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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말_ 예수와 석가의 창조적 만남을 위하여
제1장. 마하(摩訶)와 아하 제2장. 반야(般若)와 믿음 제3장. 바라밀다(波羅蜜多)와 십자가 제4장. 심경(心經)과 성경(聖經) 제5장. 관자재(觀自在)와 여호와 제6장. 보살(菩薩)과 예수 제7장. 행심반야바라밀다시(行深般若波羅密多時)와 성도(聖徒)의 길 제8장. 조견(照見) 오온개공(五蘊皆空)과 하나님 없는 인간 제9장. 도일체고액(度一切苦厄)과 구원 제10장, 사리자(舍利子)와 예수의 애제자(愛弟子) 요한 제11장. 색불이공(色不異空) 공불이색(空不異色)과 비움과 나눔의 길 제12장.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과 하나님과 세상 제13장. 수상행식(受想行識) 역부여시(亦復如是)와 인식(認識)의 문제 -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제14장. 사리자(舍利子) 시제법공상(是諸法空相)과 하나님의 여백 제15장. 불생불멸(不生不滅)과 하나님에게 귀의(歸依) 제16장. 불구부정(不垢不淨)과 하나님의 눈, 아가페 제17장. 부증불감(不增不減)과 하나님의 존재 방식, 알파와 오메가 제18장. 시고(是故) 공중무색(空中無色)과 없이 있는 하나님 제19장. 무수상행식(無受想行識)과 거기 있으며 말하는 하나님 제20장. 무안이비설신의(無眼耳鼻舌身意)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사람들 제21장. 무색성향미촉법(無色聲香味觸法)과 인연(因緣)으로서의 하나님과 피조물 제22장.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無眼界 乃至 無意識界)와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제23장. 무무명(無無明)과 구원의 빛 제24장. 역무무명진(亦無無明盡)과 구원의 길 제25장. 내지(乃至) 무노사(無老死)와 영원한 나라 제26장, 역무노사진(亦無老死盡)과 구원론적 이율배반 제27장. 무고집멸도(無苦集滅道)와 은총의 대문(大門) 제28장. 무지역무득(無智亦無得)과 하나님의 어리석음 제29장. 이무소득고(以無所得故)와 “두 벌 옷을 가지지 말라” 제30장. 보리살타(菩提薩唾) 의반야바라밀다고(依般若派羅密多故)와 성도의 직무 제31장. 심무가애(心無가碍)와 자유인의 삶 제32장. 무가애고(無가碍故) 무유공포(無有恐怖)와 그리스도의 사랑 제33장. 원리전도몽상(遠離顚倒夢想)과 거듭남의 비밀 -착각에서 벗어나는 길 제34장. 구경열반(究竟涅槃)과 하나님의 나라 제35장. 삼세제불(三世諸佛)과 삼위일체 하나님 제36장. 의반야바라밀다고(依般若派羅蜜多故)와 예수의 생존방식 제37장. 득아뇩다라삼먁삼보리(得阿褥多羅三?三菩提)와 하나님 없는 인생의 허무 제38장. 고지(故知)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와 십자가와 부활 제39장. 시대신주(是大神呪) 시대명주(是大明呪)와 십자가의 도(道) 제40장. 시무상주(是無上呪) 시무등등주(是無等等呪)와 무상(無上)의 기쁨, 부활의 세계 제41장. 능제일체고(能除一切苦) 진실불허(眞實不虛)와 하나님의 씨 제42장. 고설(故說) 반야바라밀다주(般若波羅蜜多呪) 즉설주왈(卽說呪曰)과 주기도문(主祈禱文) 제43장. 아제아제(揭諦揭諦) 바라아제(波羅揭諦) 바라승아제(波羅僧揭諦) 모지사바하(菩提薩婆詞)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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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불이공은 일반 대중이 빠지기 쉬운 단견(短見)으로, 물질세계에 너무 집착할 것을 염두에 두고 설파한 것이라면, 공불이색은 불도(佛道)를 닦는 수행자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공(空)에 대한 집착으로서의 단견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한 설명 방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색불이공은 ‘없는 것을 있다’고 생각하며 집착하는 유상(有相)을 떠나라는 것이고, 공불이색은 ‘공이 전부’라고 생각하는 공상(空相)을 떠날 것을 말하고 있다. 공에만 집착하는 것은 보살의 이상이라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현실 세계 곧, 색 없는 공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마치 플라톤의 이원론적 이데아론을 정면으로 거부하고 현상 속에 실재인 이데아가 내포되어 있다는 아리스토텔레스적 철학과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 p.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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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을 인식론과 결부시켜 볼 때, 공은 무분별지(無分別智)다. 반면에 색은 분별지다. 그러므로 무분별지는 분별지 곧 색을 넘어선다. 공은 본래면목(本來面目)의 장(場)이지만, 색은 변전(變轉)의 현장이다. 본질과 현상의 세계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역사는 색의 세계에서 전개된다. 본질적 입장에서 볼 때 색은 미망(迷妄)의 세계다. 그러나 공 또한 색을 떠나 있지 않다는 점에서 공도 역사를 떠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치 하나님이 역사를 떠나 있지 않는 것과 같다. 오히려 예수는 역사 속에 진입했고 역사를 변혁했다. 그런 점에서 하나님과 세상은 불연속적이지만 예수로 인해 연속성을 지니기도 한다. 이른바 공과 색의 매개자가 예수라는 것이다. 이점이 불교와의 차이라면 차이다.
