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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온한 열대
인간 이전과 이후의 인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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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들어가며: 쓰나미 이후 11

1부 타자

1장 인류학/민족지의 현재
1 말레이타섬으로 29⊸2 포우바이타 마을 33⊸3 섬들 41⊸4 문화를 쓴다: 인류학/민족지 비평의 전개 49⊸5 인류학/민족지에 대한 재고 52⊸6 포우이아시섬 55⊸7 디메 63⊸8 민족지를 둘러싼 실험: 텍스트성의 문제 67⊸9 바하이 73

2장 부상하는 자연
1 쓰나미의 밤 81⊸2 옛 땅으로 돌아간다 85⊸3 존재론적 전회: ‘단일한 자연/복수의 문화’의 문제 91⊸4 세계청년의날 97⊸5 진짜 토지 소유자 102⊸6 밤이 내린 마을에서 108⊸7 광의의 자연: 비베이루스 지 카스트루의 다자연주의 118⊸8 수많은 존재론: 데스콜라의 ‘자연의 인류학’ 125⊸9 코이나 135

2부 역사

3장 역사에 대항하는 섬들
1 살육의 밤 141⊸2 수수께끼로서의 역사 148⊸3 교환론과 그 너머 152⊸4 섬들의 역사 쓰기: 말리노프스키에서 역사인류학으로 157⊸5 ‘역사 없는 섬들’과 ‘역사 속의 섬들’ 사이에서: 살린스의 역사인류학 163⊸6 식민지 역사 속의 섬들: 살린스에서 토머스까지 170⊸7 아시 섬들의 형성사 176⊸8 전투의 시대 180⊸9 법의 도래 186

4장 이미지로서의 섬들
1 ‘카스톰 시대’의 섬들 193⊸2 전투와 전사 201⊸3 전투와 이주 205⊸4 전투 장치로서의 섬들 210⊸5 역사에서 이미지로: 스트래선의 역사인류학 비판 214⊸6 ‘새로운’ 섬들 220⊸7 ‘말할 수 없는’ 역사 226⊸8 잘 잊는 경관: 멜라네시아의 ‘역사’와 ‘자연’ 231⊸9 쓰러진 나무 239

3부 자연

5장 살아 있는 바위
1 장례길 247⊸2 성장하고 죽는 바위 251⊸3 자연과 문화를 넘어서: 현대 인류학의 전개 257⊸4 살아 있는 바위 264⊸5 에리포우섬의 사마니 269⊸6 섬을 만드는 사람들 276⊸7 ‘자연-문화’를 기술하다: 라투르 이후의 전개 283⊸8 바위의 죽음 293⊸9 멜라네시아에서의 ‘자연-문화’: 교환론의 한계 301

6장 가라앉는 섬들
1 가라앉는 부두와 섬들 311⊸2 인류세를 살아가는 아시 사람들 315⊸3 ‘살아남음’의 민족지 321⊸4 ‘바다 위의 삶’의 쇠망 325⊸5 무너지는 바위들 332⊸6 석출되는 자연: 와그너에서 ‘자연의 인류학’으로 338⊸7 ‘깊은 곳’과 ‘땅속’ 346⊸8 이미지로서의 자연: 스트래선의 전개 352⊸9 민족지의 자연: 존재론적 전회 이후의 인류학적 사고 359⊸10 베어진 나무 366

나가며 374
후기 380
친애하는 한국 독자들에게 385
옮긴이의 말: 바다 위의 인류학, 자연 너머의 심연을 마주하다 392
초출 일람 401
미주 403
찾아보기 434

저자 소개 3

저사토미 류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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里見龍樹

도쿄대에서 사회학과 사회사상사를 공부하다 2007년, 문화인류학으로 전향해 2014년, 도쿄대 문화인류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와세다대학교 인간과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솔로몬제도 말레이타섬 인근에 산호석으로 ‘인공섬’을 짓고 사는 ‘바다의 민족’ 아시들에 대한 장기 현지조사를 바탕으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탐구해 왔으며, 기후변화, 산호초 보전, 열대림 벌채 등에 대한 환경인류학적 연구를 진행 중이다. 저서로는 『‘바다 위의 삶’의 민족지: 솔로몬제도 말레이타섬 북부에서 사회적 동태와 자연환경』(2017), 『입문 강의: 현대인류학의 모험』(2024) 등이 있으며,
도쿄대에서 사회학과 사회사상사를 공부하다 2007년, 문화인류학으로 전향해 2014년, 도쿄대 문화인류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와세다대학교 인간과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솔로몬제도 말레이타섬 인근에 산호석으로 ‘인공섬’을 짓고 사는 ‘바다의 민족’ 아시들에 대한 장기 현지조사를 바탕으로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탐구해 왔으며, 기후변화, 산호초 보전, 열대림 벌채 등에 대한 환경인류학적 연구를 진행 중이다. 저서로는 『‘바다 위의 삶’의 민족지: 솔로몬제도 말레이타섬 북부에서 사회적 동태와 자연환경』(2017), 『입문 강의: 현대인류학의 모험』(2024) 등이 있으며, 『부분적인 연결들』, 『증여의 젠더』, 『인디오의 변덕스러운 혼』 등 존재론적 전회의 주요 저작들을 공역했다. 박사논문으로 2016년에 아시아?태평양연구상을, 2018년에 시부사와상과 일본오세아니아학회상을 수상했다. 『불온한 열대』는 이 같은 그간의 연구를 집약한 결과물로 2023년, 기노쿠니야 인문대상 베스트에 올랐다.
서울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선임 연구원으로 있다. 서울대학교에서 인류학 박사 학위를 받고 규슈대학교 한국연구센터 방문 연구원, 히토쓰바시대학교 객원 연구원을 역임했다. 지은 책으로 『식민지의 기억과 타자의 정치학』(2016)이 있으며, 『지구화 시대의 문화 정체성』(조너선 프리드먼, 공역), 『흐름으로 읽는 프랑스 현대 사상사』(오카모토 유이치로), 『숲은 생각한다』(에두아르도 콘), 『부분적인 연결들』(메릴린 스트래선)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현재 서울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선임 연구원으로 있다.

