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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고도서 카바레
새로운 예술 공간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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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ABAR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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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01 카바레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02 1881년 파리, 카바레의 탄생
03 1897~1914년, 세계 속의 카바레
04 예술가들이 만나는 곳, 카바레
05 전위 예술의 매체, 카바레
06 포효하는 1920년대
07 카바레가 낳고 기른 것들
08 제3제국의 소용돌이 속으로
09 망명지의 카바레
10 카바레의 과거와 현재
감사의 글 / 부록 / 참고문헌 / 찾아보기

저자 소개 1

역강수정

 
어려서 책장 한쪽에 〈문학사상〉과 〈현대문학〉이 빼곡했다. 어린이 세계문학전집을 뗀 후로 엄마가 구독하던 그 월간지들을 손에 잡히는 대로 뽑아서 시와 단편소설을 읽었다. 그 탓인지 전공과 전혀 무관한 출판 쪽 일을 하게 되었고, 출판사와 잡지사를 들락거리다가 전업으로 번역을 시작한 지도 얼추 스무 해 가까이 되어간다. 연세대를 졸업한 후 출판사와 잡지사에서 근무했으며,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는 『오만과 편견』, 『모비 딕』, 『태어나서 처음으로』, 『손으로 말하고 슬퍼하고 사랑하고』, 『웨인 티보 달콤한 풍경』, 『시스터스 : 우린 자매니까』,
어려서 책장 한쪽에 〈문학사상〉과 〈현대문학〉이 빼곡했다. 어린이 세계문학전집을 뗀 후로 엄마가 구독하던 그 월간지들을 손에 잡히는 대로 뽑아서 시와 단편소설을 읽었다. 그 탓인지 전공과 전혀 무관한 출판 쪽 일을 하게 되었고, 출판사와 잡지사를 들락거리다가 전업으로 번역을 시작한 지도 얼추 스무 해 가까이 되어간다.

연세대를 졸업한 후 출판사와 잡지사에서 근무했으며,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 는 『오만과 편견』, 『모비 딕』, 『태어나서 처음으로』, 『손으로 말하고 슬퍼하고 사랑하고』, 『웨인 티보 달콤한 풍경』, 『시스터스 : 우린 자매니까』, 『마지막 기회라니?』, 『베아트릭스 포터의 집』, 『신도 버린 사람들』,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 『우리 시대의 화가』, 『보르헤스에게 가는 길』, 『그랜드마더스』 등이 있다.
저자 : 리사 아피냐네시(Lisa Appignanesi)
리사 아피냐네시는 폴란드에서 태어나 파리와 몬트리올에서 대학을 마치고 런던에서 프루스트와 헨리 제임스, 로베르트 무질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다음에는 다시 뉴욕으로 건너가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 후로도 저자는 여러 곳에서 많은 사람들과 교류하고 모임을 결성하며, 문화의 산실이었던 카바레 정신에 부합되는 삶을 살아왔다. 실험예술에 뿌리를 둔 현대미술연구소(ICA)에서 회의와 세미나를 총괄하는 책임자로 10년간 일했고, 이후 다큐멘터리 제작에도 참여했으며 논픽션과 소설 등 여러 권의 베스트셀러를 썼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시몬느 드 보봐르를 조명한 《프로이트의 여자들》(존 포레스터와 공저), 평단의 높은 지지를 받은 회고록 《망자의 실종》, 그리고 소설인 《메모리 맨》과 베스트셀러 스릴러인 《신전》, 《겨울의 죽음》 등이 있다.
〈가디언〉과 〈인디펜던트〉에 정기적으로 글을 기고하고 있는 저자는 문학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프랑스 정부로부터 예술문학훈장을 받았다. 현재 런던에 살고 있다.

품목정보

발행일
2007년 04월 20일
쪽수, 무게, 크기
408쪽 | 682g | 153*224*30mm
ISBN13
9788990048837

출판사 리뷰

'카바레'의 탄생
카바레라는 말은 ‘포도주 창고’ 또는 ‘선술집’을 뜻하는 프랑스어에서 유래되었다. 그런 카바레는 프랑수아 비용이 살았던 15세기 중반에 이미 공연장으로 활용되었다. 술 취한 손님들이 즉석에서 노래를 따라 불렀을 테고, 더 많은 손님을 불러모아 매상을 올리고 싶었던 주인은 순회 극단이나 발라드 가수, 곡예사, 카니발 때만 잠깐씩 활동하던 이런저런 사람들에게 무대를 제공했을 것이다. 몇 세기 뒤에나 등장하게 되는 예술 카바레의 두 가지 형식, 즉 예술가들끼리 작품을 선보이고 즉흥 공연을 하는 회합 장소로서 카바레, 그리고 규모는 작지만 높은 지적 수준을 자랑하는 레뷔의 공연장으로서 카바레가 그때부터 움트고 있었던 것이다.
