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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서문
옮긴이 글 머리말 1장 애국주의의 역사적 위상 내셔널리즘과 현대세계 청조의 통치구조 19세기의 의미 애국주의의 등장 대외 위기의식과 국민 형성 저널리즘의 역할 생존경쟁에 승리할 주체를 찾아서 화이론(華夷論) - 만(滿)과 한(漢) 인종의 관념 군국민(軍國民)과 체육 일본과 '중국' 2장 동포를 위해 단결하다 - 반미운동(1905년) '중국인' 관념의 형성 본적지 아이덴티티와 도시사회 미국이민의 본적 미국에서의 화인배척 청말의 톰 아저씨 양계초의 미국 인종론 보이콧 운동을 어떻게 볼 것인가? 광주(廣州)의 경우 - 광동인(廣東人)주의로서의 애국 상해(上海)의 경우 - 출신지를 초월한 단결 천진(天津)의 경우 - 본토인의 복권으로서의 애국운동 화공과 애국 도시사회와 애국주의 3장 중국의 일체성을 추구하다 - 지도와 역사서술 과분(瓜分)의 공포 지도를 상기하며 국토를 방위하라 중국사의 탄생 기년(紀年)을 어떻게 할 것인가? 개인의 기년 - 송교인(宋敎仁)의 회의(懷疑) 일체성을 추구하여 4장 변발을 자르다-상무(尙武)와 문명에의 지향 왜 변발을 잘랐는가? 전변론의 등장 전변론의 전개 1910년의 전변논의 신해혁명 시기 전변의 실천 변발로 본 풍속 문제 청말 전변론의 역사적 의의 5장 애국을 위해 죽다-정치운동에서의 죽음과 추도 정치운동과 죽음 담사동(譚嗣同)의 죽음-양계초에 의한 ‘담사동전’ 열사를 추도한다 죽음의 정치적 의미 진천화(陳天華) 죽음의 재검토 반자인(潘子寅)의 죽음과 추도 거듭되는 애국의 죽음 국가에 충성을 바치다 죽음을 재촉한 암살자-오월의 경우 암살을 둘러싼 정념과 사고 영웅으로서의 개인 중국을 위해 죽는다는 것 6장 애국주의를 논하는 방식 오스만제국의 꿈의 저편 일본 역사학의 문제와 그 극복 양계초의 통한 저자후기/ 연표 / 참고문헌 / 찾아보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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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는 이미 『天津の近代-淸末都市における政治文化と社會統合』라는 저서에서 도시 '천진'을 중심으로 제국주의가 어떻게 침투해 들어오고 또한 그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였는가?하는 문제를 다양한 각도에서 분석했다. 그 연장선에 있는 이 책에서 저자는 내셔널리즘이라는 전제 하에 역사적 사실을 꿰어 맞추려고 하는 종래의 연구방법론에서 벗어나 동향결합, 이민, 지도와 역사서술, 기년, 전발과 역복, 열사에 대한 추도 등의 다양한 주제를 통해 근대 중국 내셔널리즘의 형성과정을 세밀하게 분석한다.
이 책의 주인공이기도 한 양계초(梁啓超)는 터키나 인도, 아프리카와 같이 중국이 서구열강에 의해 과분瓜分, 즉 분할될 상황에 처해있지만 중국은 이를 자각하지 못하고 있다고 개탄하면서, 이러한 위기적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우선 국명으로서 ‘중국’이라는 용어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것을 주창하였다. 이에 양계초는 한, 당 등 개별왕조를 초월한 전체 역사를 포괄할 수 있는 국명으로서 ‘중국’을 사용할 것을 제창하고 있다. 이에 ‘중국’이라는 국명은 각 왕조를 초월한 통일된 국가로서 그 실체를 명확히 드러내게 되었다. 한편, 양계초는 새로운 ‘중국’을 건설하기 위한 방안으로 우선 중국인의 내면에 존재하는 노예근성奴性을 극복하기 위해 종래의 전통적인 사회적 차별을 부정하고 국가를 담당할 대등한 ‘국민’을 양성할 것을 주장하였다. 양계초는 새로운 ‘중국’을 건설하는데 왜 ‘국민’의 양성을 절대적으로 상정하고 있었던 것인가? ‘국민’의 바탕 위에 ‘국가’가 성립해야 한다는 것은 바로 ‘국민’의 지지를 바탕으로 정권의 정당성을 확립해야 한다는 것으로 달리 말하면, ‘국가’는 ‘국민’의 의사를 근거로 해서 통치를 해야 한다는 논리에 입각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국민’의 지지에 의해 정권의 정당성을 부여해야만 한다는 논리는 전통적인 천명을 정당성으로 하는 왕조 지배질서를 크게 위협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천명이 아니라 국민의 지지에 정권의 정당성을 부여해야 한다는 양계초의 논리는 청조정부의 정체성政體性을 흔드는 것으로 위험시 되었던 것이다. 