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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트론 호러
화이트 데이 완치 환호성 험악한 세상 오토매틱 블루베리 요술 궁전 5월에 공부하는 아이들 해설 | 하강하는 유령, 환호하는 은총 · 전청림 작가의 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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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살고 싶은 건 아니었다. 절대로 살아 있을 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닿고는 싶었다. 책도 직접 넘겨 보고, 잔디도 손으로 쓸어보고 싶었다. ---「시트론 호러」중에서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는데, 의심이 들 때마다 말이야. 속고 있다는 기분을…… 믿고 있다는 기분으로 바꿔서 생각하면 가능해. 나는 지금 속고 있는 게 아니야. 믿고 있는 거야. 이렇게. 지금 이 순간을 믿을 건지 속았다고 생각할 건지는 내가 선택할 수 있으니까. 끝까지, 정말 끝까지 가보면 돼.” ---「화이트 데이」중에서 “그렇게 살아 있는 기분은 어때요?”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그가 물었다. “불쌍한 사람들 다 죽이고, 혼자 살아 있는 기분은 어떠냐고요.” ---「완치」중에서 인류 역사의 마지막 챕터일 수도 있는 시기였다. 세상의 마지막 날만큼은 모든 착취와 순응에서 벗어나 자신에게 의미 있는 하루를 보내고 싶다는 개인의 욕망이 강해졌다. 공동체의 윤리나 존속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폭력 시위를 통제하기가 어려웠다. 세상을 바꾸는 과정이 더는 평화적일 필요도, 옳은 방법일 필요도 없게 되었다. ---「환호성」중에서 이런 이야기를 대체 누구에게 털어놓을 수 있을까. 누군가에게 진지하게 털어놓는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다 화끈거리는 황당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위대하지도, 이상적이지도 못하다는 이유로 진실은 진실이 아닌 게 될까? ‘고작 이런 이유로……’가 앞에 붙는 볼품없는 진실이야말로 수많은 대형 참사의 실상이라 할 수 있었다. ---「험악한 세상」중에서 나무가 그 자리에 있었기 때문에, 한 여자가 죽었고, 한 여자가 살았다. 그렇다면 저 나무는 죄책감이 클까, 억울함이 클까, 분노가 클까. ---「오토매틱 블루베리」중에서 환은 창문에 시선을 두며 “밖은 눈이 진짜 많이 내려요, 정말 괜찮겠어요?”라고 한 번 더 그녀에게 물었다. “자연재해처럼 불가항력적인 것들 있잖아요. 네가 어찌할 수 없는 일이다,라고 말하는 것들이요. 이상한 반항심이 생겨요, 그런 것들에.” 환의 말에 선우가 답했다. ---「요술 궁전」중에서 바닷물이 출렁거렸다. 그 순간 두 동성애자와 한 여자아이의 윤리가 바깥으로 떨어졌다. 해방감이 들었다. ---「5월에 공부하는 아이들」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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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 일은 없어요. 나는 진짜 컵이에요.”