차은정의 다른 상품

교육열과 꿈, 소년을 주제로 서울대학교에서 「휩쓸리며 꿈꾸는 소년들: 지방 일반계 고등학교에 대한 인류학적 연구」라는 논문으로 인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국 사회에서 사람들이 ‘두 눈을 크게 뜨고 꾸는 꿈’과 그것을 둘러싼 역동에 관심이 있다. 최근에는 반사회적인 힘이 세계에 어떻게 출현하는지에 흥미를 두고 소년들이 구성하는 우리를 증언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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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6년 09월 28일
쪽수, 무게, 크기
440쪽 | 638g | 138*200*27mm
ISBN13
9788964375228

책 속으로

말레이타섬에 와보니 뜻밖에도 만나는 사람마다 하나같이 일본을 강타한 쓰나미 이야기를 꺼냈다. 일본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지진 당일 바다 건너 솔로몬제도에서도 쓰나미 경보가 발령되어 섬과 연안에 사는 아시들이 서둘러 고지대로 대피해야 했다. … 사람들의 말에 따르면, 일본의 지진 소식은 발생 직후부터 라디오 등을 통해 말레이타섬에도 전해졌다. 일본 국토의 대부분이 쓰나미 피해를 입었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날 보더니 이구동성으로 뉴스를 듣고 정말 걱정했다면서 내가 얼마나 피해를 보았는지 묻고 또 물었다. 사람들은 어떤 의미에서 나를 쓰나미가 휩쓴 일본에서 간신히 탈출해 온 피난민으로 여기는 듯했다. 일본과 말레이타섬을 동시에 덮친 ‘쓰나미’라는 사건으로 인해 아시의 ‘바다 위의 삶’은 뿌리째 흔들리기 시작했다.
--- pp.12-13

나는 내 연구가 극히 한정된 전문 독자들에게만 전달되는 게 늘 불만이었다. 인류학을 뒤늦게 공부하기 시작했고 2008년에 말레이타섬에서 첫 현장연구를 시작한 후에도 오랫동안 나는 반쯤 아마추어 혹은 외부자로서 인류학에 임해 왔다. 그런 내가 전문 독자에게만 전달되는 민족지적 연구에 만족할 순 없었다. 인류학을 전공하지 않은 독자들은 내가 엮어 낸 말레이타섬에 관한 이야기를 현재의 자신과 무관한 것으로 생각하고 지나칠 것이다. 그러나 거의 아무도 읽지 않는 민족지를 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래서 이 책에서는 말레이타섬이라는 ‘불온한 열대’에 대한 ‘낯선’ 이야기가 뜻밖의 ‘낯익은’ 이야기로 독자에게 다가갈 가능성을 탐색하고자 했다.
--- p.24

원래 사회학을 전공한 내가 학문적 교착상태에서 벗어나고자 인류학을 처음부터 다시 배워 보겠다고 생각한 것은 20대가 끝나 갈 무렵이었다. ‘뭔가 조금이라도 사유하려면, 지금까지의 나와는 전혀 다른 삶을 살며, 지금까지의 내가 전혀 몰랐던 사람들을 만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나는 무엇 하나 제대로 사유하지 못하고 끝날 것이다.’ 그 무렵의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 p.32

말리노프스키 이후의 현장연구와 민족지 양식을 성찰적으로 문제시했던 이제까지의 흐름을 고려한다면, 인류학이라는 ‘상점’은 이제 예전과 같은 방식의 ‘정상 영업’은 불가능한 듯했다. … 인류학의 연구 대상은 확실히 변화했다. 이런 상황에서 말레이타섬의 아시와 아시의 섬들에 관한 연구는 자칫 잘못하면 ‘반동적’이라는 질타를 받을 수도 있었다. 매일 아침 포우바이타 마을의 부두 위를 걸으며 바다에 흩어져 있는 섬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한편으로 그런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
--- p.55

나는 인문학에서는 반드시 쓸 수 있는 글만 쓰는 건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가능한지가 불확실한 서술을 시도하는 것이야말로 의미가 있다. … 이 책이 지향한 것은 바로 그런 ‘불온함’이었으며 실제로 일관되게 ‘불온함을 어떻게 기술할 것인가?’라는 불안한 모색의 과정을 밟아 간다.
--- p.387

(73) 열대의 ‘이국적 타문화’에 대한 ‘옛날식’ 인류학은 정말로 끝난 것인가? 오히려 인류학의 더 큰 변화 속에서 ‘이국적 타문화’와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근대성을 동등하게 바라볼 수 있는 새로운 인류학적 관점이 생성된 것은 아닐까? … 20세기 인류학을 지탱해 온 ‘타문화’와 연관된 이국주의는, 실은 반드시 타자를 타문화로 객체화하고 고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질적인 타자를 이질적인 채로, 그 비결정적이고 불연속적인 모습 그대로 서술하기 위한 기법이었던 것은 아닐까?
--- p.73

