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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ㆍ6
제 1 부 〈신(神)을 아는 일〉은 가능한가?ㆍ13 제 2 부 이슈와라-프라탸비갸 카리카ㆍ29 제 1 편 지식(知識)편 갸나-아디카라ㆍ31 제 1 장 서론(序論) (5절)ㆍ33 제 2 장 일견(一見)의 반론 (11절)ㆍ51 제 3 장 일견에 대한 반박 (7절)ㆍ87 제 4 장 〈기억(記憶)의 힘〉 (8절)ㆍ105 제 5 장 〈인식(認識)의 힘〉 (21절)ㆍ127 제 6 장 〈배제(排除)의 힘〉 (11절)ㆍ191 제 7 장 〈유일한 기초(基礎)〉 (14절)ㆍ221 제 8 장 주의 특성(特性) (11절)ㆍ259 제 2 편 행위(行爲)편 크리야-아디카라ㆍ281 제 1 장 〈행위(行爲)의 힘〉 (8절)ㆍ283 제 2 장 〈다양성 안의 단일성〉 (7절)ㆍ299 제 3 장 〈올바른 ‘지식의 수단’〉 (17절)ㆍ313 제 4 장 인과 관계의 본질 (21절)ㆍ357 제 3 편 계시(啓示)편 아가마-아디카라ㆍ403 제 1 장 탓트와(범주) (11절)ㆍ405 제 2 장 주체의 본질 (20절)ㆍ429 제 4 편 요약(要約)편 탓트와-상그라하-아디카라ㆍ471 제 1 장 요약(要約) (18절)ㆍ473 나가며ㆍ5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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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집필은 『돌과 즈? 이야기』에서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다루던 중 〈기억(記憶)〉이란 주제를 다루면서 시작되었다.
꿈의 어떤 예시(豫示)에도 불구하고 대수롭잖게 여기다가 다시 “꿈의 잔”을 듣고서야 그 의미를 깨닫고 급격하게 방향을 틀었다. 주의(注意)가 다른 곳을 향해 있었던 것 같다. 주(主)만 바라보아야…… 결과적으로 『돌과 즈? 이야기』와 이 책의 출판 순서도 바뀌었다. 『이슈와라-프라탸비갸 카리카』는 웃팔라데바의 저작으로, 프라탸비갸 학파의 시조인 소마난다의 쉬바-드리슈티와 더불어 아주 중요한 경전이다. 유명한 〈프라탸비갸(재-인식) 학파〉라는 명칭은 바로 이 책의 제목으로부터라고 알려져 있다. 이슈와라-프라탸비갸 카리카(IPK)의 주석으로는 저자 자신이 쓴 것은 두 가지로, 짧은 것은 카리카와 동시에 쓴 이 책에 소개되는 브릿티(v?tti)이고, 아주 긴 것(8,000 절)은 나중에 쓴 비브리티(viv?ti 혹은 tika)라고 하는데 상실되었다고 하며, 최근에 그 일부(I,3:6 - 5:3)를 발견했다고 한다. 그 후 아비나바굽타가 쓴 이슈와라-프라탸비갸 비마르쉬니(IPV)와 〈이슈와라-프라탸비갸-비브리티-비마르쉬니(IPVV)〉가 있다. (IPV는 필자가 다음에 그럭저럭 다루겠지만, IPVV는 이후 누군가 다루어 주기를 간절히 바란다.) 이 책을 집필하면서 참고한 것은 다음과 같다. 1. The ??varapratyabhijn?k?rik? of Utpaladeva with the author’s v?tti- critical edition & annotated translation Raffaele Torella 지음 2, Pratyabhijna Karika of Utpaladeva R. K. Kaw 지음 (pdf 파일) 3. The Ubiquitous Siva vol I, II - 소마난다의 쉬바-드리슈티 John Nemec 지음 그리고 크세마라자의 『프라탸비갸 흐리다얌』은 아마도 이 책 등의 〈요약의 요약〉일 것이다. 필자로서는 결코 잊지 못할, 성경의 〈신(여호와 하나님) 인식 경험〉에 대한 장면……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모세가 이르되 “주의 영광을 내게 보이소서.”