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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서문 - 한국의 독자들에게--11
1부 다시, 영화란 무엇인가 영화, 이 부재하는 것의 광채--19 영상의 이론에서 이론의 영상으로--46 영화, 황당무계한 반기호--80 영화와 떨어지는 것--94 제도로서의 영화--128 영화와 비평--137 2부 거장들, 작품들 - 변모하는 풍경 속에서 돈 시겔과 리차드 플라이셔 또는 그 혼탁과 투명--145 프리츠 랑 혹은 원환의 비극--167 장 르누아르 또는 촉각도시의 흔적--188 존 포드, 뒤집어지는 하얀색--209 [기적]의 기적-드레이어의 경우--231 영화작가 클린트 이스트우드--246 흡혈귀한테 보내지 못한 편지: 소네 추세이 [나의 섹스백서-절정도]--257 시네마의 선동장치--261 헨리 폰다는 결국 영화와 행복한 관계를 맺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났다--284 파국적 슬로모션--286 영화는 어떻게 죽는가:할리우드의 50년대--302 어두어져 가는 시간 속에서: 미조구치 겐지 [치카마츠 이야기]--333 일본영화의 황금시대: 미조구치, 오즈, 나루세--348 고다르와 트뤼포를 동시에 사랑하는 것의 귀중함--354 [풀 메탈 자켓]의 큐브릭은 실패작을 찍는 것조차 실패했다--357 파라자노프의 죽음을 추모하면서 허우샤오시엔의 [동동의 여름방학]에 넘치고 있는 영화의 기척에 몸을 드러내보면 어떨까--360 지금 영화는 완고하게 침묵하고 있다. 그런 영화의 침묵에 대해 비평가는 어떻게 대처하면 좋을까--363 ‘모든 영화는 미국영화이다’(고다르)라고는 농담으로도 말할 수 없게 된 할리우 드의 영화의 참상을 앞에 두고 사람들은 새로운 세기를 향해서 영화에의 기대를 어 떻게 조직하면 좋을 것인가--371 액션영화 베스트 50--379 3부 이동하는 영화들 알프스 남쪽 사면의 마조레 호반에 남쪽의 영화도시가 출현한다--397 영평인으로 홍콩영화제에 출석해 12일 간을 보냈다. 신작으로는 허우샤오시엔과 첸카이거의 영화가 틀림없이 일급의 작품이었다--423 마드리드의 거리에서 영화를 말하다: 빅토르 에리세와의 대화--429 광주의 존 포드--441 절대의 화폐: 사고와 감성을 둘러싼 단편적 고찰 1--445 4부 영화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작가주의에 거스르면서 팀 버튼을 옹호하는 것의 곤란--457 고다르의 고독--465 선악의 피안에서: 구로사와 기요시 [밝은 미래]--488 영화의 21세기는 페드로 코스타의 [반다의 방]과 함께 시작된다--502 연출가의 지능지수의 이상한 높음: 마이클 만 [콜래트럴]--506 존 포드와 던진다는 것--509 존 포드의 [웨건 마스터]: 이 사치스러운 B급 영화를 어떻게 볼 것인가--516 21세기에 걸맞은 진정한 픽션을 처음 인류에게 제시하다: [스티브 지소의 해저 생활]--525 리얼타임 비평을 권함--528 에드워드 양 추도--561 몽고메리 클리프(트) 문제에 관해서: 영화사의 캐논화는 가능한가--570 이 영화작가의 겸허함의 결여는 보는 사람의 관용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다: 테렌 스 맬릭 [트리 오브 라이프]--588 영화붕괴전야에 부쳐/영화붕괴전야를 향해서--592 해설: ‘영화광인’ 하스미 시게히코--임재철--603 옮긴이 후기--611 원제 및 출전--613 하스미 시게히코 연보--618 찾아보기--624 |
Shigehiko Hasumi,はすみ しげひこ,蓮實 重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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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주자’로서의 비평가
그의 비평에서 중요한 것은 영화 체험의 ‘폭넓음’의 문제가 아니라 그 체험의 ‘강도’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강렬한 응시의 힘에 기반하고 있는 것이다. 영화 체험이 우리에게 가져다 줄 수 있는 최고의 수확은 화면을 뚫어지게 봄에 의해 얻어지는 예상치 못한 발견, 하스미식의 용어로 말하자면 ‘조우’의 순간에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 조우가 가능해지려면 화면을 볼 때 절대 화면 밖의 요소를 개입시키지는 않는다는 태도를 견지해야만 하는 것이다. 