내가 인류학을 전공하지 않은 일반인에게 말레이타섬에서의 현장연구 경험을 이야기해 보면, 이따금 “현지인의 삶에 무작정 끼어드는 것은 좀 폭력적이지 않나요?” 같은 질문을 받곤 한다. 그러나 ‘우리/그들’의 경계 설정에 근거한 이런 윤리적 질문은 말레이타 사회를 외부 세계와 ‘단절된’ 전통 사회인 것처럼 상상한다는 점에서 일면적이다. 그와 정반대로 늘 이주를 반복해 온 아시들은 스스로를 ‘외지인’으로 여기고, 나아가 (나 같은) 타지에서 온 이주자를 언제나 같은 ‘외지인’으로서 포용해 왔다면 어떨까? 이 경우 타자성이나 현장연구와 민족지를 둘러싼 지금까지의 “인식론적 고뇌”는 더 이상 성립하지 않을 것이다. 조금 덧붙이자면, 현장연구와 민족지라는 실천은 그 근본에서 자기와 타자가 각기 불분명해짐으로써 가능해진다. 아마도 이는 많은 인류학자가 언어화하지는 않았더라도 분명 스스로 체험해 온 것이리라.
--- pp.131-132

내게는 아시 사람들이 건설하고 거주해 온 섬들, ‘인공적’이면서도 ‘자연적’인 저 섬들이야말로 ‘자연/문화’라는 근대적 이분법을 초월한 ‘광의의 자연’을 단적으로 구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아시 사람들은 이 섬들이 ‘살아 있는 바위’로 만들어졌는데, 그 ‘바위가 죽어’ 가며 서서히 바닷속으로 가라앉고 있다고 말한다. 이 이야기가 말해 주듯이 아시의 ‘바다 위의 삶’은 언제나 변화하는 ‘자연’과 얽혀 있기 때문에 이제까지의 인류학이 ‘문화’라든가 ‘사회’라고 불러 온 영역만으로는 결코 논의가 완결될 수 없다. 내게 가장 핵심적인 민족지적 과제는 바로 그런 근대적 ‘인간’과의 상관관계나 ‘자연/문화’의 이분법을 아득히 넘어서는, ‘광의의 자연’으로서의 섬들에 대해 사유하고 기록하는 것이다.
--- p.133

벤은 아시의 섬들이 살고 죽는 것임을 확실히 밝히고 있다. 벤에 따르면, 섬이 막 만들어졌을 무렵에는 바위가 아직 살아 있지만 머지않아 죽을 수밖에 없고 그로 인해 섬은 가라앉게 된다. ... 섬들이 가라앉는 것은 해수면의 전 지구적인 상승 때문이 아니라 바위가 서서히 죽어 가기 때문이다. ... 아시의 바위는 바닷속에서 언제나 ‘인간 없이’ 자라나고, 섬들은 바위가 죽어 가며, 지구온난화 등의 인위적 영향과 무관하게, 마찬가지로 ‘인간 없이’ 가라앉는다. 그런 의미에서 아시의 섬들과 바위의 생사는 너무나 인간 이전적이면서도 인간 이후적인 현상이다. 그렇다면 바위나 섬들의 이 고유한 삶과 죽음은 아시의 ‘바다 위의 삶’에서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 p.254

어부와 함께 카누를 타고 밤바다에 있을 때, 혹은 말라리아를 옮기는 야행성 모기를 무서워하면서도 어부가 육지로 돌아오기만을 어둠 속에서 기다릴 때, 그리고 돌아온 어부와 모닥불을 둘러싸고 대화를 나눌 때, 나는 확실히 포우바이타 사람들의 ‘바다 위의 삶’이나 이를 가능하게 하는 자연환경과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교감하고 있었다. 말하자면, 이 시기 나의 현장연구는 과거 인류학이 많은 경우 대상으로 삼았던 ‘문화’와 ‘사회’의 수준에 머무르지 않고, 확실히 ‘자연’이라고 부를 만한 물질적이고 실재적인 수준에 접어들고 있었던 것이다.
--- p.116