청조 지배체제 하에서 새로운 ‘중국’을 모색하고자 했던 강유위, 양계초 등을 위시로 한 무술변법운동戊戌變法運動은 일단 광서제光緖帝의 신임을 받았지만, 얼마 후 서태후를 비롯한 수구세력의 쿠데타에 의해 ‘백일유신百日維新’으로 끝나게 된다. 청조 지배체제 내에서 청조의 자강을 위해 등장한 ‘중국’의 개념이 수구세력에 있어서는 자신들의 지배체제(즉 청조)를 위협하는 개념으로 위구시되었던 것은 흥미로운 사실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한편 무술변법운동의 실패 후 ‘멸만흥한’을 기치로 내건 혁명운동은 중국과 한漢을 동일시하는 것에 의해 만주족인 청조를 타도하고 한인(중국인)의 민족국가 건설을 지향하였다. 이러한 한족부흥운동 과정에서 전설상의 인물로 실존여부도 명확하지 않은 황제黃帝를 한족의 시조로 부각시켜 한족을 통합하는 새로운 관념으로서 부각시켰다. 그러나 신해혁명에 의해 성립한 ‘중화민국’은 만주 등 비중국의 세계를 포함하는 청조의 영역을 그대로 계승하게 됨에 따라 황제의 자손이라고 하는 한족 내셔널리즘만으로는 새로운 중국을 통합하기 어려웠다. 이러한 배경 하에 중화민국 임시대총통에 취임한 손문孫文은 취임연설문에서 종족적 보복주의에서 벗어나 한漢·만滿·몽蒙·회回·장藏의 제 민족의 통합으로서 ‘오족공화’를 주창하였으며, 나아가 만주, 몽골, 티베트, 신강 등지의 제 민족을 ‘동포’로 부르고 공화국의 주체로서 주권을 지닌 국민으로 포섭시키고 있다. 그러나 1920년대에 이르러 손문은 지금까지 자신이 주창한 ‘오족공화론’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고 입장을 바꾸었다. 그 이유로 오족의 인구는 한족이 절대적으로 다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또한 현실적으로 만주는 일본, 몽골은 러시아, 티베트는 영국의 세력권 하에 들어가 있는데, 모두 자립할 능력을 지니고 못하고 한족에 의지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인식하에서 손문은 만·몽·회·장을 한족에게 동화시켜 ‘중화민족中華民族’을 형성하고 하나의 완전한 민족국가를 조직하여 미국과 함께 동서양반구에 있어 양대 민족주의 국가를 건설할 것을 주창하였다. 즉 한족을 중심에 놓고 한족 이외의 4개 민족을 한족으로 동화시켜 ‘중화민족’이라는 하나의 거대 민족국가를 형성할 것을 처음으로 주장하게 된다. 이 ‘중화민족’은 기존 민족의 범주를 초월해서 4개 소수민족을 포함하는 비중국의 세계까지 모두 포괄하는 새로운 민족상으로 제창된 것이지만, 그것은 궁극적으로 ‘대한족주의大漢族主義’의 변형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나 손문은 1924년 ‘국민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선언’에서 국민당의 민족주의는 중국민족의 해방을 추구하고 나아가 중국 영토 내에 있는 각 민족을 일률적으로 평등하게 하는 데 그 의의가 있다고 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손문은 중국 내의 제 민족의 자결권에 의거한 자유롭고 통일된 중화민국을 조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제 소수민족을 한족에 동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각 민족의 자결권과 일률적인 평등을 보장한다고 하는 주장은 종래의 민족적 차별을 행한 ‘대한족주의’입장을 수정한 것으로서 이는 민족정책상 커다란 변화라고 할 수 있지만, 만주, 몽골, 티베트, 위글족 등 다수 그룹과 기타 소수 그룹을 동일선상에서 취급함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다수 그룹의 독자성을 약화시키려고 하는 정치적 의도가 담겨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실제로 1949년에 건국된 중화인민공화국은 손문의 민족정책을 비판적으로 계승하여 제 민족의 평등과 자결을 적극적으로 추진함으로써 각 민족의 평등한 권리에 의거한 통일적 다민족국가의 실현을 추구하고 있다. 중국정부는 1950년부터 제 민족의 조사에 착수하여 개혁과 개방 시기에 들어간 1979년 운남성雲南省에 거주하는 지누어족基諾族을 민족으로 승격시킴으로써 한족을 제외한 55개 소수민족을 확정하였다. 