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내 모든 선한 것을 네 앞으로 지나게 하고 여호와의 이름을 네 앞에 선포하리라.” 또 이르시되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또 이르시기를 “보라 내 곁에 한 장소가 있으니 너는 그 반석(磐石) 위에 서라.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磐石)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질문(요구)은 하나로 간단한데 신의 대답(설명)은 여럿으로 간단하지 않다. 여기에 우리의 신 인식의 핵심이 있는 것 같다. 약간의 푸념(넋두리)을 하자. ‘주의 영광’이라는 그 ‘얼굴’을 그냥 보여주면 될 일일 것 같은데…… (아마도 이것이 우리 대부분의 견해 내지 입장일 것이다.) 또 신은 모세의 말귀도 잘 알아듣지 못하는 듯, 이미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여호와라는 이름’을 선포하겠다고 하고…… 더구나 ‘내 얼굴을 보고 살 자가 없다’며 겁이나 주고……. 이것을 어떻게 읽어야 하나? 어떤 의미로 이해할 것인가? 몇 마디 말로, 간단히 설명될 일은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웃팔라데바도 카리카(수트라)에다 브릿티, 비브리티로 긴긴 말을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위의 성경에서 신이 허여(許與, 허락)하는 몇 가지 힌트를 얻는 것에 일단 만족하자. 신은 우선 ‘신(神) 곁(가까운 데)의 한 장소(場所, 곳)’를 가리킨다. 이 장소는 물론, 〈물리적인 장소〉로만 볼 필요는 없다. 이 장소는 곧 ‘반석(磐石)’으로, 반석에 대한 의미는 성경에서는 아주 뚜렷하다. 먼저 아주 잘 아는 구절, 예수가 했다는 말, “너는 베드로(‘반석’)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그리고 유명한 찬송과 그 설명, “만세 반석 열리니 내가 들어갑니다.” “이는 신령한 반석으로부터 마셨으매 그 반석은 곧 그리스도(구원자)시라.” 신 곁의 한 장소, 신 가까이에 있는 반석 같은 존재 혹은 무엇…… 성경은 말한다. “그 위에 서라.” 필자는 말한다. “이 이슈와라-프라탸비갸 반석 위에 서라.” 그 다음은 은혜다. 순전히 신의 은총이다. “보라 내 곁에 한 장소가 있으니 너는 그 반석(磐石) 위에 서라. 내 영광이 지나갈 때에 내가 너를 반석(磐石)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무슨 말이 더 필요한가! (필자는 그저 눈시울을 붉히며, 반복하고 반복할 뿐이다.) “내가 너를 반석(磐石)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 주의 은혜가, 은총이 있다면, 우리는 이 〈신(神) 인식(認識)〉경(經)의 어떤 틈에 두어질 것이고, 또 주의 (은혜의) 손이 우리를 감쌀(덮을) 것이다. 그리고 손을 거두리니 ‘주의 얼굴을 보는’ 아누파야는 아니라도 ‘주의 등을 본다’는 샥토파야……. (아누파야, 샥토파야 등은 이미 여러 책에서 다루었고, 더 다룬다.) “필자는 말한다. ‘이 이슈와라-프라탸비갸 반석 위에 서라.’”에 대해서 한마디. 사실, ‘주의 영광’을 ‘쉐키나’나 ‘빛’으로, ‘주의 이름과 얼굴’을 ‘본질’, ‘본성’ 등으로 풀고 몇 마디 주석을 해봐야 달라지는 것은 없(을 것이)다. 겨우 소위 〈우리의 지식〉 몇 가지가 더 늘어날 뿐이다. (이런 것이 〈기독교 신학의 상황〉이다.) 이슈와라-프라탸비갸는 바로 이 내 안에서 시작한다. 