아시가 살아가는 산호초 환경은 ‘인류세’ 개념으로 표현되는 환경 위기가 절실한 문제로 부상한 가운데 오늘날 국제적으로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열대우림에 필적할 만한 생물 다양성을 가진 산호초는, 한편으로는 지구온난화로 인한 수온 상승이나 해양 산성화로부터 큰 영향을 받는 취약한 생태계로도 알려져 있다. 세계자연기금 보고서에 따르면, 지구온난화와 해양 산성화가 현재 예측되는 속도로 진행될 경우, 2050년까지 지구상의 모든 산호초가 멸종할 것으로 추정된다..... 사실상 지금까지 인문사회과학에서 거의 다뤄지지 않은 산호나 산호초-아시의 ‘살아 있으며 언젠가는 죽을 바위’-는 해러웨이가 “산호초의, 우리와 조금도 닮지 않은, 인간을 초월한 세계 창조”라고 표현했듯이, 그 복잡성과 독자성에서 가히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그 어떤 의인화도 받아들이지 않는 존재다. 산호초는 19세기에 다윈이 경탄해 마지않은 것처럼 생물이 성장과 소멸을 통해 곧바로 해양 지형을 형성하는 독특한 생태계다. 서양의 과학적 분류법에서도 산호는 18세기경까지 식물과 동물 사이를 오갔다. 또한 대부분의 조초산호造礁珊瑚는 무수한 폴립polyp이 모여 탄산칼슘 골격을 형성함으로써 군체를 이루고 있으며, 일부 개체가 죽더라도 군체의 표면과 내부에서 또다시 새로운 개체가 자란다. 또한 산호는 그 안에서 서식하며 광합성을 하는 갈조류와 공생 관계에 있는, 식물과 동물의 경계를 초월한 통생명체holobiont다. 물론 해수온 상승에 의한 백화白化의 정확한 메커니즘이나 높은 수온에 대한 적응 등 현재까지도 불명확한 부분이 많아 산호에 관한 과학적 지식은 확고하다고 말하기 어렵다. 이처럼 산호와 산호초는 근대적인 자연과학의 관점에서 접근한다 해도 여전히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으며, 따라서 확고한 ‘과학적 지식’을 가지고 ‘문화적 신념’을 평가한다는 근대적 가정은 성립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아시의 ‘살아 있는 바위’에 대해 현장연구를 수행하는 인류학자는 ‘과학적 지식/문화적 신념’의 경계가 불분명한 일종의 식별 불능 지대에 발을 들여놓게 되는 것이다.
--- p.266

섬의 건설자재인 바위는 쌓일 때 아귀가 맞는 순간 ‘딸깍’ 하는 건조하고 단단한 뜻밖의 고음을 낸다. 밀물이 들어오는 저녁 바다와 그곳에서 일하는 에리포우섬 사람들을 바라보며 나는 바다 위로 울려 퍼지는 이 딸깍 소리를 음미했다.
--- p.269

그의 첫인상은 지금도 생생하다. 하숙집에서 할 일 없이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커다란 동물 이빨을 꿰어 만든 목걸이를 한 남자가 자우 아저씨를 찾아와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는 돌아갔다. 나는 그의 날렵한 풍채와 목걸이의 아름다움에 강한 인상을 받았다. 그가 돌아가고 난 뒤, 자우 아저씨는 내게 이렇게 말했다. “예로부터 섬 만들기에 특히 뛰어난 남자가 있는 법이지. 예를 들어, 아까 그 남자가 그래.” 그가 바로 사마니였다. 나중에 본인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목걸이는 늪지에서 마주친 악어를 직접 죽여 그 이빨로 만든 것이었다. 그 후 나는 사마니와 벤 등 에리포우섬의 형제들이 포우바이타 지역에서도 걸출한 ‘바다의 민족’으로 알려져 있고, 섬 만들기뿐만 아니라 ‘바다 위에 살기’ 위한 다양한 기술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예를 들어, 이들은 다른 사람들이 쉽게 못 하는 바다거북fonu을 잘 잡는 것으로 유명했다. 포우바이타 지역 사람들은 크리스마스 때 친척들이 모이면 별미인 바다거북 고기를 해먹으려고 종종 사마니 형제에게 주문을 넣곤 한다. 그러면 그들은 며칠 뒤 생포한 바다거북을 가져다준다(실제로 나는 포우바이타 마을 부두에서 사마니 형제로부터 막 건네받은 바다거북을 산 채로 머리에 이고 가는 여자아이를 본 적이 있다). 그러나 주문한 쪽에서는 사마니 형제가 어디서 어떻게 바다거북을 잡는지 짐작조차 못 한다. 사람들은 이 형제의 베일에 싸인 기술에 대해 “사마니 형제는 바다거북을 잡을 수 있는 카스톰을 가지고 있어”라고 표현한다. 그러니까 오늘날 아시가 통상적으로 접촉해서는 안 되는 것으로 여기는 카스톰, 즉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던 시절부터 내려오는 지식에 대해 사마니 형제는 예외적으로 접근 권한을 가진다고 인정된다(그 이유는 나중에 이야기하겠다). 나 또한 사마니가 하레라는 붉은 물고기를 연달아 낚아 올리는 광경을 마법에 홀린 듯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에리포우섬 체류 중 그는 내게 “목에 걸린 생선 가시를 빼내는 주문”도 가르쳐 주었다.
--- p.274

포우이아시섬 바에의 커다란 나무가 쓰러져 묘지를 완전히 덮어 버렸대. 나무는 일요일에 쓰러졌고, 디메는 금요일에 죽었어. 나무가 쓰러졌을 때 나는 ‘디메가 곧 죽겠네’ 생각했어. 디메는 포우이아시섬 바에 안에 있는 뭔가에 손을 대서 죽은 거라고 다들 그래. 그래서 사람들은 쓰러진 나무를 완전히 베어 내려고 바하이를 기다리고 있어. 그리고 마틸다 등은 일요일에 신부님과 포우이아시섬에서 기도foa를 하고 싶다네.
--- p.294

