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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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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목차

저자 소개 2

“만약 이런 일이 생긴다면?”이라는 질문에 혼자 묻고 답하며 온종일 즐거울 수 있는 사람. 오롯이 내 의도와 계획으로 축조된 세상을 마주하며, 나만의 유토피아를 짓는다. 만들고 무너뜨리기를 반복하는 창조의 시간을 즐긴다. 가급적 오랫동안 글을 쓰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
2022년 에세이 《사랑에 빚진 자가 부치는 편지》를 발표하며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로맨스 소설 《러브 알러지》, SF 소설 《레드 플래그: 주의가 필요한 사람들》을 썼다. 2025년 《안녕, 레온》으로 제12회 대전정보문화산업진흥원장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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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목정보

발행일
2026년 10월 30일
쪽수, 무게, 크기
308쪽 | 130*200*18mm
ISBN13
9791174578655

책 속으로

서원은 눈을 감고 아키오를 떠올렸다. 소복이 쌓인 눈밭에서 황색 군복을 입고 맨발로 설원을 걷고 있는 아키오. 추위로 언 손은 대나무 마디처럼 갈라졌고, 찢어진 볼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전쟁으로 폐허가 된 땅은 내딛는 걸음마다 비명을 지르며 먼지처럼 바스라졌다. 그리고 기다란 절망의 끝에 서슬 퍼런 눈을 한 남자가 꼿꼿하게 서서 아키오를 내려다보고 있다.
--- p.5

가이는 타노라는 여자의 삶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그럴수록 마음 깊숙이 묵직한 돌이 가라앉는 듯했다. 시대극이라서가 아니었다. 여태 연기했던 인물들은 대본 속에서 태어났지만 타노는 실제 숨 쉬고 울었던 사람이었다.
--- p.61

카메라를 비스듬히 든 남자는 몇 걸음 더 걸어 나오더니 자신을 보며 씨익, 웃었다. 괴랄한 미소였다. 가이는 의식적으로 달아나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얼어붙은 다리는 좀처럼 움직여주지 않았다. 마치 꿈속에서 허우적대는 기분이었다. 가이는 억지로 몸을 돌리고 가방을 움켜쥔 채 발걸음을 뗐다. 천천히, 그러나 곧 속도가 붙었고 가이는 전력으로 뛰기 시작했다.
--- p.93

선아는 욕실 문을 잠그고 욕조 배수구에 마개를 꽂은 뒤 레버를 온수 쪽으로 돌렸다. 수전에서 흘러나오는 고요한 물소리가 욕실 안에 퍼졌다. 아들 서원은 선아가 받아주는 따뜻한 목욕물을 유독 좋아했다. 그녀는 손등까지 내려온 블라우스 소매를 조심스레 걷어 올리고 물의 온도를 확인했다. 무릎을 꿇고 앉은 탓에 흰색 랩스커트가 바닥에 질질 끌렸다. 하지만 아들을 생각하면 참을 수 있는 일이었다. 부모라면 자식을 위해 희생할 줄도 알아야 하니까.
--- p.129

“형, 가는 김에 하이센스 좀 갖다줘.”
그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눈썹을 찌푸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서원은 멀어지는 그의 등을 바라보다가 해월이 앉아 있는 쪽으로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 p.162

왜일까. 매번 숨기려 했던 진실은 어느새 해월에게 흘러가 있다. 목구멍 안쪽이 사박사박 긁히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어쩌면 서걱거리는 건 목이 아니라 마음일지도 모른다. 너는 모를 거야. 내가 백서원을 어떻게 만났고, 어떤 사랑을 했는지. 그 말이 몸속 깊은 곳에서 메아리쳤다.
--- p.217

믿는다. 가이는 그 말을 천천히 곱씹었다. 지금껏 나조차도 나를 온전히 믿어본 적이 없었다. 내가 하는 말, 내가 느끼는 감정, 내가 내리는 결정. 이 모든 것이 언제나 오답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전제로 살아왔다. 의심은 습관이 되었고, 늘 누군가의 판단에 기생하듯 명분을 찾아왔다. 그러나 이제 삶의 흐름이 달라지고 있었다. 누군가의 기준에 나를 욱여넣는 지긋지긋한 일상들. 가이는 가만히 과거를 더듬어보았다. 아등바등 살아왔던 뜯겨나간 자국들. 이제는 방향을 바꿔야 했다.
--- p.240

가이가 연기한 장면 속에는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깃들어 있었다. 모든 여백과 공간 사이에 여태 전하지 못한 말들이 가만 남아 있었다. 앞으로 같이 쓰다듬고 나눠야 할 이야기들이었다. 두 사람이 내쉬는 숨소리 사이로 파도 소리가 조용히 밀려왔다가 다시 사라졌다. 버드나무처럼 길게 늘어진 가로등 불빛이 발끝에서 희미하게 흔들렸다.
--- p.305

출판사 리뷰

헤어지자는 말로는 끝나지 않은 첫사랑
시간이 흐른 뒤에야 가능한 이별


헤어진 지 5년, 첫사랑과 함께 영화를 찍게 됐다. 톱스타 배우 서원에게 가이는 가장 화려하면서도 우울했던 시절을 함께한 사람이자 자신의 나약함으로 놓쳐버린 사랑이다. 영화 촬영장에서 가이를 다시 만난 그는 익숙한 습관과 작은 몸짓 속에서 과거의 흔적을 발견한다. 변하지 않은 모습에 반가워하며 그때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커진다.