바로 이 ‘내 안의 신성을 찾는 길’이다. 또 빠른 길이다. 그리고 누구나 ‘기억’을 알고 또 사용하고 있다. 이 책은 바로 이 ‘기억’에서 시작한다. (아주 쉽다.) 그것이 필자가 “이 이슈와라-프라탸비갸 반석 위에 서라.”는 이유다. --- 「들어가며」 중에서 제 1 장 요약(要約) (18절) 쉬바에게 절하노니 그는 헌신자들의 자아를 현현하누나 〈무수한 ‘지식의 수단과 대상’을 지닌〉 하나로 자아는 본질에서 지고의 주와 동일하다. 이것은 자기-경험, 이성(합리적 이유), 아가마로 증명된다. 이제 아가마의 내용의 요약(要約)을 열여덟 절로 구성되는 마지막 장에서 다룬다. 〈 1 〉 〈모든 창조물의 바로 그 “나”〉는 마헤슈와라로, 하나이고, 그의 형상은 만유(萬有) 곧 전체이며, 〈나누어지지 않은 의식 “나-이것(아함-이담)”〉으로 가득 차 있다. ¹ 〈‘나눠지지 않은, 지각하는 주체’와 또 ‘나눠지지 않은, 지각할 수 있는 대상’과 또 ‘그 둘의 융합’을 맛보는 일(차맛카라)로 가득하고〉, ² 〈우선 추구해야 할 ‘네 번째 상태’에서는,³ 모든 살아 있는 존재에 공통인 자아(나)이고, 그의 형태는 모든 것(전체)인 자(“하나”님)〉는 마헤슈와라이다. 이 경문을 판데이는 이렇게 번역한다. “〈하나인(하나님인) 지고의 주〉 홀로 ‘살아 있는 모든 존재’의 바로 그 자아(‘나’)이다. 그는 ‘나는 이 우주 전체다.’라는 끊임없는 의식으로 가득하다.” ¹ 이 번역은 카리카 본문의 가장 직접적이고도 일반적인 의미를 나타낸다. 판데이의 번역은 깔끔하고, 판디트의 번역도 좋다. 브릿티의 더 복잡한 표현은 아함-이담이라는 두 용어를 우선은 분리하여 그다음은 함께 고려하는 것 등 때문이다. ² 아비나바굽타가 설명하듯이, 우리는 여기에서 〈‘다른 주체들과 구별되지 않는 것’으로 ‘지각하는 주체’에 대한 성찰적인 자각〉을, 즉 〈명백한 분절 아래에 있는 ‘주체의 근본적 단일성’에 대한 성찰적 자각〉을 갖는다. 똑같은 것이 대상에도 적용되고, 마지막으로 ‘주체와 대상의 궁극적인 비(非)-타자성(멜라나)에 대한 자각’을 본다. (이 브릿티 부분은 참맛을 찾아에서 라스토기의 해석도 참조하라. 토렐라는 차맛카라를 긴 구절의 세 가지 요소에 각각 연결하고, 라스토기는 각각을 아함, 이담, 아칸다마르샤에 대한 설명으로 보나,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³ 이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얼룩(盲目)이 용해되기 때문이다.? 〈 2 〉 거기서(타트라), 〈(주에 의해) 자유롭게 창조된 “이것”의 영역에 포함된 마음 등의 실체〉는, 그가 〈허구의 나(아함카라)〉를 ‘지각하는 주체’인 것으로 여기게 한다. 이 우주가 ‘지고의 주의 자유로운 확장에 의해’ 구성되는 것으로 나타나며,¹ 〈성찰적 자각 “이것”의 영역에서 지각의 대상으로 - 마음, 호흡, 공(空) - 창조된 실재들〉, 정확히 이 실재들은, 〈알 수 있는 것(대상)〉의 한 부분을 나타내는데, 〈허구의 나〉로 여겨지는 원인이고, 이것이 강력하여² 〈제한된 지각하는 주체〉로 변형된다. ¹ 본문의 모호함은 카리카의 타트라에 대한 이중 해석(탄트라) 때문인 것 같다(토렐라도 일부러 모호하게 번역했다고 한다). 아비나바굽타는 그의 두 주석에서 마헤슈와라를 언급하며 타트라의 동시적인 ‘이중 기능’을 따른다. “마헤슈와라는 ‘자아(나)’이고, 〈‘이것’ 부분〉은 〈그 자신으로 구성된 기층(基層) 위에 그에 의해 창조된 것〉이다” (첫 번째 경우의 타트라는 사티가 이해되는 절대 처소격이고, 두 번째는 스와스리슈타에 따른 처소격이다.) ² 〈이 현상〉을 이렇게 설명할 수도 있다. 우리가 한 존재로 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 거기에는, 인간의 내면(內面)에는, “의식(意識)이 있다. 