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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의 말 - 5
1부 싱잉볼 - 13 숲으로 간 책방 - 14 서랍 속의 달 - 16 행운목 - 18 건조주의보 - 20 화석 - 22 빈 의자 - 24 외눈박이 - 26 고백 - 28 어쩌다 방으로 들어온 소 - 30 월식 - 32 책갈피 - 33 허술에게 - 34 2부 나비물 - 39 내일 숍에서 - 40 징검다리 - 41 저물녘 빈집 - 42 곡비 - 43 참닻꽃 - 44 요실금 - 46 느랭이댁 - 47 풍도 - 48 물 주는 남자 - 49 허니문 - 50 모든 어제는 아름다웠다 - 52 물밥 - 54 3부 목련의 발자국 - 57 루드베키아 - 58 메주 - 60 꽃달임 - 62 능소화 - 64 답장 - 65 물의 광복 - 66 찔레꽃 - 67 꽃무릇 - 68 산딸나무 - 69 겨울강 - 70 이팝나무 - 72 묘연 - 74 4부 비는 중절모를 쓰고 내린다 - 79 객장의 전설 - 80 마그리트의 사과 - 81 모네의 물감 - 82 허공에 지은 집 - 84 도라 - 86 파문 - 88 드뷔시의 바다 - 90 저물녘의 자코메티 - 91 바다의 경마 - 92 뜬금없이 - 94 새가 된 글자 - 95 평정(平靜) - 96 해설 천년을 버틸 ‘언어의 집’ 한 채/ 김정수 - 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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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비의 처음처럼
아직 읽지 않은 바깥을 향해 날개가 촉촉하다 도랑을 끼고 한참 들어가면 숲 사이로 길의 안쪽이 깊다 불빛이 새어나오는 책방은 흙내 묻은 손으로 반기는 곳 사운대는 숲의 소리들 눕거나 기대어 선 나무들의 눈빛과 마주친다 그 속을 다 읽지 못하지만 첫 문장이 뜨거울수록 도끼날은 빛난다 숲의 주인이 되고 싶은 건 허기진 탓 때때로 말꽃 잔치에 쉽게 넘어가기도 하지만 익숙하거나 낯선 목소리가 구름을 피우다가 비를 뿌린다 숲이 무성할수록 내 문장은 날개를 편다 붓꽃 위에 나비 날개를 접을 무렵 나는 욘 포세*와 함께 돌아왔다 * 노르웨이 작가 2023년 노벨상 수상. --- 「숲으로 간 책방」 중에서 글씨들의 다발 속으로 깃발처럼 꽂히는 간이역에는 먼 곳에서 묻어온 바람 냄새가 나거나 코스모스들이 등 뒤에서 흔들리거나 안개에 잠겨 선로를 잃어버리곤 해요 당신에게 흘러가는 문장을 가끔씩 지키는 차단기 겹치고 포개져 갈팡질팡할 때 갈피를 못 잡고 캄캄하게 깊어질 뿐이에요 저마다 다른 보퉁이를 안고 머문 자리마다 남겨놓은 그리움과 웃음들 조금씩 닳아서 낡아가고 있어요 흔적을 남기지 않는 그것들은 매듭을 했거나 금박을 하고 언제나 빳빳한 자세를 보이지요 가끔 꽃잎이 끼어든 갈피에서 향기에 실려 꽃비 사이로 어떤 얼굴이 걸어오고 단풍잎은 지난 가을을 돌려세우기도 해요 쉼표처럼 끼어드는 생이 침묵의 검은 가지에 새 잎을 피우는 걸 보았어요 --- 「책갈피」 중에서 모자를 쓴 신사들이 지붕 위에서 내려오고 있어요 멀리 또는 가까이 중절모를 쓰고 내려요 비는 어느 곳에나 내리지만 아무도 젖지 않아요, 하염없이 비를 맞기만 하지요 스스로도 젖지 않는 건 비가 아니기 때문이지요 중절모를 쓴 아버지들이 쏟아져요 도착하는 비, 골콩드를 떠나 도시에 뿌려지고 있어요 소리없이 찾아와요 새처럼 떠서 천천히 내리는 남자는 우리 집에도 있어요 아니 옆집 뒷집 윗집 아랫집을 들락거려요 세상은 아침 아홉 시와 저녁 여섯 시가 되면 고층 빌딩에서부터 지하까지 비가 내려요 똑같은 코트를 입고 출근하거나 퇴근하면서 빗방울을 만들지 않는 남자들은 그저 허기처럼 찾아와 후드득 사라질 뿐이지요 보이지 않으면 알 수 없어요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르는 본색, 거대한 집채 안에 천 개의 얼굴을 하고 있는, 내 안에 있어도 나도 모르는 내가 --- 「비는 중절모를 쓰고 내린다」 중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