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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그레고어 칸트와 그의 벌레 변신
일러두기 제1부 칸트와 포스트모더니스트 제1장 칸트, 하이데거, 포스트모더니즘: ‘바깥의 사유’에 대한 고찰(피터 하) 제2장 칸트와 라캉: 칸트와 정신분석의 윤리(맹정현) 제3장 칸트와 레비나스: ‘포스트모던 칸트’로서의 레비나스(강영안) 제4장 칸트와 리오타르: 칸트적인, 그러나 너무 비칸트적인(최소인) 제5장 칸트와 들뢰즈: 선험적 종합에서 경험적 종합으로(서동욱) 제6장 칸트와 푸코: 푸코의 칸트 읽기(양운덕) 제2부 칸트, 포스트모더니즘의 주변 제7장 칸트와 아도르노: 아도르노의 모더니티 극복과 칸트의 유산(노성숙) 제8장 칸트와 아렌트: 칸트와 아렌트, 그리고 포스트모더니즘(김석수) 제9장 칸트와 하버마스: 이성의 기획과 다원주의(박구용) 제10장 칸트와 로티: 중후한 소여와 경박한 구성(김영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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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장 요약]
제1장 칸트, 하이데거, 포스트모더니즘 이 글은 푸코와 데리다로 대표되는 포스트모던 철학의 원천으로서 하이데거를 발견하고, 다시 이 하이데거 철학의 근원에서 칸트적인 영감을 발견한다. 하이데거, 포스트모던 철학 그리고 칸트. 얼핏 보기에 아무런 연관이 없어 보이는 이들 철학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공통점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이 철학들이 ‘반(反)헤겔주의’적 사유를 표방하는 데 있다. 반헤겔주의란 절대 정신의 변증법적 운동을 통해 모든 것을 자신의 내재성에 귀속시키려는 사유를 거부하는 것을 말한다. 이들 철학은, 절대 정신의 내재적 운동에 절대로 귀속될 수 없는 ‘바깥’의 영역이 있으며, 이 영역은 ‘유한성’에 의해 근거지어진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한다. 제2장 칸트와 라캉 윤리가 없는 임상이란 가능한 것인가? 치료로서의 정신분석이 무의식적 주체의 변화를 겨냥하는 것이라면, 이러한 변화는 준거점으로서의 가치와 가치 판단을 함축한다는 점에서 모종의 윤리를 전제할 수밖에 없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라캉은 칸트를 프로이트에 의해 정초된 주체의 전복을 위한 윤리적인 전환점으로 제시했고, 그의 대척점에 위치한 사드와 더불어 읽기를 권한 바 있다. 이성과 욕망의 냉전 시대에 머물러 있는 우리의 상식을 뒤엎는 이러한 제안은 쾌락 원칙과 대상에 의한 규정성을 넘어서는 칸트의 윤리학으로 하여금, 환상의 미끼들이라 해야 할 상상적 이미지와 상징적 이상을 파열시킴으로써 주체의 실재에 도달하고자 하는 욕망의 윤리를 예고케 한다. 바로 이런 의미에서 이는 고전의 한 장을 장식하고 있는 칸트에 대한 독서를 갱신하는 20세기의 중요한 시도들 중의 하나임이 틀림없다. 제3장 칸트와 레비나스 레비나스 철학에는 칸트 철학에서 볼 수 없는 독특한 개념들이 있다. 이들은 ‘그저 있음il y a’ 이라든지 ‘향유’라든지 ‘분리’라든지 ‘무한성’이라든지 ‘타자’라든지 하는 개념들이다. 그럼에도 사물과 인간과 도덕과 신앙을 보는 관점에서 양자는 유사성을 보인다. 칸트에 따르면 과학적 인식의 대상은 사물 세계에 있는 것들로 제한된다. 나 자신을 포함해서 나의 인격과 타인의 인격, 신의 존재, 신앙의 의미 등은 과학적 지식의 한계를 벗어나 있다. 달리 말해, 표상적 사유의 권역을 벗어나 있다. 칸트는 도식이나 상징을 통해 이것들의 표상 가능성을 모색하지만 사물을 표상하듯 그렇게 표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인정한다. 레비나스 철학은 칸트가 한 이 인정을 훨씬 더 극단화시킨다. 그에 따르면 타자는 표상 바깥의 존재이다. 타자는 내가 아닌, 나와 다른 존재일 뿐 아니라 내가 거머쥐고 지배할 수 없는 존재이며, 그 존재는 나에게 얼굴로서 명령하는 존재로 나타난다. 타자는 단지 나와 다른 존재가 아니라 나에게 윤리적 명령을 하는 존재로 등장한다. 