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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1. 마망과 런어웨이 걸 - interview 끔찍하고 아름다운 마음의 풍경_필립 래럿스미스(이스턴 파운데이션 큐레이터) 2. 세상을 등질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 - interview 완벽한 순간, 순전한 기쁨_프랜시스 모리스(前 테이트 모던 관장) 3. 삶을 사랑하라는 전언 - interview 폐허에서 발견한 생의 얼굴_한선정(한영수문화재단 대표) 4. 우리는 모두 몸을 갖고 있다 - interview 예술 바깥에서의 사유_이건용(미술가) 5. 예술은 영성을 대신할 수 있는가 - interview 부재하는 것을 함께 경험하기_서울미디어시티비엔날레 예술감독팀 6. 접히지 않는 마음 - interview 장소와 관계 맺기_박소희(파마리서치문화재단 큐레이터) 7. 자기만의 방, 나의 토템들 - interview 감추어진 것을 들춰내는 일_이은실(미술가) 나오며 |
안동선의 다른 상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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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미술관에서 잘 운다. 평소에는 메마르고 딱딱한 나무 껍질처럼, 내 안의 연약한 존재를 숨기기 위해 가드를 올린 채 살아간다. 그런데 미술관에서는 다르다. 작품과 나만 있는 것 같은 공간, 사위가 고요하고 최적의 온도와 조명이 갖춰진 안전한 공간, 무엇보다 다른 사람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공간. 거기 있으면 내 고독한 처지가, 쓰라린 마음이, 못난 생각이 들키지 않을 것 같다. 그 안에서는 마음을 열고 작품과 무언가를 주고받을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예술에서 얻는 수많은 것-환희, 환기, 깨우침, 재미, 확장, 연결-가운데서도 특히 위로를, 나아가 구원을 얻는 순간을 애타게 기다린다.
--- p.7~8(들어가며) 나는 그 앞에서 멈춰 한참을 바라봤다. 가까이 다가가 들여다보면 물감의 투명도가 조금씩 다르다. 같은 회색인데 어떤 것은 안으로 가라앉고, 어떤 것은 표면 위로 부유한다. 설정한 제약 안에서 형태, 색조, 질감이 무한히 변주되는 그 아름다움은 사진으로는 절대 전달되지 않는 종류의 것이었다. 휴대전화 카메라로 찍어 낸 마틴의 그리드는 평면적인 격자에 불과하지만, 전시장 조명 아래 직접 마주한 그림은 공기 중의 먼지처럼 부유하는 빛의 파동을 발산한다. 그것은 오직 ‘세상을 등지고’ 작품 앞에 홀로 선 관람객에게만 허락되는 경험이다. --- p.63(2. 세상을 등질 때 비로소 보이는 것들) Q. ‘세상을 등진’ 은둔자로 알려진 아그네스 마틴은 역설적이게도 오늘날 현대미술의 스타일 아이콘이기도 합니다. 누빔 워크웨어를 입고 머리를 땋은 채 작업을 준비하는 그의 단호하고 초월적인 모습은 SNS에서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죠. 빛나는 예술가들을 좇다 보면 이런 극적인 역설을 종종 만나게 되는 것 같습니다. A. 동의합니다. 아그네스 마틴은 20세기 미술가 중에서도 유독 모호하고 신비로운 작가예요. 자신의 작업에 대해 직설적으로 말한 적이 거의 없으니까요. 그래서 이번 전시에서 상영할 예정인 메리 랜스의 다큐멘터리 〈세상을 등지고〉가 회화 작품만큼이나 중요합니다. 마틴이 그림을 그리는 과정을 직접 증언하기 때문이죠. (붓질하는 동작을 흉내 내며) 영화를 보면 그가 마치 집을 짓는 사람처럼 붓을 놀리는 마술적인 장면이 나옵니다. 그는 늘 “이미지가 나에게 온다”고 말했죠. 흥미로운 지점은 그 이미지가 탄생하는 찰나와 회화를 만드는 실제 ‘노동’ 사이의 관계입니다. 