하스미 비평의 진수는 이러한 응시의 힘을 통해 얻은 조우의 체험을 자기류의 테마틱스(주제론)로 재구성하는 데에 있다. ‘부정한다는 것’, ‘먹는다는 것’, ‘옷을 갈아입는다는 것’, ‘산다는 것’, ‘보는 것’, ‘멈춰서 있는 것’ 등을 각 장의 주제로 내세우고 있는 [감독 오즈 야스지로]는 하스미류의 테마틱스를 본격적으로 전개했다는 의미에서 그의 대표작이라고 할 만하다. 이 책에 실려 있는 글 중에서는 곡선을 주제로 한 히치콕에 대한 글, 원환을 주제로 한 프리츠 랑에 대한 글, 흡혈귀를 주제로 한 소네 추세이에 대한 글 등이 이러한 하스미류의 테마틱스의 대표적인 글이라고 할 수 있다. 하스미 자신의 다음의 발언에서 그의 글쓰기에 대한 보다 구체적인 힌트를 얻을 수 있다. “내가 영화에 대해 갖고 있는 이미지라는 것은 지금 영화에 있어서 19세기가 끝나고 영화에서의 20세기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19세기 음악의 분야에서는 위대한 작곡가가 많이 있었고 20세기가 되자 이번에는 위대한 연주가들이 많이 나왔습니다. 그것과 마찬가지로 영화도 1960년 이후 연주가의 시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경우 영화에 있어서 연주가라고 하는 것은 누구냐고 하면 그것은 보는 사람 즉 관객입니다. 우리가 인터프리테이션을 하는 것입니다. 그것에 의해 환경으로서의 영화가 풍부해지기도 하고 빈곤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거기에 있어서 19세기의 대작곡가에 해당하는 감독들이 차지하는 지위라고 하는 것은 안타깝게도 명백히 저하되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작가에 대한 비평가의 강세라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현실인 것입니다. 초인적인 작가들, 하워드 혹스, 오즈 야스지로라든지 히치콕이라든지 혹은 마키노 마사히로 같은 굉장한 작가들이 나오기를 기대하고 있거나 혹은 젊은 사람들이 그들 위대한 작가들과 같은 작품을 만들어 주기를 초조해하며 기다리고 있어보았자 소용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는 그들이 만든 영화를 평가하기는 합니다만 결코 여기에 미래를 걸거나 하지 않고 오히려 미래를 걸어야 하는 것은 연주가 쪽으로, 영화 그 자체를 연주해가는 우리 관객의 감성 그 자체라고 생각합니다..... 그 영화의 연주 그 자체를 수동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영화적인 환경을 바꿔 가는 방식으로 연주해가면 좋을 것이라는 게 나의 생각입니다.” ‘하스미적인 스타일’의 확립 우리는 아주 드물게 자신을 잊고 심지어는 세계를 잊어버리는 그런 순간을 맞이하게 된다. 경이적인 예술작품을 조우했을 때나 아니면 놀라운 영화를 발견했을 때 말이다. 이러한 결정적인 순간은 항상 언어화, 더 정확히 이야기하면 이야기로의 탈바꿈을 우리에게 요구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어떤 이야기의 틀로 편입돼야만 그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 가능한 그런 것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우리에게 있어서의 어떤 결정적인 체험, 즉 한계체험이라고 해도 좋을 이 체험은 일상적인 레벨 즉 평준화된 세계로 끌어내려지고 만다. 어떤 대상이 계측 가능한 깊이 혹은 내부에 근거를 가지고 있다고 믿게 되면 한계체험은 더 이상 한계체험이 아니라 일상적인 체험이 돼버리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는 “비평이란 존재가 과잉된 어떤 것과 황당무계한 조우를 연출하는 철저하게 표층적인 체험이다”라고 단언하고 있다. 그렇다면 체험을 그 고유성에 있어서 그대로 살려내는 ‘표층적인 비평’이란 도대체 어떤 것일까. 하스미의 전략은 언어를 그 극한에까지 밀어붙여서 거의 그 의미가 쉽게 포착되지 않는 지점으로까지 몰고 가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의미작용이 거의 상실되는 지점까지 언어를 몰아붙인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서 그의 독특한 문체가 등장하는 것이다. 일본어 문장으로서는 구두점이 아주 적으면서도 대단히 호흡이 긴 그의 문장은 그냥 읽으면 거의 숨이 넘어갈 정도로 일종의 “주술적인 리듬”까지 느껴진다. 도발적인 어투, 그리고 종래의 일본어 문장으로는 거의 상상이 가지 않을 정도로 호흡이 긴 문장. 바로 이런 것이 일본의 비평계에서는 ‘하스미적인 것’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시네필의 은밀한 쾌락’에서 ‘영화적 환경에의 개입’까지 80년대 일본영화계에 하스미의 비평 및 활동이 끼친 영향력은 대단한 것이었다. 