진짜와 가짜의 경계를 지우는 이 시대의 연금술 ‘믿음’에 관하여 무언가에 무서우리만치 진심인 사람들이 있다. 타인의 시선을 사로잡을 만큼 열성적인 이들은, 불편한 진실 앞에서는 살짝 눈을 감으며 믿음을 이어나간다. 믿음을 잃어버렸지만 계속 종교 활동을 하는 교주 ‘재원’(「화이트 데이」)과, 애인이 벌인 사기 행각을 알고서도 그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도르마무’(「완치」)처럼 소설은 “가짜라는 허상을 뻔히 알면서도 그 속에 기꺼이 투신하는 인물의 이야기”를 그린다. 하지만, 이 허울뿐인, ‘가짜’처럼 보이는 허상에도 아이러니하게 “섬뜩한 진심이 깃들어”(전청림 해설, 「하강하는 유령, 환호하는 은총」) 있다는 점은 소설을 한층 깊은 차원으로 이끈다. 교주를 따르는 이들의 무한한 신뢰와 열기, 자신을 위해 “양파도 사과처럼 먹을 수 있”(p. 103)는 애인의 마음까지 과연 가짜라고 손가락질할 수 있을까. 맹목적인 믿음은 ‘진짜와 가짜’ ‘선과 악’의 경계를 무심히 뒤흔든다. 반대로 믿음을 완전히 잃어버린 이들도 있다. 인종차별에서 비롯된 증오 범죄로 부모를 잃은 ‘진’(「험악한 세상」)과 가족들로부터 아우팅을 당한 ‘은호’(「5월에 공부하는 아이들」)에게는 한 톨의 희망조차 남아 있지 않은 듯하다. 그러나 이들은 자기 내면으로 깊숙이 파고들어 끊임없이 스스로를 의심하고, 자신의 이면을 직시하는 과정을 반복한다. 그러는 사이 그들은 “사람은 어디에서든 사랑할 수 있고 즐거울 수 있게 태어났”(p. 294)다는 사실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 살고 있는 한 세상은 계속돼야” 한다는 마음을 스스로 내뱉고, 마침내 그것을 선선히 인정한다. 복수가 아닌, 오히려 “낯 뜨거운 진심”을 “세상 밖으로”(p. 198) 내보이는 순간, 구소현의 소설 속 인물들은 잃어버렸던 믿음을 되찾고 “험악한 세상”을 살아갈 힘을 다시 얻는다. “이중인격은 시대정신이었다.” 죽고 싶은 마음과 살고 싶은 마음을 묶어 내일로 향하는 이인삼각 달리기 끝끝내 윤리와 존엄을 붙잡고 마는 선함도 유약함도 온정주의도 그의 소설에는 없다. 대신에 “세상을 바꾸는 과정이 더는 평화적일 필요도, 옳은 방법일 필요도 없게 되었다”(p. 131)라는 현실 직시 속에서, 기어코 착하지 않은 방식으로 세계의 임계를 뚫어나가는 과격함이 있다. -전청림 해설, 「하강하는 유령, 환호하는 은총」에서 화산이 폭발하듯 예상치 못한 순간 밀려오는 현실의 고통 앞에서, 우리는 그에 대한 해답으로 종종 죽음을 떠올리곤 한다. 마치 게임에서 로그아웃하듯, 죽음을 ‘클릭’하기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반대로 우리가 ‘살고 싶다’라고 되뇌는 순간은 언제일까. 『환호성』에는 삶의 의지를 잃어버린 인물들이 계속해서 등장한다. 그러나 ‘작가의 말’에 “이들을 끝없는 절망에 갇혀 있게 두지 않을 거야”라고 밝혔듯, 구소현은 희망 하나 없어 보이는 상황에서도 삶을 향해 한 발짝 다가가려는 인물들의 “아주 작은 운동성을 발견”(p. 22)해낸다. 「시트론 호러」에서 다시 살아나고 싶지 않은 유령 ‘공선’은 결말에 이르러 대학생 ‘효주’의 소설을 읽고 누군가에게 “닿고 싶”(p. 29)다는 강렬한 욕구를 느낀다. 표제작 「환호성」의 ‘세경’은 지구 종말을 앞두고 사내 따돌림까지 당한 절망적인 상황에서, 친구가 보낸 음성 녹음을 듣고 “알 수 없는 기이한 힘이 솟”고, “뭐라도 해야 할 것 같”(pp. 151~52)아 평소라면 하지 않았던 일을 감행한다. 「요술 궁전」의 ‘환’은 자살 시도를 한 애인을 가까스로 살려낸 후 “죽음보다 가치 있는 삶”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면서도, “가을의 소리”(p. 286)를 들으며 일상을 이어나가고, 「오토매틱 블루베리」의 ‘지한’ 역시 안락사와 다름없는 장기 최면을 고민하지만, 친구의 “몸에 난 땀을 몰래 쓸고 만지”는 순간, 문득 “왜 이렇게 이 순간은 가슴이 뛰고 벅차는지 알고 싶”(p. 239)어진다. 