이런 타자를 레비나스는 ‘흔적’이라 부른다. 우리가 신을 체험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타자’라는 이 흔적뿐임을 레비나스는 강조한다. 이 글은, 서양 형이상학 비판과 비판철학의 가능성, 제일철학으로서의 윤리학, 신과 종교의 문제, 이 세 주제를 통해서 칸트 철학이 레비나스를 통해 어떻게 극단화되는지 살펴본다. 제4장 칸트와 리오타르 리오타르는 칸트 철학을 ‘근대의 에필로그이며 포스트모던의 프롤로그’라 규정한다. 이것은 리오타르의 사상이 칸트 철학과 맺고 있는 관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더니즘은 근대성에 대한 불신과 회의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칸트 사상에 내재된 근대 정신 혹은 계몽 정신의 전형을 찾아내 이를 철저히 부정하고 극복하고자 한다. 이 점에서 리오타르는 근대 정신을 대표하는 칸트와는 대척점에 서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리오타르는 칸트의 비판 정신으로부터 근대를 극복하고 넘어서는 포스트모던의 뿌리를 찾아낸다. 리오타르는 전통 형이상학을 부정하고 폐기 처분하며, 서로 이질적인 이성 능력들을 구분하고, 이들 이질적인 것들에 고유성과 자율성을 인정하는 칸트의 비판 정신이 모든 종류의 보편적 정당화의 시도, 거대 이야기의 종말을 예고한 포스트모던의 전주곡임을 확인한다. 이러한 리오타르에게서 우리는 한편에서는 근대성의 흔적을 지닌 칸트 철학에 대해 격렬하게 저항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근대를 넘어서서 현대를 예비하는 칸트의 비판 정신을 열렬히 환호하는 리오타르의 모습을 읽어낼 수 있다.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더니즘이 서 있는 곳은 칸트의 근대성에 대한 부정과 포스트모던적 칸트의 적극적인 수용이 교차하는 지점이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우리는 반(反)모던적 모던의 사상가로서 리오타르를 칸트의 반칸트적 후예라 말할 수 있다. 제5장 칸트와 들뢰즈 들뢰즈는 그의 유명한 ‘분열증’ 개념마저 칸트로부터 배우고 있다. 그는 『칸트의 비판철학』을 쓰고 나서 그 책이 매우 마음에 든다고 말한다. 그가 칸트를 너무나도 좋아해서인가? 아니, 오히려 칸트의 등에 붙어서 괴물을 창조할 수 있었기 때문이리라. 그 괴물은 ‘초월적 경험론’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들뢰즈가 경험론을 내세우면서 칸트를 계승하고 또 칸트와 대결하고자 했다면, 그는 마땅히 칸트의 가장 빛나는 유산인 ‘선험적 종합판단’의 문제를 건드리지 않으면 안 된다. 이에 대한 경험론자 들뢰즈의 답변은 바로, 선험적 종합을 대신하는 ‘경험적 종합’이다. 이 글은 들뢰즈가 어떻게 칸트의 인식론을 비판하고 제삼비판의 숭고 체험을 높이 받들며, ‘경험적 종합’을 심리학―정신분석이 아닌!―의 구렁텅이에 던져버린 영국경험론자들과 달리, 그것을 필연적인 인식의 차원에서 쇄신하는지 그리고 있다. 제6장 칸트와 푸코 푸코만큼 칸트의 아들이 되기를 열망한 사람이 있을까? 아들의 역할은 아버지의 계승과 극복이다. 그는 ‘계몽’과 ‘비판’이라는 칸트 철학의 두 핵심 요소를 가져다가 자기 철학의 기둥으로 삼으면서 아들의 이 두 가지 의무를 다한다. 계몽을, 어떤 권위에도 종속하지 않고 이성을 사용할 수 있는 순간으로 이해했던 칸트의 가르침에 따라 푸코도 의지, 권위, 사유가 결합되어 있는 기존의 관계들을 변형시켜나가고자 한다. 이런 계몽의 과제를 수행하기 위해 손에 쥐게 된 무기가 바로 비판이다. 그러나 칸트가 뛰어넘을 수 없는 지식의 필연적인 경계를 세우기 위한 비판에 주력했다면, 푸코는 지식에 세워진 경계들을 위반하기 위한 실천적 비판을 수행한다. 그리하여 푸코의 비판과 더불어 우리는 지식이 수립되기 위한 기존의 조건을 발견할 뿐 아니라, 사물과 타인과 자기 자신에 대한 새로운 지식의 수립 가능성까지 건너다보게 된다. 