작품을 실제로 마주하면 만드는 과정을 인지하게 하는 물성이 명확히 확인되지만, 정작 작가는 그 육체적 과정에 대해서는 침묵했거든요. --- p.81~82쪽[interview 완벽한 순간, 순전한 기쁨-프랜시스 모리스(前 테이트 모던 관장)] 이건용 작가는 말했다. 우리는 건강하든 노쇠하든 몸을 가지고 있고, 그 조건 자체가 작품이 될 수 있다고. 세갈은 자기가 20년 전에 만든 노래 앞에서도 몸이 먼저 반응한다고 했다. 아티아는 되돌리지 않는 것도 하나의 수리라고 했다. 이제야 그 말들의 다음 문장을 쓸 수 있을 것 같다. 몸이 완전했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을 것이다. 숙취가 이틀 넘게 지속되니 그제야 내가 늙었다는 것, 몸을 사려야 한다는 것을 인지하고, 종아리에 쥐가 나는 밤이 있어 남의 걸음 속도를 알아차리고, 떨리는 손이 있어서 흔적이 남는다. 몸의 한계는 우리를 겸허하게 만들고, 그 겸허가 우리를 인간이게 한다. 필러로 편집하려 했던 얼굴도, 가속도가 붙은 채 노화하는 몸도, 지금 이 문장을 쓰느라 뻐근해진 어깨도 불완전함으로써 이미 작품의 조건 안에 있다. 우리는 모두 몸을 갖고 있다. --- p.147(4. 우리는 모두 몸을 갖고 있다) 내 사주에는 말 대신 돼지가 있다. 돼지는 ‘정신의 역마’라 실제로 돌아다니기보다는 상상과 공상으로 시공간을 오간다. 샤갈 그림 속 날아다니는 사람들처럼. 하지만 올해는 나 역시 불기둥의 영향권 아래서 거의 매달 온갖 곳을 나다녔다. 지난 여름 특이한 미술관이 보고 싶어 방콕에 갔다가 보름 뒤에는 건물 그 자체가 된 작품을 보겠다고 다시 서른 시간을 이동했다. 그러느라 또다시 (남편은 모르는) 카드빚이 쌓였다. 왜 굳이 가려고 할까? 나도 서도호 작가처럼 착 착 접어 가지고 다닐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왜 어떤 것들은 끝내 접히지 않는가. --- p.219(6. 접히지 않는 마음) Q. 미리 말씀드리기도 했는데, 저희 집 거실 중앙에 〈예민한 심장 Ⅰ〉이 걸려 있어요. 매일 그 그림을 바라보기도 하고 등지기도 하면서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사람들과 모여 놀기도 하죠. 짓궂은 질문인데(웃음), 미술관과 일상 공간 중 어느 쪽이 작품에게 더 좋은 삶이라고 생각하세요? A. 미술관은 보다 많은 사람에게 작품이 열려 있다는 점에서 또 다른 의미를 지닙니다. 다양한 시선 속에서 작품이 해석되고 확장될 수 있는 공간이니까요. 반면 개인의 공간에 놓인 작품은 더욱 깊은 사유의 시간을 가능하게 하는 측면이 있어요. 어느 한쪽이 더 좋다고 말하기보다는, 각각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작품의 삶을 만들어 간다고 생각합니다. --- p.318쪽[interview 감추어진 것을 들춰내는 일-이은실(미술가)] 명나라의 문인화가 동기창은 왕유의 〈망천도〉를 언급하며, 그림이란 세상사를 모두 잊게 해 주는 기물이라고 했다. 마지막 장에 적은 내 토템들이 하는 일도 그렇다. 조선 후기의 문인화가 강세황은 동기창의 그 말을 받아 겸재 정선의 〈하경산수도〉 발문에 “이 복잡한 세상을 떠나서 살 수 없다고 누가 말하던가”라고 적었다. 그림 한 폭으로 세상을 떠나 본 사람의 말 아닌가. 다만 떠나 있는 시간은 짧고, 돌아오면 소란은 그대로다. 그 짧은 시간을 벌기 위해 전시장에 가고, 그 시간을 늘려 보려고 글을 쓴다. 제목이 된 문장도 거기서 나왔다. --- p.325~326(나오며) --- 본문 중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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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강보라,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홍이지 추천