이렇듯 ‘살고 싶다’ ‘살아봐도 좋겠다’는 마음은 어느샌가, 너무나도 뜻밖의 순간에 불쑥 생겨난다. 구소현의 소설 속에서 이러한 마음이 움트는 과정은 결코 “평화”롭지도 않고 “착하지”도 않으며, “옳은 방법”만을 경유하지도 않는다. 그렇기에 인물들이 생의 의미를 되찾는 순간을 짚어보면 어딘가 “과격”하고, 개연성이 부족하고, 몇몇 단계를 성큼 건너뛴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구소현은 삶의 한가운데서 돌고 있는 ‘죽음’이라는 거대한 미러볼 아래서, “말이 좀 안 되더라도”(‘작가의 말’) 속절없이 마음에 스며들고 마는 생의 충동을 기어이 찾아내고, 우리에게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의 심장을 선물한다. 소설 속 인물들과 우리는 크게 다르지 않다. 매일 마음 둘 곳을 찾아 헤매고, 자신마저 속여가며 하루하루를 견딘다. 마그마처럼 모든 걸 녹일 듯한 분노와, 하염없는 한낮의 분수 같은 지루함에 휩싸여 절망하기도 한다. 그러나 세상이 정해둔 기준과 정상성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테두리를 조금씩 만들어나가는 그들처럼, 이 소설집을 읽은 이들 역시 언젠가 각자의 방식으로 “해방감”(p. 323)을 만끽하며, ‘진짜’ 마음에서 터져 나오는 “환호성”을 듣게 될 것이다. 당신에게 이런 길을 왜 보여줬느냐면, 당신이 한 번쯤은 자신만을 위한 환호성을 들었으면 했다. 귀가 먹먹해질 만큼, 우레와 같이 쏟아지는 박수 소리를 말이다. 내가 느꼈던 것을 당신에게도 주고 싶었다. 당신은 받았을까? 두렵고 궁금하다. -‘작가의 말’에서 · 작가의 말 항상 의문이 들었다. 내가 계속해서 쓰는 사람이어도 될까? 난 소설과 시를 사랑한다. 꽉 찬 마음으로 말할 수 있다. 문학이 삶을 구원할 수 없다는 말에도 반박할 수 있다. 내가 구원받았다. 집에 가기 싫을 때, 학교에 가기 싫을 때, 아무도 나를 신경 쓰지 않을 때, 아무도 나와 대화해주는 사람이 없을 때, 반대로 아무와도 말하고 싶지 않을 때, 화장실에 가는 것을 제외하고는 침대 밖으로 나오지 못했을 때 소설을 읽었다. 많이 읽을 때는 하루에 다섯 권을 종일 읽었다. 집중해 읽다 보면 땀을 많이 흘리게 된다. 내면은 충만하고, 진은 다 빠진 이상한 상태가 된다. 이때의 나는 뭔가를 해낸다. 멈춰 있지 않고 다음 일을 한다. 집과 학교에 뚜벅뚜벅 걸어가고, 아무도 나에게 관심이 없어도 별생각이 없어진다. 사람들에게 먼저 말을 걸고 다시 잘 지낸다. 침대 밖으로 나와 샤워를 하고, 놀러도 다니고, 맛있는 것도 사 먹는다. 중간에 깨지 않는 개운한 잠을 잔다. 소설은 나를 태워주지 않는다. 조수석이나 뒷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게 두지 않는다. 나를 스스로 걷게 만든다. 걸어가고 싶게끔 만든다. 다음에 뭐가 있는지 궁금하게 해 뛰게도 한다. 끊임없이 문장을 읽으며 그 안에 담긴 장면을 떠올려야 한다. 인물이 어디로 가는지, 누구와 만나 어떤 행동을 하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상상해야 한다. 물리적으로 책장을 한 장, 한 장 넘겨야 한다. 이런 행위들은 내가 여전히 움직일 수 있고, 느낄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넌 인간이야, 그리고 살아있어”라고 말해주는 것만 같다. 매일 아침이 오는 게 너무 싫고, 기분이 나빴었는데, 어느 날 내게 내려온 빛이, 그래서 잠에서 깬 그 순간 천천히 내 몸에 도는 에너지가 기분 좋게 느껴졌다. 소설을 읽으며 움직일 힘이 생겼기 때문에 그랬다. 진심으로 소설을 좋아한다. 소설은 좋다. 하지만 내가 소설을 써도 되는지는, 자격이 있는 사람인지는 모르겠다. 