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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봄 슬프고 좋은 봄 그들이 나의 숨구멍 고통이라는 열쇠 떠날 땐 뒤돌아보지 않는다 운 나쁜 쥐와 우리의 혐오 죽은 자리에서 태어나다 여름 사마귀에게 경의를 두려움의 뒷면을 만나다 지난 몸을 잊다 안간힘을 다하다 완전연소의 꿈 눈속임의 천재들 가을 벌집 사이를 오가다 먹는 일과 먹히는 일 나의 눈먼 두꺼비 다가간다, 목숨을 걸고 소멸의 시간, 멈추거나 떠나거나 하찮은 미물에 마음을 포개다 겨울 마이너스란 없다 떠나려는 갈망과 불안 반나절 인연 마지막 나비 중력에 저항하다 먼지처럼 가볍게 책에 등장하는 비인간 생명체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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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꽃을 위해 일하지만, 사실은 꽃이, 새가, 햇살이, 빗방울이 나를 부축해 살리고 있음을 안다. 흙이 몸을 벌려 꽃을 키우고, 꽃이 몸을 열어 생명을 키우고, 뭇 생명이 몸을 바쳐 나를 키웠으니, 내 몸이 돌아갈 자리가 첫 흙임이 마땅하고 응당하다. 내게 ‘회춘’은 ‘윤회(輪回)’다. 형태만 변할 뿐 사라지지 않는 물질의 윤회. 두 단어가 가진 각각의 중의성이 마음에 든다. 아무래도 나는 이 보드라운 흙 위에서 생을 마칠 것 같다. 식물처럼, 식물의 잔여물처럼, 퇴적되어 썩을 것 같다. 좋은 일이다.
---p.20 「슬프고 좋은 봄」 중에서 올챙이가 성체로 변태(變態)하려면 꼬리가 죽어야 한다. 꼬리 세포들은 몸으로 흡수될 때 저항하지 않는다. 자기가 꼬리임을 고집하지 않는다. 없어질 것이 없어져야 새로운 몸이,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변태는 표면적인 변화이자 근본적인 변화다. 형태뿐 아니라 속성까지 달라진다. 물속에서 아가미로 호흡하며 풀을 먹던 올챙이가 뭍으로 나와 허파와 살갗으로 숨 쉬며 곤충을 잡아먹는다. 몸의 대변혁이다. 변곡점을 통과하면 존재는 송두리째 바뀐다. ---p.57 「죽은 자리에서 태어나다」 중에서 나는 오래전 번식기를 통과하여 현재 번식 후기에 살고 있다. 곤충이 아닌 인간으로 태어난 덕에 번식 후기가 제법 길다. 활활 타고 남은 잔불의 정체성을 새롭게 받아들이는 중이다. 아껴둔 욕망이 있다면 다 태우고 가라고, 다 긁어내고 가라고, 갱년기의 열이 몸의 마지막 땔감을 탈탈 태운다. 갱년기도, 늙음도, 죽음도, 다 인생의 첫 경험이라는 생각을 한다. 어디까지 애쓰다가 어디쯤에서 놓을 것인가. 나는 타다 만 눅눅한 숯보다 완벽하게 다 타서 흩어진 흰 재가 좋다. 완전연소의 꿈을 이룰 수 있기를 바란다. ---pp.101-102 「완전연소의 꿈」 중에서 그 갑옷을 벗자 안에서 다른 갑옷이 자랐다. 이번엔 현명한 사람, 똑똑한 사람, 능력 있는 사람을 흉내 냈다. 그에 못 미치는 나를 책망했고, 긴장했고, 안간힘을 다했다. 갖지 못한 것을 선망하느라 가진 것을 돌아보지 못했다. 나를 인정하지 못하는 내가 보호색을 입고 타자를 의태했다. 나는 무엇이 부끄러웠을까. 자벌레처럼, 대벌레처럼, 내동댕이쳐져 밟히지 않으려고 감쪽같이 숨었을까. 나비가 아니라서 위축되었을까. 나방인 게 어때서. ---p.114 「눈속임의 천재들」 중에서 우리 집 마당은 곤충과 양서류와 파충류가 먹이사슬을 이뤄 ‘살아가는’ 공간이다. 폴짝 뛰는 메뚜기를 개구리가 채어 먹고, 달아나는 개구리를 뱀이 물어 삼킨다. 