국내외 미술 현장을 누비며 길어 올린 미술 전문 기자 안동선의 내밀한 고백과 대화 사라지는 전시와 휘발되는 감정 사이에서 미술이 건네는 위안의 순간을 글로 붙잡다 매년 9월이면 어김없이 돌아오는 미술계 최대 축제 프리즈 서울은 막을 내렸지만, 차마 다 헤아리지 못할 전시들이 지금 이 시간에도 곳곳에서 부지런히 꾸려지고 있다. 대부분의 사람은 가을 초입에 열리는 이 축제에 잠깐 눈길을 줄 뿐이지만, 미술을 업으로 삼는 이에겐 계절과 국경의 경계 따위는 없다. 이곳의 축제가 끝나면 또 저곳의 축제가 기다리고 있다. 미술 전문 기자 안동선은 어느 누구보다 부지런히 서울과 방콕, 베니스와 뉴욕의 미술 현장을 누비며 눈으로 직접 마주하는 일의 감동을 우리에게 전한다. 하루가 멀다 하고 수많은 전시가 우리를 둘러싸지만, 잠시 머물다 사라지는 것 또한 전시의 속성이다. 사라지는 것은 비단 전시만이 아니다. 작품 앞에서 느꼈던 감정 역시 시간이 흐르며 서서히 휘발된다. 그 모든 것을 붙잡아 두기에는 세상이 너무 빨리 변한다. 우리가 예술을 곁에 두는 이유는 저마다 다르겠지만, 그 안에서 잠시나마 위안을 얻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멀미 나듯 돌아가는 세상에서 미술관은 일종의 진공 상태를 선사한다. 나와 작품 사이에 눈에 보이지 않는 감정 말고는 그 무엇도 없다. 『세상의 소란이 지워지고』는 미술 공간에서의 자발적 고립을 자신만의 완벽한 순간으로 치환해 낸 안동선의 내밀한 고백록이자 인터뷰집이다. 저자는 전시나 작품을 마주하며 느낀 감정과 생각을 먼저 풀어놓고, 그 뒤에 전시를 만든 사람 혹은 전시의 주인공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배치한다. 그렇게 하나의 전시는 서로 다른 두 개의 결로 살아난다. 세상의 소란에서 벗어나 예술 속에서 발견한 고독과 연결의 감각 패션 매거진에서 15년간 문화, 예술 분야를 담당하는 피처 에디터로 일한 뒤, 2017년부터 프리랜서 에디터로 살아온 저자는 퇴사를 고민하는 주변 친구들에게 이렇게 일갈한다. “관이 너를 버리기 전까지는 관에 붙어 있어. 바깥은 춥고 거칠어. 완전 야생이야.” 야생은 언뜻 자유로워 보이지만, 긴장을 늦추지 않고 필사적으로 달려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곳이다. 안에 있어도 경쟁이지만, 바깥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다. SNS에서는 ‘나’라는 존재마저 특별하게 포장하고 전시해야 한다. 자아 퍼포먼스와 셀프 브랜딩은 일상화되었다. 심지어 “삶의 가장 내밀한 상처마저 ‘이 책의 출발점’으로 내건 서문”을 쓰는 자신에게조차 피로감을 느끼던 어느 날, 저자는 카메라를 등진 채 캔버스를 응시하는 한 여성의 뒷모습과 마주한다. 미국의 추상화가 아그네스 마틴이다. 마틴은 세상의 소란이 지워진 곳에 홀로 스튜디오를 짓고 오로지 그림에만 몰두했던 인물이다. 다큐멘터리 속 마틴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혼자 있으면 모든 것에 집중할 수 있어요. 제 인생 최고의 순간들은 혼자였던 시간이었어요.” 저자 역시 마틴처럼 철저하게 고독을 음미하고 싶어 한다. 그러면서도 누군가와 진실로 연결되기를 바란다. 그 모순된 마음을 저자는 숨기지 않는다. 하나의 전시를 보고 나면 안동선의 기억 속에서 비슷한 결의 전시들이 보이지 않는 실로 꿰매어진다. 법정 스님의 입적 16주기를 기리는 전시에서 그는 다시 한 번 마틴을 떠올리며 두 사람이 홀로 머물렀던 방식이 어딘가 닮아 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그 실 끝에는 외딴섬에서 한 땀 한 땀 인체를 빚어내는 호주 출신 작가 론 뮤익이 있다. 세상사의 피로와 헛헛함에서 출발한 이야기는 여러 작가와 작품을 거쳐, 전시를 기획하고 만들어 낸 이들의 목소리로 이어진다. 때로 난해하게 느껴지는 현대미술에 저자의 사적인 경험과 감정이 포개어지고, 여기에 작가와 기획자의 목소리가 더해지면서 미술은 독자 곁에서 한 번 더 태어난다. 