프랑스어로 노래를 뜻하는 ‘샹송’은 19세기 후반에 카페와 비스트로에서 즐길 수 있는 대표적인 오락이었다. 샹송은 사랑의 세레나데처럼 분위기를 무르익게 해주는 소품으로서만이 아니라 보도 수단의 기능까지 담당했다. 인쇄에 필요한 기계와 비용 때문에 거의 지배 계층이 장악한 신문의 대용이었던 셈이다.
가수가 혼자 나와 노래를 부르는 비스트로와 카페가 널리 퍼지고 의상과 장치를 사용할 공식 허가도 받으면서 점차 프랑스 고유의 공연 형태인 ‘카페콩세르’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고, 이것이 19세기 말에는 뮤직홀로 변하게 된다. 카페콩세르는 대체로 더 많은 관중을 수용했다. 날씨가 좋으면 노천에 무대를 펼치고 가끔은 제대로 구색을 갖춘 밴드를 동원하기도 했다. 그리고 주로 오락에 초점을 맞추었다. 어쩌다 풍자와 저항의 노래가 포함되기는 했어도, 좀더 공격적인 그런 노래들은 아무래도 작고 친밀한 카바레가 제격이었다.
카페콩세르에서 발전한 카바레도 웃음과 오락이 본질이기는 했지만, 1881년 현대적인 싹을 틔운 이후로는 한층 지적이고 자의식 강한 예술 형태로 자리잡았다. 카바레 탄생의 도화선은 이드로파트(Hydropathes: 1878년에 당시 젊은 시인이던 에밀 구도가 결성한 예술가 모임으로, 풀이하면 ‘물 치료 요양자들’이라는 뜻)라는 이름의 문인 집단이었다. 시와 소설을 쓰는 사람들이 매주 모여 작품을 선보이고 시와 노래, 일인극, 짤막한 소품을 공연하기도 했다. 이드로파트의 규모가 점점 커졌다는 사실은 시인과 소설가, 예술가들이 그런 식으로 만나 작품과 아이디어를 교환하고 싶어했다는 증거일 것이다. 대중적인 풍자와 저항의 노래를 전달 매체로 차용한 것과 더불어, 이것이 바로 카바레 탄생의 주된 원동력이었다.
그때부터 이 두 가지는 카바레의 대표적인 특징이 되었다. 카바레는 아방가르드를 자처하던 젊은 예술가들의 실험 무대로, 당대의 사건을 다루고 도덕과 정치와 문화를 비판적으로 반영하는 풍자 무대로 떠올랐다. 최고의 카바레는 역시 이 두 가지 특징을 고르게 선보인 곳들이었다. 카바레는 정극과 버라이어티쇼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며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했다. 무대와 장치, 공연 내용에 즉흥성을 가미한 이 유연한 매체는 재치가 반짝이는 저항 정신과 반골 기질, 혁신적인 태도를 꾸준히 유지하면서 시대 상황에 따라 초점을 조정했다. 실제로 반골 기질은 카바레의 본질이었다.

첫 번째 문예 카바레 : 검은 고양이
생략된 거위 위에 거들먹거리며 한 발을 얹은 검은 고양이, 이것이 바로 첫 문예 카바레의 상징이었고, 이 상징을 만든 사람들은 에드거 앨런 포의 음산한 지면에서 태어난 우아하면서도 신비로운 이 고양이가 예술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지적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그리고 고양이의 시답잖은 먹이는 불만에 가득 차 꽥꽥거리는 아둔한 부르주아였다.
여러 예술 사조를 두루 절충해 고양이를 탄생시킨 사람들이 바로 최초의 카바레 아티스트, 이름하여 ‘카바레티스트’들이었다. 노래하고 시를 읊고 춤추고 그림자극을 만들고 가사와 곡과 극본을 쓰고 공연을 하는 고양이. 혁명적인가 하면 군주제를 지지하고, 신비주의자인 동시에 묵직한 이야기보따리를 술술 풀어내고, 소름 끼치게 무시무시한 이야기와 눈물 콧물 빼는 사랑 이야기를 모두 좋아한 고양이. 풍자에 담긴 조롱의 끈으로만 한데 꿸 수 있고 실제로도 그랬던 모순의 존재.