“코이나는 예전에 몇 년 동안 정신이 이상했어. 이렇게 같이 앉아 있다가도 ‘가슴 보여 줘’ 하면 보여 주는 그런 병이었어.” 그리고 그는 아마 내가 일본에 있는 동안 행해진 어떤 치료 의식 같은 것에 관해 이야기했다. 어느 날 [코이나의 아버지] 이로이가 병원에서 코이나를 꺼내와 포우이아시섬으로 데려왔다. 그녀의 병에 포우이아시섬의 무언가가 관련돼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때가 정오가 지난 이맘때였어. 바하이가 바에를 향해 기도한 다음 드라세나 잎사귀hango로 코이나의 머리를 치기 시작했어. 그러자 코이나가 완전히 이상해졌어. 근데 저녁이 되니 깜짝 놀란 것처럼 눈을 번쩍 뜨더니 ‘뭐 좀 먹고 싶어. 그리고 저녁 기도회에 가야겠어’ 이러는 거야. 그녀가 괜찮아진 거지!”
나는 코이나에 관한 이 이야기를 듣고 또다시 동요했다. 그 일요일의 폭풍우가 지나간 후, “우리도 그런 비는 본 적이 없어. 미사 중에 이런 비를 보고 사토미는 어찌 생각할까 싶었어”라고 말해 준 이가 바로 그녀 아닌가. 나는 디메의 죽음을 전후로 보고 듣고 느낀 것들에 대해, 이 사건과 만남에 대해 생각하며 이것을 민족지로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 p.303

부두 위를 걷는다. 발밑의 바위들이 무너져 내리지 않도록 조심스레 발을 내딛는다. 내 앞뒤로는 포우바이타 마을에서 섬으로 돌아가려는 사람들이 걷고 있다. 나는 곧 일본으로 돌아갈 것이다. … 저녁의 밀물은 이미 높아져, 우리가 걷는 부두는 완전히 바닷물에 잠겨 있다. 양팔로 짐을 안은 섬사람들도 찰방찰방 물소리를 내면서 발밑을 살피며 천천히 걷고 있다. 이미 기울어진 태양 아래, 이들은 마치 무슨 기적 같은 이야기의 등장인물들처럼 아무것도 없는 바다 위를 걷는 듯했다.
--- p.370

2009년 7월 어느 날, 나는 당시 친하게 지내던 메케의 권유로 그의 처가 쪽 친척이 사는 ‘톨로’(산의 민족)의 마을을 방문했다. … 반나절에 걸친 이 도보 여행이 끝나고 마을로 돌아오니 에디의 딸들이 타로와 코코넛밀크를 섞어 돌판에 굽는 말레이타섬의 별미 ‘가라’gara를 준비해 놓고 있었다. 에디의 아내가 나를 위해 능수능란하게 바나나 잎을 잘라 아직 뜨거운 가라를 싸주었다. 바나나 잎에 싸인 가라를 손에 들고 어둠이 내려앉은 길을 따라 걸으며 포우바이타 마을로 돌아오는 동안 나는 지금 내가 어찌 이런 생활을 하는 것이며, 또 나 자신이 얼마나 다른 내가 될 수 있는지 믿을 수 없었다. 그리고 나는 생각했다. ‘나’라는 것은 하나의 작은 방과도 같다. 그리고 그 창문을 열면 ‘타자’라는 무수한 바람이 불어온다.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 p.384

출판사 리뷰

 존재론적 전회 이후 인류학자는 어떤 인류학을 실천하고 어떤 민족지를 써야 하나?
| 낯선 곳을 탐색하는 인류학적 여행기와 현대 인류학 이론에 관한 고찰이 교차하는 실험적 텍스트
| 가장 고전적인 장소에서 가장 최신의 이론을 넘어서고자 한 야심찬 시도

2008년 현장연구를 시작한 후에도 오랫동안 사토미는 막막한 느낌을 떨칠 수 없었다. 동거동락 중인 아시 사람들은 ‘우리에겐 ‘전통문화’라 할 만한 것이 남아 있지 않아’, ‘우리도 당신과 마찬가지로 주변 섬에서 온 이주민이야’, ‘바다 위의 삶은 더 이상 불가능할 것 같아 내륙 산지로 이주할 생각이야’라는 식으로 스스로의 정체성을 유예하는 듯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 또 한편 이론적으로도 산호석으로 ‘인공섬’을 짓고 ‘바다 위의 삶’을 살아가는 아시의 문화를 어떤 방법론을 가지고 서술해야 할지 막막했다. 게다가 그가 찾은 말레이타섬은 멜라네시아 지역, 그러니까 인류학의 고향과도 같은 곳으로 말리노프스키 이래 고전적으로 이미 철저한 연구를 거친 현장이었다. 아시 문화나 사회조직에 대해 객관적으로 보고하는 것도, 그것을 구성된 텍스트로 보며 기술하는 것도 이미 철저한 비판을 거친 철지난 방법이었고, ‘대화’나 ‘나’의 이야기를 도입하는 것이 현대 인류학이 봉착한 문제에 대한 해답이 될 거라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런 와중에 저자는 ‘전략적 이국주의’를 구사하며 텍스트나 표상론으로 환원하기 어려운 실재성을 사유하기 시작한 ‘존재론적 전회’의 흐름을 마주하기 시작한다.

