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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혼자가 된 것이다. 하지만 나는 영원히 이렇게 지내온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내가 잠을 좀 더 많이 자면 시간이 빨리 갈 수도 있을 텐데. 생각을 멈춰버린다면. 하지만 나는 잠을 자기 싫다. 내가 내 몸에 뭔가 영향을 미칠 수나 있는지 모르겠다. 나는 전자 장비처럼 ‘작동 중’이거나 ‘작동 중지’ 상태일 뿐이다. 정신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한다. 나는 내 몸에 세 들어 있다. 나는 잠들고 싶지 않다. _ 엘자
이건 정상이 아니다. 이 말을 수도 없이 되뇌었다. 이건 정상이 아니야. 이건 정상이 아닌데. 움직일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고 생각하거나 말할 수도 없는 환자를 찾아간다는 생각에 들뜬다는 게 말이 되는가. 심지어 나는 그 환자와 아는 사이도 아니다. _ 티보 나는 7주 동안 사람들이 하는 말에서 색감과 질감을 자연스레 떠올릴 수 있었다. 내 동생의 연애 이야기는 구역질나는 붉은 벨벳 같다. 그만큼 호르몬이 차고 넘치는 느낌이다. 엄마는 보라색 가죽 같다. 낡은 핸드백처럼 뻣뻣해 보이지만 이미 군데군데 갈라졌다. 이 과장 의사는 공사판의 강철봉처럼 윤기도 없고 우악스럽다. 이 와중에도 다행히 나에겐 열흘 전부터 떠오른 무지개가 있다. 티보는 온갖 미묘한 감정들, 나에게 새로운 그 모든 것과 함께 등장했다. 나는 특정한 한 가지 색깔을 떠올릴 수가 없다. 반짝반짝하면서도 당혹스러운 색이다. 그러다 무지개가 생각난다. _ 엘자 내 차로 돌아온다. 내 마음은 52호실의 그 가녀린 몸뚱이 주위에서 떠날 줄을 모른다. 내 품에 꼭 안고 싶었던 그 몸. 하지만 몇 달간 움직이지 못해 연약해진 두 다리를 보고서 내 이기적인 욕심을 추슬렀다. 그래서 그냥 가만히 옆에 앉아 있다가 나왔다. 자칫 그녀가 부러지기라도 할까봐 겁났나보다. 20분 후, 집에 도착한다. 어떻게 운전을 해서 왔는지 모르겠다. 소파에 주저앉는데 아무런 감각이 없다. 반사적으로, 혹은 습관적으로 움직일 뿐이다. 배 주스를 홀짝홀짝 마시는 동안 어떤 생각이 서서히 밀려온다. 나는 누군가를 사랑하고, 그 사람은 내 고백을 들었다. _ 티보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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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수상태인 몸에 갇힌 여자
마음의 문이 굳게 닫힌 남자 그래도 봄처럼 사랑은 찾아온다 혼수상태인 여자와 그녀의 병실에 우연히 들어선 남자의 사랑을 그린 프랑스 소설. 이 소설을 한 줄로 소개하면 이렇게 될 것이다. 자못 독특한 설정에 호기심이 일어남과 동시에 여러 가지 편견이 생길 만도 하다. 그리고 그것은 대체로 부정적인 편견일 수 있는데 이 소설의 장점은 이러한 편견들을 뒤집어 놓는 데 있다. 편견 1. 프랑스 소설이라서 프랑스 소설이라고 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나? 노벨 문학상 수상 작가를 가장 많이 배출하였고 유명한 고전 문학과 철학서들이 다수 나온 곳인 만큼 우아하고 심도 깊은 이야기, 사랑 이야기라 하더라도 어쩐지 지루하리만치 장황하거나 현학적인 수사로 가득 차 있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이 소설은 그러한 편견을 완전히 깨버린다. 막상 읽기 시작하면 미국 소설인가 싶을 정도로 문장이 짧고 경쾌하며 배경이 우리나라라 하더라도 크게 위화감이 없다. 엘자가 자신의 상황에 대한 느낌을 담은 첫 페이지부터 그러하다. “춥다. 배고프다. 무섭다. 적어도 내 생각에는 그렇다. 