이러한 민족평등정책은 55개의 소수민족이 자치와 언어, 의석 수 등을 확보하게 되어 민족간의 불신 등을 없애고 화합하는 데 큰 공헌을 하게 되었지만, 또한 그 이면에는 많은 문제도 낳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만주, 몽골, 티베트, 위글족 등의 다수 그룹과 지누어족과 같이 극히 숫자가 적어 단지 소수 부족으로 불리고 있던 그룹이 동일하게 민족으로 취급되고, 또한 한족에 대해 모두 획일적으로 소수민족으로 분류됨에 따라 고유의 전통과 역사 속에서 정치적인 공동체를 형성해 왔던 다수그룹의 독자성은 상대적으로 약화되어 중화세계 속으로 포섭되게 되었던 것이다. 1988년 여름 중국의 유명한 사회학자 비효통費孝通은 홍콩 중문대학에서 행한 ‘중화민족中華民族의 다원일체 구조’라고 하는 강연에서 중화민족의 구성원은 대단히 복잡하여 다원적 구조를 이루고 있으며, 이는 자연발생적인 민족실체로 아울러 대일통大一統의 구조를 형성하였다. 이 자연발생적 민족실체는 19세기 후반부터 서양열강의 압박 속에서 공동으로 저항하는 가운데 형성된 ‘자각적인 민족실체’로써 이 실체의 구조는 ‘다원적 통일체’를 포함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언설은 이미 언급하였듯이 1920년대 손문에 의해서 주창된 ‘중화민족’론을 이론적으로 보강하여 발표한 것이지만, 여기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다. 그가 말하는 ‘중화민족’이라는 개념은 ‘한족’이나 몽골족, 티베트족 등 민족학상의 개념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정치적인 개념으로서 등장한 것이며, 또한 수천년내 서서히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민족실체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근대의 산물로서의 ‘정치적 공동체’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비효통의 ‘중화민족 다원일체 구조론’은 많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 중국을 통합하는 키워드로서 재무장되고 있으며 그것은 곧 주변국가에 새로운 위협으로 부각되고 있다. 최근 한·중간의 역사분쟁으로 화두가 되고 있는 고구려사 귀속문제에서 중국 측 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는 ‘통일적다민족국가統一的多民族國家’설은 바로 비효통의 학설을 논리적 전제로 삼고 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그렇다면 현 시점에서 중국정부가 ‘중화민족’론을 대대적으로 선전하며 중국인민들에게 민족주의를 호소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1980년대 등소평鄧小平정권에 의한 개혁과 개방이후 중국의 경제는 급속히 성장하면서 미국과 함께 동서의 양대산맥 중의 하나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이러한 경제성장과 함께 1997년에는 아편전쟁으로 인해 영국에 할양했던 홍콩을 회수하였으며, 1999에는 포루투갈이 조차하고 있었던 마카오를 400여년 만에 돌려받는 데 성공하였다. 또한 2001년에는 WTO가입으로 인해 아시아경제권에서 맹주로 부상하고 있으며, 나아가 세계경제체제에 편입이 된 상황 하에서 중국은 세계정치, 경제질서의 주역으로서 부상하고 있다. 게다가 2008년에는 북경올림픽을 개최할 예정으로 어느 때보다도 대국의 면모를 발휘하며, 국가적 위상을 드높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여전히 풀어야할 숙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우선 개혁과 개방으로 인한 경제성장으로 인해 중국인민의 생활은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풍요로워졌으나, 그와 함께 지역간의 불균등한 경제발전 및 인민간의 빈부격차가 첨예한 사회문제로 부각하고 있다. 특히 1989년에 발생한 천안문사건은 대외적으로 중국은 여전히 독체제제이며, 민중의 인권은 억압되어 있다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한편, 대약진운동, 문화대혁명시기에는 ‘혁명이데올로기’를 통해 국가권력이 말단까지 철저하게 미칠 수 있었지만, 개혁과 개방이후 국가권력의 말단침투 및 장악력은 점차로 이완되는 중에 있다. 이에 따라 티베트를 비롯한 소수민족의 거취문제가 다시 부각되고 있으며, 최근 민진당民進黨의 진수편陳水扁이 대만의 총통으로 재선되면서 타이완 독립문제가 크게 부각되고 있는데, 이 역시 현대 중국이 풀어 나가야할 중요한 과제 중의 하나인 것이다. 게다가 한국 경제의 발전으로 인해 코리안드림을 꿈꾸며 한국으로 몰려드는 중국 조선족의 움직임은 중국정부를 크게 긴장시키고 있다. 