보통의 민족지였다면 사례에 들어맞는 이론적 입장 하나를 파고들며 기술해 나갔을 테지만, 이 책은 이렇게 문제의식을 발전시켜 나가는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 준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고전적 인류학의 현장을 다시 사유의 중심으로 호출하면서 그곳을 한 세기 인류학사와 접목시키는 동시에, 참여관찰의 전통을 충실히 계승하면서 그 위에 현대 인류학의 이론적 문제의식을 쌓아올리는 과정을 유려한 문체 속에 녹여낸 이 책은 “대중을 향해 말하고자 한” 실천적 글쓰기 전략의 일환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사회사상사를 전공하다 인류학으로 전향한 전력뿐만 아니라 (간학제적인) 와세다대 인간과학부 교수로 부임해 인류학을 배운 적 없는 학생들에게 현대 인류학을 가르치는 경험을 쌓으면서 저자는 일반 독자들에게도 “인류학이 종전과 전혀 다른 연구를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다고 한다. “현대 인류학의 흐름을 처음부터 쉽게 설명하는 방식”은 이런 생각에서 “공을 들여” 나온 결과물이다. 덕분에 출간 후 이 책은 “100년에 걸친 인류학의 발자취를 명쾌하게 정리하며 그 위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질문과 마주하게 해주는 책”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한편으로 이 책은 참여관찰의 전통을 충실히 따른 성실한 민족지이기도 한데, 현지에서 예상치 못한 사건들을 잇달아 마주하며 타자와 역사, 자연의 ‘불온함’에 대한 인류학적 사고가 깊이를 더해가는 과정은 인류학자가 민족지를 쓰는 행위가 ‘주어진 타자를 기록’해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현지(인)와의 만남 속에서 인류학을 생성해 나가는 과정이 된다는 것을 실천적으로 보여 준다. 이에 더해 현장에서 매일매일 써내려간 일지가 쌓여 만들어내는 흥미진진한 서사와 아시 사람들과 저자의 라포가 느껴지는 정감어린 사진들이 내뿜는 현장감 역시 ‘낯선 곳을 탐색하는 인류학적 여행기’로서의 매력을 더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저자는 멜라네시아 인류학의 전형적인 이미지-폐쇄적인 섬사람들, 문명과 접촉하지 않은 전통사회의 이미지-를 깨고 아시를 ‘끊임없이 타지인들을 받아들여 온 열린 역사’를 기반으로 변화하는 환경에 역동적으로 대응해 온 사람들로 그려내는 데 성공한다. 또 타자를 재현함에 있어 그들이 가진 고정된 생활방식이 아니라 그들이 어떻게 흔들리고 있는지를 자신의 흔들림과 함께 포착해 나간 방법론은 매우 다층적인 인간사를, 그 복잡성을 놓치지 않으면서 기록하는 새로운 방식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기억과 망각을 오가는 역사

이 책의 2부에서 사토미는 아시가 거주하는 섬들의 역사를 기억과 망각이 교차하는 역사로 새롭게 기술하는 방법을 보여 준다. 처음엔 사토미 역시 전통적인 역사인류학의 방법론을 가지고 섬들의 역사를 풀어내는 민족지를 썼다. 즉, 섬들을 둘러싼 이주와 정착의 역사, 서구 세계와의 접촉을 통해 변화해 온 역사를 조사한 것이다. 하지만 계속해서 이 틀에 들어맞지 않는 불온한 요소들이 튀어나왔다. 역사적 사실을 조합해 보면, 아시의 섬들은 상당수가 ‘오메아(전투)의 시대’에 서구 세계와 접촉이 이루어지면서 급속히 조성된 것이었다. 그런데 아시 사람들에게 이에 대해 묻자 자신들이 거주하는 섬들은 오메아의 시대 이후인 ‘법의 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라면서 선을 그었다. 또 사람들은 “이 섬은 누가, 언제, 왜 건설했는가” 같은 질문에 오래전 일은 잘 모르며 함부로 말할 수 없다고 입을 다무는 경우가 많았다. 중요한 역사적 물증으로 보이는 몇몇 무인도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엇갈린 진술들을 내놓거나 과거의 사건을 거의 기억하지 못했다.

보통 현지조사에서 이처럼 정합적이지 않은 응답들은 ‘데이터’에서 제외되기 마련이다. 대개는 정합적 이야기를 해주는 정보 제공자(대부분은 고령의 남성)의 답변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잘 모르겠다’ 같은 응답은 데이터에서 제외된다. 이에 따른다면 위와 같은 이야기들은 불순물이며 무인도들은 반역사적인 것들이고, 아시는 역사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결여한 사람들이 된다. 하지만 사토미는 그런 불온한 요소들을 끝까지 붙들고 씨름하며 왜 아시 사람들이 그런 역사 인식을 갖게 됐으며, 그런 ‘오해’가 아시의 역사 인식에 대해 무엇을 시사하는가를 묻는다.