1881년은 코뮌이 붕괴되고 10년이 지났을 때였다. 널찍한 길과 너른 광장이 구불구불 비좁던 자갈길을 대체했다. 이 엄청난 건축적 성형의 저의는 모두 잊혀졌다. 새로운 면모를 갖춘 파리는 세계의 빛나는 수도로 우뚝 섰고, 민주주의의 희망이 드높은 제3공화정은 평화와 번영을 구가했다. 무정부주의자의 폭탄이나 정계의 추문, 내부 분란으로 토대가 흔들리는 일은 당분간 없을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도 파리의 한 유수 일간지는 신년을 앞두고 이런 헤드라인으로 사람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1880년, 여기 음란의 해 잠들다.’ 정치적으로 조용하고 경제적으로는 부르주아들의 활동이 융성했던 한 해를 마무리하는 비문이라고는 보기 어려웠다. 그러나 길에 나가보면 부자의 마차들 옆으로 거지와 부랑자, 넝마주의, 창녀, 도둑이 넘쳐났다. 그리고 부자 신문들은 전자보다 후자에 초점을 맞추어 삶의 음침한 실상을 강조하는 걸 더 즐겼다. 물론 금과옥조 같은 설교도 빠지지 않았다.
로돌프 살리는 이드로파트의 회원들과 함께 원대한 행보를 내디뎠다. 최초의 예술 카바레를 세운 것이다. 이 새로운 장르가 지닌 첫 번째 의미는 자연주의 숭배 풍토에 풍자를 도입한 것이었다. 중산층 관객에게 그들이 섬기는 그 대단한 가치가 자기만족에 불과하다는 것을, 하수구 같은 욕망을 덮은 한 겹 허세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려면 일정한 충격파가 필요했다.
살리는 ‘샤 누아르Chat Noir’, 즉 ‘검은 고양이’의 터전으로 몽마르트르를 선택했다. 당시만 해도 그곳은 시골 정서를 그대로 간직한 변두리였으며, 유명한 트레이드마크인 풍차가 높이 서 있었다. 포도밭, 노동자들이 드나드는 선술집, 소와 닭과 당나귀들이 어슬렁거리는 흙길을 따라 순교자의 동산에 오르면 야트막한 돔 지붕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순례자들의 집결지, 파리 코뮌 지지자들의 피가 뿌려진 곳에 몇 년 전에 들어선 사크레쾨르 성당이 나온다. 당시 몽마르트르에 살던 사람들은 이른바 카나이유canaille, 즉 어중이떠중이 하층민들이었다. 그러나 정작 본인들은 그 호칭을 자랑스러워하며 부르주아의 턱밑에서 마타도르처럼 손을 휘저어댔다. 범법자, 파리의 깡패들, 포주와 그들이 거느린 여자들, 비렁뱅이들, 일이 있거나 없는 노동자들이 모두 몽마르트르로 모여들었다. 많은 예술가들처럼 살리가 어딘지 살얼음판 같은 이곳에 터를 잡은 이유는 카르티에 라탱의 높은 생활비를 감당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검은 고양이의 탄생은 대중의 상상력 속에서 카나이유 그리고 그들의 정신적 동족인 문학계와 예술계의 보헤미안들을 영원히 결합시켰다.
초창기의 검은 고양이는 무척이나 소박했다. 살리의 친구인 시인과 작곡가, 작가, 화가들이 몽마르트르의 거처에 모여 잡담을 나누고, 책을 읽고, 작품을 시연했다. 이런 ‘클럽’의 성격, 즉 모임의 폐쇄성은 오히려 그 존재를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밤늦도록 건물 밖으로 들리는 소리가 행인들의 호기심과 불만을 자극했고, 우격다짐으로 밀고 들어오는 경우가 생기면서 소문은 더 확실히 퍼져나갔다.