혼수상태에 빠진 지 20주나 됐으니 춥고 배고프고 두려운 건 당연하지 않나. 그런데 느낌이 없다. 내 몸이니 응당 나 자신이 느껴야 할 텐데, 이건 뭐 도무지…… 그냥 이런 느낌이려니 상상할 뿐이다.” 게다가 장르 소설에서 즐겨 이용하는 교차 서술로 몰입도를 높인다. 마치 그 여자, 그 남자 식으로 심정들이 교차한다. 한 사람의 시점에서 ‘그 행동의 의미는?’ 하고 물음표를 매긴 부분에서 상대의 시점으로 ‘그때의 속마음’이 나와 설렘 포인트들이 터진다. 편견 2. 지독히 우울할 것 같은 주인공 우리의 주인공을 보자. 엘자는 혼수상태인 몸에 갇혀 있다. 외부의 소리를 듣고 들은 것을 기반으로 생각하고 살고 싶어한다. 하지만 그것을 알릴 방도가 없다. 어머니가 자신을 만지는 것도 두려워한다는 걸 알지만, 가족과 친구들의 방문 빈도가 줄어든다는 것도 알고, 담당 의사가 자신을 포기해서 죽음으로 내몰려고 한다는 것도 알지만 그들은 짐작조차 하지 못한다. 마치 우주를 혼자 떠도는 것과 다름없을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이다. 게다가 이야기의 주무대가 병원이니 생각만 해도 우울한 독백일 것 같다. 하지만 엘자의 목소리는 그런 편견을 걷어차 버린다. 화성에 혼자 낙오되어 생존해나가는 이야기를 담은 소설 『마션』의 주인공을 떠오르게 한다. 예를 들면, 부모님께 “정말로 희망이 없다”며 연명 치료 중단을 권하는 의사를 향해 분노를 떠뜨리는 장면에서는 약간의 위트마저 느껴진다. “바보야, 의사면 의사답게 말해! ‘부인’ 소리만 붙이면 다 격식을 차리는 줄 알아? 딸내미의 죽음을 앞당길 작정이라면 적어도 세련되게 일을 처리할 정도의 예의를 갖추라고! 당신이 무슨 서부 영화의 캐릭터인 줄 알아? 당신은 의사잖아! 이 가증스러운 과장 의사는 내 머릿속에서 딱 그런 모습이다. 단추를 하나도 채우지 않은 가운, 한 손으로는 벽을 짚고 한 손은 허리에 올려놓은 건들건들한 자세. 저 인간이 의사다운 바지가 아니라 청바지를 입고 있다는 데 내 손모가지를 걸겠다.” 편견 3. 이 사랑이 가능한가? 엘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심지어 살아 있기나 한지 티보는 알지 못한다. 엘자 역시 티보가 어떻게 생겼고 어떤 사람인지 전혀 알 수가 없다. 마치 서로 다른 행성에 사는 두 사람이 사랑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게 가능한 일일까? 티보는 동생 병실을 피하기 위해 엘자의 병실로 우연히 들어선다. 동생은 음주운전으로 10대 여자 아이 둘을 치어 죽였다. 그런 동생을 받아들이기 어려워 마음에 폭풍이 이는 티보에게 엘자에게서 나는 재스민 향은 마음을 가라앉히는데 도움이 된다. 그리고 자신의 말을 듣기만 해주는 듯 조용한 엘자의 반응도 마음을 편하게 만든다. 마치 송곳으로 자신을 찌르는 듯한 바깥세상에서 그를 지켜주는 인큐베이터 같다고 느낀다. 그런 티보의 존재를 엘자는 귀로 먼저 느낀다. 낯선 사람임에도 친근한 듯 먼저 말을 걸고 자신을 환자로 대하지 않는 듯한 태도는 신선하게 다가온다. 그녀는 그가 마치 무지개 같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서로는 각자의 절망 속에서 한 줄기 희망이 되어간다. 시각이 아닌 후각과 청각으로 시작된 사랑. 이것 자체가 시각으로 시작되는 것이 당연한 교감, 사랑에 대한 편견을 깨버린다. 비시각적인 감각과 상상력, 보이지 않아도 존재한다는 믿음과 희망으로 이루어 나가는 사랑은 얼음산에 희귀하게 보이던 무지개처럼 따뜻한 감동으로 다가온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법이거든”이라고 했던 어린 왕자의 말처럼. 모두가 희망을 포기하고 그녀를 죽음으로 내모려는 상황에서 그와 그녀는 어떻게 그녀가 존재하고 있음을 증명할 수 있을까? 후반 네 챕터는 정말 숨이 막힐 정도로 긴박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