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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 고요에 놓인 시간, Friluftsliv
1. 해가 아직 오지 않은 땅, 북극 스발바르(Svalbard) 2. 하루가 네 시간뿐인 산, 스발바르 트롤스테이넨(Trollsteinen) 3. 북극의 오래된 식탁, 물범 스테이크(Seal Steak) 4. 기다림 끝에 춤추는 빛, 당신의 오로라는 어디에 있는가?(Aurora) 5. 분홍빛을 곁에 두고, 8,841km 로드트립(Road Trip) 6. 돌에 새겨진 시간, 알타 암각화 박물관(Alta Museum) 7. 바람이 가져갔는지, 바위가 들었는지, 트롤퉁가(Trolltunga) 8. 함께 젖은 여행 메이트, 셰락볼튼(Kjeragbolten) 9. 피오르가 말해준 것, 게이랑에르(Geiranger) 10. 여덟 번의 여름과 열한 번의 숨, 트롤스티겐(Trollstigen) 11. 산이 숨을 쉬는 소리, 뵈링스포센(Vøringsfossen) 12. 비가 오거나 비가 오려고 하거나, 베르겐(Bergen) 13. 미래의 책과 한 장의 절규, 오슬로(Oslo) 14. 빌려 오지 않은 이야기, 요툰헤이멘 베세겐(Jotunheimen Besseggen) 15. 가장 오래된 겨울 위에서, 요툰헤이멘 뵈베르브레안(Bøverbrean) 16. 지도 밖에서 보낸 두 밤, 노지와 휘테(Hytte) 그리고 알레만스레텐(Allemannsretten) 17. 가장 남쪽의 마을, 북쪽 땅끝의 절벽 만달(Mandal)과 린데스네스(Lindesnes) 그리고 노르카프(Nordkapp) 18. 바다 위의 알프스, 로포텐 제도(Lofoten Islands) - 레이네(Reine)와 레이네브링엔(Reinebringen) 19. 값을 묻지 않는 섬, 로포텐 베뢰위(Værøy) 20. 트롤도 나오지 못하는 밤, 로포텐 백야 사우나(Sauna) 21. “헤이(Hei)”하고 비켜서는 길, 로포텐 뤼텐(Ryten) 22. 83미터의 집과 한 글자의 마을, 로포텐 바이킹박물관과 오(Å)마을 23. 운해의 밀물, 센야 후스피엘렛(Senja Husfjellet) 에필로그 - 안테나 없는 길, 스웨덴 쿵스레덴 Kungslede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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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서는 하루 동안 무엇을 느꼈는지보다 얼마나 많은 일을 지워냈는지가 더 중요했다. 그날 스쳐 간 바람의 결이나 창가에 머물던 햇살은 좀처럼 마음에 담지 못했다. 감각을 잃어가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노르웨이의 피오르 앞에 서서야 깨달았다. 해가 뜨지 않는 겨울엔 한낮에도 길을 밝힐 불빛이 필요했고, 해가 지지 않는 여름에는 자정에도 암막 커튼을 쳐야 어둠을 만들 수 있었다. 시간과 빛이 서로 어긋나는 낯선 땅에서, 나는 비로소 오감에 집중했다. 이곳에선 무언가를 끝냈는지보다, 무엇을 느꼈는지가 하루를 기억하는 기준이 되었다. ---p.8
곰이 사는 세상에 표지판을 세우고, 볕이 들지 않는 땅에 집을 짓고, 얼어붙은 산속에 다음 세대를 위한 씨앗을 넣어두는 일. 이 섬에서 사람이 한 일은 모두 살아내겠다는 대답이었다. 이 땅은 아무것도 약속해 주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p.16 오로라는 밤하늘에 오래 머무는 법이 없다. 예고 없이 갑자기 나타나 흔들리며 흩어지고는, 어느새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애써 기다릴 때는 오지 않았고, 기대를 내려놓은 밤에 찾아왔다. 나의 오로라도 그랬다. 