몽마르트르의 어두침침한 흙길을 걸어 검은 고양이의 문을 밀고 들어서는 파리 주류 사회의 일원들은 그곳에 모욕을 당하러 간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살리는 뻣뻣하게 격식을 갖춘 인사와 ‘각하’니 ‘귀하신 선량’이니 하는 조롱 섞인 호칭으로 손님을 맞았다. 술값은 꾸준히 올랐고, 더불어 그의 손끝에서는 경멸의 냄새가 솔솔 피어올랐다. 많은 노래와 시가 중산층 문화를 패러디했다. 다루는 주제는 비슷했을지 몰라도 이들의 패러디에는 감상의 토로나 자기변명 같은 도덕적 궤변을 차단한 냉소와 아이러니가 넘쳤다.

대중적인 버라이어티쇼를 진지한 예술로 격상시키다 : 자유는 팅엘탕엘
빌헬름 시대의 독일은 파리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바르셀로나보다도 자유의 기운이 훨씬 덜했다. 권위적인 계층 구조가 팽배하고 제복을 차려입은 관리들과 상명하달식의 ‘예스맨’이 만연했으며, 민심은 갈수록 정치를 외면했다. 부패가 들끓고 종교는 말뿐이었다. 가정과 교회, 직장과 국가에 대한 의무를 침울할 정도로 신봉하는 게 독일 중산층의 미덕이라지만, 그것은 성공을 보장하는 물질적 풍요에 대한 욕망을 덮은 얇은 막에 불과했다. 문화라는 것도, 이해는 안 되지만 어딘가 지루하면서도 경외심이 느껴지는 소리에 고개를 끄덕이며 한 수 접어주는 것이었다. 검열은 극예술에 더욱 엄격한 잣대를 적용했고, 성도덕은 완고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일정한 문예나 예술 사조가 꽃을 피웠어도 독일 문화와 사회에 처음부터 드러내놓고 조롱의 총구를 들이대지는 않았다. 그러던 것이 1900년 들어 흐름이 바뀌었다. 속물근성을 겨냥한 니체의 통렬한 공격과 니체 자신의 영향력이 다양한 분야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유머와 디오니소스적 요소들이 예술의 한 부분으로 정당하게 평가받았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마침내 젊은 예술가와 지식인들이 도덕률과 사회 규범, 그리고 판에 박힌 부르주아와 궁중 취향에 반기를 들고 나섰다.
일단 분위기가 조성되자 많은 요소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오면서 독일의 카바레 탄생에 일조했다. 그중에서 가장 큰 구실을 한 것은 몽마르트르의 생동감 넘치는 보헤미안적 분위기와 그곳에 카바레라는 새로운 예술 형태가 생겨났다는 프랑스발 전언이었다. 한동안 파리에서 지내다 뮌헨으로 돌아온 알베르트 랑겐도 검은 고양이와 〈질 블라 일뤼스트레〉의 풍자 정신에 매료되었다. 그는 역시 몽마르트르의 분위기에 심취했던 프랑크 베데킨트 등과 힘을 합쳐 풍부한 삽화를 곁들인 풍자 주간지 〈짐플리치시무스〉를 창간했다. 이후 수십 년 동안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독일 전체를 바짝 긴장하게 만든 〈짐플리치시무스〉는 권위를 생산하고 행사하고 수용하는 모든 사람들, 문학계의 악취미와 위선적인 도덕률을 공격했다. 카바레와 일맥상통하는 정신이었다.
1900년, 프랑스 음유시에 깊은 감명을 받고 그것이 ‘민중에게 예술을 공급하는’ 수단이 될 수 있음을 간파한 시인 오토 율리우스 비어바움은 노래로 부를 수 있는 독일 시들을 모아 《도이체 샹송》이라는 책을 펴냈다. 서정 시인인 리하르트 데멜과 데트레프 폰 릴리엔크론, 시인이자 소설가인 아르노 홀츠, 에른스트 폰 볼초겐과 베데킨트의 작품들이 수록되었다. 편지 형식으로 쓴 서문에서 비어바움은 예술이 일상의 삶에 스며들게 만들고 싶다는 취지를 밝혔다. 작금의 예술가들은 박물관 전시용이 아닌 사람들이 앉을 수 있는 의자를 만든다면서, 이제 시인들도 조용한 응접실에서나 감상할 수 있는 작품이 아니라 흥에 겨운 군중 앞에서 공연할 수 있는 시를 쓰고자 한다는 것이었다.
마음대로 형태를 빚어낼 수 있는 조형적인 매체인 카바레는 독일로 건너오면서 프랑스의 오리지널이 지닌 장난기를 조금 상실한 대신 한층 진지하고 풍자적인 공격성을 띠게 된다.