--- p.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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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각적인 주관적 인식의 세계가 언어와 개념에 묶이게 될 때, 공의 세계나 영의 세계에서 멀어져 간다. 십자가의 성 요한의 말과 같이, 신과의 교섭은 어떤 해석이나 숙고의 여지가 없이 즉각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마치 하나님이 예언자들을 부를 때 그들은 즉각 응답하고 나섰던 것과 같다. 시대적 부름과 소명에 망설임 없이, 목숨을 아끼지 않고 그들의 사명을 다했다. 신의 뜻이 인간에게 가장 분명하고 첨예하게 전달된 것이 예언자였다. 예언자들은 하나님의 소리를 눈으로 들었다. 그만큼 직접적이었던 것이다. 마더 테레사는 눈으로 하나님의 소리를 들었다. 거리에서 병으로 신음하며 죽어가는 비참한 인도의 빈민들을 바라보면서 하나님의 음성을 눈으로 들었다. 그녀는 줄곧 내면의 소리를 묵묵히 들으며 스스로 눈이 먼 자들의 눈이 되었던 것이다. 분별과 차별을 넘어서 신의 소리를 보는 눈(觀音), 그것이 참된 ‘봄’이 아닐까?
--- p.1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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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다가 죽어버리자
동양과 서양의 문물이 급속히 교차하고 있는 지점에서 예수의 정신과 석가의 정신은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아직 상호 이질적인 분위기에서 서로의 만남과 대화를 주저하고 있는 분위기다. 서로의 신념체계가 다른 만큼 서로에게서 열린 마음과 자세로 배우려고 하기보다는 폐쇄적인 분위기 속에서 배타적으로 대해 왔던 것도 사실이다.
동양정신과 서양정신은 세계문명의 두 축이다. 이들 두 축의 중심부에는 각각 그리스도교와 불교의 영향력이 깊이 스며있다. 동양과 서양은 각각의 이질적인 문화적 토양 때문에 오랜 세월동안 서로 다른 정신세계의 길을 걸어 왔다. 하지만 정보와 교통이 급격히 편리해진 지구촌 시대의 오늘은 그 양상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서양정신과 동양정신의 만남은 이제 하나의 각기 독특한 방식으로 토착적인 영역을 자생적으로 구축하여 가고 있는 셈이다. 예수가 세상에 던져주고자 했던 진정한 메시지의 의도와 석가가 깨달았던 진리의 세계가 서로 다른 역사적, 혹은 문화적 맥락에서 이해될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어느 지점에서 만남과 대화가 가능할 뿐 아니라, 그 대화는 이제 피할 수 없는 엄연한 현실이 되었다. 이러한 피할 수 없는 예수와 석가의 창조적 만남은 끊임없이 변모하는 세계 속에서 평화로운 공동체를 지향하는 새로운 대안적 문화양식으로 피어날 수 있다. 꽃은 하루아침에 갑자기 피어나는 것이 아니다. 역사라는 뿌리와 줄기를 통해 문화적 향기로 피어나는 것이다. 예수와 석가의 만남은 서양정신과 동양정신의 아주 특별한 만남일 수 있다. 서양정신을 예수 속에 다 담아낼 수는 없듯이, 동양정신을 석가 속에 모두 담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두 정신의 만남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아주 독특한 만남으로 규정될 수 있다. 아직 그 증후는 미미하지만 그것은 분명 창조적 문화의 변형으로 나타나게 될 것이다.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가 ‘천 년 후의 역사가가 20세기를 평가할 때 최고의 사건은. 정치나 경제가 아니라 그리스도교와 불교가 최초로 만났다는 점’이라고 예언했던 말은 결코, 과장이라고만 할 수 없을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 창조적 만남의 도정(道程)에 나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