누군가 살려면 누군가 죽지 않을 수 없으니 ‘살아가는’은 ‘죽어가는’의 동의어일까. 유전자의 지속성으로 보면 영구히 사는 일이되 개체의 일회성으로 보면 영원한 소멸이다. 살리는 일과 죽이는 일이 동시에 일어나고, 먹히는 일이 먹는 일을 떠받친다. 내가 일평생 먹어온 수많은 살이여. 당신들의 일회성 살을 무수히 먹고 내 일회성의 몸은 아직 건재하다. ---pp.134-135 「먹는 일과 먹히는 일」 중에서 추석을 앞두고 풀 베는 예초기 소리가 마을 길에 요란하다. 나는 풀숲 그늘에 엎드린 작은 동물들, 그중에서도 특히 느려터진 두꺼비를 생각한다. ‘제발 도망가라, 도망가. 눈치 빠른 쥐처럼, 미끄러운 뱀처럼, 겁쟁이 개구리처럼, 제발 달아나라, 달아나.’ 그러나 나는 무력하고 내 기도는 헛되다. 예초기 소리가 그치고 길과 들판이 조용해진다. 그들은 소리 내지 않는다. 학살 중에도, 학살이 끝난 후에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아무도 모른다. 하찮은 죽음에 누구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pp.145-146 「나의 눈먼 두꺼비」 중에서 어미 거미들이 산란할 때까지 나는 거미줄에 손대지 않는다. 11월 첫서리에 그들이 모두 사라지면 집 외벽을 포위하다시피 한 십수 개의 텅 빈 거미집을 먼지떨이가 달린 장대를 휘둘러 모조리 없앨 것이다. 주인 없는 집은 찌꺼기이자 잔해일 뿐, 진짜 알맹이는 저 알집에 오글오글 모여 있다. 봄날의 풀잎과 여름 메뚜기를 거쳐 가을 거미의 정자와 알로 옮겨간 태양 에너지가 겨우내 알집 속에 웅크려 있다가 내년 봄 어린 거미들로 바글바글 환생할 것이다. ---p.157 「다가간다, 목숨을 걸고」 중에서 새들에게 홍시를 허하는 건 ‘내 것’들로 둘러싸인 ‘내 방’을 벗어나는 것보다 훨씬 쉽다. 그러나 누가 허하고, 누가 주며, 누가 받는다는 건가. 저 감이 나의 감인지, 새의 감인지, 나무의 감인지 어찌 아는가. 씨앗이 떨어져 땅에 뿌리 내릴 때 흙의 습기와 양분에 소유권을 물을 수 없고, 꽃과 열매와 딱정벌레와 새들은 모두 이 행성의 생명계에 속한다. ‘내 것’이라는 확신은 거대한 착각일지도 모른다. ---p.179 「마이너스란 없다」 중에서 철새의 장거리 이주는 새의 몸을 생리학적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일이다. 그들은 시각과 청각, 바람과 기압, 지구 자기장 등 몸이 감지할 수 있는 모든 감각을 총동원해 길을 찾는다. 과거에 없던 인공의 구조물과 빛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지금, 새들은 폭력적인 빛의 홍수에 빠져 온 힘을 소진하고, 감각이 교란당하고, 인공물에 부딪쳐 떨어져 죽는다. 도달해야 할 그곳을 그리워하며, 속수무책 길에서 죽는다. ‘어둠을 밝히는 빛’이라는 상투적 찬사는 빛이 일으킨 파괴적 고통을 감춘다. 우리는 ‘죽음의 빛’, ‘학살의 빛’에 책임이 있다. 어둠은 보존되어야 한다. ---p.189 「떠나려는 갈망과 불안」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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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두꺼비”가 우리를 멈춰 세운다
