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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자의 수다
현대작가의 두 형체가 주는 이미지 _ Raul C. Sampaio Lopes 프롤로그 펠릭스가 만난 127인의 예술가 강강훈 강형구 강호성 강홍석 고상우 권기수 권기철 권대훈 권무형 권오상 권오인 금동원 금보성 김광우 김나영&그레고리마스 김대관 김동연 김동유 김두진 김미경 김미경 김민경 김민선 김보영 김상돈 김선두 김 쎌 김영미 김영희 김용호 김은주 김정욱 김주연 김 준 김지은 김진언 김창열 김태균 김희연 문범강 박경률 박광성 박대조 박동수 박서보 박승예 박승원&송지은 박종호 박준범 박지혜 박찬용 배윤환 배형경 변웅필 서상익 서용선 세 오 송수남 송진수 신광호 아트놈 안성석 안창홍 에디강 오승민 오정근 옥정호 유영호 유진숙 윤기원 윤현선 이경미 이동재 이두식 이명호 이목을 이민혁 이보람 이상준 이세경 이소연 이 송 이연숙 이원호 이은숙 이재익 이해민선 이혁진 이현진 임동승 임자혁 장미경 장승효 장연순 전광영 전수경 전원근 정관영 정연연 정지필 정직성 조명식 조현동 조현익 지니유 지요상 찰스장 천경우 천대광 천성길 최부윤 최석운 최수정 최영실 최인수 최인호 최찬숙 탁 노 하태임 한경우 한카리 호도리 홍성원 홍장오 홍정욱 황세준 황창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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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연
펠릭스가 재원에서 두 번째 저서를 출간한다. 아티스트, 그 예술적 영혼의 초상-펠릭스가 만난 127인의 예술가이다. 독일 이민 2세대로 독일서 태어나고 독일서 자란 그가 한국에 온 것은 3년 전이다. 그의 말을 빌리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진이 좋아 독일 지역 신문사에서 사진 일을 하였단다. 그 후 대학에서는 부모님의 권유로 사진이 아닌 경영학을 전공하게 되지만 결국은 화랑 가를 배회하며 예술가들의 사진을 찍는 사진가로 돌아온다. 펠릭스와 나와의 인연은 본문에도 실려 있는 재독 미술가 박광성의 소개로 시작된다. 9년 전 지금은 그의 아내가 되어 한국항공우주연구원(Korea Aerospace Institute)에 근무하고 있는 김 박사와 펠릭스를 만났다. 그 후 결혼식에 초대를 받게 되었고 두 부부의 첫 아들 이름을 부탁 받아 ‘박재문’이라 지어 주는 인연으로 이어지며 그의 첫 번째 저서인 베를린 아트와 이번 두 번째 책을 함께 작업하게 된 것이다. 2. 기획 이번 책은 한국 현대미술가들의 사진을 꾸준히 찍고 있는 펠릭스를 3년 동안 지켜보던 나의 제안에 의해서이다. 그리고 펠릭스에게 ‘아티스트, 그 예술적 영혼의 초상’이란 제목을 화두처럼 주었다. 이 책에는 127명의 한국 현대미술가의 인물 사진이 독일과 한국에서 그들의 작품이 배경이 되는 옵션을 달고 펠릭스의 사진 작품이 되어 꿈처럼 펼쳐져 있다. 꿈, 그래 이것은 진정 꿈이다. 회화, 사진, 비디오, 조각, 설치, 퍼포먼스를 아우르는 전 분야의 한국 현대미술을 그 작가와 함께 만날 수 있는 일이 비록 지면이지만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내가 이 책을 기획한 의도이다. 뭐 그리 거룩한 의도도 아니다. 그냥, 우리의 작가들을 우리는 알자는 말이다. 알고 보고, 알고 느끼자는 말이다. 결국 그것이 구경꾼들의 감성을 회복시킬 것이고 그래야 후원을 하든, 작품을 사든, 구경을 가든 할 것 아닌가? 내 꿈은 세계100대 작가에 우리의 작가가 10명이 포함되는 것이다. 아니, 10명이 포함된 세계100대 작가의 작품집을 만드는 것이 정확히 내 꿈이다. 기꺼이 사진 속에 담겨준 팔순을 훌쩍 넘긴 박서보, 김창열 선생님을 비롯한 125명의 작가 분들은 지금 한국과 외국 곳곳에서 왕성한 활동들을 하고 있는 현역 작가들이다. 127명의 작가 분들께도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이분들 중 송수남, 이두식 선생님은 지금은 고인이 되셨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지면을 빌어 삼가 두 분 고인의 명복을 빈다. 3. 작업 펠릭스에게는 이번 작업이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촬영의 조건들이 갖추어진 상태에서 진행된 작업이 아니다. 속된 말로 필드(?)