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이 건네는 고상한 떨림을 안동선만큼 수다스럽고 범속한 언어로 번역해 내는 사람을 나는 알지 못한다. 그 언어는 주인을 닮아 몹시 고유하기도 하다. 그의 삶을 통과하는 순간 미술은 한 번 더 태어난다. 애도할 틈도 없이 떠나보낸 사촌을 기리며 베니스에서 만난 피에르 위그의 영상을 마음의 빈소로 삼는 사람, ‘되돌리지 않는 것도 하나의 수리’라는 카데르 아티아의 말을 빌려 필러로 부풀어 오른 제 입술을 다독이는 사람을 대체 어디서 만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오랫동안 의아해했다. 왜 전시장에 가는 것보다 그가 다녀온 전시 이야기를 듣는 게 더 즐거운지. 작가를 직접 만나는 것보다 그가 작가와 나눈 대화를 읽는 편이 더 짜릿한 이유는 무엇인지. 영문 모를 나의 두 기쁨이 사이좋게 갈마드는 이 책을 읽으며 비로소 깨닫는다. 안동선은 향유의 천재구나. 경청의 고수구나. 툭하면 전시를 보겠다고 카드빚도 불사하고 비행기에 오르는 이 못 말리는 ‘아트 덕후’에게는 미술로 스스로를 구원하고 나아가 타인의 마음까지 들어 올리는 뭉클한 재능이 있다.
그가 이끄는 숨 가쁜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작품 앞에 홀로 선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고요, 온갖 사유로 소란스러운 아주 특별한 고요에 다다르게 될 것이다.
한국에 온 뒤로 이문은 항상 초조했다. 이문의 부모는 많이 일하고 적게 버는 노동을 당연한 듯 평생 해온 사람들이었다. 이문의 이십대가 어떻게든 그들과 다른 미래를 만들고 싶어서 애쓴 시간이었다면 삼십대는 그들과 같은 미래라도 얻기 위해 애가 닳은 시기였다. 첫 직장에서 퇴직금도 못 받고 해고된 후로도 이문은 비슷한 규모의 사업장을 옮겨다니며 시키는 모든 일을 했지만 이
저 칸칸마다 농축된 어둠이 너무 짙었다. 이 작은 지옥 안에서 몇 년을 더 보내야 하는지, 보낼 수 있을지, 그러고 나면 자기는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지 이문은 계산해보려고 했다. 정확히 알 수 있을 것 같다가도 모든 게 깜깜했다. 이문이 앉아 있는 이 칸에 쌓인 어둠만큼, 딱 그만큼은 확실한 것 같다가도 그마저 흐물흐물 풀어져 사라졌다.
노동자를 쉽게 자를 수 없는 조건을 갖춘 기업, 잃을 게 많아서 여론을 무서워하고 직원들을 어르고 달래야 하는 기업에 들어가고 싶었다. 그렇다고 내가 뭐 엄청나게 대단한 환경 을 바라는 건 아니었다. 그저 총무과와 인사과가 따로 있는 정도 파티션으로 자리가 나뉘어 있고, 식대 카드 한 장을 여럿이 돌려 스지 않는 곳. 주기적으로 방문하는 청소 노동자가 있어 직원들이 직접 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