한 눈으로 살아낸 두꺼비의 삶이 대견하고 애틋했던 작가는, 그날 이후 집 주변에서 두꺼비와 마주칠 때마다 눈부터 확인한다. 눈먼 두꺼비를 만나면 마음이 환해지고, 눈먼 두꺼비가 오래 보이지 않으면 걱정하며 그리워한다. 수많은 두꺼비 가운데 유일한 두꺼비, “나의 눈먼 두꺼비”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된다. 눈 잃은 두꺼비로부터 출발한 글은 “무단횡단자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지고, 풀숲에 숨은 두꺼비의 비극적 운명 앞에 우리를 멈춰 세운다. 그 자체로 하나의 완결된 에세이인 《나의 눈먼 두꺼비》(3부 ‘가을’ 편)는 내용과 주제 면에서 책이 가리키는 방향성을 압축해 보여준다. 한 편의 소항목 제목이 책의 표제로 등극하게 된 이유다. ‘인간중심주의’로 만물의 가치를 재단해온 우리의 오랜 습관 도시에 살았더라면 만나지 못했을 온갖 비인간 생명체들이 매일 작가의 일상 속으로 뛰어든다. 목숨을 걸고 짝짓기하는 무당거미, 수로에 숨어든 도롱뇽, 빗물 통에 빠진 쥐, 다락방에 기어든 깡충거미……. 작고 연약하고 치열한 생명체들이 한 인간의 감각과 세계 인식을 바꾸어놓는다. 작가는 낮은 눈길과 느린 걸음으로 그들의 세계를 탐색하기 시작한다. 작고 연약한 생명체들의 경이로운 의태 능력, 인간의 직관을 뛰어넘는 그들의 감각 세계를 들여다보며 작가는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는 한편 인간중심주의로 만물의 가치를 재단해온 우리의 오랜 습관을 반성한다. 때가 이르면 저항 없이 퇴장하는 그들을 보며, 이 땅에 잠시 머무는 유한한 유기체로서 그들과 우리가 다르지 않음을 절감한다. 우리 곁에 존재하는 작은 그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어느덧 생명에 대한 근원적 질문과 인류가 저질러온 파괴에 대한 묵직한 성찰 앞에 서게 된다. 동물에 대한 혐오, 두려움, 적의는 당연한가? 유해동물, 혐오동물이라 흔히 말하는 동물들에 대해서도 작가의 시선은 편견 없이 작동한다. 땅바닥에 뿌려진 밀가루를 핥는 쥐가 작가의 눈에는 ‘배고픈 작은 동물’로 보인다. 귀찮기 그지없는 파리도 알고 보면 놀라운 감각 능력의 소유자이고, 생태계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분해자이다. 벌들은 자기 집이 공격받지 않는 한 사람을 공격하지 않지만, 사람은 자기 두려움 때문에 벌들을 몰살시킨다. 두려움과 혐오의 뿌리는 무지다. 작가는 지렁이나 애벌레를 징그러워하지 않고, 벌과 쥐와 뱀을 박멸의 대상으로 보지 않는다. 악의와 탐욕으로 상대를 절멸시키고 나아가 세상을 파괴하는 건 그들이 아니라 인간이다. 이 책은 동물에 대한 막연한 공포와 혐오, 적의를 돌아보게 하는 한편, 생김새나 유용성을 기준으로 다른 생명체를 평가해 온 인간 중심적 편견의 근저를 조금씩 흔든다. 생존과 소멸의 순리를 엿보는 자리 먹고 먹히고, 짝짓기하고 새끼를 키워내고, 마침내 생을 다해 돌아가는 그들을 작가는 경외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매미가 벗어놓은 허물에서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떠올리고, 호랑나비와 하늘소와 달팽이의 번식과 소멸 위에 자신의 갱년기와 노화를 겹쳐 본다. 사향제비나비를 의태한 두줄제비나비붙이 나방에게서 보호색을 입고 타자를 의태했던 젊은 날의 자신을 떠올리고, 뱀의 입속으로 삼켜진 참개구리, 직박구리에게 먹힌 노랑나비, 분해되어 흙으로 돌아가는 죽은 동물 앞에서 유기체의 유한성과 생명의 순환을 긍정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