내가 소설가라기엔…… 양심에 찔리고, 마음에 걸리는 것들이 많다. 항상 불안에 떨며 썼다. 이렇게나 자기 확신이 없는 사람의 소설을 누가 읽겠느냐며, 스스로를 몰아붙이기도 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쓰고 있는 이유는…… 나도 계속해서 걷고 싶어지고, 어느 순간에는 정말 뛰고 싶어지는 길을 만들고 싶었다. 걷다 보면 못 보던 것들도 보이고, 예를 들어 아이스크림 트럭과도 만나는, 강아지들이 홍수처럼 쏟아지는 공원도 지나치는, 그러다 달리고 싶어져서 계속해서 바람을 가르며 달리다 보면 어느 순간 파도가 힘차게 부서지는 바다도 나오는 그런 길을 당신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당신에게 이런 길을 왜 보여줬느냐면, 당신이 한 번쯤은 자신만을 위한 환호성을 들었으면 했다. 귀가 먹먹해질 만큼, 우레와 같이 쏟아지는 박수 소리를 말이다. 내가 느꼈던 것을 당신에게도 주고 싶었다. 당신은 받았을까? 두렵고 궁금하다. 이러다 정말 책을 내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많은 분이 도움을 주셨다. 한수예 선생님, 김보경 선생님, 전청림 선생님, 강화길 선생님께 감사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부끄럽지만, 이분들이 나와 함께해주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감격에 잠겼었다. 읽히는 경험을 하며 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글을 쓰는 사람인지 조금은 알게 되었다. 내 생각보다 난 어둡구나. 내 생각보다 나는 당신에게 말을 거는 것에 서툴구나. 많은 사람에게 읽힌다는 건 이런 거구나. 다 다른 걸 보는구나. 깨달은 게 많았다. 생각과는 다른 나, 생각과는 다른 글이 지금 내 앞에 있다. 당신에게 주고 싶어 소중히 가져온 것이, 당신에게는 고양이가 물어온 작은 시체처럼 난처한 선물일 수도 있다는 걸 알았다. 당신이 별로 좋아하지 않는 쑥떡일 수도 있다. ‘왜 갑자기 쑥떡을? 일단 받긴 받았지만, 난 이걸 안 먹는데’라는 생각이 들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쑥떡을 좋아해서 가져왔다.) 그렇다고 “내가 원하던 상황은 이게 아니야”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이런 걸 좋아해달라고 떼쓰고 싶은 건 더더욱 아니다. 난 이 책이 당신과 만난 것만으로도 기쁘다. 당신에게 대화를 신청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난 이미 충분한 것 같다. 계획했던 일은 아니었지만, 소설집을 묶으며 그동안 써온 소설들을 다시 읽어보니 하나같이 현재 상태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인물들이 나왔다. 나아지고 싶어 하는, 해결책을 찾으려는 사람들은 늘 매력적이다. 멋지다. 나는 항상 글을 쓰며 ‘이들을 끝없는 절망에 갇혀 있게 두지 않을 거야’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니 마지막에 도달하는 곳은 항상 죽을 것 같지만 죽을 리 없는 바다다. 걱정 없이 뛰어들어도 된다. 가고 싶은 만큼 깊은 곳으로 하염없이 내려가도 된다. 팔다리가 떨어져라 헤엄쳐도 된다. 몸에 힘을 빼고 자연의 흐름에 몸을 맡겨 둥둥 떠다녀도 된다. 누군가의 등에 올라타도 된다. 바다 위를 걸어도 된다. 그래도 되는 바다다. 뜻대로 되지 않는 삶이지만 그래도 되는 곳 하나쯤은 있어도 되지 않을까. 말이 좀 안 되더라도 말이다. 2026년 여름 구소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