조선족의 이탈은 곧 전체 소수민족의 이탈문제로 확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내외적 문제에 직면하여 새롭게 중국을 재무장시킬 수 있는 논리로써 손문에 의해 주창된 ‘중화민족’론이 다시 이론적으로 재무장되어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은 최근 신의 배라는 이름의 유인우주선 ‘신주神舟’발사에 성공하였다(2003년 10월 15일). 중국언론들은 우주선 발사 상황을 대대적으로 보도하고 있는 가운데 우주를 향한 중국인들의 오랜 꿈이 이뤄졌으며, 이는 수천년간 지속된 ‘중화민족’의 위대한 승리라고 하면서 축제 분위기를 고조시키고 있다. 게다가 우주비행사인 양리위(楊利偉, 1965-)는 우주상공에서 “홍콩과 마카오 대만 동포여러분에게 안부를 전합니다”라고 하여 ‘중화민족’으로서의 일체성을 고무시키고 있다. 요녕성출신으로 한 번도 홍콩을 방문한 적이 없다고 하는 그가 자연스런 ‘중화’의식의 발현으로서 이 말을 한 것이라고 보기보다는 중국정부의 치밀한 사전계획아래서 이루어졌다고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중국의 새로운 영웅으로 부상한 양리위가 우주에서 돌아오자마자 홍콩을 방문해 대대적인 환영을 받은 것 역시 중국 정부의 계산 하에 진행되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중화민족’론이 ‘대한족주의’를 바탕으로 한 기타 소수민족동화정책의 일환으로 제창된 정치적 공동체라고 하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실제로 중국내의 한족들이 ‘중화민족’의 정치성을 피부로 느끼지는 못할 지라도 적어도 중화인민공화국 내에 포섭되어 있는 소수민족의 경우는 다를 것이다. 특히 역사적으로 자신들이 ‘중국’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1950년 무력에 의해 ‘중국’으로 병합된 티베트는 ‘중화민족’론이 갖는 정치성의 가장 큰 피해자가 아닐까 생각한다. 한편, 최근 한국학계의 일각에서는 중화인민공화국이 현재 영토를 중국사의 공간적 범위로 규정하고 고구려의 역사를 중국사의 일부로 통합시키려는 동북공정 의식의 저변에는 ‘영토순결주의-현재의 영토에서 이민족의 역사적 흔적을 부정하고 지우려는 의식-’ 라고 하는 이른바 ‘국가주권’이 발동하고 있으며, 이에 대응하여 현재 국경의 영토적 통합성 원칙이 아니라 역사적 발생론의 관점에서 볼 때 고구려사는 마땅히 한국사의 일부라고 주장하는 한국학계의 주장을 ‘역사주권’의식이 내포되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여기에서 ‘국가주권’과 ‘역사주권’은 서로의 주장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현재의 완성된 ‘국민국가’를 기점으로 해서 단일한 선상에서 역사를 파악하고 있다는 점에서 결국 인식론적 틀을 같이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담론의 배경에는 현재의 역사관이 국민국가적 관점에서 과거 역사의 다양성을 획일화시키려고 하는 폭력성-예를 들면 고구려 역사가 지닌 문화적 다양성과 복수성을 중국이나 한국 어느 일방에 의해 폭력적으로 획일화시키려고 하는 것-이 내재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국민을 전제로 한 근대국가나 민족주의가 특히 아시아에서는 단지 100여년의 역사에 지나지 않는 근대의 산물이기 때문에 이를 장기적인 역사 속에서 상대화시켜야 한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 책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19세기 세계적 노동력의 재배치라고 할 수 있는 이민이 국경을 초월한 인적 이동, 분산, 그리고 네트워크의 형성이라는 점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일체화·균일화 방향으로 나아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국과 타국을 명확히 구분하는 국민국가의 형성을 촉발하는 중요한 계기로 작용하게 되었는가 라는 점에 대해서 좀더 신중히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이 문제는 오늘날 세계가 글로벌화 해가는 시대에도 민족국가에 대한 열망이 오히려 더 강해지는 움직임과도 연관지어 생각해 볼 문제인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