범속한 언어로 예술의 세계를 건너는 안동선의 고유함 소설가 강보라는 저자 안동선을 두고 “수다스럽고 범속한 언어로 현대미술이 건네는 고상한 떨림을 번역해 내는 사람”이라고 평했다. 그러면서 “그 언어는 주인을 닮아 몹시 고유하다”고 덧붙였다.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홍이지 역시 이 책을 읽으며 자신을 잠시 잊고 다른 존재의 시간에 자신의 시간을 포개어 살아온 이의 고유함을 떠올렸다고 썼다. 을 포개어 살아온 이의 고유함을 떠올렸다고 썼다. 이 ‘고유함’이야말로 미술기자 안동선을 수식하는 가장 적확한 표현처럼 보인다. 현대미술은 때로 쉽게 다가갈 수 없다는 이유로 고상한 영역에 놓이곤 하지만, 안동선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범속과 고결의 경계는 어느덧 흐려진다. 그곳에는 미술을 진심으로 사랑하여 때로 자신을 잊고, 울컥하기도 하고, 그 시간을 조금이라도 늘려 보려 글을 쓰는 지극한 탐미주의자가 있을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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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이 건네는 고상한 떨림을 안동선만큼 수다스럽고 범속한 언어로 번역해 내는 사람을 나는 알지 못한다. 그 언어는 주인을 닮아 몹시 고유하기도 하다. 그의 삶을 통과하는 순간 미술은 한 번 더 태어난다. 애도할 틈도 없이 떠나보낸 사촌을 기리며 베니스에서 만난 피에르 위그의 영상을 마음의 빈소로 삼는 사람, ‘되돌리지 않는 것도 하나의 수리’라는 카데르 아티아의 말을 빌려 필러로 부풀어 오른 제 입술을 다독이는 사람을 대체 어디서 만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오랫동안 의아해했다. 왜 전시장에 가는 것보다 그가 다녀온 전시 이야기를 듣는 게 더 즐거운지. 작가를 직접 만나는 것보다 그가 작가와 나눈 대화를 읽는 편이 더 짜릿한 이유는 무엇인지. 영문 모를 나의 두 기쁨이 사이좋게 갈마드는 이 책을 읽으며 비로소 깨닫는다. 안동선은 향유의 천재구나. 경청의 고수구나. 툭하면 전시를 보겠다고 카드빚도 불사하고 비행기에 오르는 이 못 말리는 ‘아트 덕후’에게는 미술로 스스로를 구원하고 나아가 타인의 마음까지 들어 올리는 뭉클한 재능이 있다. 그가 이끄는 숨 가쁜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작품 앞에 홀로 선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고요, 온갖 사유로 소란스러운 아주 특별한 고요에 다다르게 될 것이다. - 강보라 (소설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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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가 주는 가장 큰 기쁨은 자아의 소멸인지도 모른다. 너무 깊이 몰두한 나머지 나 자신의 존재조차 잊는 것. 모든 것이 즉각적으로 이해되고 쉽게 만들어지는 시대에 안동선은 오히려 난해하고 정답 없는 예술을 붙드는 작가와 작품들 앞에서 그런 순간을 기록한다.
보이저호가 신호를 보내지 않는 날 함께 은퇴하는 관리자가 있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다. 한 우주선의 시간에 자신의 시간을 포개어 살아온 이의 고유함을 이 책을 읽으며 떠올렸다. 예술을 감상한다는 것도 어쩌면 그런 일인지 모른다. 나의 존재를 잠시 잊고, 다른 존재의 시간에 나의 시간을 포개는 일. 『세상의 소란이 지워지고』는 예술가와 작품, 그들을 둘러싼 이야기를 따라가며 우리가 미처 살아보지 못한 시간과 감각으로 우리를 이끈다. 이 책을 읽는 동안 그렇게 세상의 소란은 잠시 지워진다. - 홍이지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