이때 그가 가져오는 것은 스트래선의 ‘이미지’ 개념이다. 스트래선은 살린스의 구조주의적 역사인류학이 문화적 동일성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려는 전통주의적 원시사회의 이미지를 반복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사건을 꼭 맥락화해야만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니라고 주장했다. 맥락화에 의존할 경우 사건은 맥락의 예시로만 간주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사건의 의미를 맥락을 상정하지 않고 그 자체로 이해하고자 한 것. 스트래선에 따르면, 그 안에 과거와 미래가 모두 담겨 있는 ‘이미지’는 이미 그 자체가 역사를 구현하고 있기 때문에 역사적 맥락 속에 위치시킬 필요가 없다. 사토미는 ‘교환 네트워크’에서도 ‘역사적 맥락’에서도 미끄러지는 아시의 섬들을 이런 ‘이미지’로 사고해 본다. 자신의 역사를 풀어내기 어려운 아리테섬이나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져 가는 무인도 등 아시의 섬들은 맥락화에 대항하는 불온한 ‘이미지’다. 아시에게 섬들은 ‘잘 몰라서 말할 수 없는’ 역사를 구현하는 역설적인 물증이자, 역사와 비역사 사이의 경계에 놓인 대상이며 역사인류학이 제창한 역사적 맥락화를 거스르는 일종의 불순물, 달리 말해 스트래선이 말한, 맥락화에 대항하는 ‘이미지’라고 말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사토미는 아시의 ‘역사’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재구성한다. 보통 우리는 역사를 정체성의 기반을 제공하는 정합적 지식으로 생각하지만, 아시에게 역사는 결코 자명하지 않은 수수께끼 같은 것으로 존재하며 ‘우리’의 정체성의 근거가 되기보다 오히려 사람들을 끊임없이 불안과 탐구로 이끌어 가는 무엇이다. 아시의 섬들은 ‘이런저런 사건이 확실히 있었음’을 실체화하고 기록해 주기보다는, 오히려 ‘이런저런 사건이 있었을 수도 있지만, 그것이 다른 사건이었을 수도 있으며, 나아가 또 다른 사건이었을지도 모른다…’라는 잠재적이고 우유적인 역사를 구현한다. 아시는 이런 역사 인식을 통해 맥락화할 수 없는 역사의 불온한 모습과 맞닥뜨리면서, 역사와의 관계에서 구축되는 ‘우리’라는 자기 동일성에서 벗어나 ‘정체성의 식별 불능 지대’로 발을 들여놓게 된다.

 인류세 논의를 넘어 | 불온한 자연에 대해 사유하는 법

¶ “우리는 섬을 만들지 않아. 섬이 제멋대로 자라는 거야.”
¶ “섬을 짓는 데 쓰는 건 모두 살아 있는 바위야. 바위는 살아 있기 때문에 강하고 섬을 단단히 붙들어 둘 수 있어. 바위는 늙으면 단단히 맞물리지 않아. 그러면 섬이 가라앉아.”
¶ “사람들은 이제 바다 위의 삶을 두려워해. 지금 세상에는 별의별 일이 다 있잖아.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어찌 알겠어? 지진이니 쓰나미니.”
¶ “해수면 상승에 대한 내 생각은 이래. 섬이 막 만들어졌을 때는 바위가 아직 싱싱하고 살아 있어. 그런데 바위가 햇볕에 그을려 죽어 버리면 섬이 낮아지지. 그래서 밀물이 섬 위까지 들이닥치는 거라고.”
¶ “얕은 여울에는 바위가 사라져 버렸지만, 땅속에는 살아 있는 바위가 있어. 땅속에 있는 바위까지 전부 파내 버리는 건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야. 바위를 다 파내 버렸다고 해도 10년이나 12년 정도 지나면 다시 바위가 자라는 걸 볼 수 있어.”

외부인의 시선에서 본다면 산호초 위에서 살아가는 아시는 분명 인류세적인 상황에 직면해 있다. 디스플레이스먼트 리서치 같은 환경단체의 보고서에 따르면, 아시의 섬들은 평균 고조면 기준 1미터 미만 높이로 현재의 해수면 상승 추세로는 더 이상 살 수 없는 곳이다. 만조시 섬들은 해수면 위에 “간신히 떠있는” 수준이고 폭풍이 몰아치면 물에 완전히 잠겨 버리는 섬도 있다. 이 같은 설명에서 아시의 삶의 위기는 글로벌 기후변화에 따른 것이다.

인류세적 개념 미학은 이처럼 그간 환경위기를 논하는 담론들 속에서 보편화되어 왔으며, 인간의 자연에 대한 개입에 경각심을 불러일으켜 온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사토미 류쥬는 이런 개념 미학이 제시하는 ‘곳곳에 인간 활동이 침투한 자연’이라는 이미지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 바탕에는 ‘자연-문화’를 일원론적으로 바라보며 이를 일종의 하이브리드로 생각하는 관점이 깔려 있으며, 여러 종의 얽힘과 관계성을 서술하며 비인간 종에 대한 인간의 윤리와 책임을 도출하는 식의 논의로 이어진다(이는 1990년대 이후 인류학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사토미는 이 같은 확장적 관계론이 인간 중심의 사회관계나 윤리를 다른 생물종으로 확장한 것에 불과한 게 아닌가 의심하며 관계성의 외부를 전혀 보려 하지 않는 소박한 미학에 함몰돼 있다고 비판한다. 그가 보기에 이는 어떤 면에서 자연에 대한 인간의 주체성을 최대한 강조하는 근대의 정점처럼 보인다. 이에 따르면, 곳곳에 인간 활동이 침투해 있기 때문에 ‘손대지 않은 대자연’ 같은 걸 상정하고 이를 보호하려는 시도도 의미가 없다. 어찌 보면 자연의 종말론인 셈. 사토미는 이 같은 인류세적 종말론에서 빠져나오는 길을 아시의 자연관 속에서 찾으려 한다.

환경과학의 이야기와 달리 아시는 해수면이 높아져서 섬이 잠기는 게 아니라, 섬을 구성하고 있던 ‘살아 있는 바위’가 서서히 ‘죽어가며’ 섬이 가라앉고 있다고 말한다. 또 이들에 따르면, 어떤 섬들은 바다의 깊은 바닥(산호 지반)과 맞닿아 있는 경우 계속 자라나기도 한다. 아시들이 느끼는 삶의 위기는 이런 바위의 생사와 실존적으로 연결돼 있다. ‘이제 바다에서 살 수 없다’는 불온한 이야기들은 바로 그런 맥락에서 나온 말들이다. ‘자연/문화’를 이분법적으로 바라보는 관점에서라면 이 같은 아시의 생각들은 모두 비과학적인 문화적 신념 같은 것으로 치부되고 말 것들이다.