에서의 작업이었다. 조명이 제 각각인 전시장과 작가의 작업실, 대학의 교수실에서 또는 나의 요구로 계획과 무계획의 상태에서 촬영을 하여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펠릭스의 사진에 진한 인간미와 진정성이 더 돋보인다면 나의 아전인수인가? 펠릭스에게 참으로 수고했다는 위로의 말을 전한다. 4. 책은 거울이다 이 책은 독자들 보다 어쩌면 이 책에 실린 작가들에게 더 매력적인 책이 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책은 거울이고 그 거울을 통해 비춰지는 작가 자신의 모습과 작품을 작가들은 나르키소스처럼 볼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의 자신이 오른 손을 들면 거울 속 자신은 왼손을 들 것이고 오른쪽을 바라보면 거울 속 자신은 왼쪽을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작가 스스로가 자신과 자신의 작품에 가져보는 이런 비평의 기능은 분명 새로운 창조의 출발점일 수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5. 전시 이 책의 출간과 동시에 금보성아트센터(구;김흥수 미술관)에서 출판기념회 겸 책에 실린 작가들의 작품으로 2주에 걸쳐 전시회를 갖는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여러 분야의 가장 활발한 작가들이 참여하는 그야말로 다이내믹한 잔치가 될 것이다. 다양한 작업들이 200여 평 규모의 전시실 2개 층을 가득 채워 작가들에게는 자신의 작업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할 것이고, 구경꾼들에게는 신나게 보고 즐기는 미술 장터가 될 것이다. 이 전시를 위해 금보성관장이 많은 수고를 하였다. 그저 감사 할 뿐이다. 6. 넋두리 늦은 시간 사무실에서 이 ‘기획자의 수다’를 마무리 하며 난, 나도 모르게 장꼭도의 시를 중얼거리고 있다. “난 인생을 사랑했지. 그건 내게 구역질나는 일이야. 그 때문에 난 몰락하니까.........................” 그래도 꿈은 이루어진다. Images des deux corps de l’artiste vivant 현대작가의 두 형체(形體)가 주는 이미지 경험상 사실이 아닌 경우를 자주 보았음에도 우리는 겉모습에서 그 사람의 인간적인 성품까지 엿보려고 하는 마음을 떨쳐버리지 못한다. 밀로스 포만 감독의 1984년 영화 아마데우스에서 가장 재미난 장면 중의 하나는, 자기 재능 말고는 가진 것이 없는 작곡가 안토니오 살리에리가 짤스부르크 대공 겸 대주교의 주관으로 열린 연회에 초대받아 손님들 사이를 거닐며 아직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모차르트를 과연 알아볼 수 있을 것인지 생각하는 장면이다. 그 많은 천재성이 과연 겉모습에 드러날까? 자신이 그토록 찬미하던 천재 작곡가가 한낱 미숙하고 경박하기 그지없고, 조잡하게 장난치기 좋아하는 그리고 특별히 신체적 매력도 지니지 않은 애송이임을 알았을 때의 실망스러움이란! 그의 음악에 흐르는 우아함, 재능, 표현력과는 얼마나 대조적인가! 보다 극단적으로, 당대의 어느 인물은 또 다른 프랑스 작곡가 장 필립 라모(1683-1754)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의 온 영혼과 정신이 클라브생에 담겨있다. 악기를 닫으면 집에 아무도 없는 것 같다.” 예술성과 육체적 특성 사이의 모든 관계, 간단히 말해 예술성과 인간성 사이의 모든 관계를 단절해 버리는 말이다. 20세기 초 프랑스 소설가 마르셀 푸르스트(1871-1922)는 작품을 작가의 자전적 경험의 반영으로 여기는 데에 반기를 들었다. 작가의 삶이야말로 작품을 설명해주는 유일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비평가 생트 뵈브에 반대하는 의견이었다. 포르투갈 시인 페르난두 페소아(1888-1935)는 “heteronymies[에테로니미]”라는 자신만의 신조어를 만듦으로써 그에 대한 생각을 극단까지 밀고 간다. 페소아는 자기가 창작한 시(詩)의 저자 이름으로 알베르투 카에이루, 리카르두 레이스, 알바루 드 캉푸스 등 허구의 시인을 고안해내어 그들 각자에게 고유한 문체를 부여할 뿐 아니라, 나아가 서로 다른 인적 사항, 직업, 성(性)적 경향까지도 만들어 주었다. 그러면서 시인 페르난도 페소아 역시 그가 만들어낸 시인들처럼 똑같이 가상의 인물이거나 혹은 반대로 실제의 인물인 것처럼 여겨지게 유도했다. 