제7장 칸트와 아도르노 아도르노는 문명의 발전 과정을 주도해온 계몽의 신화론적 야만성을 비판할 뿐 아니라 자연 지배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도구적 이성과 주체 중심의 동일성 사고를 비판함으로써 포스트모더니즘 철학과 매우 친화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그러나 이와 달리 모더니티 극복을 위한 그의 시도는 칸트의 비판 개념에서 출발하고 있으며, 칸트가 지니고 있었던 계몽의 이념, 자율적 이성, 자연에 대한 성찰 등을 이어받고 있다. 그리하여 아도르노는 계몽의 자기비판과 구원을 여전히 요구하고 있으며, 자율적 이성을 폐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성의 자기 성찰을 통해 자연과 이성의 화해 가능성을 모색한다. 나아가 ‘주체 속에 있는 자연의 회상’을 통해서 다원성에 근거하고 있는 인간의 자유이념을 구현하고자 끊임없이 고군분투한다. 제8장 칸트와 아렌트 현대 철학은 주체의 사유와 존재 자체를 일치시키려는 기존의 모든 철학에 내장되어 있는 전체주의적 틀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다. 바로 이 새로운 길은 양자 사이의 배타적인 일방적 지배를 허용하지 않고, 이들이 함께 노니는 현상의 장을 긍정하는 ‘사이[間]’의 철학이다. 현대철학은 바로 이와 같은 대전제 아래서, 차이를 열어줄 것이냐, 좁힐 것이냐를 놓고 격돌하고 있다. 바로 이 격돌의 중심부에 칸트의 ‘비판철학’과 아렌트의 ‘판단철학’이 자리하고 있다. 이들 철학은 각기 현상과 물자체 사이를 분리하여 어느 한쪽이 다른 한쪽을 지배하는 방식을 거부한다. 이들은 ‘반성적 판단력’과 ‘공통 감각’을 기반으로 보편과 개별을 매개하고자 한다. 그러나 아렌트는 칸트의 ‘선험적 공통 감각’에는 구체적인 현실 공동체에서 행위하고 판단하는 개별성이 약화되어 있음을 비판한다. 하지만 아렌트의 칸트에 대한 이와 같은 비판은 차이를 강조하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로부터 역비판을 받는 부분이기도 하다. 칸트와 아렌트, 그리고 포스트모던 사이에 발생하고 있는 미묘한 문제들은 오늘날도 여전히 살아 있는 문제로서 21세기 철학의 지평을 열어가는 데 반드시 거쳐야 할 관문이 아닐 수 없다. 제9장 칸트와 하버마스 니체적 전통을 고수하는 포스트구조주의자들은 , 인간적인 사회의 건설을 지향했던 이성의 기획, 즉 휴머니즘의 토대 위에서 구축된 현대적 계몽의 기획이 전체성과 단일성에의 향수에 젖어 이질성과 다원성을 배제하고 억압한다는 급진적 비판을 제기하고 있다. 따라서 이들은 칸트 철학으로 상징되는 이성의 기획을 전면적으로 해체할 것을 제안한다. 반면에 하버마스는 홀로주체성으로부터 서로주체성으로 패러다임 전환을 통해 이성의 기획을 혁신함으로써 차이에 대한 예민한 감수성을 가진 보편주의적 관점을 제안한다. 하버마스는 포스트구조주의자들처럼 이성의 타자를 실체화하고 이질성과 다원성을 절대화하는 방식으로는 사회 비판을 위한 규범적 척도를 마련할 수 없다고 비판한다. 이런 맥락에서 하버마스는 포스트구조주의자들처럼 이성의 타자를 신비적 방식으로 실체화함으로써 칸트의 ‘초월적 변증론’ 이전으로 후퇴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다원성이나 이질성과 공존할 수 있도록 칸트 철학을 혁신적으로 변화시킬 것을 제안한다. 이 글은 이와 같은 방식으로 전개되는 논쟁, 즉 이성의 기획을 옹호하는 철학자들과 해체를 시도하는 철학자들 간의 논쟁을 칸트 철학과 연관시켜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있다. 제10장 칸트와 로티 로티는 근대 철학을 비판하면서 근대 철학의 핵심적인 철학적 가정들을 공박하고 있다. 칸트는 이러한 근대적 기획의 핵심적 인물이다. 재판관으로서의 철학, 순수한 철학, 탈역사적·탈문화적인 철학, 전문적인 철학 등의 이념은 바로 칸트로부터 나온 것이다. 로티는 분석과 종합의 이분법, ‘소여의 신화,’ 개념 내용과 개념 도식의 구분에 대한 거부를 통해 칸트의 철학을 통렬하게 공박하면서 그것을 해체시키고 있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모든 것을 해체시키면서 임의적으로 구성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논리적 진리, 선험적 진리, 개념적 진리, 나아가 인간에게 주어진 어떤 한계성이 우리들을 제약하고 있다. 이 점을 우리에게 일깨워준 것이 바로 칸트의 통찰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