하지만 산호는 근대적 자연과학의 관점에서 접근한다 해도 상당 부분 여전히 미지의 영역이다. 따라서 확고한 과학적 지식을 가지고 문화적 신념을 평가한다는 근대적 가정은 성립하지 않는다. 아시에게 산호초 공간은 살아있는 바위에 의해 형성되기에 항상 변모할뿐더러 ‘우리’의 바다위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환경이다. 무엇보다 바위의 생사는 자신들의 관여를 초월하며 그보다 앞서 있다. 아시의 생활 혹은 그들이 말하는 ‘바다 위의 삶’은 항상 성장하고 변화하는 ‘자연’과 엮여 있기 때문에 기존의 인류학이 ‘문화’나 ‘사회’라고 불러온 영역만으로는 결코 해명되지 않는다. 가령 2011년 쓰나미 이후 ‘이제 바다에서 살 수 없다’는 아시의 불온한 생각이 그러하고, 바위가 죽어서 섬과 부두가 가라앉는다는 사실 자체가 자신들의 도덕적 쇠퇴를 증명한다는 종말론적인 인식이 그러하다. 이들에게 이는 환경위기와 관련된 파국이 아니라 아주 오래전부터 일상적인 시간 속에서 끊임없이 존재했던 감각이다. 그들은 섬들이 구현하는 ‘광의의 자연’과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스스로를 점검하며 변화해 왔다. 예를 들어, 아시 사람들은 계절풍이 불어오는 시즌마다 바위를 더 쌓아올리면서 지금껏 해수면 변동에 대처해 왔다. 아시는 얼핏 보기에 전통적인 생활을 영위하며 변화하지 않는 것 같지만, 실은 언제나 미세하게 진행돼 온 폐허화에 맞서 바위의 생사에 순응해 스스로를 변모시키면서 바다위의 삶을 살아온 것이다.

하지만 섬 주민의 감소와 주민 간 불화는 이런 보수 작업을 지연시키고 바위의 붕괴를 가속화하고 있다. 무너진 채 방치된 부두에 대한 탄식 속에서 주민들 사이의 사회적 관계와 바위 더미의 물리적 상태는 한 몸이다. 아시에게 문제는 해수면 상승이 아니라 더 이상 섬을 돌볼 수 없어 해수면 변동에 대처할 수 없는 자신들의 처지이며 그래서 부두와 섬들을 마주할 때마다 스스로의 과오를 되물었던 것이다.
이런 아시의 인식은 결코 부정적이거나 소극적이지 않다. ‘죽어 가는 바위’와 ‘가라앉는 섬’을 둘러싼 아시의 인식 이면에는 ‘우리는 항상 바위를 새로 쌓아 올려야 하고, 그렇게 할 수 있다’라는 근본적으로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감각이 함께한다. 그런 감각은 쿠와레우섬 밑에서 ‘살아 있는 바위’가 ‘지금도 자라고 있다’는 이야기나 ‘바위가 부족해질 일은 없다’는 사마니의 이야기와도 상통한다.

사토미는 “섬 아래에 큰 바위가 살아서 자라고 있다”는 아시의 말 속에서 인간의 실천적 관여를 초월한 ‘바위’의 인간 이전적 삶, ‘외부로서의 자연’을 발견한다. 아시에게 ‘바위’는 ‘땅속’이나 ‘깊은 곳’과 같은 일상생활의 외부에서, ‘우리’의 관여를 본질적으로 넘어서 무관계적인 방식으로 계속 ‘자라나는’ 것이다.

아시는 이처럼 원래부터 존재하던 바위의 성장성 및 생산성을 모방하고 연장해 섬을 건설해 왔다. 상어가 바위를 모아 섬을 높여 준다는 이야기가 그 예다. 이것들을 비과학적 신념이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산호초의 성장이나 융기, 부유물의 퇴적에 의한 섬의 자연적 성장은 실제 가능한 일이다. 아시는 산호석의 성장성과 운동성을 명확히 인식하고 있으며, 바로 그 바위에 ‘순응하며’ 그것을 연장하듯 섬을 쌓아 왔다. 이 때문에 종종 그들의 이야기에서는 ‘섬을 만드는 것’과 ‘섬이 스스로 자라는 것’, 다시 말해 인공과 자연을 구별할 수 없다.

아시는 근대적 이분법과는 다른 방식으로 ‘자연’이라는 외부, 즉 본래적인 것을 분리해 인식한다. 자신들의 관여에서 벗어나 근본적으로 그에 선행하는 방식으로 자라나는 바위와 섬. 아시는 그런 인간 이전의 바위의 성장성에 기생하는 것처럼 바다에서 살아온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우리는 섬을 만들지 않아. 섬이 제멋대로 자라는 거야”라고 말한다. 서구적 관점에서 자연이 사회나 문화와는 독립적으로 보편적인 법칙성을 따르는 인간 이외의 영역을 의미하는 것인 반면, 아시의 ‘자연’은 사회나 문화 개념이 불확실해지는 순간 부상하는 인간 이전적이면서도 이후적인 것이다. 그리고 사토미는 바로 이 같은 자연에서 인류세적 종말론을 벗어날 희망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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