아니면 〈텅 빈 것〉, 아트마만이 거기에 있다. 본시 내면에 이 〈나〉는 없다. 그런데 의식(의 주변)에 지식, 경험, 기억이 축적된다. 그것이 마음이다. 그것은 꼭 필요한 것으로, 그것 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 그러나 그때 거기에 어떤 부수적 현상이 일어난다. 세상을 바라볼 때는 〈그 기억을 통해서〉 보고, 새로운 경험을 할 때는 〈그 지식을 통해서〉, 〈그 경험을 통해서〉 나름대로 해석한다.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 끊임없이 그렇게 하면 그것과 동일시된다. 그러므로 〈의식이 기억 등과 동일시된 것〉이 에고이고, 우리가 흔히 〈나〉라고 하는 것이다.” 〈 3 〉 〈많은 것으로 여겨지는 개별적 주체들〉은 그들의 진정한 본성을 “인식하지 못한” 즉 〈재(再)-인식이 없는〉 결과이다. 그들 안에는 행위와 행복이 창조되는데, 즉 즐거움과 고통이 그 특징인 열매다.¹ 그것은 정확히 〈‘그의 본질이 모든 것인 그것’에 대해 “비(非)-재인식”이라고 부르는, 제한되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마음, 호흡 등과 같은 ‘다중이고 파편적인 실체’에 기인한 ‘제한된 주체성’에 대한 자각〉은² 〈‘지고의 주체성에 대한 완전한 지식’의 부재〉라고 부른다. 개별적 자아는 많다. 아는 주체로 나타나는 그들 안에서, 마헤슈와라는 자신의 행복과 활동을 창조하며, 그것은 〈유일의 진정한 행위성〉 안에 내재한 그들 자신이다. 이것은 정확하게 즐거움이라고 부르는 열매인데, 그것이 (신성의) 지복의 입자로 구성되기 때문이고, 또 고통인데, 그것이 (신성의) 활동의 극미한 조각이기 때문이다. 활동이 고통이라는 사실은 나중에 설명될 것이다. ¹ 그러므로 〈주가 여러 제한된 영혼에게 떨어뜨린 결실의 능력〉은 그가 창조한 행복과 활동의 능력을 반영한 것이고, 반면에 그에게는 내재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들은 칼피타(만들어진 것)이다. 행복과 활동은 갸나와 크리야 샥티, 프라카샤와 비마르샤와 다른 것이 아니다. ² 아비나바굽타는 ‘긴 뱀(고나사)’의 예로 이것을 설명한다. 그것의 몸은 단일한 생명(지바트바)으로 편재(遍在)하지만, 그것이 조각날 때, 동일한 뱀의 개별 부분에 활기를 주는 〈여러 구별되는 부분의 생명력〉으로 나눠질 수 있고, 또 다시 하나가 될 수도 있다. [우리가 현재 볼 수 있는 생물로는 플라나리아가 - 두 조각이 나도, ‘조각난 부분’이 다시 ‘완전한 성체(成體)’가 된다는 점에서 - 고나사와 비슷할 것이다. 어릴 적 배운 ‘불가사리’도 생각난다.] 잘 아는 대로, ‘공기(대기)’와 ‘(바다)물’은 그릇(容器)에 나누어(?) 담을 수도 있다. 〈 4 〉 제한된 주체에서 삿트와, 라자스와 타마스는, 주 안에서 지식, 행위와 세 번째로, 마야에¹ 상응한다. - 그에게는 사물이 그 자신의 몸을 나타낸다. 주의 지식과 행위는 마야와 함께, 제한된 주체의 삿트와, 라자스와 타마스가 된다. ¹ 마야의 힘은 사다-쉬바-이슈와라 국면에서 의식에 이단타의 모습을 결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크리야 샥티의 확장이다. 즉 실제로 아비나바굽타의 말에 따르면, 삼하라의 우세함 대신 - 스리슈티는 갸나 샥티에서 우세함 - 〈순야타(空性) 혹은 니셰다가 우세한 것〉은, 즉 〈주체와 대상의 상호 구분(결정)〉은 크리야 샥티 그 자체이다. 이 마야의 힘은 쉬바에게 속하지만, 위 카리카의 공식이 가리키듯이, 그것은 분화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지식과 행위의 힘〉과 똑같은 국면에 있지 않다. 이 절은 여러 책에서 다루고 있다. 