특히 지적인 영화청년들 사이에서 그는 거의 신화적인 인물로 떠올랐다. 동경대와 릿교대에서 있었던 그의 영화강의는 청강생들로 강의실이 미어터질 정도였고 평론가 지망생들은 그의 글을 흉내 내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를 흉내 내는 젊은이들을 ‘하스미무시’(하스미 벌레)라고 경멸적으로 부르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의 직접적인 제자 중 훗날 감독이 된 인물만 꼽아도 구로사와 기요시, 수오 마사유키, 아오야마 신지, 나카다 히데오 등이 있고 평론가가 된 인물 중에는 요모타 이누히코, 마츠우라 히사키 등이 있다. 90년대 이후, 특히 그가 동경대 총장을 하던 90년대 말에는 하스미가 잠시 ‘비평가 휴업 선언’ 시기에 들어서면서 영향력이 많이 떨어진 감이 있었지만 그의 영향력은 여전히 여러 곳에서 감지되었다. 90년대 말 교토영화제에서 영화논문을 현상 모집했을 때 어느 심사위원은 이렇게 말했다. “응모작 중에 모 평론가의 글의 영향이 느껴지는 글들이 너무 많아 실망했다. 자기 글을 쓰도록 좀 더 노력해주기 바란다.” 이 모 평론가가 하스미를 지칭하는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일본의 영화문화에서 하스미의 영향력이 커졌던 중요한 이유 중 하나는 그가 단순히 글만 쓸 뿐 아니라 영화적 환경을 바꾸는 활동에도 아주 적극적으로 나섰기 때문이다. 1985년에 영화계간지 [뤼미에르]를 창간하면서 하스미는 (그의 명명에 의하면) ‘1973년의 세대’에 속하는 감독들 즉, 빔 벤더스, 빅토르 에리세, 다니엘 슈미트, 클린트 이스트우드 등의 작품을 일본에서 제대로 평가하는 데 공헌했을 뿐 아니라 다니엘 슈미트 같은 경우 그의 회고전을 일본에서 조직하기도 했다. 1973년은 존 포드가 죽은 해이면서 동시에 ‘존 포드적인 것’으로 대변되는 할리우드 영화의 양질의 부분을 계승한 위의 감독들이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시작한 해라는 점에서 1959년 누벨바그의 등장 못지않게 중요한 영화사적 시점이라는 것이 그의 견해이다. 과연 그의 지적대로 이 세대의 감독들이 모두 세계적인 대가가 된 것을 보면 그의 선견은 확실히 인정해줄 만하다. 특히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작가로서의 평가에 대해서는 그 자신도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이 책에 실린 “영화작가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1980년에 쓰여진 글로, 당시 시점에서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세계적으로 아직 작가로 인정되지 않았던 그런 시대였다. 이 감독들 외에도 그는 소련의 렌필름의 대표작들을 모아 일본에서 상영하기도 했고 하워드 혹스 회고전, 장 르누아르 회고전 등에 관여하기도 했다. 하스미 영화비평의 진수 국내 최초의 본격적 소개 하스미 시게히코의 단행본으로는 『감독 오즈 야스지로』(한나래, 2001)가 국내에 소개된 것으로 유일하며 『나루세 미키오』(한나래, 2002), 『근대 일본의 비평 1868~1989』(소명출판, 2002), 『현대 일본의 비평 1868~1989』(소명출판, 2002) 등에 그의 글과 발언이 일부 소개된 정도이다. 그런 연유로, 영화비평가로 활동해온 지난 40여 년간 하스미 시게히코가 언론매체 및 자신의 저작 등 여러 경로를 통해 발표한 영화비평(및 비평론)은 본 책을 계기로 국내에 처음 본격적으로 소개된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에는 『영화의 신화학』(1979), 『영상의 시학』(1979), 『고다르 혁명』(2005) 등 하스미 시게히코가 발표한 영화 관련 저서에서 뽑은 글들을 포함하여 『영화-유혹의 에크리튀르』(1983), 『시네마의 기억장치』(1979), 『시네마의 선동장치』(1985), 『영화는 어떻게 죽는가』(1985), 『영화순례』(1993), 『영화광인, 오즈의 여백에』(2001), 『영화광인일기』(2000), 『영화광인 만사쾌조』(2003), 『영화광인 신출귀몰』(2003), 『영화붕괴전야』(2008), 『영화론 강의』(2008) 등의 단행본들과 ≪뤼미에르≫ 등의 잡지에 실린 글 중 하스미 시게히코의 비평의 진수라 할 만한 글들을 뽑아 간추린 것이다. 거기에다가 하스미 씨 본인이 자신이 영화글을 쓰게 된 계기를 되돌아보는 서문을 새로이 썼다는 점도 특기할 만 하다(‘저자서문 - 한국의 독자들에게’ 참조). |