낯선 도시의 새벽, 아무도 없는 플랫폼에서 들려오는 열차 소리, 언어가 통하지 않아도 미소 하나로 충분한 인사. 그 순간들은 화려하지 않아도 분명히 빛이 났다. 오래 남지 않아도 괜찮다. 오로라는 원래 붙잡을 수 없는 것이니까. ---p.40 문득 먼 옛날 이곳을 지나던 사람들도 이런 여름을 보았을까 생각했다. 짧은 여름이 찾아와 숲이 한꺼번에 푸르러지는 모습을. 바위 곁에 핀 작은 꽃들을 무심히 지나쳤을까, 아니면 잠깐 눈길을 주었을까. 순록을 따라 이동하던 누군가는 걸음을 멈추고 바다를 바라보았을지 모른다. 그 사람과 나 사이에는 아득한 세월이 놓여 있지만, 햇빛이 어깨에 내려앉는 느낌만큼은 비슷했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7,000년이 조금은 가까워졌다. ---p.54 “Det finnes ikke dårlig vær, bare dårlige klær.” “나쁜 날씨는 없다. 나쁜 옷차림만 있을 뿐이다.” 혹독한 기후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말이었다. 노르웨이 사람은 거친 환경에 적응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날씨를 핑계 삼지 않고, 삶의 일부로 받아들였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바람이 불어도 일상에는 변함이 없었다. ---p.64 피오르는 수만 년 동안 빙하가 깎아내고 바다가 채워 만들어진 지형이다. 그 시간 앞에서 내 나이는 셀 수 있는 단위가 아니었다. 무엇을 이뤘고 무엇을 건너뛰었는지도, 여기에서는 잴 수가 없었다. 자를 들이댈 수 없다는 것은 내가 뒤처지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애초에 뒤처짐이라는 말이 성립하지 않는 자리에 잠시 앉아 있다는 뜻이었다. 위로받았다기보다, 나를 재던 나 자신이 잠시 자리를 비운 것 같았다. ---p.75 베르겐 항구를 걷다 보면 디즈니 애니메이션 〈겨울왕국〉이 떠오른다. 항구를 따라 늘어선 브뤼겐(Bryggen) 지구의 건물들이 영화 속 아렌델 왕국의 모티프가 되었다고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브뤼겐은 1702년 대화재로 사라졌다가 옛 모습 그대로 다시 지어져 지금까지 그 시간을 이어왔다. 불에 타 없어진 자리에 같은 얼굴로 다시 선 거리였다. ---p.91 그렇게 두세 시간을 빙하 위에서 보냈다. 빙하는 녹지 못하고 쌓인 눈이 제 무게에 눌려 굳은 얼음이다. 그러니 발밑에 있는 건 오래전 어느 겨울에 내린 눈이었다. 크레바스 아래로 흐르던 물소리는 그 겨울들이 흘러가는 소리로 들렸다. 이 위를 걷는 일은, 이 땅이 기억하는 가장 오래된 겨울들을 한 겹씩 밟아 가는 일이었다. ---p.118 긴 이동 끝에 도착한 로포텐에 두 발을 내딛는 순간, 나는 이곳과 사랑에 빠질 것을 직감했다. 6월 초의 로포텐은 비바람 속에서도 싱그러웠다. 푸른 바다 위로 초록을 머금은 산들이 가파르게 솟아 있었다. 산이 품은 웅장함과 바다가 지닌 포근함이 어우러진 이곳은 ‘바다 위의 알프스’라는 애칭을 얻었다. 강한 바람에 빗방울이 흩날렸지만, 오래 기다린 땅에 발을 디딘 마음은 오히려 따스했다. ---p.137 살면서 안개 속을 걷는다고 느낀 날들이 몇 번 있었다. 앞이 보이지 않아 발밑만 살피던 때에는 그 길이 어떤 모양인지 알 수 없었다. 시간이 흘러 조금 높은 데서 돌아보고서야, 그 길이 나를 어디로 데려다 놓았는지 보였다. 그때 나를 둘러싼 안개도 산과 산 사이를 채운 바다였는지도 모른다. 젖은 데크를 한 칸씩 밟으며 산을 내려왔다. 구름은 아직 내 둘레를 흘렀다. 지금은 다음 발을 디딜 자리만 살폈다. 이 안개를 바다로 기억하는 일은 나중에 해도 좋았다. ---p.18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