페소아의 친구이자 시인, 데생화가였던 알마다 네그레이루스(1893-1970)는 그 허구의 시인들 각각의 인물화를 그려주는 일까지 도맡았다. 이처럼 작가의 외양적, 심리적, 전기(傳記)적인 자료들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작품을 구상하는 경향은 20세기 내내 성공을 거두었고, 1968년 롤랑 바르트(1915-1980)는 “저자의 죽음”을 공언하기에 이른다. 이와 대조적인 입장을 표방하는 것으로, 종종 원문에서의 문맥과 다른 의미에서 매우 유명해진 프랑스 박물학자 뷔퐁(1707-1788)의 “문체는 곧 그 사람 자체이다”라는 말이 있다. 바사리(1511-1574) 역시 자신의 저서 미술가 열전(1550, 1568)에서 라파엘로에 대해 설명할 때, 화가의 우아함과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아름다움은 또한 그의 작품에 대한 설명이기도 했다. 존재의 외양과 예술로서 표현되는 보다 심오한 본성 사이의 은밀한 관계에 바사리가 믿음을 가졌을지도 모르는 이유는, 서양 최초로 위인전에 초상화를 병행해 수록했기 때문이다. 그러면 17세기 프랑스 문인들 사이에서 벌어진 고대파와 현대파의 논쟁이 우리에게 되풀이 된다는 말인가? 작가의 외양과 예술성이 항상 일치하지 않으니 고대파의 입장이 불리해 질지 모른다. 하지만 현대파의 주장에 맞서, 루이세자르 뒤코르네(1806-1856)의 낭만주의적 회화작품을 다른 식으로 ‘해석’할 가능성도 부정할 수 없다. 특히 그의 한 자화상에서 팔이 없이 대형 작품을 발로 그리는 모습을 보면 깜짝 놀라고 만다. 마찬가지로 화가 기욤 기용레티에르(1760-1832)는 법관 아버지와 아프리카 노예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였으니 서양미술사에서 최초의 유색인종 미술가였다. 또한 카라바지오(1571-1610)의 홀로페르네스를 참수하는 유디트가 성폭행을 당한 여류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1593-1652)의 유디트와 똑같이 해석될 수 없는 것도 모두 작가의 외양과 예술성 사이의 관계를 알고 나면 충분히 다르게 해석될 수 있는 경우들이다. 따라서 펠릭스 박의 이 저서는 예술가와 예술 사이의 직접적인 관계를 실제로 더 이상 믿지 않는 시대, 작가의 비천한 삶과 육체를 숭고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작품이라고 믿었던 낭만주의적 비전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시대, 다시 말하면 작품과 작가가 전적으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더는 믿지 않는 시대에 나온 것이다. 당대 미디어를 통해 진정한 스타로 각광받았던 피카소(1881-1973), 앤디 워홀(1928-1987)의 경우처럼, 예술가의 이미지가 확대되어 거의 작품의 이미지만큼 (혹은 더 중요하게) 보여지는 시대에 나온 저서이다. 게다가 한스 나무트(1915-1990)가 찍은 잭슨 폴록(1912-1956)의 사진은 앞서 보았던 것과 조금 다른 문제를 제기한다. 작가가 이루어낸 결과물, 작품 자체보다는 작업하는 과정에 초점을 둔 나무트의 사진들이 폴록의 예술세계를 이해하는 데 얼마나 많은 영향을 끼쳤는지 생각해 볼 여지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펠릭스 박은 이전 사람들보다 훨씬 조심스럽다. 그는 사진을 보는 이들에게 보다 많은 해석의 자유를 부여한다. 그에게 감사할 일이다. 그러니 접근하는 방식은 한결같이 일괄적이지 않다. 다소 다루기 어려운 현장, 전시장이나 아틀리에에서 이루어진 즉흥적인 만남의 결실이기에, 거기에는 유익한 다채로움과 대단한 진정성이 보장된다. 그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은 예술가에 대한 두 가지 이미지, 예술세계가 보여주는 이미지와 작가 자신이 보여주는 이미지의 대면(對面)이다. 그는 독자에게 이 둘 사이에 존재하는 수많은 연관성 혹은 대비성을 읽어내도록 권한다. 그의 사진에는 실로 다양한 관계가 내재한다. 때로 살리에리가 느낀 대비성를 찾기도 한다. 때로 그토록 강렬하고 다른 어떤 것과도 닮지 않은 작품 앞에서 작가의 외양은 어쩌면 그렇게 소박하고 평범한지! 이 두 가지 이미지에서 어떤 것이 ‘참’일까? 어떤 사진에서는 다른 종류의 대비가 작용한다. 김민선의 연약해 보이는 몸은 그녀의 방대한 작업과 놀랄 만큼 대조적이다. 김지은의 사진도 비슷한 인상을 준다. 