먼저 프라탸비갸 흐리다얌 5절에서 “쉬바의 갸나, 크리야, 또 〈제 3의 힘〉 마야는, 파슈 즉 지바에서는 〈삿트와, 라자스, 타마스로〉 - 쉬바 자신의 수족(手足)과 같은 대상적 실재로서 - 나타난다. 〈절대 자유이면서, 갸나, 크리야, 마야의 힘을 갖는 의식〉은 제한(制限)이 과잉되어, 〈그 성격이 삿트와, 라자스, 타마스인 파슈 즉 칫타(마음)〉로 나타난다.” - 스판다 카리카 1:19에서 “주(主)의 경우에서 [그의 사지(四肢)인 〈대상적 실재〉에 대해서] 〈갸나〉 〈크리야〉 〈마야〉인 그들 힘은, 제한된 개아의 경우에서는 삿트와, 라자스, 타마스로 나타난다.” - 파라 트리쉬카에서(388쪽) “〈그와 동일한 대상들과 관련하여 주의 지식과 행위로 인정되는 무엇〉, 〈제 3의 것과 함께 똑같은 것〉, ‘마야’는 제한된 주체의 세 가지 구나다. 즉 삿트와, 라자스, 타마스.” 〈 5 〉 분화의 상태 때문에, 기능(능력)과 산물로 변형된 이런 성질(구나)은 〈‘그것들의 소유자인 어떤 주체’에게 내재한 힘〉으로 여길 수 없다.¹ 삿트와, 라자스와 타마스는 (주체로부터) 별개로 나타나기 때문에, 힘이라는 용어는 〈‘힘(샥티)’과 ‘힘의 소유자(샥티만, 쉬바)’ 사이에 구별이 없다는 점에서〉 그들에게 적용되지 않을 수 있다. 실제로 모든 것은 힘(들)의 확장이다.² ...... --- p.473~482 〈 12 〉 〈모든 것을 자신의 본질로 갖고 “이 모든 다양한 전개는 내 것이다.”고 그렇게 아는 자〉는 정신적 구성물의 흐름 속에서도 마헤샤의 상태를 얻는다.¹또한 개별적 주체는 - 그는 정확히 주의 힘에서 파생된 정신적 구성물을 계속해서 산출하더라도 - 그 자신의 본성을 주라고 완전히 알아채게 되고 - “삼사라(윤회계)의 이 다양한 전개는 내 것이다.” - 이 주체 역시, 〈어떤 분화도 없이 우주로 스며들고 또 모든 정신적 구성물을 순수한 성찰적 자각으로 변형하는데〉, 마헤슈와라의 상태를 얻는다. ¹ 앞 절에서는 비칼파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니르비칼파(중심, 삼빗)에 고정하는 것으로 비칼파를 억압시켰으나(〈생각의 용해〉), (- 이것은 샥토파야 수행이다.) 여기서는 반대로, 의식의 전체성(全體性)의 영역에서 그것을 포함하(고, 변형하)는 것(방법)을 가르친다. (- 이것은 샴바보파야 수행이다.) 이 카리카(수트라)는 프라탸비갸 흐리다얌 12절 〈샴바보파야 수행〉 부분의 주석에서 다루었다. “‘〈이 모든 현현의 영광〉은 〈나의 것〉이다.’라고 알고, 〈우주가 그의 참나인 것을 깨달은 사람〉은, 비칼파 즉 마음 혹은 생각이 그 놀이를 할 때라도, 마헤샤타를 소유한다.” 마헤샤타는 마헤샤의 추상명사이고, 마헤샤는 “위대한 주”로 쉬바를 말한다. [“쉬바성(性)”] --- p.497~498 〈(심리적 혹은 정신적) 공간 지각력〉…… 어떤 조각가가 〈아주 투명한 재질의 두꺼운 판(板)〉에다 ‘사람의 얼굴’을 음각(陰刻)했다고 하자. 그리고 우리가, 그 ‘조각하지 않는 반대편’에서 그것을 본다면, 〈(그 음각한 부분이 만드는) 텅 빈 공간이 만드는, 양각(陽刻) 형태의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있을 것이다. 텅 빈 공간이 만드는 그 얼굴은 〈투명한 재질의 재료〉와 〈한 조각가의 피나는 노력〉으로 우리에게 드러나는 것이다. 아마도 〈신의 얼굴〉과 〈그것을 드러내는 일〉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이른바 〈내 내면의 신성을 느끼는 일〉은 그런 〈‘심리적 혹은 정신적 공간(텅 빈 곳)’을 지각하는 힘(능력)〉일 것이다. 아마도 저 〈염화시중(拈花示衆)의 일화(逸話))〉도 꽃이 아닌 - 즉 별과 구름 등 대상이 아닌, 그런 것을 담는 - 〈텅 빈 공간〉을 보라는 것이었으리라. 비갸나 바이라바는 말한다. 