그러나 기억 속에 남은 사람과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 사이에는 각자가 살아낸 시간이 쌓였다. 가이에게는 해월과 함께 쌓아온 일상이 있고, 서원과의 관계에서 입은 상처도 여전히 남아 있다. 이 소설은 한때 사랑했다는 사실만으로는 되돌릴 수 없는 관계의 균열을 섬세하게 그린다. 과거의 잘못을 인정하고 상대의 현재를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필요한 법, 그렇게 뒤늦게 마주한 진심은 오래 미뤄온 이별을 비로소 가능하게 한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통제와 방치
그 안에서 자란 사람들


서원의 엄마 공선아는 아들을 여전히 ‘아가’라고 부른다. 그의 일과 관계는 엄마의 뜻에 따라 움직여야 한다. 서원은 자신을 옭아매는 통제를 알아차리면서도 엄마를 거스르면 안 된다는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한편 가이의 엄마는 정반대의 방식으로 상처를 준다. 혼자서도 잘할 것이라는 말 뒤로 물러서고, 딸이 고통을 털어놓을 때조차 그 마음을 헤아려주지 않는다. 한쪽은 지나치게 개입하고 다른 한쪽은 등을 돌리지만, 두 사람 모두 자신의 감정보다 엄마의 반응을 먼저 살피며 자란다.

그렇게 배운 사랑의 방식은 성인이 된 뒤의 관계에도 스며든다. 서원은 가이를 사랑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마다 엄마의 그늘로 숨고, 가이는 버림받지 않기 위해 상대가 원하는 모습을 갖추려 애쓴다. 서로의 결핍을 알아보았기에 가까워졌지만, 그 결핍으로 인해 서로를 아프게 하기도 한다. 『하이센스』는 비틀어진 모성이 남긴 상처와 그 영향에서 벗어나려는 이들의 몸부림을 함께 그린다. 익숙한 관계에 맞서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자기 삶의 선택을 스스로 감당하는 과정이 두 청춘의 성장통으로 펼쳐진다.

영화 《영령》에서 만난
피하고 싶었던 얼굴들


작품 속에서 두 사람이 촬영하는 영화 《영령》은 가이와 서원이 외면해 온 상처를 되비추는 거울이다. 일본의 억압과 전쟁 속에서 감정을 누르고 살아온 조선인 여성 타노는 아들 아키오에게도 냉담한 엄마인데, 타노를 연기하는 가이는 자신의 고통에 무심했던 엄마를 떠올리는 동시에 타인의 눈치를 살피느라 진심을 감추고 살아온 자신을 발견한다. 아키오를 연기하는 서원 역시 부모의 뜻과 가문의 명예로 인해 존중받지 못하는 소년에게서 엄마의 기대에 맞춰 살아온 자기 모습을 본다. 그것은 엄마의 통제를 알면서도 벗어나지 못하는 서원의 마음과 겹친다.

기억력 증진을 목적으로 개발됐으나 감정 몰입에도 도움이 된다고 알려진 신약 ‘하이센스’가 두 사람의 기억과 감각을 생생하게 끌어올린다. 약의 도움으로 배역에 깊이 몰입할수록 과거의 상처와 눈앞의 촬영 장면이 포개지고, 인물의 감정과 자신의 감정을 구분하기 어려워진다. 두통과 불안, 혼란을 겪으면서도 연기를 위해 약에 기대는 이들에게 《영령》 촬영은 자신이 어떤 사랑을 받았고 그 안에서 무엇을 잃었는지 되짚는 과정이 된다.

사랑할수록 숨고 싶다
우리는 왜 이토록 사랑에 매일까?


가이는 사랑받고 싶다. 그러나 가까운 사람에게 자신의 약한 모습을 보여주는 일은 두렵다. 가이가 감춘 마음은 해월에게 닿을 수 없고, 말하지 않은 사정은 두 사람 사이에 빈틈을 만든다. 서원은 자신을 통제하는 엄마에게 여전히 인정받고 싶다. 사랑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갈망하면서도 보이지 않는 구속에서 빠져나오기 힘들어한다.

마음 깊은 곳에 쌓인 인물들의 두려움과 외로움을 들여다보자. 전쟁과 가족 안에서 벌어지는 폭력이 그것을 연기하는 배우들에게 어떤 마음을 주는지 들여다보면,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여전히 사랑을 갈망하며 자신을 내놓는 이들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묻어둔 기억이 또렷해진 뒤에도 기꺼이 다시 사랑에 투신할 수 있게 하는 젊은 마음이, 이 소설 안에 생생히 살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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