이해민선의 모습은 그녀가 그린 큰 규모의 풍경 앞에서 작아지는 느낌이 놀랍다. 세로로 길게 늘어진 자국으로 비밀스럽게 얼굴이 가리워진, 거의 옷을 걸치지 않은 모델들 앞에서, 뚜렷하게 모습이 드러나는 것을 경계하는 듯한 그의 회화작품에서, 이번엔 얼굴이 또렷이 보이는 신광호는 멋쟁이의 모습이다. 김대관의 작품 혹은 금보성의 작품은 그들이 기대 서있는 곳의 수수함에 비하면 또 얼마나 환하게 색채를 드러내는가! 그와 반대로 작가와 작품이 서로 융화되어 보기도 한다. 김창열의 멋스런 옷차림, 세월의 흔적이 신선하게 느껴지는 그의 얼굴은 솟아나는 물방울, 부분부분 지워진 글자로 가득한 작품의 멋스러움과 동일한 인상을 준다. 마찬가지의 방식으로 임자혁의 흑, 백, 적색의 미학이 작가에게 옷을 입히고, 그래픽 작품의 분위기를 지배한다. 붉은 색이 간간히 뿌려진 전체 갈색 톤의 조현익 작품에서 작가는 동화되어 사라져 보인다. 박지혜는 작품 안에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그 앞에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작가와 작품 속 인물에서 동일한 절제와 우아함이 보인다. 이소연과 변웅필의 경계하는 듯한 몸짓, 그 몸의 일부가 작품 안으로 들어가 자리를 잡은 듯하다. 박승예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손과 얼굴이 작가가 걸치고 있는 짙은 색 옷과 모자에서 분리되어, 제 이미지에서 빠져나간 것처럼 여겨진다. 김두진은 정말 세 개의 머리를 가지고 있지 않은가! 펠릭스 박은 보다 은밀한 다른 관계를 암시하기도 한다. 박서보의 차분한 모습은 그의 작품이 보여 주는 준엄함을 감당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천성길은 또 왜 자기 작품 가운데 들어가 웅크리고 있을까? 아주 잘 배치된 사진 구성 덕분에 권기수의 작품은 작가의 몸에서 발산되는 빛처럼 보인다. 그리고 김용호의 경우, 만화의 말풍선처럼 작가의 머리에서 작품이 곧바로 빠져 나오는 것만 같다. 김정욱이 서있는 위치는 작품 속 인물들만큼이나 난해하다, 그림 앞에 서있는 전수경의 실루엣은 당황스러울 정도로 에로틱한 무엇을 암시한다. 얼굴과 발가락 살색이 작가가 입은 흑백의 의상으로 더욱 두드러지고, 그렇게 작품 속 분홍빛이 독특한 방식으로 연장된다. 작가와 작품 사이의 물리적 거리, 그것도 놀랄 만큼 근접한 거리로 말하자면, 박대조의 경우를 주목할 만하다. 비디오 영상에 거의 딱 붙어 있는 작가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작가에게 작품은 어머니에게 있어 자식과도 같은가? 아니면 18세기 프랑스 화가들이 언급했듯이 자기 ‘애인’ 같을까? 아니면 육체와 그것의 반영(反映) 같을까? 아니면 다른 어떤 것일까? 이 저서에 소개된 사진 하나하나에 설명을 붙이지 못한 점, 미처 다 언급하지 못한 작가들에도 용서를 빌어야 할 듯싶다. 하지만 여기서 문제되는 것은 그 작가들이 아니라 펠릭스 박의 사진들이라는 점을 또한 알아주셨으면 한다. 이 글을 마치며 간단히 한 가지 더 언급하자면, 강렬한 모노크롬 블루로 유명한 프랑스 화가 이브 클랭(1928-1962)은 작품이 “자기 예술의 재”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그것은 분명(언젠가는 먼지가 되어 버릴) 예술가의 육체와 그의 사고(혹은 영혼, 정신, 정신현상, 무의식, 그것도 아니면 각자가 그것을 무엇이라 부르건, 무엇을 상상하건 상관없이) 사이와 동일한 유형의 관계라고 여길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작품과 작가 자신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것은, 보다 본질적인 실제에 이르고자 한다면 반드시 이해하고 해석해야 하는 표시들이거나 단서들이다. 그것보다 더 까다로운 것도 없다. 작가의 존재 자체가 지닌 이중의 형체, 물리적 외양으로 보이는 형체와 오랜 시간 작품과 더불어 구축해온 형체, 이 두 가지 형체와 맺는 여러 유형의 관계에 대해 펠릭스 박은 사진 이미지를 통해 다양한 의견을 제시한다. 하지만 아무 것도 강요하지 않는다. 해석에 사용되는 자기 고유의 여과장치를 겸손하게 제시할 뿐이다. 펠릭스 박이 어떻게 작가로서의 자기 모습을 드러내는지 그것을 풀어내야 하는 것은 이제 독자의 몫이다. Raul C. Sampaio Lopes 번역 이선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