시를 기능화하고 혁신하겠다는 비어바움의 취지는 유겐트슈틸 운동(Jugendstil: 청춘의 양식이라는 뜻으로, 공예의 모방 경향에 대한 반동으로 일어난 독일판 아르누보 운동)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팅엘탕엘(tingeltangel: 가볍고 세속적인 음악을 연주하고 쇼를 공연하는 대중 주점), 즉 대중적인 버라이어티쇼에 ‘품위를 부여’해 진지한 예술의 차원으로 격상시키겠다는 그의 구체적인 욕심은 독일 카바레의 또 다른 출발점이 되었다. 비어바움은 현대의 도시인들에게는 버라이어티, 즉 다양성 중추가 있다고 주장했다. 도시인은 변화를 원하고, 비어바움은 이른바 보통 사람들에게 예술적 차원의 다양성을 제공함으로써 취향을 격상시켜줄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그는 ‘자유는 팅엘탕엘’이라면서 예술의 자유와 독일의 대중 버라이어티쇼 사이에 등호를 그었다. 이런 대중적 형식의 채택은 그 동기가 문화였든 정치였든 간에 카바레의 한 전통으로 면면히 이어지면서 모더니즘의 추진력이 되었다.

시대착오적인 도덕률과 관습에 저항하다 : 독일 최초의 카바레, 11인의 처형인
뮌헨의 보헤미안들은 엄격한 도덕률을 강요하고 공연 예술에 공권력 개입을 허용한 이른바 하인츠 법에 고집스레 저항했다. 그리고 그것은 검열, 책과 잡지의 압수 수색, 공연의 일부 삭제, 극단적인 경우에는 법을 위반한 예술가와 발행인의 수감으로 이어졌다. 예술가와 학생들은 ‘자유로운 예술 활동과 학문 수호를 위한 괴테 연대’를 결성했다. 1901년 사육제 때는 〈짐플리치시무스〉의 편집장인 랑겐과 극작가 프랑크 베데킨트를 비롯한 소속 회원들이 항의 문구를 들고 항전 구호를 외치며 거리 행진을 벌였다. 그들은 발가벗고 뛰는 것 말고는 하인츠 법에 맞서 뭐든 할 각오가 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여기에는 젊은 분리주의 화가들, 〈짐플리치시무스〉의 편집자와 기고가들, 오토 팔켄베르크를 위시한 극예술원 학생과 배우들도 참여했다. 사육제 항의가 끝난 직후, 그중 열한 명이 시대착오적인 도덕률과 기존 관습에 지속적으로 저항하기 위해 카바레를 열자는 데 뜻을 모았다. 이름은 자신들을 옥죄고 드는 법에 착안해 ‘11인의 처형인Die Elf Scharfrichter’이라고 지었다. 그들이 처형하러 나선 것은 다름 아닌 사회의 위선이었다.
다양한 분야에서 기금을 모아 작은 극장을 빌렸고, 안에는 기괴한 느낌의 가면 11개를 걸었다. 펠리시앙 롭스와 스탱랭, 〈청춘〉과 〈짐플리치시무스〉에서 활동하던 당대 예술가들의 드로잉도 벽을 장식했다. 1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탁자와 의자는 편안했지만, 이들이 수집한 고문과 처형 도구들은 음산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이들은 판사용 가발에 죄수의 칼을 채운 해골을 자신들의 상징으로 선택했다. 극장 바닥에는 움푹하게 들어간 오케스트라용 공간이 있었는데, 당시에는 흔치 않은 시설이었다. 그리고 특수 효과를 위한 최신 조명 장치도 설치했다. 기술 면에서는 당시 최고라 할 만했다. 뮌헨 최초의 카바레 무대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낡은 관행을 처형하러 나선 이들은 공개적으로 공연을 하면 검열에 시달릴 걸 알았기 때문에 일주일에 한 번만 ‘초대 손님을 모시고 공연하는 클럽’을 표방했다. 그러나 공연 팸플릿에는 초청장을 구하는 방법이 공공연히 적혀 있었다. 처형인들은 저마다 오싹한 예명을 하나씩 지었다. 뮌헨에 파견된 프랑스 저널리스트로 샹송 가수이자 검은 고양이에서 사회를 보기도 했던 마르크 앙리는 스스로를 발타자르 슈타르 또는 시체라고 일컬었다. 비평가이자 서정시인인 레오 크라이너는 디오니시우스 토드(죽음)가 되었고, 이 그룹의 탄생 주역인 오토 팔켄베르크는 페터 루프트(바람), 재능 있는 작곡가 한스 리하르트 바인회펠은 한네스 루흐(악명)였다. 나머지는 틸 블루트(피), 프리지디우스 슈탕(교수형 밧줄), 막스 크낙스(칼), 제라피온 그라프(무덤), 카스파어 바일(손도끼), 고트프리트 슈틸(죽음), 그리고 빌리발두스 로스트(녹)였다. 피니 뼈니 하는 이런 표현들과 고딕풍의 공포 패러디에서 이들의 성격이 그대로 드러났다.