욕망(혹은 생각)이 일어나기 전에 어떻게 “내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욕망 혹은 생각이 일어나기 전〉의 〈내 내면의 그 심리적 혹은 정신적 공간〉 말이다. 오래전에 ‘그랑 블루’라는 프랑스 영화가 있었다. (중략) 영화에서, 주인공(자크)을 사랑하는 여자주인공은 묻는다. “잠수할 때 어떤 기분이 들어요?” “추락하지 않고 〈미끄러져 떨어지는 느낌〉이야. 가장 힘든 건, 바다 맨 밑에 있을 때야. 왜냐하면 다시 올라와야 할 그 이유를 찾아야 하거든. 항상 그걸 찾는 게 너무나 어려워.” 〈미끄러져 떨어지는(하강하는) 느낌〉이든, 아니면 “이끌리어 올라가는(상승하는) 느낌”이든, “옆으로 한(限)없이 넓어지는 느낌이든” 그것은 똑같다. 〈‘그런 느낌’의 서툰(?) 표현〉은 신약성서에서도 보인다. 소위 〈변화(變化) 산〉 혹은 〈변모(變貌)의 사건〉이라는 ‘환상을 본 사건’ 말이다. “두 사람(모세와 엘리야)이 떠날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여짜오되 ‘주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草幕)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하되 자기의 하는 말을 자기도 알지 못하더라.” 영화 그랑 블루로 돌아가, 마지막 장면에서 여자주인공은, 바다 밑으로 가서 보아야 할 게 있다는 자크에게 울부짖는다. “가서 무엇을 본다는 거예요? 그곳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밑은 어둡고 차가울 뿐이에요. 당신 홀로 있을 뿐이에요. (그러나) 나는 여기 있다고요. 나는 이 현실(現實) 속에 이렇게 있잖아요.” 필자는 앞의 ‘〈신을 아는 일〉은 가능한가?’에서 어릴 적 부른 찬송가를 옮겼다. 자 곧 가거라 이제 곧 가거라 저 큰 은혜 바다 향해 자 곧 네 노를 저어 깊은 데로, 가라 망망한 바다로 〈노를 젓는 일〉은 ‘깊은 데’로, ‘망망한 바다’로 가는 일인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 밑 모르는 깊은 바다 속”을 경험하는 일은 그 속에 뛰어드는 것밖에 다른 길은 없다. 그리고 “그 밑”까지 이르렀을 때 지금까지 나를 이끌어주었던 밧줄(즉 ‘어떤 생명줄’)조차도 이제는 놓아버려야 한다. 이것이 이 영화의 백미(白眉)다! 저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進一步)” 말이다. 거기에는 돌고래라는 ‘나(주인공)의 가족’이 나를 반기며 이끈다. (마치 그레첸이 파우스트를 이끌고, 베아트리체가 단테를 이끌 듯이 말이다.) 그때 거기서 우리는 진실로 이렇게 느낀다. (만약 말로 대답 혹은 표현한다면 말이다.) “‘가서 무엇을 본다는 거예요?’ 그래, 이곳에는 (나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이 모든 것이 ‘나’이다! 이 밑은 어둡거나 차가운 느낌조차도 없다. 그냥 나 홀로 있을 뿐이다!- 이 ‘우주적인 나’ 외에 누가 더 있겠는가! (그러니) 나는 여기 있다! 나 곧 실재(實在)는 ‘이렇게’ 있다!” 〈내 안의 신성을 되찾는 빠른 길〉이라는 부제를 붙여가며, 〈신(神)-인식(認識)〉경(經)을 다듬었다. 그러나 이 책을 (한 번) 읽은 어떤 독자는 어쩌면 어리벙벙할지도 모른다. 전에도(쉬바 수트라에서) 말했듯이 이런 책은 그냥 〈한번 읽는 것〉으로 알 수 없다. (필자 역시 이 책을 다듬으며, 읽고 또 읽었다.) 앞에서도 신신당부했고 또 다시 말한다. 찬찬히 읽고 또 읽어라. 이해(理解)할 때까지. --- 「나가며」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