 표현된 것이다. 그 이야기는 심방의 입을 통해 전해지고 굿판에서 다듬어지며, 삶의 벼랑 끝에 선 이들을 붙드는 말로 남았다. 그래서 나는 조상 신화, 본풀이를 다시 읽고 싶어졌다. 그것을 과거의 기록으로 남겨두기보다, 오늘의 삶 속에서 다시 숨 쉬게 하고 싶었다. 신화학자와 연구자들이 다져 놓은 길 위에서 자료와 책을 배우고 익히며, 나는 그 이야기들을 내 언어로 다시 말하고자 했다. 소중히 채록된 본풀이를 한 줄 한 줄 톺아보며, 그 안에 스민 제주 사람들의 삶과 숨결을 함께 전하고 싶었다. 신화는 지난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가 좌절과 실패 속에서도 또 다른 가능성을 상상하고, 그 아픔을 다시 삶의 서사로 바꾸어 서로를 위로하는 한, 신화는 새로운 모습으로 끊임없이 태어난다. 어머니가 내 손을 잡고 걸었던 그 새벽처럼, 신화는 지금도 누군가의 삶 한가운데에서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살아 움직이고 있다. 조상 신화를 다시 읽는 일은 오래된 공동체 의식과 다시 연결되는 일이다. 동시에 오늘의 우리가 서로를 어떻게 보듬을 것인가를 스스로에게 묻는 일이다. 이 책이 그 물음에 작은 울림 하나라도 더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 「에필로그」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