라팽 아질, 아방가르드 살롱 : 당나귀, 예술학파의 태두 되다
아방가르드에게 카바레는 자궁이나 다름없었다. 볼거리는 카바레의 본질이며, 아방가르드는 자기 존재를 알리기 위해 그 볼거리들을 만들어내야 했다. 이들의 예술가적 반골 기질은 사회와 예술이라는 참호 속에 들어앉아 화석처럼 굳어가는 가치를 겨냥하는 카바레 패러디와 일맥상통했다. 우스꽝스런 코미디에서 신랄한 풍자에 이르기까지 다채로운 유머도 공통된 특징이었다. 대중적인 요소를 예술에 활용하는 것도 똑같았다. 마지막으로 카바레의 공연 성격, 아이러니한 코멘트를 사이사이에 끼워 넣는 불연속성은 당시 가장 실험적인 작품들의 기본 구성과 일치했다. 카바레와 20세기 초의 아방가르드가 공유한 이런 유사성은 한쪽이 다른 한쪽을 창조하고 다시 그것으로부터 영향을 받는 양방향의 역동성을 낳았다.
세기의 전환기에 몽마르트르에 모여든 가난한 화가와 작가들은 예술의 정의를 확대해 개인적인 삶의 모습까지 포함시켰다. 장난스런 언행과 왁자지껄한 술판도 시와 그림을 낳는 창의력의 원천이었다. 이 시기에 영향력의 진폭이 가장 큰 예술의 본거지는 ‘라팽 아질’이었다.
생 뱅상과 솔 거리가 교차하는 가파른 언덕배기, 급격한 도시 팽창과 더불어 몰려드는 투기꾼과 물가 폭등으로부터 이 파리의 명물을 보존하고 싶었던 아리스티드 브뤼앙이 이곳을 매입했고, 재기 발랄한 화가 A. 질이 프라이팬에서 튀어나오는 커다란 토끼 그림을 간판에다 그리면서 카바레 라팽 아질이 탄생했다(‘화가 A. 질’을 프랑스어로 하면 la peint A. Gill, 즉 ‘민첩한 토끼’라는 뜻의 Lapin Agile과 발음이 같다).
브뤼앙은 이 카바레를 프레데리크 제라르에게 임대했다. 프레데라는 애칭으로 통하던 이 털북숭이 사내는 몽마르트르에서 기타를 팔던 사람인데, 마음이 약해 가난한 예술가들에게 외상을 남발했다. 이후 10여 년 동안 이곳은 예술가들의 대표적인 회합 장소였다. 피카소, 아폴리네르, 막스 자코브, 프랑시스 카르코, 앙드레 와르노, 위트릴로, 피에르 마크 오를랑, 롤랑 도르젤레, 마리 로랑생, 앙드레 살몽, 쥘 데파키에, 그리고 요아킴 라파엘 보로날리. 마지막에 언급된 이 화가가 명성을 얻는 과정을 보면 라팽 아질 그룹의 독창적인 상상력을 분명히 확인할 수 있다.
롤랑 도르젤레는 나중에 문단의 저명인사가 되지만 이때만 해도 쪼들리는 예술가였다. 붉은 스웨터와 딱 붙는 검은 재킷을 입고 다녀서 애도하는 메뚜기 같은 인상을 풍겼으며, 무엇보다 장난을 잘 치기로 유명했다. 도르젤레는 라팽 아질에 들락거리던 입체파 화가들에게 진 빚을 갚기로 작정했다. 그는 입체파들을 허세꾼으로 여겼고, 또한 이들의 대변인 격이던 아폴리네르가 이 사조에 대한 어떤 질문이나 비판에도 묵묵부답으로 일관하는 걸 고까워했다. 입체파를 조롱하는 한편 유행에 지나치게 민감한 파리에서 명성을 얻기란 식은 죽 먹기라는 걸 입증하기 위해 도르젤레는 보로날리라는 화가를 만들어내어 과격파라는 새로운 화풍의 창시자로 포장했다. 보로날리는 이 화풍의 취지를 설명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미래파의 문장을 완벽하게 패러디한 이 성명서는 시조가 이탈리아인인 것을 비롯해 파리 대중이 보기에 꽤 신빙성이 있었다. 화단에 넘쳐나는 온갖 ‘주의’에 대한 논란을 불러일으킨 후, 도르젤레는 화가를 찾는 일에 착수했다.
캐나다 사냥꾼과 코르시카 산적을 반반 섞어놓은 듯한 프레데는 당나귀 한 마리를 키우고 있었다. 롤로라는 이름의 이 당나귀는 라팽 아질의 소박한 시골풍 분위기와 잘 어울렸다. 그리고 도르젤레는 이 당나귀에게서 화가의 면모를 발견했다. ‘화가’를 찾아낸 도르젤레는 주변의 속물 친구들과 라팽 아질에 모인 사람들에게 다음번 살롱 데 쟁데팡당에 지금껏 보지 못한 가장 독창적이고 도발적이며 혁명적인 작품을 내겠다고 호언장담했다.
그는 집행관 입회하에 롤로의 꼬리에 붓을 묶고 다채로운 색의 물감을 준비했다. 애지중지하는 당나귀가 다칠까 걱정이 된 프레데도 한쪽에서 지켜보았다. 롤로는 먹이를 배불리 먹었고, 식사를 든든히 마친 당나귀가 꼬리를 흔들어대는 건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롤로가 꼬리를 흔들자 물감을 듬뿍 머금은 붓이 움직이면서 앙드레 와르노가 들고 있던 커다란 캔버스에 그림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캔버스에는 꽤나 신기하면서 흥미로운 효과가 나타났다. 다음 단계는 제목을 짓는 일이었다. 토의 끝에 도르젤레는 파리 비평가들의 입에 오르내릴 만한 제목을 생각해냈다. 〈그리고 태양은 아드리아 해에 지고〉. 그린 이, 요아킴 라파엘 보로날리.
롤로의 걸작은 살롱 데 쟁데팡당에 맞춰 완성되었고, 도르젤레는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관람객들의 반응을 살폈다. 그가 숨죽이며 고대했던 그대로였다. 대중과 평단의 의견이 갈리긴 했지만 대부분의 평론가가 이 작품을 거론했다. 작품을 다루는 태도나 비중 면에서도 함께 전시되었던 반 동겐이나 마티스, 루오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폭탄을 터뜨릴 완벽한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그는 언론에 자신의 장난을 밝혔고, 신문에는 이런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당나귀, 예술 학파의 태두 되다.?? 롤로는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일찍이 살롱에 그렇게 많은 관람객이 몰린 적은 없었다.
도르젤레의 회상에 따르면, 처음 살롱을 찾은 관람객들은 여전히 어떤 작품이 당나귀 보로날리의 그림이고 어떤 작품이 20세기 거장이 될 재목의 그림인지 구분하지 못했다고 한다. 수십 명이 구입 의사를 밝혔고, 롤로는 꼬리 몇 번 흔든 것만으로 불후의 화가 반열에 올라 엄청난 돈까지 벌었다. 베네지트는 이 사실을 모른 채 자신의 저서에 롤로를 이탈리아 화가로 언급하는 실수를 범했다. 전해지는 바로는 한동안 파리 사교계에서 명성을 떨치던 롤로는 시골 별장 생활의 따분함을 견디지 못하고 전쟁 중에 생 시르 쉬르 모랭 강에 뛰어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한다. 과연 진정한 예술가답게 ‘신경쇠약’이 자살 이유였다.
도르젤레의 장난으로 인해 이른바 예술계의 감식안은 시험대에 올랐고, 한 시대를 풍미하는 취향이라는 게 얼마나 위선적인지 만천하에 드러났다. 그리고 간간이 천재성에 사기성을 섞은 아방가르드의 선명한 독창성이 강조되었다. 아방가르드는 장난도 의례적인 평가 기준을 적용해 예술로 만들 수 있다는 걸 입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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